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3권] 86회 - C Q C
그동안 피카니도 나름대로 기회를 찾고 있었다.
안내받은 방에는 확실히 구경거리가 많았다. 한쪽 벽에 골동품 칼과 머스킷 권총, 방패, 퀴레시어 흉갑 같은 옛 시대의 병기들이 걸려 있었는데 개중에는 합체 무기들도 제법 있었다.
약 200년 전 인간들의 땅에서는 화약 무기들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각종 냉병기와 화기를 억지에 가까운 수준으로 합치는 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칼 손잡이에 권총을 집어넣거나, 머스킷 소총의 몸통을 칼집 삼아 개머리판에서 칼을 뽑기도 하고, 방패 가운데에서 총알이 나가도록 권총을 달기도 했다. 생각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구조가 복잡해져서 쉽게 망가졌고 무엇보다 단가가 엄청나게 들었다. 그래서 지금 시대에는 엄청난 고가의 수집품으로 취급받는데 지금 피카니가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값을 다 합치면 도심의 집 두 채 값은 나올 거 같았다.
반대쪽 벽에는 원주민들하고 관련된 물건들이 수두룩했다. 정복자와 야만인의 구도로 꾸민 모양이다. 여러 가지 암각화의 탁본, 각종 장신구, 드림캐처, 토마호크 도끼, 활과 화살통, 그리고 반으로 갈라져서 단면을 드러낸 두개골들. 온갖 종족들의 해골이 거기 있었다.
“구역질 나는 새끼.”
어쨌든 눈앞에 무기들이 널려있으니 피카니는 보이는 대로 단검 하나를 가져가려고 했으나 쐐기로 단단히 고정되어서 꿈쩍도 안 했다. 손마디로 두드려보니 울림이 느껴지는 게 벽은 석고와 합판으로 만들어져서 여차하면 부술 수도 있었겠지만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제기랄.”
그는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머리카락 속에 숨겨놨던 열쇠 따는 도구로 잠긴 문을 따보기로 했다. 1분 정도 시간을 들이자 열 수 있었다. 안에는 진열실에 들어가지 못한 수집품들이 쌓여있었다. 화약 냄새가 나는 걸 보아하니 아까 봤던 방에 진열된 총에 넣는 탄약들도 여기에 둔 모양이다. 어쨌든 허탕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문을 따려고 하는데 복도로 레스의 비명이 퍼졌다. 그 뒤에 플러머가 뭐라고 하는 고함도 이어서 들렸다. 피카니는 애써 무시하면서 열쇠 따기에 집중했다.
“조금만 더 버텨다오.”
당장이라도 박차고 들어가서 싸워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으나 안 좋은 몸 상태로 무기도 없이 이길 자신은 없었다. 아무리 썩어빠진 놈이라고 해도 연방 보안관은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마침내 문을 열어보니 이번에는 서재가 나왔다. 박제된 동물만 몇 마리 있을 뿐 특별한 점은 없다. 푹신한 안락의자 하나와 작은 탁자만 있는 거로 보아 응접실은 아니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곳 같았다. 책장에는 손을 타지 않은 먼지 쌓인 책만 가득할 뿐 아무리 건드려봐도 고전적인 비밀 통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나마 탁자에 놓인 봉투를 뜯을 때 쓰는 나이프는 건질만 했다. 날카롭게 잘 갈렸고 도금되어 있다. 피카니는 필사적으로 더 도움이 될만한 걸 찾아보았으나 아무래도 방금 레스가 쓰러진 거 같았다. 취조실에서 나는 소란이 어찌나 컸는지 피카니도 피부로 느껴졌다.
간발의 차로 그는 미리 돌아와서 플러머를 기다릴 수 있었다. 피카니는 뒷짐을 진 채 여태껏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침을 뚝 떼고 진열된 물건들을 느긋하게 구경했다. 플러머가 안으로 들어왔을 때 물었다.
“시설이 좋은 것치고는 방음이 잘 안 되는 거 같네.”
상대는 옷깃을 고쳐잡으며 뚜벅뚜벅 다가왔다.
“보통은 들을 사람이 없으니까. 혹시 여기서 관심 가는 거라도 있나?”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턱짓을 했다.
“줄 것도 아니면서 뭘.”
