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9화 〉[3권] 99회 - 특이 체질 (99/188)



〈 99화 〉[3권] 99회 - 특이 체질




주삿바늘이 텐트 지붕에 매달린 등불의 빛을 받아서 첨예하게 번뜩였다. 톤토는 소독한 천으로 루나의 팔을 닦고 정맥에 주사를 놓았다. 일을 마치고 그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하딘과 빈센트에게 말했다.


“정말 운이 좋았군. 이 여자. 특이 체질이 아니었으면 몇 시간 전에 요절했을 거다.”

루나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하딘이 졸음을 깨려고 자기 팔을 꼬집으면서 물었다.

“마법사님이 특이 체질이라고?”

톤토가 루나에게 잘 자라는  이불을 토닥여주면서 작게 말했다.

“머리카락이 파랗잖아. 머리카락하고 눈동자가 특이한 색을 띤다면 특별한 사건을 겪어서 체질이 변했거나 타고났다는 뜻이지. 육체적으로는 연약해도 면역력하고 재생력이 강해. 노화도 느려졌고. 아는 사람 중에 비슷한 친구가 하나 있지.”

이번에는 빈센트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물었다.

“아까 놓은 주사는 뭐야? 혼자만의 비법으로 만든 마법약?”


“푸른곰팡이로 만들었다.”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버린 두 사람을 향해 톤토는 설명을 덧붙였다.

“벤질페니실린. 요즘 시대 사람들은 항생제에 내성이 없으니 잘 통할 거다.”

하딘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널 올가미에 매달아서 제국까지 끌고 가주마.”

“좋으실 대로.”

톤토는 묵묵히 루나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주며 간호에만 전념했다.  길이 바빴던 하딘은 천막을 나왔다. 빈센트는 그를 쫓았다.

“이젠 어쩔 생각이야?”


“돌아가서 싸울 거다. 도시 쪽은 아직도 난리야. 지원군이 올 때까지 피해가 늘지 않도록 누군가는 나서야지.”


“괜찮겠어?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넌 총에 맞았잖아.”


하딘은 턱밑에 지저분하게 자라난 수염을 신경질적으로 벅벅 긁었다.


“우리 모두 총에 맞았어. 벌여둔 판은 마무리는 지어야지.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되던 마법사님은 집으로 돌려보낼 거다. 애물단지도 같이.”

“좋게 들리진 않는군.”

하딘은 자신의 말에 다가갔다. 그가 빈센트에게 손짓으로 작별을 고했다.

“만약의 일이 생기면 마법사님은 너한테 맡긴다. 그분께는 알아서 둘러대 줘.”

빈센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마중을 보내려 했다. 뜬금없이 들려온 소음이 그의 손짓을 멈췄다.  남자는 소음이 들려온 곳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단한 것들끼리 세게 부딪치는 소리였다. 누군가가 곡괭이나 삽으로 땅을 파고 있었다. 원래 군대에서 땅은 허구한 날 파대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기척이 들리니 수상쩍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삽질을 하는 사람은 늘씬한 여자였다. 종이처럼 하얀 피부에 까만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 그리고 고양이 귀. 레모니 타티아나다. 타티아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기척을 향해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걸었다.

“무례하게 들리는 거 알지만  도와주시겠습니까?”

빈센트가 다가가서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자네 괜찮나? 있어야  텐트로부터 한참 떨어졌잖아.”

“제가 괜찮냐고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억눌린 환희가 엿보였다. 그녀가 이쪽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면서 몸을 떨었다. 얼굴에도 활짝 웃고 싶어 하는 억눌린 욕망이 티가 나게 보였다.

“지금보다 몸에 생기가 흘러넘친 적이 없는걸요. 반평생을 족쇄에 매여 살아왔는데 이젠 아니에요! 이제 난 어디든 갈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지금 파고 있는 땅이 좀 딱딱하네요. 남자가 도와주면 좋겠어요.”

