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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화 〉[2권] 60회 - 세 가지 규칙 (60/188)



〈 60화 〉[2권] 60회 - 세 가지 규칙

“그럼 잠깐 눈  붙이고 있을게요.”

루나는 의외로 소파가 푹신하고 아늑해서 놀랐다. 그리고 일행들은 히콕을 따라서 어디론가 향했다. 그녀는 처음에 지팡이를 끌어안고 가만히 명상만 하다가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예 완전히 소파에 드러누웠다. 나중에 인기척을 느끼고 그녀는 잠에서 깼다. 루나는 얼굴을 덮었던 실크 모자를 치우고 눈을 비볐다. 다시 만난 일행들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왔는지 얼굴이 다들 굳어있었다.

“제가 얼마나 자고 있었나요?”

피카니가 회중시계를 꺼내서 대답했다.

“1시간. 늦어서 죄송합니다.”

“무슨 일 있었나요?”


“별 건 아니고 생각보다 상황이 안 좋아서요.”


루나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들과 함께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하지만 히콕은 도중에 빠졌다.

“나는 여기서 머물 거야. 잠입하고 있던 갱단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거고. 무슨 일 생기면 여기로 전보를 보내셔.”

“그러지.”

하딘 대위가 말을 받아주자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시 건물 속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루나가 남자들에게 물었다.

“그 3인방은 만나 보셨나요?”

피카니가 대답했다.

“아뇨. 여긴 없군요.”

어떻게 되어 가는지 궁금했지만 더 이상 그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 루나는 묵묵히 따라갔다. 밤안개 속에서 가로등 불빛이 장막을 드리웠고 화강암 타일을 긁는 발소리는 척박했다. 하늘에는 전깃줄이 선을 죽죽 그었다. 남자들이 각자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말할 기분이 아닌 건 다들 똑같았다. 시각은 10시를 한참 넘어서 이제 거리를 걸어가는 이는 그들뿐이다.

다시 전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갈 때까지 그 공기를 견디는 것이 루나에게는 최근에 겪은 일 중에서  무엇보다 힘들었다. 그나마 아직도 피곤한 기색 없이 자기 일을 성실히 다하고 있는 차장은 볼 만하였다.

“본 열차의 마지막 운행을 함께 해주신 손님 여러분들에게 마무리 인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은 내일도 정확한 시간에 맞추어 태양과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루나는 소리 없이 박수를 쳐줬다. 차장이 무서워서.







벽난로의 불빛은 방 입구를 향해 등을  소파의 앞만을 밝혔고 악단의 연주 같은 장작 타는 소리는 고요함에 운치를 더했다. 창문 없는 넓은 방의 사방을 둘러싼 벽에는 호화로운 태피스트리와 그림, 동물 박제들이 빼곡하게 걸려 벽지가 보이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소파부터 테이블, 전등, 발 받침대까지 가구들에는 금박과 자개장식이 가득하고 모두 최고급 샌달우드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천장에는 최신식 환기 장치가 분위기를 해치지 않게 교묘히 설치되어 있다. 만일 사치라는 개념을 물질로 만들  있다면 수조 속의 물처럼 방안에 넘실거렸을 것이다.

“주인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바깥에서 어린 여자 목소리와 함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소파에 앉아있는 자가 손을 뻗어서 종을 들고 흔들어서 맑은 소리를 울렸다. 그리고 종을 내려놓았는데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서 작은 선반이 거기 있었다.

방안으로 메이드 옷을 입은 소녀가 새하얀 천으로 덮은 쟁반을 가지고 들어왔다. 소녀는 주인이 앉아있는 소파 근처의 테이블에 쟁반을 놓고 뒤로 물러선 다음 정중히 물었다.


“더 필요한 것 없으십니까?”


주인은 소녀에게 관심 없다는 듯이 긴 그림자를 드리운 소파 바깥으로 손을  흔들었다. 시종이 바깥으로 나가고 나서야 주인은 쟁반을 덮은 천을 치웠다. 거기에는 알록달록한 알사탕과 젤리빈이 크리스털 용기에 담겨져 최신 잡지와 함께 놓여있었다. 그는 고상하기 짝이 없는 손놀림으로 젤리빈을 한줌 입안에 쏟아 넣고 잡지를 펼쳤다. 그러다가 사이에 꽂혀있던 수배전단지가 그의 무릎 위로 흘러내렸다.

“하하. 이게 누구신가. 알아서 나타나주셨네.”

그는 아자리의 수배서를 보고는 털털하게 웃었다. 울림 없이 맑은 젊은 청년의 목소리였다.

“보아하니 제국도 이제야 눈치를 챈 거 같은데 수배서를 뿌리는 멍청한 짓이나 하다니. 인간 놈들을 과대평가했나. 아니면 그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신가?”


