〈 20화 〉[1권] 20회- 각성제 취급은 신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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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델이 평평한 돌 위에 뭔가가 담긴 자루를 올려놓자 아비투스가 그것을 산탄총의 개머리판으로 힘껏 내리쳤다. 루나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들고 있던 양철 머그잔에서 차가 살짝 넘쳤다. 카르델은 자루에서 건빵 조각을 하나 꺼내 루나에게 주었다. 건빵 자루를 옆으로 치우자 밑에 깔렸던 돌에는 금이 가 있었다. 아비투스가 그녀에게 말했다.
“먼저 차에 담가서 불리십시오.”
쿠키처럼 차에 찍어서 먹을 생각이었던 루나는 찻잔 아래로 가라앉는 건빵을 보며 자연스럽게 표정이 우울해졌다. 사람은 궁핍한 식사를 할 때 집이 그리워지는 법.
하딘 대위는 물도 없이 건빵을 씹어먹고는 외투와 군장을 부하들에게 맡겼다. 말의 몸도 가볍게 하려고 안장에 달아둔 짐까지 내렸다. 하딘은 권총과 올가미만 챙겨서 말 위에 올랐다.
“아까 봤는데 여기 숲은 먹을 게 지천이야. 금방 오마.”
그리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피카니가 아비투스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시는 거지?”
“사냥하러 간 겁니다.”
“권총만으로? 힘들 텐데.”
아비투스가 악력만으로 장작을 맨손으로 비틀어 부수면서 말했다.
“아뇨. 올가미로. 올가미로 목에 걸 수 있으면 별 걸 다 끌고 옵니다.”
루나가 말했다.
“카우보이처럼?”
아비투스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늑대를 끌고 왔었죠.”
“먹었나요?”
“아뇨. 투표로 결정해서 결국 풀어줬습니다. 늑대는 생태계에 큰 역할을 하거든요.”
옆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카르델이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참 아쉬웠지. 맛이 궁금했는데. 누린내가 진동하겠지만 보통 누가 먹어보겠어.”
피카니는 대화에 낄 수가 없어서 돌조각 같은 건빵을 입에 넣고 초췌한 얼굴로 우물거렸다. 그러다가 중요한 일이 생각났다.
“그런데 방금 본 걸 어딘가로 전해야 하잖습니까.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겁니까?”
카르델이 대답했다.
“우리한테는 두목이 별말 안 했는데.”
일행 중 누구도 짐을 챙기고 있지 않았다. 다들 혹시 하딘 대위가 명령을 깜빡한 게 아닌가 싶어서 불안해할 때 루나가 손을 들고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당장 염화(念話)를 보낼게요.”
루나는 자신의 지팡이를 들고 땅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들 그녀가 마법사니 지금 마법을 부리려는 구나 싶어서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봤다. 기대와는 다르게 그녀가 부린 마법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땅에 글자인지 그림인지 모를 것을 다 그리고 나서 루나가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자 땅의 글자가 조금 흔들렸다. 신비로운 불빛 같은 건 없었다. 루나가 말했다.
“다 끝났어요.”
카르델이 손을 들면서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방금 뭘 하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마법으로 편지를 보냈어요. 그 편지는 다른 마법사가 받아서 지금쯤 상부로 전했을 거예요.”
다들 짐작만 하고 확신이 없어서 답답했는데 그 말을 듣고 남자들은 쓸데없이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여댔다. 서로 체면 때문에 먼저 나서서 묻지 않고 간만 봤던 게 들통났다. 아비투스가 질문했다.
“그거 어디까지 보낼 수 있는 겁니까?”
“구체적인 거리는 측정해본 적이 없어요. 만월 밤이라면 꽤 멀리 보낼 수 있을 거예요.”
피카니가 물었다.
“만월이요?”
“예.”
피카니는 거기까지 듣고 뭔가 떠올랐다.