흥분에 겨워 높아졌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거기 밑에 뭐가 있는데?”

다른 질문은 미뤄두고 하딘은 코앞에 있는 것부터 물어보았다. 타티아나는 자신의 금빛 눈동자를 어둠 속에 반짝거리며 당돌하게 대답했다.

“제 장비들.”

남자들은 궁금증이 풀려서 만족한 눈치가 전혀 아니었다. 힐난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그들을 향해 타티아나는 새침하게 다시 말했다.


“갈 길이 바쁘지 않았던가요? 대위님.”

하딘은 한쪽 눈썹이 들썩였고  근육이 저렸다. 그는 입가를 일그러트리다가 타티아나에게 손을 뻗어서 도구를 건네받았다.

“내가 할 게 빈센트.  어깨에 총을 맞았잖아.”

여태껏 삼켜왔던 울분을 땅에다가 화풀이하듯 대위는 격렬하게 움직였다. 자신의 오랜 군 생활을 행동으로 증명하듯 삽질마다 돌이 쪼개지고 단단히 다져졌던 흙이 가루로 변했다. 딱히 이상할 것도 없잖아. 하딘은 필사적으로 그리 생각했다. 전향한 마족 공작원이 인간  장교한테 삽질을 시킬 수도 있지. 사람이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공원에서는 마법사들이 싸움을 벌이고, 자기들은 시가지에서 기관총도 쐈는데 이 정도쯤 대수겠어.


삽 끝에 무언가가 닿아서 조심스럽게 겉만 긁어내자 서류 가방의 모서리가 드러났다. 타티아나는 조심스럽게 손으로 흙을 파내고 가방의 손잡이를 잡아서 꺼냈다. 방금 가방을 꺼낸 구덩이에 사각형 자국이 석관처럼 선명하게 남은 거로 보아 오래전부터 묻혀있던 모양이다. 그녀는 가방에 달린 다이얼형 자물쇠를 풀고 열었다.

“두 분을 엿듣고 있었습니다. 떠나려 하시기에 일부러 소리를 냈죠. 그냥 부를 수도 있었지만 제 존재는 가능한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안에는 다양한 날붙이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버드나무 칼집에 꽂혀 있는 단도를 들어서 칼날을 살짝 뽑자 겉에 새겨진 물결무늬가 순간 번쩍였다. 리볼버도 총알과 함께 나란히 수납되어 있었다. 그 총을 보고 하딘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나강 M1895인가.”


“잘 아시는군요.”

타티아나는 나강 리볼버를 귓가에 대고 약실과 공이를 움직여서 제대로 움직이는지 소리로 확인했다. 특이하게 생긴 장갑 한 켤레도 있었는데 남자들은 권총에 신경이 쏠려서 거기까진 자세히 보지 않았다. 총알을 넣지 않은 채로 그녀는 권총을 들고 이리저리 쏘는 자세를 취했다.  시간 전까지 환자였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동작에 낭비가 전혀 없었고 자세는 빈틈이 없었다. 하딘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소음기를 달 수 있는 유일한 리볼버잖아. 몇 번 노획해봤어.”

 말에 호응하듯 타티아나는 소음기도 권총의 총구에 끼워서 이리저리 자세를 취해보았다. 작은 권총에는 어울리지 않는 길쭉하고 굵은 소음기가 섬뜩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몸은 괜찮아진  같고. 그걸로 어쩔 생각이야?”

빈센트가 물었다. 알면서도 던져본 질문이었다. 타티아나는 절제된 손놀림으로 어느샌가 허리에 두른 권총집에 나강 리볼버를 집어넣고 대답했다.

“대위님의 마무리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설마 했던 예상 그대로의 대답이었다. 하딘은 손을 내저었다.

“안돼. 자넨 중요 인물이야.”

“파스낙하고 결판을 낼 거라면 제가  도움이  겁니다.”

