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3권] 87회 - 한물간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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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얻어맞는 것도 배를 맞는 것만큼 아팠다. 피카니는 손에 집히는 대로 뭐든 들고 일어났다. 팔이 왜 이리 무거운가 해서 봤더니 나이프가 아니라 플란트락 권총이 달린 장검이었다. 창고로 날아갈 때 벽이 부서지면서 진열되던 게 같이 떨어진 거였다. 당연히 총알은 들어있지 않다. 이쪽으로 다가오던 플러머는 그 모습을 보고 움찔거렸다. 피카니가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는 걸 보고 더욱 놀랐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찡그렸다.
아무리 그라도 칼을 든 상대한테 그냥 덤빌 순 없었다. 방금 피카니가 걷어찬 권총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거리가 아슬한 지금 빈틈을 보이기는 싫었다. 플러머는 눈알을 이리저리 돌리며 머리도 굴렸다. 바로 앞에는 기회가 보이면 바로 달려들 피카니가 있고, 바닥에는 온갖 날붙이들이 나뒹굴었다. 플러머의 결론은 근처에 떨어져 있던 칼에 발끝을 걸어서 손으로 들어 옮기는 거였다. 그렇게 둘의 싸움은 뜬금없이 한물간 방식으로 돌변했다.
피카니는 정직하게 싸울 생각 따위 없었다. 그가 창고에서 그새 챙겨둔 주머니 같은 것을 집어 던지자 플러머는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주머니에서 화약이 쏟아져 나왔다. 피카니는 그것이 눈에 들어갔기를 바라며 달려들었으나 플러머는 간단히 공격을 받아내었다. 이번에는 피카니가 합을 받았는데 힘이 너무 세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이 망할 자식은 뭘 처먹은 거야?!’
그가 거리를 벌리는 동안 플러머는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카락과 옷에 묻은 화약을 떼어내려 하고 있었다. 눈앞의 싸움보다 그게 더 신경 쓰이는 눈치다. 칼을 겨누며 그가 말했다.
“굳이 나한테 왜 이러는지 이해는 안 되지만 덕분에 일 처리가 편해졌군.”
피카니가 눈속임으로 헛손질하고 깊숙이 찌르자 상대는 날을 옆으로 쳐낸 다음 맞서 휘둘렀다. 피카니가 공격을 받자 허공에 불꽃이 튀었다.
“엇?!”
“엇?!”
두 남자는 자기들도 모르게 기겁하고 서로 거리를 벌렸다. 플러머는 식겁한 얼굴로 옷에 묻은 화약에 불이 붙지는 않았을까 손으로 더듬었다. 피카니의 본의와는 별개로 싸움의 긴장감은 높아졌다. 어쨌든 둘은 다시 대치했다. 하지만 서로 적극적으로 나서질 못했다.
피카니는 팔이 저렸다.
‘빌어먹을 이거 무거워!’
칼에 달린 쓸모없는 권총 때문에 무게중심도 틀어져서 자세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차라리 이딴 것보다 쇠파이프를 양손에 들고 휘두르는 게 더 나았겠다고 그는 뼈저리게 후회했다. 다행히 저쪽도 당장 공격하는 대신 어떻게 해야 단숨에 끝낼 수 있을지 고민에 빠진 거 같았다.
“언제부터 타락했어? 보안관씩이나 돼서 무슨 짓이지?”
손을 쓸 수 없으면 다른 쪽이라도 써야겠다고 피카니는 생각했다. 말이 많은 성격 같으니 빈틈이라도 생겨주길 바라면서. 느리게 춤을 추듯 플러머가 살짝 발을 옮겼다.
“보안관인 게 대수인가? 약한 놈은 먹히고 강한 자만 살아남는 이런 세상에.”
“개척시대는 끝났어. 네가 그러고도 문명인이야?”
“현실적인 게 문명의 덕목이지.”
그는 쥐고 있는 칼을 돌리며 고쳐잡다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뭔가 떠올랐는지 눈을 깜빡거리고 플러머는 날을 세우지 않은 칼의 몸통을 다른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칼 손잡이가 상대에게 향하도록 뒤집었다.