“내가 뭘 받느냐에 달렸지. 용건을 들어보실까.”
피카니가 가발을 벗자 그는 정색하고 멍하니 굳어버렸다. 피카니가 남자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꼴로 나타나서 미안합니다.”
잠깐 나가버린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야 플러머는 상황이 파악됐다.
“대체 너 누구야? 잠깐만. 아냐. 아냐 그럴 리가.”
“보다시피 다른 사람 눈에 띄면 귀찮은 몸이라.”
“여기서 대체 뭐 하는 거요?”
“이유는 엄청나게 많지요. 당신 도움이 필요합니다.”
플러머는 조금 긴장하고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뺐다.
“그게 무엇이신지.”
“혹시 파스낙이라는 자에 대해서 아는 거 없습니까?”
전략적으로 침묵이 흘렀다. 플러머는 전혀 모른다는 시늉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전혀 들은 바 없소만. 그런데 혼자 온 거요?”
“나하고 동료들은 국경 너머 제국에서부터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 사쿠라비와 일행들을 쫓는 것도 포함해서 온갖 일을 처리하려고요. 요전에 당신한테 먼저 온 제국군이 있었을 겁니다.”
“아. 네. 기억납니다.”
“대위 뒤에 있던 궁상맞게 생긴 부하도 기억합니까?”
플러머는 과거의 기억과 지금 보이는 것이 겹치는 순간 기가 차서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며 다른 곳을 보고 소리 없는 탄성을 질렀다. 그 기세를 살려 피카니가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지금 할 말이 제일 중요한 건데. 톤토라는 주술사를 당신이 데리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 개인사는 이미 알고 왔고. 거기에 상관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기는, 한데.”
“필요하니 당장 데리고 나가야겠습니다.”
플러머는 반사적으로 질문을 하려다가 그만두고 헛기침을 했다. 최근 자기보다 윗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보니 그는 좀처럼 침착해지질 않았다.
“예, 물론 협조해드려야죠. 따라오십시오.”
플러머가 앞장서서 등을 돌리는 순간 피카니는 기척을 죽이고 숨겨둔 나이프로 목 가운데를 노렸다. 최선의 공격이었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 상대가 그 와중에 순전히 감으로 반응하는 바람에 칼날은 급소를 빗나가 겉만 베었을 뿐이다. 피카니는 빗맞힌 나이프를 다시 수평으로 휘둘렀지만 플러머는 그걸 몸만 틀어서 피했다. 둘은 반사적으로 거리를 벌리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플러머는 눈을 부라리고 이빨까지 보이며 분노를 얼굴에 드러냈다. 목에서 흐른 피가 그의 속마음을 보여주듯 목깃을 붉게 적셔갔다.
“용사 주제에 비겁하기는.”
플러머가 옷깃에 손을 집어넣자 피카니는 달려들었다. 하지만 상대의 힘이 상상 이상으로 강해서 그는 몸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플러머는 자기한테 달라붙은 상대를 발로 밀어버리고 겨우 옷 안에서 권총을 꺼냈다. 피카니가 팽이처럼 몸을 돌려서 그걸 걷어차지 않았더라면 천장 말고 몸에 구멍이 났을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서 자꾸 소란이 들려 귀를 기울이고 있던 샤카자이아는 총성을 듣고 소리쳤다.
“레스?! 거기 있어?!”
그동안 플러머는 사람 같지 않은 괴력으로 피카니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자신을 붙잡은 팔뚝에 나이프를 꽂아도 소용없었다.
‘얼음을 쑤시는 느낌이네.’
피카니는 그대로 온갖 총기들이 진열된 벽을 부수며 바로 옆에 있는 창고로까지 날아갔다.
◆
빈센트는 복도 너머에서 몰려오는 상대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계속 쏘았다. 리엔필드 소총은 볼트 액션 소총 중에서 연사속도가 유난히 빠른 편으로 숙련된 사수는 1초에 한 번씩 쏠 수 있었다. 보병들 사이에는 이런 묘기를 광란의 1분이라고 불렀다. 흡사 목수가 망치질하듯 굵직한 소총탄 소리가 멎을 기미가 없으니 건너편에 있는 갱들은 권총만 엄폐물 바깥으로 꺼내서 총알 낭비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전기를 끊어버린 탓에 창을 통해 바깥에서 들어오는 불빛밖에 없는 건물은 화약의 섬광이 잔상으로 이리저리 너울거렸다. 탄이 떨어지자 빈센트는 탄알 클립을 꺼내며 외쳤다.