“애초에 자네 하나 때문에 우리가 이 싸움에 끼어든 거야. 그런 부담을 감수할 수는 없어. 지원군이 올 때까지 얌전히 있도록!”


타티아나가 그 말을 듣고는 안색이 바뀌었다. 심각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어차피 지원군은 못 옵니다.”

“뭐?”


“지원군에 대해서 제게 더 일찍 말씀하셨어야죠. 지금이라도 오지 말라고 알려야 합니다.”

“왜지? 그게 우리의 유일한 희망인데.”


하딘은 흥분할 뻔했지만 심상치 않다는 기색을 느끼고 귀를 기울였다.

“파스낙을 멈추지 못하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길 거라고 말씀드린  기억하십니까?”


“알아. 그놈 때문에 도시가 병들어가고 있잖아.”


타티아나는 침을 삼키고 침착하게 말했다.

“비유한 게 아닙니다. 훨씬 더 구체적인 거예요.”










캘러헬은 레스 일행을 좁은 골목으로 안내했다. 그가 건물 벽에 기대어져 있던 커다란 널빤지를 치우자 감춰진 문이 나타났다. 용접된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쇠문이었다. 손잡이나 자물쇠 없이 작은 구멍만 하나 있는데 페어리가 거기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미닫이 식으로 알아서 열렸다.


“들어와도 괜찮아. 지금은 부비트랩 안 깔았으니까.”

원래 거기까진 생각 못 했는데 일행들은 그 말을 듣고 긴장했다. 캘러헬은 그들이 안으로 들어오자 널빤지로 바깥을 가리고 문을 잠갔다.


전구에 불이 들어오자 일행들은 여기가 가정집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한쪽에는 총알 조립용 작업대 위에 공구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고 근처의 길쭉한 선반에는 무언가가 들어있는 유리병이 그득했다. 소파나 탁자, 화로 같은 생활용 가구는 물론 반쯤 분해돼서 조립을 기다리는 모터바이크까지 있었는데도 내부는 공간이 넘쳐났다. 원래는 공방 비슷한 곳 같았다.

레스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탁자 위에 엎드렸다. 캘러헬은 그의 피로 물든 셔츠를 단숨에 찢어버리고 총에 맞은 곳을 살폈다. 페어리는 어느 틈에 나이프를 찾아와서 탁자로 날아와 가져가라는  끙끙거리며 위로 들어 올렸다. 뭐라도 하고 싶었던 여자들은 근처에 계속 기웃거렸다. 샤카자이아가 조심히 물었다.


“많이 심각한가요?”

“광배근에 박혀 있는 총알이 하나. 허벅지에도 하나. 견갑거근에도 하나. 오른쪽 팔하고 손은 복합골절. 그런 상태로 더러운 호숫물에 몸을 풍덩 담갔다가 또 싸웠지. 아, 심장도 한  멈췄었고. 까먹을 뻔했네.”

캘러헬이 손짓을  때마다 페어리가 부지런히 날아다니며 그에게 필요한 도구를 날라주었다. 그가 소독액으로 적신 솜을 레스의 몸에 문지르자 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아직도 그가 의식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캘러헬은 놀랬다. 그가 레스에게 물었다.

“마취제는 종류별로 다 있어. 아편, 모르핀, 코카인. 어떤  좋아?”

레스가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부 싫으니까 깨물 것이나 줘요.”

근현대 시기의 의학 수준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미개하다고 불러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갈 길에 멀어서 마취할 때 부작용을 감수하고 마약 물질을  것 그대로 썼다. 아자리는 자신이 갖고 있던 손수건을 그의 입에 물려주었다. 캘러헬은 성냥불로 나이프를 달궜다.

“샤카자이아는  친구 좀 단단히 잡아줘. 총알이 동맥 건너편에 박혀서 골치 아파졌어. 아자리아 씨는 저기 냉장고에서 수혈용 혈액 꺼내줘. 커다란 금속 상자 보이지?”