“들어 본 거 같군요. 달의 주기가 마법의 힘에 영향을 준다면서요.”
“마법만이 아니라 마족한테도 영향을 끼쳐요. 태생이 그런 종족이니까요.”
카르델이 말했다.
“개인적인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그 머리카락 색은 염색한 겁니까?”
루나는 자신의 앞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고 눈동자만 위로 올려서 빤히 보았다가 말했다.
“학창 시절에 실험하다가 사고를 겪었어요. 원래는 갈색이었죠.”
“고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이상한가요?”
그녀의 눈동자가 갑자기 불안으로 부들거리자 카르델은 급하게 대답했다.
“그건 아니고 다른 부작용은 없는지 궁금해서요.”
“30년 동안은 문제없었어요.”
다들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이상해진 분위기를 눈치채기 전에 피카니가 나섰다.
“그럼 앞으로도 상관없겠군요.”
다행히 루나는 다른 생각에 정신이 쏠려서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기억 못 하는 거 같았다. 남자들은 각자 품은 똑같은 질문을 고이 간직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서 할 일로 돌아가려 했다. 그들을 붙잡으려는 듯 루나가 화제를 바꿨다.
“저도 뭐 물어볼래요.”
구체적으로 누구한테 거는 말인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일단 피카니가 대답했다.
“네, 말씀하시죠.”
“왜 여러분은 용사님이랑 친하게 안 지내요?”
얼음 같은 침묵과 불편한 시선만 서로 오갔다. 루나도 각오하고 던진 질문이었기에 끈질기게 기다렸지만 계속 말이 없었다. 겨우 피카니가 말했다.
“공사 구분 철저히 하는 것뿐입니다.”
카르델과 아비투스도 떨떠름한 얼굴로 둘러댔다.
“예. 뭐.”
“그냥 그런 겁니다.”
저쪽에서 하딘 대위가 사슴의 목에 올가미를 걸고 이쪽으로 끌고 오고 있었다. 자리를 떠날 핑계가 생긴 남자들은 바로 일어나서 사냥감을 받으러 일어났다. 둘만 남았을 때 피카니가 그녀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런 얘기 다신 꺼내지 마십시오.”
여태껏 자신에게 계속 친절했던 피카니가 처음 가시 돋은 말을 해서 루나는 질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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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친절한 안내를 받고 레스는 아자리가 있는 진료소로 향했다. 사각형으로 지붕을 넓게 친 천막 아래에 환자들이 나란히 누워있었는데 그들 주위에는 간호해주는 사람들이 약초를 절구에 넣고 그 자리에서 빻아 상처에 바르거나 빻은 것으로 담뱃대의 속을 채워주고 있었다. 그 사이에 단테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와서 레스는 어디로 가야 할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아자리가 그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건방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봐라, 물 좀 다오.”
꼴이 심상치가 않다. 레스는 오는 길에 생각해둔 위로의 말과 농담들은 속에 넣어두고 말없이 수통만 줬다. 그녀는 손을 떨면서 물을 반쯤 흘려가며 마셨다. 그러고는 사레가 들어 한참 기침을 하다가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빨리 일어났네? 어떻게?”
레스가 겪기로는 아자리가 저번에 성문을 뚫었을 때는 새벽을 꼬박 새우고도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한 짓을 했는데도 이렇게 빨리 의식을 차리다니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자리는 수백 살 먹은 아저씨처럼 걸걸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난들 알겠어요. 그냥 눈이 떠지더라.”
“나중에 다시 올까? 아무래도 내가 불편할 때 와버린 거 같은데.”
아자리는 평소 차분하면서도 살짝 짓궂은 고상한 말투를 썼으나 지금은 평범한 개차반이다. 단테가 옆에서 그에게만 들리게 작은 소리로 애원했다.
“도망치지 말고 나 좀 도와줘요,”
아자리가 투덜거렸다.
