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3권] 78화 - 플롭
레스가 걸음을 옆으로 옮겼다. 왼발을 오른쪽으로 반 발자국. 그리고 오른발을 같은 방향으로 한 발자국. 양손을 땅에 찍은 지팡이에 얹어두고 굳어있던 파스낙도 움직였다.
아자리도 마음 같아서는 끼어들고 싶었으나 상황이 너무 살벌해서 언제 들어가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결투를 방해하기 싫은 게 아니다. 아무리 위력이 약한 마법이라도 쓰려고 준비하면 파스낙이 파동을 통해 눈치챌 것이다. 아자리는 기껏 레스가 목숨을 걸고 만들어준 대치 상황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차장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켜보기만 했다.
레스는 여전히 처음의 자세를 지키고 있다.
‘최대한 빨리 뽑아서 쏴도 모자랄 판에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레스?’
아자리는 여태껏 레스가 지는 모습을 상상도 해본 적 없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길 수 있는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두 남자는 수평계의 추처럼 대칭 했고 시계 시침이 원운동을 하듯 돌았다. 파스낙은 레스를 계속 째려보면서 생각을 정리하다가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나하고 계집하고 싸우는 와중에 내가 총에 맞는 모습을 봤었겠지. 내가 무적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 거야. 이제 알겠다. 이놈은 먼저 뽑아서 쏠 생각이 없어.’
같은 순간에 아자리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파스낙이라도 마법으로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는 없어. 파스낙이 공격하려고 방어를 푸는 순간에 쏴버릴 생각이구나! 총잡이가 마법사를 이길 방법은 이것뿐이야!’
레스는 묵묵히 발만 천천히 옮기고만 있을 뿐이다. 수 싸움은 아직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도로에 솟아있는 철제 가로등의 불빛과 달빛에 드리워진 전깃줄들의 거미줄 같은 그림자. 도시는 냉정했고, 차가웠고, 평범했다.
‘짜증 나는군. 슬슬 피곤하기도 하고.’
파스낙은 그 와중에 마법으로 자기 몸을 지키고 있느라 피로가 느껴졌다. 아무리 근력과 체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똑같은 자세 그대로 버티려면 어렵듯이 파스낙도 집중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레스가 걸음을 멈추자 분위기가 돌변해서 파스낙은 심호흡을 하고 레스를 더욱 매섭게 째려보았다.
‘마법 두 개를 같이 쓰는 건 힘들지만 어디 한 번 마음속을 읽어볼까.’
아자리는 대치가 길어질수록 희망이 커졌다.
‘잘하고 있어요. 계속 지치게 만들어요. 아무리 저놈이라도 나하고 방금 싸우고 온 직후니까 한계가 있을 거예요.’
갑자기 파스낙이 손을 쳐들었고 가면 속에서 눈동자가 번쩍거렸다. 가느다란 벼락이 손끝에서 튀어나와 레스를 향해 어둠을 태웠다. 모두가 상황을 깨달았을 때는 종소리 같은 천둥이 거리에 울렸다.
레스는 쓰러지지 않았지만 이를 악물고 경련을 일으키며 버티고 있는 모습은 애처롭기만 했다. 파스낙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가로등의 불빛이 그를 위한 스포트라이트 조명 같았다.
그가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연극배우처럼 과장하는 투로 말했다.
“총잡이가 마법사를 만나면. 총을 든 쪽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 위력을 최대한 줄인다면 나 정도 수준의 마법사는 손동작 한 번으로 공격할 수 있거든. 그런데 너는 뽑고, 조준하고, 쏴야 하잖아. 차라리 평범한 발총 자세였다면 가망이 있었을 텐데.”
레스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헛구역질하다가 위액 섞인 토사물을 한 번 쏟아냈다. 그가 입고 있는 싸구려 옷의 보푸라기는 방금 맞은 벼락으로 모조리 타버려서 온몸에서는 연기가 났다. 꼭두각시 꾼이 위에서 실을 잡아당겨 주듯 애써 다시 자세를 잡았지만, 가망이 없어 보였다.
“안돼….”
아자리는 파스낙이 방어막을 앞으로 다시 펼치는 모습을 보았다. 급하게 다시 펼쳤다고 빈틈이 생기기는커녕 강철방패처럼 견고했다.
파스낙은 아직도 분이 다 풀리질 않아 지팡이를 쳐들고 레스를 가리키며 외쳤다.
“블러핑도 상대를 보고 쳤어야지. 할 말은?”
레스가 오른손으로 외투 자락을 뒤로 넘기자 권총집이 드러났다. 파스낙이 그걸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광소를 흘렸다.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아자리가 마침내 전차에서 내렸다.