아자리는 깜짝 놀랐다.


“냉장고가 있어요?”


“혈액형은 종류별로 있으니까 서둘러.”

기계식 냉장기술은 18세기 중반부터 시도되고 있었다. 제대로 된 가정용 기계 냉장고는 1911년에 본격적으로 상용화됐다. 캘러헬의 집에 있던 것은 암모니아를 이용한 후기형 흡수식 냉장고였다. 그녀가 냉장고 문을 열면서 얼굴에 닿는 냉기에 감탄하고 있자 보고 있던 레스는 손수건을 퉤 뱉고 재촉했다.


“뭘 신기해하고 있어 마녀 주제에.”

“그러고 보니 혈액형이 뭐예요 레스?”


“나도 모르는데.”

“뭣?”

캘러헬의 입에서 단말마가 나왔다.

“난 현대식 병원에 가본 적 없어. 수혈받은 적도 없고.”

얼마나 심각한 얘기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레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말했다. 일행들은 그가 중환자라는 것도 잠깐 까먹었다. 캘러헬은 그답지 않게 잠깐 정색하다가 잽싸게 레스의 입에 다시 손수건을 물렸다. 샤카자이아도 허겁지겁 움직였다. 캘러헬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총알부터 뽑자고.”


가장 피비린내 나는 일은 짧고 깔끔하게 끝났다. 칼이 닿을 때마다 레스는 눈을 질끈 감고 신음을 조금 질렀을 뿐 날뛰지는 않았다. 살에서 나온 총알이 알루미늄 접시 속으로 들어가자 금속음이 또렷하게 울렸다. 샤카자이아가 안에 있는 총알을 세어보고는 물었다.

“캘러헬 씨. 총알이 4개네요? 아까 3개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하나 더 있었어. 예전에 맞았던  아직도 있더군.”

일행들 모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페어리도 물론이다. 살을 쨌던 곳은 모두 페어리가 마법으로 바로바로 메꿔주었다. 캘러헬이 자신의 소매를 걷었다.

“다행히 난 누구한테나 수혈할 수 있는 RH- O형이지. 그래도 원래는 이러면  되지만 다른 방법이 없군.”


그들은 레스를 소파로 옮겼다. 캘러헬은 자신의 팔에 호스가 달린 주삿바늘을 꽂고 반대편도 레스의 팔에 꽂아서 연결했다. 그리고 팔꿈치를 세웠다. 다른 쪽 손으로 자기 얼굴을 쓸어내리며 캘러헬이 여자들에게 말했다.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이는군. 눈치 볼  없어.”

켈러헬의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달려오는 자동차를 발길질로 부쉈을 때도 지친 티가  보였는데. 샤카자이아가 눈짓으로 자신의 차례를 양보하자 아자리가 목을 가다듬고 먼저 운을 띄웠다.

“당신 인간이에요?”

캘러헬은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고 머리를 긁으며 백발을 흐트러트렸다.

“종으로 분류하면 나는 인간이야. 하지만 그런 게 궁금한 건 아닐 테지. 나도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어.”

말하면서 그가 자신의 어깨에 앉아있는 페어리를 힐끔 보았다. 샤카자이아가 이어서 물었다.


“강화 인간은  번이나 만났고 싸워도 봤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유난히 특이해요. 같은 질문이라 짜증 나겠지만 대체 정체가 뭔가요?”

페어리가 뭐라 적힌 푯말을 번쩍 들어서 그들에게 보였다. 아자리는 소리 내서 읽었다가 목소리가 뒤집혔다.

“최초의 카우보이?!”

“아니. 그런 거 아냐. 첫 번째 세대에 들어갈 뿐이지 내가 최초는 아냐.”