“이상하게 보이나? 감정이 자기 멋대로 튀어요. 옷이 바뀌어서 그럴지도. 느낌은 참 좋네.”
아자리의 원래 옷은 너무 더러워져서 지금 빨래하고 말리는 중이다. 지금 입은 옷은 마을 사람들이 빌려준 옷이다. 레스는 솔직한 의견을 말해줬다.
“새 옷이 잘 어울리는걸.”
“애들 옷 어울린다는 게 여자한테 할 소리냐!”
아자리의 치수에 맞는 건 아이들 옷밖에 없었다. 실제로도 독특한 무늬와 자수가 새겨진 아동용 원피스는 아자리와 잘 어울렸지만, 그녀가 원한 건 그게 맞으면서도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윗몸을 벌떡 일으키며 버럭 성질을 부렸다. 주위에 있던 다른 환자들과 그들을 간호해주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이쪽을 바라보았다. 바로 아자리는 무안해져서 고개를 굽실거리며 그들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피해 끼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저거 차기 마왕이래.”
레스가 단테에게 속삭였다. 단테는 아무 말도 안 했으나 표정에서 묘한 긍정이 느껴졌다. 아자리가 또 풀썩 쓰러지면서 투덜거렸다.
“아, 당 떨어진다. 먹을 거 있는 사람?”
다른 관점에서는 마왕다운 모습이었다. 먼저 와서 아자리의 신경질을 상대해줬던 단테가 레스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약사분들이 말하기를 우리를 위해서 빨리 의식을 차릴 수 있도록 각성제를 처방해줬다고 그러네요.”
“아, 과연.”
“중독성 있는 그런 건 아니지만 자제력이 좀 사라진답니다. 술에 취했을 때처럼.”
레스는 자신에게 주목하라고 손끝을 위로 들었다.
“애들아. 중요한 일이 있어.”
시간을 들여서 그는 아는 걸 차근히 설명했다. 단테와 아자리는 질문으로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집중해서 들었다. 이때만큼은 아자리도 심각한 얼굴이었다. 설명을 마치고 그가 물었다.
“의견 말해줘.”
당연히 단테는 심경이 복잡한 눈치였다. 아자리는 잠깐 고민하다가 금방 결정했는지 레스를 바라보는 시선에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레스, 당신 마왕 잡은 거 맞죠?”
꺼내기 싫은 화제였으나 레스는 입을 다물거나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만.”
“그때는 상황이 어땠어요? 상대의 숫자가 얼마나 됐죠?”
“못해도 70명. 세어보지 않아서 정확히는 몰라.”
“피카니랑 함께 정예 70명을 이겼으면 당신 혼자서 저 정도쯤은 별거 아니겠네요.”
레스는 그걸 말이랍시고 한 건지 농담으로 한 건지 잠깐 고민하다가 생각을 포기했다.
“아무리 그래도 맨손으로는 힘들 거 같다만.”
“쯧, 총 없으면 쓸모가 없네.”
레스는 총을 잃어버린 게 누구 때문이냐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소리는 모험을 택하자는 말로 이해하면 될까?”
“어차피 우리는 뒤로 못 돌아가요. 피카니도 근처까지 왔을지 모르죠. 돈이 소용이겠어요”
그 말을 듣자 단테도 머리를 끄덕이고 고민을 멈췄다. 그가 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민들을 도와서 같이 싸우고 마차도 되찾읍시다.”
“정말? 댁이라면 위험을 피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단테는 팔짱을 끼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전 여기 사람들이 좋아요. 위기에 처했으니 돕고 싶어요. 빼앗긴 마차도 저한테는 각별한 거라서 꼭 되찾은 다음에 도적놈들한테 앙갚음도 하고 싶고요. 또 아자리 양이 말했듯이 지금 저희에게 황금은 의미가 없어요. 마차가 없으면 추적을 따돌리지 못할 겁니다.”
“내 마음에 드는 말만 골라서 해주는군.”
레스는 매우 흡족해하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