“장전한다!”
바로 등 뒤에 있던 하딘이 연막탄을 꺼내서 자신들 발밑에 던졌다. 제대로 된 군용품이 아니라 질산칼륨과 산화된 설탕으로 만든 급조품이라 연막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가자!”
하딘이 그렇게 외치고 앞에 있는 아비투스의 등을 밀쳤다. 빈센트는 흥분에 찬 목소리로 불평을 쏟았다.
“서두르자고는 했지만 역시 너무 무모했어!”
아비투스가 앞장서면서 대꾸했다.
“같이 지낸 세월이 얼만데 뭘 새삼스럽게!”
세 남자는 달렸다. 그들 앞으로 기다리고 있던 갱단원들이 튀어나오자 아비투스가 달려들어서 철갑으로 총알을 받아줬다. 하딘도 권총을 쏘면서 그 뒤를 바짝 쫓아갔다. 실내는 순식간에 서로가 서로와 얽히는 난전으로 어질러졌다. 아비투스의 철갑에 퉁겨진 흉탄에 맞은 운수 나쁜 사람도 있었다.
남자 둘이 그나마 몸집이 커서 어둠 속에서도 분간이 잘 되는 아비투스한테 같이 달려들었다. 불행히도 그들은 아비투스가 쇠망치를 들고 있다는 걸 몰랐다. 한 사람은 자기 갈비뼈가 뭐에 맞아서 부러졌는지도 몰랐고 다른 한 사람은 아비투스에게 옷깃과 다리를 붙잡히고 레슬링 기술로 먼지구름이 날 정도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바로 옆에서는 하딘이 침착하게 권총을 다 쏘고 나서는 다른 손에 쥔 기병도로 사방을 검술로 휘저었다. 아무리 칼잡이가 사라진 시대라지만 그들이 하딘을 총알이 떨어진 권총으로 이길 방법은 없었다. 크게 베이고 바로 달아나는 놈들은 굳이 쫓지 않았다.
그들 앞으로 굳게 잠긴 문이 있었다. 너머로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렸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살기가 따끔거릴 정도로 선명했다. 아비투스는 일행들이 장전을 마친 것을 확인한 다음 쇠망치를 힘껏 쳐들고 기합을 지르며 자물쇠를 문손잡이째로 부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안쪽에서 눈먼 총알들이 쏟아져 나왔다. 성난 갱단원들의 목소리도 뒤이어 튀어나왔다.
“뭐 하는 새끼들인지는 몰라도 벌집으로 만들어주마!”
하딘은 그동안 창문 쪽으로 다가가서 바깥을 보았다. 반대편 방향의 어둠 속에서 이쪽을 향해 누군가가 신호를 보내듯이 불빛이 규칙적으로 몇 번 번쩍였다. 그가 아비투스를 향해 말했다.
“아비투스. 구멍 뚫어.”
“숙이십시오.”
그는 망치를 몇 번 휘두르고 주먹과 발길질로 창문을 부숴버렸다. 창문은 격자까지 통째로 뜯어져서 벽돌 덩어리와 함께 바깥으로 떨어졌다. 그다음에는 이쪽 방과 저쪽 방 사이에 있는 벽으로 다가갔다. 안에서 입구만 지켜보고 있던 갱단원들은 당황해서 난데없이 허물어지고 있는 벽을 향해 닥치는 대로 쏘았다.
“아악!”
아비투스는 쉬지 않고 날라오는 총알 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뒤로 벌러덩 쓰러졌다. 다행히 철갑이 뚫린 건 아니었다. 뒤쪽을 계속 보고 있던 빈센트가 연막이 꺼져가는 걸 보고 총소리에 묻히지 않게 소리 질렀다.
“더 온다!”
총알들이 앞과 뒤에서, 머리 위로 날아다녔다. 불현듯 참호에 죽치고 앉아있던 시절이 떠오를 정도였다. 하딘은 주머니에서 스페이드 카드를 꺼내고는 잽싸게 벽에 난 틈새에 끼웠다. 그가 일행들을 향해 외쳤다.