캘러헬이 둘러대는 듯한 투로 급하게 말하고 페어리가 들고 있는 푯말을 뺏어서 휙 던졌다. 누워있던 레스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첫 번째 세대라니. 대체 당신 몇 살이야…?”

“까먹었어. 돌연변이가 되기 전에 갖고 있던 기억이 희미하거든. 리볼버가 개발되기 전부터 사냥꾼으로 살았던 건 확실해.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니던 세대 중에선 마지막이었을 거야.”


아자리가 이마에 손을 대면서 중얼거렸다.


“그럼 아무리 적게 쳐줘도 60살은 넘었다는 건데.”


겉으로 보이는 캘러헬의 나이는 레스하고 비슷하거나 조금 많은 수준이었다. 레스가 머리를 조금 움직여서 자기 팔에 꽂힌 주삿바늘을 힐끔 보았다.


“이런 말 하긴 미안한데 당신 피가 내 몸에 들어가도 괜찮은 거요?”

“조금이라면 괜찮아. 목숨 걸고 강화 인간이 되는 도박을 하고 싶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그건 싫어.”


아자리가 한숨을 쉬어서 분위기를 환기하고 다음 질문을 던졌다. 무슨 생각으로 쉰 한숨인지는 그녀도 몰랐다.


“일단 도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당신과 친구분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끝장났겠죠. 하지만 이건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네요.”


“뭔데?”

“당신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요. 저희가 보잘것없어 보일 정도로 강하신데 왜 여태껏 숨어 있었나요? 솔직히  분이라면 파스낙을 상대로도 이길  같은데.”

샤카자이아가 고개를 돌려서 아자리를 바라보았다. 캘러헬은 샤카자이아의 궁금증을 바로 짐작하고 대신 설명했다.

“연극 용어야. 실력 없는 극작가를 비웃는 용어인데 엉터리 각본에서는 갈등구조를 마지막에 나타나는 초월자가 얼렁뚱땅 한꺼번에 해결해주거든. 초월자 역을 맡은 사람은 보통 기계 장치에 매달려서 위에서부터 등장하지.”


아자리는 그의 친절한 설명 때문에 더 속이 쓰렸다.


“물론 사정이 있었다는  알아요. 너무 답답해서 그만….”


“자기 집이 극단 후원한다고 은근슬쩍 과시하는 거야?”


“넌 입  다물어!”

아자리는 갑자기 끼어든 레스에게 소리를 버럭 지르고 눈가를 감싸 쥐었다. 캘러헬은 깔깔 웃었고 페어리는 키득거렸다. 캘러헬이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당연한 생각이야.”


“악의는 없었어요.”

그녀가 사과하자 샤카자이아도 엉겁결에 같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소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캘러헬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파스낙은 갱단, 경찰, 상류층에 이르기까지 온갖 곳에 손을 뻗쳤지. 핑커튼에도 통첩이 오더군. ‘은하고 납 중에서 골라라. 원하는 대로 받게 될 것이다.’”

 아니면 총알. 아자리가 말했다.

“어떻게 했나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난 가장 단순한 방법을 골랐어. 아는 사람들을 모아서 쳐들어갔지. 결과는 지금 내 꼴을 보면  거고.”


이번에는 샤카자이아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죠?”

“아까 쫓겼을 때 따라오던 놈들 기억하니?”

아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는 얼굴들이었어요. 전차에 탔을 때도 나타났었죠.”


“전부 내가 가르친 제자들이야. 사람 관계란 얄궂어.”

페어리는 레스가 머리를 베고 있는 소파의 팔걸이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담백한 표정을 지으며 담배 피우는 시늉으로 한숨을 연기 내뿜듯 길게 쉬었다. 레스가 끼어들었다.

“배신당한 건가.”


“난 자만에 빠져 있었지.  흥분했었고. 함정 정도는 눈치채야 했는데.”


“저도 겪어봐서 아는데 당할 때는 정말 어쩔 수가 없어요.”

캘러헬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