칼의 날로 찌르거나 베는 것만 검술이 아니다. 무게가 쏠려 있는 손잡이 부분을 이용해서 망치처럼 휘두르거나 가운데 부분도 같이 잡고 곤봉처럼 때릴 수도 있다. 하프 소딩, 혹은 모트쉴락이라 부르는데 원래는 갑주 때문에 칼날이 통하지 않는 적이나 가까울 때 쓰는 기술이다. 서로 칼끝을 겨루는 상황에 대놓고 이러는 건 의미 없었으나 문제는 상대가 플러머였다. 다음 공격을 막으려 들었다가는 칼과 함께 뼈 어딘가도 부서질 게 틀림없었다. 가뜩이나 희박한 승산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심장의 달음박질과 함께 피카니의 머릿속에 울렸다.
뒤로 빠지면서 반격을 노리느니 먼저 공격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서로 눈을 깜빡일 때를 기다리며 거리를 좁혔다. 피카니가 앞발을 길게 뻗으며 팔을 뻗었다. 한 손 검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공격이지만 그가 미처 몰랐던 게 있으니, 하프 소딩은 반격기술로도 유용하다. 플러머는 마치 사람의 팔을 붙잡고 관절기를 거는 것처럼 칼의 몸통과 손잡이에 튀어나온 부분으로 피카니의 피스톨 소드를 붙잡았다. 바위 사이에 낀 것처럼 꿈쩍도 안 해서 불꽃이 튀는 일도 없었다.
[떠엉!]
둘이 계속 힘겨루기를 하다가 기어코 피스톨 소드는 동강이 나버렸다. 보통 쇠라는 건 휘어지지 부러지지 않는다. 상대가 아무리 괴력의 소유자라지만 피카니는 합체 무기의 내구성이 얼마나 끔찍한지 실감했다. 피카니는 겨우 달아났으나 장검이 단검으로 변해버렸으니 막막하기만 했다. 플러머는 들고 있던 칼을 피카니에게 집어 던지고 주먹질했다. 칼은 피했으나 주먹은 못 피했다. 여태까지의 싸움이 허무해지는 결말이었다.
바닥을 한참 구르다 벽에 부딪혀서 멈춘 피카니의 입에서는 피리 소리가 나왔다. 동강 난 피스톨 소드는 용케 손에서 놓치지 않았다. 본인도 그것이 신기했다.
플러머가 옷깃을 고쳐잡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피카니는 멍한 눈빛으로 자신의 무기를 바라보았다. 그가 엄지로 플린트락 권총의 공이를 당겼을 때 플러머는 상대의 멱살을 양손으로 잡고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 수집품이 된 걸 환영한다.”
“하지만 난 제국에게 담보 잡힌 몸이라….”
피카니는 눈을 질끈 감은 다음 동강 난 피스톨 소드를 상대의 몸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부싯돌에서 불꽃이 나오자 플러머의 몸에 묻은 화약이 터졌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폭발은 옷에서 목으로, 그리고 얼굴과 머리카락까지 순식간에 번졌다.
“까아아아악!”
귀청 찢어지는 괴성을 내며 플러머는 자기 얼굴을 감싸 쥐며 뒤로 자빠졌다. 그들 머리 위에는 흑색 화약의 진한 연기가 떠다녔다. 피카니는 얼굴만 따끔거렸을 뿐 별 탈 없었다. 숨을 고르고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플러머의 허리춤에 묶여 있는 열쇠들을 보았다. 피카니가 거기에 손을 뻗자 플러머가 그를 발로 걷어차서 날려버렸다.
플러머는 화상으로 흉해진 얼굴을 더욱 분노로 일그러트리며 알아먹지 못할 소리를 질렀다. 피카니의 손에는 방금 날아가면서 상대로부터 뜯어낸 열쇠 다발이 들려있었다. 플러머는 짐승 같은 움직임으로 바닥에 떨어진 권총으로 다가갔다. 피카니는 벽에 몸을 기대어가며 서둘러 바깥으로 나갔다. 등 뒤로 눈먼 총알이 벽을 뚫었다.