청년은 소파에서 일어나 벽난로 바깥의 어둠속을 느긋하게 소리 없이 걸었다. 그리고  한편에 걸어둔 길쭉한 지팡이를 잡아들었다.


“내일은 오랜만에 산책이라도 가야겠군.”

그가 지팡이의 손잡이와 끝부분을 잡고 당기자 얇은 세검이 칼집을 긁는 싸늘한 소리와 함께 안에서 뽑혀 나왔다.








피카니는 잘 준비를 하면서 아까 루나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핑커튼은 의뢰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왜?”

“갱들도 그들의 고객이니까요. 그들은 고객이 줄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몸에 둘렀던 권총 벨트를 풀고 권총은 자는 중이어도 언제든 쥘 수 있도록 근처에 두었다. 마지막으로 방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는 침대에 누웠다.


“그럼 우리들 편은 없는 건가요?”

“그나마 히콕이 정보를 빼서 우리들에게 팔아주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제국군은 우리를 도와줄 여력이 없고 연방보안관은 미심쩍어요. 네, 사실상 우리뿐이군요.”


피카니는 회상을 끊어버리고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왜 용사 따위를 하겠다고 했을까...”

그리고 잠으로 빠져들었다.





피카니는 여태껏 쓰고 있던 여성용 가발을 모닥불로 집어던지고 레스의 반대편으로 자리를 잡았다. 레스가 그에게 눈길을 보내지 않은 채 장작 하나를 칼로 다듬으며 말했다.


“잘 어울리는데 계속 쓰고 있지 그랬어.”

“꺼져.”

격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피카니는 바로 부츠를 훌렁 벗어버리고 열기에 발과 신발 안쪽을 쬐었다. 그의 얼굴에는 다양한 화장품이 정교하게 칠해져있어서 체형만 얼추 가리면 대단한 미녀는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여자로 보였다. 피카니는 손수건을 물로 적신 다음 화장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땅에 깔아둔 돗자리와 베개에 누웠다.

“다시 수다로 넘어가볼까. 너희 사막 민족들은 죄다 광신도라고 들었는데 사실이야?”

“거의.”

“거의라니 무슨 뜻이야?”

“나는 신을 믿지 않아.”


피카니는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레스가 물었다.


“왜 웃어?”


“난 너하고 공통점이라고는 절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마침내 하나 생겼네.”


“그래.”

레스는 묵묵히 나무 조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피카니가 누운 채로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그런데 뭘 만드는 거야?”

“매. 하지만 어째 점점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가고 있네.”


“매는 날개가 굉장히 큰 새야. 새를 조각할 때는 비율이 중요해.”


“그래.”

“그놈의 ‘그래’말고 다른 말 좀  수는 없어?”

“그래.”

레스는 수다 떠는 일에 관심이 없는지 묵묵히 자기  일만 했다. 피카니는 질문을 바꿔보았다.


“그런데 왜 너는 신을 믿지 않아? 특별한 계기라도 있는 거야?”

“하나는 내게 가르침을 내려줄 부모가 없었기 때문이고.  번째는  스승이 이교도였거든.”


“이교도?”

“예니체리는 그런 사람들만 골라서 훈련시켜. 그리고 나는 예니체리 밑에서 자랐고.”


“허.”


“그리고 내 스승은 상당히 괴짜였어.”

레스는 잠깐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내 민족의 신념을 전부 부정하는 건 아니야. 내게도 바다위윤의 신념이 있어.”


“그게 뭔데?”


“바다위윤에게는 규칙이 있어. 가장 중요한 규칙으로는 세 가지가 있지. 밀마스티아는 환대를 의미해. 우리들에게 손님 접대는 신성한 일이야. 유목민들은 평생 누군가의 손님이 되어야하니까 우리들 또한 손님을 정중히 모셔야만 해.”

“그렇군.”


“나나와떼는 도움을 요청하는 자에게 베푸는 자비를 의미해. 심지어 적일지라도 나나와떼를 요청한다면 바다위윤은 지켜야할 의무가 있어.”

“진짜로 지키는 걸 본 적이 있어?”

“사실 나도 나나와떼는 본 적이 없어. 요청하는 사람도. 지키는 사람도.”


“나머지 하나는 뭐야.”


“바달.”


레스는 그 말을 하고나서 나무 조각을 하던 손을 멈췄다. 그가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리자 피카니가 대답을 재촉했다.

“빡치게 하지 말고 그게 뭔데?”

“바달은 복수를 의미해.”

피카니는 손바닥으로 땅을 밀면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네가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가는데. 너처럼 재빠른 총잡이는 처음 봤고, 총잡이가 누구를 죽이지 않으려는 모습도 처음 봤다고.”

“죽였어.”

모닥불의 불빛 속에서 싸늘하게 굳어버린 레스의 얼굴을 보고 피카니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피카니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침묵을 깼다.


“왜?”

“용서할  없었어. 그럴 때는 비열한 놈의 수준에 맞춰줄 수밖에.”