“리카인 페카!”
방금 파스낙이 날린 것과 똑같은 얇은 벼락이 그녀의 손에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파스낙은 그녀가 주문을 다 외치기 직전에 미리 지팡이를 앞으로 쳐들고 있었다. 아자리의 날린 벼락은 그의 코앞에서 부질없이 보기에만 화려한 불꽃으로 쪼개졌을 뿐이다.
“거 참. 학습 능력이 그렇게 없어?”
레스가 권총을 뽑았다. 그리고 양손으로 총을 쥐고 파스낙을 겨눴다. 물론 파스낙도 그 광경을 똑똑히 보고 있었지만 무엇을 더 어떻게 해줘야겠다는 의욕이 들지를 않았다. 기가 막히기만 했다.
그가 숨을 들이마시고 살짝 내뱉은 다음 숨을 참았다. 딱히 사격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아니어도 레스의 조준이 이상하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파스낙은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 두었다.
그가 쐈다.
총알은 평범한 도시를 만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냉정한 존재 의의를 위해 자기 임무를 다하였다. 날아가는 곳은 파스낙을 향하기는커녕 한 뼘 옆이다. 곧 단단한 물체끼리 맞닿는 소리와 함께 파스낙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
아자리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주위는 세상의 만물이 입을 다문 것처럼 무섭도록 적막했다. 아마 소란을 듣거나 본 시민들이 달아나서 그런 거겠지만.
레스가 말했다.
“결투는…. 한쪽이 쓰러지기 전에는 끝난 게 아니다. 뺀질이.”
“레스! 괜찮아요?!”
그녀가 바로 달려오려고 했지만 레스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손바닥을 보이며 제지했다. 저쪽이 경련을 일으키며 다시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아까 엎어졌을 때 세게 부딪혔는지 가면에 금이 가 있었다. 파스낙은 처음으로 지팡이를 가장 올바른 목적으로 사용했다. 그가 지팡이에 의지해서 부들거리며 상반신만 간신히 일으키고는 뒤를 바라보았다. 바로 근처에 있는 가로등의 표면에 부자연스러운 흠집이 나 있었다. 아자리도 그걸 보고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이 안 다물어졌다. 파스낙이 등에 맞은 곳을 부여잡으며 뒤집힌 목소리로 읊조렸다.
“여기에다가 총알을 튕겨냈다고…?”
아무래도 현실을 못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아자리도 그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운전석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차장은 흐뭇한 미소만 짓고 있다. 넋이 나간 얼굴로 파스낙이 다시 말했다.
“설마 이게 다 의도했던 거라고?”
“어…. 설명하자면 좀 길어지는데.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나.”
레스는 그제야 평소의 한가한 태도와 태평한 말투로 돌아왔다. 파스낙은 통증 때문에 인상을 찡그리며 레스를 노려보았다. 그가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첫 번째로 내가 일부러 뽑아서 쏘기 불편한 자세를 잡은 건 허세 때문만은 아니었어. 아주 단순한 이유지. 이렇게 해야 두 다리로 서 있을 때 가장 버티기 좋거든.”
권투. 검술. 창술. 유술 등등 역사와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종류의 무술은 발 한쪽을 앞으로 딛는 자세를 기본으로 삼는다.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생물인 이상 무게중심을 잡으려면 다른 선택지가 없다. 레스가 설명을 이었다.
“물론 널 당황 시킬 필요도 있었지. 널 내가 원하는 곳까지 제 발로 걸어가게 만들어야 했으니까.”
파스낙이 입을 벌렸다.
“뭐?”
“목숨이 걸렸는데 내가 그저 분위기 잡고 싶어서 발을 놀렸을까? 그리고 두 번째는….”
갑자기 레스는 말을 끊고 비석처럼 뒤로 쿵 하고 쓰러졌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레스가 다시 일어날 기색이 안 보였다. 아무래도 여태껏 정신력으로 버티다가 한계에 달한 거리라. 파스낙이 신경질을 부렸다.
“야! 설명은 다 하고 기절해! 두 번째는 뭔데! 이 망할 자식아!”
파스낙이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그가 방금 총에 맞은 곳에 손을 뻗자 옷에 박혀있던 총알이 염동력으로 빠져 나와 그의 손바닥 위로 날아왔다. 그의 고함이 가면 때문에 조금 뭉개졌다.
“됐어…. 깜짝 놀라기는 했다만 이긴 건 나다! 부하들한테도 방탄복을 입혀놨는데 내가 안 입을 줄 알았나?! 이 하등 종족 따위가….”