“폭파! 폭파! 폭파!”
그들은 기어서 멀찍이 물러나고는 귀를 틀어막았다. 아비투스도 잠깐 투구를 벗고 귀를 손으로 감쌌다. 충격파가 눈깔까지 뒤집을 기세로 그들의 내장과 뇌수를 뒤흔들었다. 무수한 분진 파편과 함께 벽에 우물만 한 구멍이 뚫렸다. 거리를 벌렸어도 고작 몇 미터 밖에 안 됐으니 다들 쇼크에 빠져서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방 안에 있는 적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지만 복도 저편에서 다시 밀려오는 놈들이 문제였다. 피에르는 자기 팔이 다른 사람 팔처럼 느껴지는 걸 어떻게든 억눌러가며 애써 소총을 들어 올렸다. 총알이 그의 어깨를 뚫었다.
“맞았다!”
빈센트는 이를 악물고 할 말만 했다. 그 말을 들은 일행들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맞서 싸웠다. 빈센트는 구멍이 난 자기 어깨에 거즈를 쑤셔 박아서 피를 머금고 불어나게 두었다. 지혈만 될 뿐 자기 손으로 직접 상처를 넓히는 짓이니 통증은 엄청났다. 그새 방 안에 있는 놈들도 정신을 차렸는지 한 놈이 이쪽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야심한 거리로부터 메마른 총성이 나더니 그 얼굴은 바람을 찢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하딘은 그 총성을 반주 삼아 온몸을 쥐어짜서 외쳤다.
“쓸어버려 카르델!”
아비투스는 다친 빈센트를 감싸느라 바빴다. 카르델도 필사적이었으나 어두운 곳에서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들을 정확히 노리는 게 여간 까다롭지가 않았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으면서 조준경의 십자선에 집중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어둠 속에 반딧불 같은 게 번쩍거렸다. 건물 안에서 또 다른 방향으로부터 총성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카르델은 조준경에 눈을 댄 채 중얼거렸다.
“주인공 놀이하고 자빠졌네.”
반딧불의 정체는 히콕의 고양이 눈이었다. 아까까지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건물은 순식간에 적막해졌다. 카르델은 다시 부지런히 방아쇠를 당기며 다른 적들의 발을 묶었다. 장전하고 있는 히콕을 향해 하딘이 물었다.
“바빴나?”
“조금. 의사 선생은 괜찮아? 포션이 있는데 소량만 섭취하는 거라면 없는 것보단 나을 거야.”
빈센트는 피 섞인 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그딴 거 입에 안 대.”
히콕은 장전을 마친 리볼버를 멋 부려서 돌리며 양손에 하나씩 들었다.
“그러시던지.”
그가 방안으로 뛰어들자 폭죽 터지듯 시원하게 속사하는 소리와 비명이 겹쳐 울렸다. 곧 히콕은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돌아왔다.
“끝났어. 빨리 물건 챙겨. 나갈 길도 닦아놨다고.”
일행들은 몸을 추스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온갖 종류의 총기들이 그득했다. 상업지구를 관리하는 블랙독 갱단들이 독점해서 보관하던 것들이었다. 네 사람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사람들이나 시판되는 싸구려 총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가장 안쪽에 놓여있는 큼지막한 상자로 향했다. 겉에 달린 자물쇠를 총으로 부수고 밀봉된 덮개를 하딘의 기병도로 비틀어서 열었다. 내용물을 확인하자 그들은 상황도 잊어버리고 잠시 숨을 죽였다. 히콕은 멍하니 감탄했다.
“우와. 선배님 말이 사실이었군. 소름 끼치는데.”
하딘이 빈센트를 부축하면서 지시했다.
“아비투스는 탄약 상자를 챙겨라. 저건 자네가 들고.”
히콕이 끙하고 신음까지 내면서 상자를 양손으로 안아 들었다.
“니미럴 이거 30kg은 되겠는데.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면 가벼운 셈인가.”
무겁다는 불평과는 달리 히콕은 사람 같지 않은 괴력을 내서 다른 사람에게 뒤처지지 않고 잘 움직였다. 그 모습을 끝까지 확인한 카르델도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