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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화 〉[3권] 102회 - 속죄와 위선 (102/188)



〈 102화 〉[3권] 102회 - 속죄와 위선

“자기 앞가림은 할 수 있으리라 믿지만. 감정에 그르친 판단은 하지 마시오.”


하딘이 덤덤히 말했다. 타티아나도 차분하게 대답했다.


“필요한 일만 하겠습니다.”

“필요한 일만 하기는 개뿔이!”

바닥에 얼굴이 달라붙은 카르델이 엄살을 피우자 타티아나는 그를 놔줬다. 그리고 무뚝뚝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카르델을 일으켜주고는 타티아나는 시침  떼고 자기 자리로 향했다. 상황이 정리됐을 때 아비투스가 다시 손을 들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보급행렬이 기병대와 함께 오지 않습니까? 언급을 안 하시는군요.”


하딘과 타티아나는 결국 올 것이 왔다고 말하는 듯이 입가를 긴장으로 옴죽거렸다. 하딘과 타티아나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이내 타티아나가 입을 열었다.

“귀를 열어주세요. 제가 목숨 걸고 전향하면서 알려주고 싶었던 걸 말하겠습니다.”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거대한 무리가 싸늘한 평야를 건너고 있었다. 국경에 묶여있던 행렬들이 여태껏 낭비했던 시간을 메우려 밤을 새워서 움직였다. 행렬 옆으로는 군모를 쓰고 말을  병사들이 줄줄이 등불을 들고 길을 밝혀줬다.

행렬로부터 떨어진 앞쪽에 장교와 수행원들이 먼저 가고 있었다. 황혼을 앞에 두고 별하고 달마저 희미해져서 어둠이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노련한 기병대원들은 저 깜깜한 어둠 너머로도 도시의 윤곽을 알아보고 있었다. 기병대 장교가 말했다.


“다 왔군. 사람들한테 조금만 더 힘내라고 전해라.”


 말을 들은 병사는 들고 있는 등불을 뒤편으로 향한 다음 손으로 불빛을 가렸다가 치우기를 반복했다. 뒤쪽에 있던 병사도 그걸 보고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등불을 흔들었다. 다시  길을 서두르던 장교와 병사들은 저편으로 나타난 불빛을 보았다.  앞에 있는 누군가가 이쪽의 불을 보고 방금 킨 거였다.

“확인해라.”

명령을 받은 병사가 쌍안경을 들고 눈살을 찌푸리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어두운 데다가 거리도 멉니다.”


장교가 선도자 역할을 맡은 병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먼저 가서 살펴보도록. 우리를 맞이하러 나온 사람인지 알아봐라.”


병사는 속도를 높이고 일행에게서 떨어졌다. 도시 쪽에서 보이는 깨알 같았던 불빛이 엄지손톱만 해지자 그는 등불에 불을 붙이고 그 앞에 손을 흔들어서 깜빡거리게 했다. 도시 쪽에서도 반응이 있기는 했으나 불빛은 아무런 의미 없이 흔들리고만 있었다. 쌍안경을 꺼내서 보니 저 앞에 있는 사람들은 걸치고 있는 군복 외투에 하얀 띠를 두르고 있었다. 병사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일행에게 돌아갔다. 장교는 보고를 들었다.


“의무병들이 앞에 있습니다. 하얀 띠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인원은 둘입니다.”


“왜 의무병이 여기에 있지?”


“등불로 야간 신호랑 모스 부호까지 전해봤으나 반응만 있을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쪽을 무시한  아니고 방법을 모르는 거 같습니다.”

다들 수상쩍은 징조를 느꼈다. 장교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잠깐 생각에 잠기다가 입을 열었다.

“계속 움직인다. 자네, 자네, 그리고 자네는 먼저 가서 직접 만나보게.”


지시를 받은 병사들이 짧게 대답하면서 하얀 입김을 피워 올렸다. 그들은 서둘러서 달렸다. 지친 몸들이었으나 밤을  번 새운 정도로는 그들을 느리게 만들 수 없었다. 개척된 땅에 세워진 신도시가 순식간에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소리를 목청껏 지르면 닿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의무병들이 뭐라고 외치면서 다급하게 등불을 흔들었다. 병사들도 그것을 보기는 했으나 일단 만나보고 얘기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묵묵히 달렸다.

갑자기 그들이 타고 있는 군마가 멋대로 발을 멈추고 울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멈췄다.

“뭐야? 요 녀석들 왜 이러지?”


“말들이 겁에 질렸어. 근방에 맹수라도 있는 건가?”


“도시 근처잖아. 그런 거 이미 씨가 말랐다고.”

그들은 쌍안경을 꺼냈다. 이제는 가까워서 의무병들의 표정과 몸짓으로부터 저들이 무슨 의도로 계속 소리를 지르고 불을 흔들었는지 그들은 이해했다.

“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거 같아.”

“물자가 없어서 급한 건 저쪽일 텐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사님? 일단 돌아가서 장군님께 말씀드릴까요? 말들이 아직도 겁에 질려서 꿈쩍도 안 하는군요.”


가장 선임 병사는 눈을 껌뻑이다가 단번에 대답했다. 받은 명령에만 신경 쓴다. 어차피 저쪽까지 코앞이니 그냥 걸어가도 된다. 그래서 그들은 말을 세워두고 걸었다. 의무병들은  모습을 보고 더욱 필사적으로 와서는 안 된다고 외쳤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땅이 떨렸다. 진동은 미미했다.

“지진이다.”


“말들이 겁먹은 이유가 이거였나.”