대체 무엇으로 만들었는진 몰라도 파스낙이 입은 것처럼 얇은 방탄복으로는 관통을 면했어도 충격은 고스란히 전해지게 된다. 레스가 쏜 38구경 매그넘 탄이라면 살이 뭉개지고 내출혈로 끝나면 양반이다. 파스낙은 간신히 일어서기는 했으나 다리가 후들거렸다. 제정신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여하튼 아자리는 다시 싸울 각오를 했다. 그녀가 권총을 꺼내려 하자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아자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뒤를 돌아보니 차장이었다.
“이건 또 뭐야?”
파스낙은 당연한 반응을 보였고 차장은 말없이 터벅터벅 다가왔다. 그는 무언가를 들고 등 뒤로 감추고 있었다. 차장이 주의를 끌어주는 동안 아자리는 레스의 겨드랑이로 손을 집어넣고 뒤쪽으로 질질 끌었다.
파스낙이 목이 쉴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무슨 상관이냐고?”
얇은 유리창 정도는 가루로 만들 정도로 쩌렁쩌렁한 성량으로 차장이 외쳤다.
“공무 집행 방해! 선로 침입! 고성방가! 패션 테러리스트! 민간인 위협!”
상상을 초월하는 목청과 더불어서 자신을 향해 조준하고 있는 무기를 보고 파스낙은 기겁하고 말았다. 소총과 비슷한 물건이었는데 보통 소총이라면 총구가 있을 곳에 굵직한 원통이 대신 달려있었다. 헨리 마티니 유탄 발사기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진짜 유탄 발사기보다는 공포탄의 압력으로 폭탄을 날리는 총류탄에 가까운 방식으로 작동되는 무기다. 그래서 장전을 하려면 총구 앞으로 유탄을 집어넣고 후장식으로 공포탄을 따로 넣어야 한다. 둘 중 어느 한쪽이라고 확실하게 말하기 어려워서 20세기 초 기술적 과도기를 상징하는 물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여하튼 맞으면 아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고로 즉결 심판.”
차장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무게가 6㎏은 넘을 유탄 발사기를 장난감처럼 한 손으로 들고 쏘았다. 파스낙은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자신을 향해 직격으로 날아오는 폭탄을 간신히 염동력으로 붙잡았다.
이성이 날아가 버린 상태라 파스낙은 생포 따위는 잊어버리고 일행들을 향해 폭탄을 돌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도중에 집중력이 흔들렸다.
‘망할! 당분이 모자라...!’
차장은 유탄을 쏘자마자 춤동작처럼 마법이라도 부릴 것처럼 파스낙을 향해 비어있는 손을 뻗었다. 그가 팔에 힘을 주자 팽창한 근육의 압력으로 소매 속에 숨겨둔 용수철 장치가 작동되어 데린저 권총이 튀어나왔다. 파스낙은 그제야 비밀 권총을 알아보고는 뒤늦게 중얼거렸다.
“아나 진짜...”
날아온 총알로 폭탄이 터지자 충격파로 아자리의 머리카락까지 흔들리고 사방이 잠깐 밝아졌다. 파편이 없는 고폭탄이었기에 다행히 2차 피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자욱한 화약 연기 위로 가로등 불빛이 오렌지 색 장막을 드리웠다. 아자리가 말했다.
“대체 역무원이 왜 그런 걸 가지고 다녀요?”
“방탄 전차랑 유탄 발사기를 누가 싫어하죠?”
그 말을 듣고 아자리는 짐작했다. 이 사람하고는 정상적인 대화를 기대하면 안 되겠다고.
연기가 걷혔고 인제 와서 놀랍지도 않게 파스낙은 사지 멀쩡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금이 갔던 가면은 이제 반쯤 박살 나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파스낙이 덜덜 떨리는 손길로 간신히 쓰고 있던 가면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아자리는 만일을 위해 자신의 권총을 꺼내서 상대를 향해 겨누었으나 차장은 느긋하게 유탄 발사기를 어깨에 걸쳐두고 바라보기만 했다.
당장이라도 숨넘어갈 것 같은 쉰 목소리로 파스낙이 말했다.
“대체 뭐 하는 놈이냐.”
아자리도 하고 싶은 말이었다. 차장은 비밀 권총을 되돌리고 옷깃에서 선글라스를 하나 꺼내더니 뜬금없이 얼굴에 썼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차장이 자신의 코와 입가를 가리자 파스낙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넋이 나간 목소리로 물었다.
“친구들은 네가 이러고 있는 걸 아나?”
“안 알려줄거지롱.”