취조실의 자물쇠를 열쇠로 따고 안에서 그는 레스를 찾았다. 레스는 바닥에 옆으로 엎어져 있었는데 오른손은 퉁퉁 부어올랐고 팔은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피카니는 말을 잃었다.
뒤늦게 기척을 알아챈 레스가 눈을 떴다.
“이겼네…?”
“그놈 아직 안 죽었어.”
수갑을 풀어주면서 피카니가 대답했다. 풀어주면서 스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지 레스는 턱이 굳을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레스는 부축을 받아가며 같이 복도를 걸었다. 가면서 피카니가 물었다.
“팔에 부목이라도 대야 하는 거 아냐? 조치 안 하면 평생 남을 텐데?”
“아자리가 고쳐주겠지….”
“그걸로 해결되면 다행이지만. 근데 저 새끼 뭘 처먹고 저렇게 힘이 센 거야? 카우보이라는 말은 못 들었는데.”
“카우보이처럼 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가는 길에 무기들도 이것저것 떨어져 있었다. 지금은 레스를 부축하느라 무거운 건 엄두가 안 나서 제일 가벼운 걸 찾았다. 마침 처음 썼던 나이프가 근처에 있었다.
그들 뒤로 정신을 되찾은 플러머가 나타났다. 알아먹지 못할 소리를 지껄이고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그들에게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피카니가 열쇠로 문을 따자마자 둘은 서둘러 반대편으로 가고 문을 닫았다. 단단히 잠그고 나서야 둘은 안심하고 그대로 스르르 주저앉았다.
“레스!”
샤카자이아의 목소리였다. 레스는 너무도 반가웠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화려하게 장식된 철창을 붙잡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샤카자이아가 뒤늦게 피카니를 알아보고는 표정이 이상해졌다.
“금발 머리?”
피카니는 어색하게 손짓하며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랜만이군. 실제론 며칠 안 지났지만.”
“저 녀석이 왜 여기 있어?”
레스도 손짓하며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작업 중이야.”
두 남자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 뒤에 있는 문이 터졌다. 기절하기 직전 뜬금없이 느려진 세상 속에서 피카니는 떠올렸다. 맞다. 저기에 아직 화약이 잔뜩 남아있었지.
엎어져 있던 레스는 몇 초 만에 정신이 들었다. 팔이 부러져서 아드레날린이 미리 치솟고 있던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방금 충격으로 부러진 팔하고 손이 난리가 나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안 아팠다. 사방이 흑색 화약의 연기로 자욱하다. 머릿속에 울리는 짜증 나는 메아리를 무시하며 그는 바닥을 더듬었다. 운 좋게도 바로 열쇠 다발이 손에 잡혔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으니 레스는 열쇠 다발을 입에 물고 왼손으로 바닥을 당겨가며 기었다. 귀가 지나치게 좋았던 탓에 폭음을 듣고 잠깐 실신했던 샤카자이아는 의식을 찾자마자 레스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됐다. 그녀가 새파래진 얼굴로 외쳤다.
“세상에! 너 팔이?!”
대답하려 해도 레스는 입이 하나밖에 없었다. 거의 다 왔다. 이제 바닥을 손으로 밀면서 간신히 일어나려는데 플러머가 연기를 헤치고 나타나서는 그의 다리를 붙잡고 반대편 벽으로 던져버렸다. 물고 있던 열쇠는 놓쳐버렸다. 샤카자이아가 레스에게 다가가려는 플러머를 향해 소리쳤다.
“나쁜 놈아! 그만둬!”
플러머가 한숨 돌리며 샤카자이아를 쳐다보았다. 얼굴에 덮여있는 화상이 눈으로 보일 정도로 순식간에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히콕이 화살에 꿰뚫린 다리를 고치고 쫓아왔던 것을 떠올리고 정체를 바로 직감했다.
그는 체중을 실어 레스를 찍어누르고 얼굴을 쳤다. 이번에는 머리가 부서질까 궁금했던 레스는 맞으면서 하나 깨달았다. 뜬금없이 그가 몽롱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기에 플러머는 손을 멈췄다.
“거기… 미디움을 레어로 바꾸려면 체력이 드나 보네. 주먹이 달아지셨어.”