“누군지는 몰라도 널 화나게 했을 정도면 심각한 쓰레기였었나 보다.”

갑자기 레스는 권총을 뽑고 그를 겨누었다. 피카니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면서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 내가 뭐 잘못했어?”


“바달.”

마지막으로  것은 방아쇠를 당기는 검지와 섬광이었다.



피카니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순간에 그의 온몸에서 진땀이 솟아나와 옷 아래로 한기가 돌았다. 창문을 보니 아침 햇살이 창턱에 걸려있었다.

“악몽을 꾸더라도 잠은 용케 제대로 잤구나.”


방음대책이 제대로 되어있는 호텔이어서 다행이었다.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고 거울을 보니 용사의 모습은 흔적도 없었다. 원래 얼굴이라는  가꾸기는 힘들어도 망가질 때는 순식간에 삭아버리지만 마음고생이 심해서 그랬는지 전보다 다섯 살은 더 많아보였다.

“수염만 살짝 더 다듬고 조금 꾸미면 날 알아볼 사람은 없겠군...”


아직도 잠에서 덜 깬 탓에 그는 정신이 없어서 오늘 할 일부터 머릿속에서 정리해야만 했다. 모처럼 혼자만의 공간을 누리고 있으니 혼잣말이나 실컷 하자고 마음먹었다. 거울을 보면서 그가 말했다.


“어디보자. 이 도시에 있는 갱단은 3개였지. 갱단마다 구성원이 60명은 되고. 우리들은 루나 양까지 합쳐서 다섯 명이니 한 사람당 대충 36명 정도 상대하면 되겠군. 끝내주네.”


다른 말로는 답이 없다는 거다. 방금 그 말을 한 것만으로도 눈가에 낀 기미가 더 길어진 느낌이었다.

“레스하고 같이 다닐 때는 겨우 둘이서 오륙십까지 상대하고도 잘만 살았는데 어떻게 했더라? 하아... 예전이 좋았어.”

피카니는 자기가  말에 놀라서 멈칫 거렸다.

“예전... 예전 방법... 놈들의 수준에 맞춰준다...”


갑자기 문 바깥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외쳤다.


“일어나십시오. 다들 모이고 있습니다.”

그는 방문을 열어서 아비투스와 대면했다.

“깨우러 온 겁니까?”

“네.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정하느라 바빠질 테니까요. 저는 이이상 복잡해지지만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피카니는 고갯짓을 하고 방문을 닫았다. 권총 벨트를 허리에 채우고 부츠를 신으면서 아까 끊어졌던 생각들을 다시 되새김질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그만두면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예전 방법. 다른 사람의 수준에 맞춰주다. 복잡해지지 말자. 머리에 맴돌던 생각들이 그 순간 한꺼번에 합쳐져 완전한 관념으로 탄생했다.


“그래 맞아. 복잡할 필요 없어...”


피카니는 계시라도 받은 예언자처럼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모자를 집었다.


“우리는 그저 놈들 수준에 맞춰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1층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수렵 민족의 아침은 이르다. 삶 그 자체가 전쟁이자 생존의 연속인 황무지의 원주민들은 아침 해가 떠오르자마자 일과를 시작해야만 한다.

하지만 샤카자이아는 생애 처음으로 늦잠을 잤다. 때는 아침 7시 반이었고 무려 평소보다 2시간이나 잠을 더 많이 잤다. 그녀는 부스스한 얼굴로 윗몸을 일으키고 괜히 몸의 반동으로 침대 매트리스 위에서 통통 뛰었다. 그리고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푹신하다...”

잠깐 그대로 굳어 있다가 그녀는 서둘러서 이불을 치우고 바깥으로 나왔다.

“안되겠어. 더 있다가는 영원히 못 나올 거야.”

샤카자이아는 욕실로 가서 세면대로 갔다. 수도를 사용하는 방법은 어제 아자리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능숙하게 따듯한 물을 받아서 세수했다. 손끝으로 얼굴을 대면 뽀득거리는 소리가  정도로 깨끗하게 씻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따듯한 물을 이토록 간단하게...”


뒷머리는 등을 거의 덮을 정도로 치렁거렸지만 다시 땋기 귀찮아서 어제처럼 포니테일 형태로 묶어서 정리하고 그녀는 1층으로 내려왔다. 레스는 바닥에 엎어져서 자고 있었다. 아자리는 고양이마냥 몸을 웅크리고 바에 드러누워 있었다. 아무래도 지난 밤 동안 그렇게 잠을 잤던 모양인데 용케도 뒤척이지 않고  떨어졌나 싶어서 신기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샤카자이아는 문득 레스 일행과 처음 만났던 아침이 떠오르려 했다.

‘아자리가 나를 처음 봤을 때 대충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일단 그녀는 레스부터 깨우러 그의 다리를 발끝으로 툭툭 쳤다.


“일어나 ‘케모사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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