파스낙은 이젠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일행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가 지팡이로 땅을 내리치자 덜 걷혔던 화약 연기가 다시 모여들더니 그의 모습을 완전히 감췄다. 아자리가 눈을 감고 감각에 집중하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갔다…. 드디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접고 다시 주머니로 넣은 차장이 레스를 흘깃 보고는 손짓을 했다.
“죄송합니다만 방금 일행분이 숨을 멈췄습니다.”
아자리는 바로 허겁지겁 양손을 모으고 레스의 가슴 위에 대고 심폐소생술을 했다.
“제발! 제발! 여기까지 와서 이러지 마요 제발! 응?”
“숙련된 조교의 시범.”
아자리를 옆으로 정중히 밀면서 차장이 순서를 넘겨받았다. 아무래도 여자아이가 하는 것보다는 성인 남성 쪽이 확실하니 그녀도 불만은 없었다. 딱 하나만 빼고.
“아~ 아~ 아~ 아~ Stll Alive~ Still Alive~ 아~ 아~ 아~ 아~ Still Alive~ Still Alive~~”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노래 박자에 맞춰서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는데 동작 자체는 군더더기가 없었으나 급한 상황인데도 묘하게 즐기고 있는 거 같아서 께름칙했다. 그녀의 미의식 기준으로는 가락도 이상했다.
“대체 무슨 노래에요 그거?”
“제 노래요.”
“왜 하는 건데요?”
“이 정도 박자가 제일 효율적이니까요.”
“그것보다 이제 인공호흡도 해야…. 아니 하고 싶다는 건 아니고! 정 못하시겠다면 제가 하겠지만!”
“그런 거 안 해도 됩니다.”
레스가 거칠게 기침을 하면서 일어났다. 정신이 들자마자 그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사람 돌바닥에 눕혀대고 뭐 하는 짓이야?!”
차장은 태연히 대꾸했다.
“원래 심폐소생술은 늑골 한두 개쯤 나가야 정상입니다.”
이번에는 아자리가 차장의 편을 들어줬다.
“죽었다가 살아난 와중에 이런 소리 하긴 싫지만 사실이에요.”
“아. 그래….”
레스는 차장에게 부축을 받고 일어났다. 급한 불도 껐으니 아자리는 그다음으로 신경 쓰이는 걸 해결하고 싶었다. 두 사람을 따라가며 그녀가 물었다.
“아까 승객들을 위협해서 진정시킨 것도 그렇고 당신 역무원 아니죠?”
차장 대신 레스가 대답했다.
“참 빨리도 알아챘네. 난 전혀 몰랐는데.”
일행들이 전차에 올라탔다. 차장은 묵묵히 조종간으로 가서 다시 전차를 몰았다. 아마 속력을 올릴 때 쓰는 것으로 보이는 레버를 한계까지 당기고 그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맥시멈 파워어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그 뒷모습을 보자니 레스와 아자리는 더 말을 걸 엄두가 안 났다.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다가 그냥 일행들에게 돌아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전차가 다시 움직였다.
둘은 공포에 젖은 승객들의 시선을 속을 헤엄치며 피카니와 루나와 다시 만났다. 피카니가 바로 물었다.
“이겼으니 살아서 돌아왔겠지만 대체 뭘 하고 온 거야? 천둥이 두 번치고 폭탄도 터지던데?”
“엄밀히 말하자면 레스는 반쯤 죽었다가 돌아왔어요.”
아자리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레스는 기운 없는 모습으로 루나 바로 옆에 누웠다. 레스가 말했다.
“앞으로 두 정거장만 더 가면 근처에 도착할 거야. 나도 지리는 대강 외워놨어…. 오후 내내 할 일이 없었으니까.”
“딱히 수다하고 싶은 기분은 아닌가 봐?”
“특히 너하고는.”
피카니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듣고 싶었으나 어깨만 으쓱하고는 뒤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혹시 또 쫓아올 적들을 대비할 사람은 있어야 하니까. 아자리는 루나와 레스 사이에 쪼그려 오도카니 앉았다. 켈커트리의 지팡이 덕분에 루나도 일단은 안정을 되찾은 듯했다. 그녀가 운을 뗐다.
“아까 했던 설명 다시 해줄래요?”
“뭐. 두 번째부터?”
“아까 대치했을 때 파스낙을 일부러 가로등 근처로 유도했다고 했어요.”
그는 한번 숨을 길게 뱉은 다음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그냥 무슨 생각이었는지 처음부터 말하는 게 낫겠다.”
“알았어요.”
“애초에 먼저 쏴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안 들었어. 마법사는 생각의 속도로 공격하니까. 빠른 건 특기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안 들더라고.”