반쯤 정신이 나간 레스의 말에 플러머가 이를 악물었다. 그가 치켜 들은 주먹이 부들거릴 정도로 힘을 주자 레스는 나간 정신이 돌아오려 했다. 어, 이거 안 좋은데.
뒤에서 피카니가 덮치려 들자 플러머는 하려던 주먹질을 멈추고 팔꿈치로 뒤를 쳤다. 피카니는 쥐고 있던 나이프를 떨어트리면서도 상대의 목을 조르며 달라붙었다. 둘이 엎치락뒤치락 다투는 동안 레스는 머리를 흔들고서야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피카니가 자기 얼굴에 한 번 쳤던 곳을 또 맞아서 얼얼하긴 했지만 인제 와서 그 정도는 덤덤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나이프를 들고 일어났다. 앞에서는 플러머가 피카니를 붙잡고 샤카자이아가 있는 철창 근처로까지 몰아세우고 있었다.
샤카자이아는 어떻게든 창살을 휘어내려고 힘을 쥐어짜고 있다. 그걸 본 레스는 그녀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짐작하고 곧 샤카자이아에게 걸려있는 이상한 목걸이도 눈치챘다.
“도와줘! 카흑!”
몸싸움 끝에 이젠 피카니가 역으로 목을 졸리고 있었다. 플러머는 레스가 나이프를 거꾸로 쥐고 던질 준비를 하는 걸 보고 피카니를 인간방패 삼아 앞에 세웠다. 그는 목을 조르는 팔에 힘을 주면서 레스를 도발했다.
“한 번 해봐. 해보라고!”
레스는 던졌다. 하지만 왼손을 써서 힘도 제대로 실리지 않았고 맞추지도 못했다. 피카니를 방패로 세우거나 피할 필요도 없었다. 한참 옆으로 스쳐 간 나이프를 곁눈질로 한 번 비웃고 플러머는 피카니를 내동댕이쳤다. 피카니는 완전히 실신해서 꿈쩍도 안 했다.
상대의 얼굴에 난 화상은 이제 완전히 아물어 있었다. 레스는 반쯤 풀린 눈으로 힘없이 뒷걸음질 쳤다. 플러머는 주먹에서 관절 소리를 내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까먹고 있었는데 너하고 저 아가씨는 동행이라고 했었지. 그렇고 그런 사이냐?”
레스는 분위기에 안 어울리게 눈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약 올리는 투로 대답했다.
“아마도 거의.”
“그게 무슨 소린데 새꺄!”
플러머는 레스의 배에 주먹을 쑤셔 넣고 허리를 굽힌 그를 짓밟았다. 겨우 이 징그러운 놈들이 쓰러졌다는 생각에 플러머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기껏 이런 몸이 되고 나서 막상 능력을 써먹을 기회가 없었는데 너희들 덕분에 몸 좀 풀었다. 파스낙이 널 잡고 싶어 하는 까닭도 조금 알겠고.”
“그러냐….”
레스가 쉬어버린 목소리로 반응했다. 플러머는 쪼그려 앉고 눈을 아래로 깔았다. 주위가 남자들의 땀 냄새로 시큼하다.
“널 저 엘프 맞은 편에 가둘 거야. 바로 앞에서 안 좋은 거라도 보이면 심히 유감이겠어?”
갑자기 레스가 굵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뒤나 조심하시지.”
“허어?”
단단한 물건이 휘어져서 삐걱거리는 소음이 안을 가득 채워 울렸다. 플러머는 굳은 얼굴로 뒤를 보았다. 샤카자이아가 분노로 눈을 이글거리며 구부린 철창 사이로 나왔다. 그녀에게 걸려있던 목걸이는 나이프로 끊어져서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플러머가 짐승을 달랠 때에나 할 법한 손짓을 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러지 말자고.”
“구사노!(벌레 자식!)”
레스가 보는 바로 앞에 짙은 색의 잔상이 일직선으로 그어지더니 플러머는 어느새 바닥으로 얼굴부터 처박혀있었다. 그렇게 문명을 대표하는 자는 야만인으로부터 가장 야만적인 방식으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