“그래도 이길 작정으로 승부를 걸었던 거잖아요. 무슨 생각으로 한 건데요?”
“같이 질 생각이었어.”
잠깐 뜸을 들이고 그녀가 말했다.
“그 말은. 같이 죽을 생각이었다고요?”
“그건 아니고.”
“말 잘 고르세요. 방금 따귀 때릴지 진지하게 고민했으니까.”
“흠.”
아직도 후유증이 가시질 않았는지 레스는 몇 번 힘겹게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그놈의 제일 큰 약점을 노리는 수밖에 없었지. 놈은 방심을 많이 해.”
“아뇨. 놈은 방심하지 않았어요. 철저했다고요.”
“그렇다면 네가 나서준 덕분에 방심한 거겠지. 한 번 이긴 것만으로는 안심하지 못해도 두 번이나 연속으로 이기면 누구라도 마음이 풀어지니까.”
“갑자기 띄워주기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자리는 내심 속이 근질거렸다.
“여하튼…. 놈이 작정하고 정신을 곤두세웠으면 대치고 뭐고 없었을 거야. 하지만 녀석은 결투를 받아들였지. 파스낙은 자기가 패배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지 못해. 더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이겼으니까. 세상만사를 내려다보는 관점으로밖에 볼 수 없게 된 거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같이 영화 봤을 때 자기 입으로 말해 주더라.”
전차는 여태껏 멈춰있던 시간을 메꾸려는 듯 격렬히 달렸다. 아자리가 말했다.
“듣고 보니 맞네요. 당신하고 같이할 생각도 진짜로 보였고.”
“역시 너 바로 근처에서 엿듣고 있었구먼? 왜 내가 불렀을 때 안 나타났어?”
“봐서 알겠지만 제가 나타났을 때 조용했었나요?”
“그랬지.”
갑자기 루나가 입을 열었다. 어린 새의 울음소리만큼 음색이 연약했다.
“어쩌면… 내려다보는 게 너무 지겨워져서 대등해질 수 있는 순간이 그리웠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결투를 받아들였을 지도요….”
아자리가 루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지셨나요?”
루나는 아직 눈꺼풀도 제대로 못 떴으나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된 모양이었다.
“정신은 방금 돌아왔어요…. 하자르 씨. 계속 얘기해주세요.”
레스는 분부대로 했다.
“말하다 보니 너무 장황해졌는데 정리하면 이거야. 처음부터 한 대 맞을 각오를 하고 놈이 방심했을 때 예상치 못한 곳으로 공격한다. 간단하지?”
아자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총알을 튕겨내서 맞추는 게 간단하다고요?”
듣고 있던 루나가 ‘와아’하고 기운 없는 감탄을 뱉었다.
“상대가 원하는 곳에 있어 준다면 충분히 해볼 만해. 물리법칙은 항상 똑같으니까. 도탄 사격은 피카니도 할 수 있을걸. 그걸 노릴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게 문제지.”
“하지만 파스낙이 마음속을 읽을 수도 있었는데요?”
“결투를 걸기 전부터 난 하나만 생각했어.”
“어떤 생각이요?”
“‘덤벼.’ 한 가지만 집중해서 생각하는 거야 총잡이에게는 당연한 거고.”
듣고 있던 루나가 다시 ‘와아’하고 기운 없는 감탄을 뱉었다. 전차가 정류장에서 멈추자 승객들이 허겁지겁 내렸고 새로 올라탄 승객들은 그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곧 차장이 표를 걷으러 왔다. 아자리는 괜히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차장을 무시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물어볼게요.”
“해.”
“마법사들의 특징을 원래 잘 알고 있었나요? 마법사가 빨리 공격하려면 위력을 낮춰야만 한다는 점. 공격하고 방어는 동시에 못 한다는 점. 그리고 위력을 낮춰서 날린 공격은 한 번쯤 맞아도 즉사는 안 한다는 점. 제가 따로 설명해준 적도 없었잖아요.”
“친하게 지냈던 사람 중에 네가 유일한 마법사는 아니야.”
여태껏 레스가 해온 짓을 보면 썩 놀라운 사실도 아니었다. 그래도 언젠가 이 점에 대해서는 제대로 물어봐야겠다고 아자리는 마음속으로 새겨두었다.
“마지막. 제일 궁금했던 거에요.”
“괜히 뜸 들이지 마. 피곤해.”
“왜 총알을 하나만 가져갔나요?”
“한 발이니까 각오가 서는 거야.”
전차가 다시 움직였다.
“나도 무서웠어.”
레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