“그런데 지진치고는 뭔가 이상한데.”


그들은 발을 멈추고 말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지진보다는 마치…. 굴이 무너질  나는 충격 같아. 난 광산촌 출신이라서 알아.”

진동이 더욱 심해졌다. 발바닥만 살짝 간지럽히던 지진은 어느새 그들의 무릎까지 흔들고 있었다. 그들 모두 오싹한 감각에 휩싸여 본능적으로 타고 왔던 말에게 돌아갔다. 땅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균열 사이의 어둠은 밤하늘보다 짙다. 암벽 층이 갈라지는 소리가 저 뒤에 있는 행렬은 물론 도시까지 덮쳤다. 땅이 무너진다. 그들은 삼켜졌다. 병사들이 놓친 등불이 균열 사이의 바닥없는 아득한 어둠 속으로 꼬리를 끌며 떨어졌다.







타티아나는 하던 설명을 이었다.


“도시와 공장의 규모가 커지면 소모되는 지하수도 늘어나고 폐수들은 하수처리장을 통해 외딴곳으로 보내지죠.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인 땅으로는 빗물이 스며들지 못하고요. 그 탓에 이곳을 받치는 땅은 속이 스펀지처럼 됐죠. 리차트라는 이점에 주목해서 여기에 온 겁니다.”


윈프리가 손을 들고 말했다.

“혹시 최근에 일어나던 싱크홀도 관계있는 건가?”

“리차트라가 미리 준비해둔 장치가 작동되면 그곳 일대의 땅이 꺼집니다. 장치라는 건 땅속에 깊이 박을 수 있는 마법 폭탄이라더군요. 그걸로 누군가가 죽는다면 운이 없었을 뿐이죠. 목격자도 없고. 증거도 없습니다.”


피카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이 싱크홀을 일으킬  있는 곳이 얼마나 됩니까.”


“가능한 장소로만 지차면 온 도시를 포함한 주변 일대.”


실감이  나는 소식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피카니가 놀라서 입을 벌린 채 굳었다가 언성을 조금 높였다.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온 도시?! 땅을 무너뜨리는  말처럼 쉬울 리가 없잖아!”


“모래로 만든 성이 무너뜨리기 힘들던가요?”


타티아나가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했으나 아직도 그녀의 말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하딘의 눈가에 낀 기미가 순식간에 넓어졌다. 그가 물었다.


“왜 여태껏 미리 말하지 않았나?”

“말해도 믿지 않을 테니까요. 여러분들마저 반응이 이렇지 않습니까. 저주가 절 죽이기 전에 알리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으나 사방에 녀석의 귀가 있으니 신중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을 헛소리로 무시하거나 정보가 새버렸다간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레오포드가 끼어들었다.

“핑커튼으로 왔을 때 우리한테라도 말해주지 그랬나.”


타티아나가 그쪽을 바라보고 대꾸했다.


“탐정님에게는 말씀드리고 싶었으나 제가 습격을 받고 중태에 빠진 탓에 기회를 놓쳤습니다. 제가 주문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이 사실을 알리고 직접 막고 싶었습니다.”


레오포드는 밀짚으로 만든 중절모를 벗고 장발을 흐트러트렸다. 만감이 가득한 얼굴로 그는 입에 성냥을 담배 대신 끼우고 이빨 끝으로 질겅거렸다. 윈프리는 한숨을 쉬었다. 침묵이 흐르는 와중에 아비투스가 입을 열었다.


“이론으로는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놈이 마음먹으면  도시가 무너진다니. 일이 너무 커져서 실감이 안 나.”

“온 도시가 붕괴한다는 건 과장된 표현입니다. 다만 리차트라가 궁지에 몰려서 모든 장치를 작동시키면 연쇄반응으로 그에 못지않은 피해가 일어날 겁니다.”

하딘이 다시 말을 꺼냈다.

“녀석이 싱크홀을 일으킬만한 장소를 특정할 수 있겠나?”


윈프리가 재빨리 안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고 바닥에 펼쳤다. 타티아나가 연필을 받고 지도로 다가가자 일행은 지도를 감싸듯이 모였다. 지도에 원을 여럿 그리면서 그녀가 말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녀석은 도시에서 중요한 곳부터 수작을 부려놨습니다. 지금은  늘어났을 겁니다. 도시가 한순간에 붕괴하는 극적인 장면은 나오지 않더라도 교통과 전기, 그리고 수도를 한순간에 모조리 끊어버릴 수 있죠.”

그때 어딘가로부터 거대한 소리가 그들에게까지 울려 퍼졌다. 천재지변이 아니면 나올 수가 없는 소리의 폭풍에 그들이 숨어있는 건물의 유리창까지 흔들렸다. 소란이 가라앉으려면 한참이 걸렸다. 타티아나가 새침한 목소리로 정적을 깼다.

“하나 지워야겠군요.”


그리 말하면서 타티아나는 자신이 방금 그렸던 원  하나에 X자 표시를 했다. 국경 방향에 있는 도시의 입구였다. 창백해진 얼굴로 카르델이 말했다.

“설마 방금 그걸로 기병대랑 보급행렬이 전멸한 거야?”


대답은 하딘이 했다.

“빈센트 쪽 사람이 오지 말라고 경고했을 거다. 리차트라도 보급품을 노리고 있으니 최대효과를 노리고 무너트리진 않았을 거다. 우리로선 피해가 크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

아비투스가 말했다.


“어쨌든 이제 싸울  저희뿐이군요. 기병대하고 보급행렬은 돌아서 오고 싶어도 어디가 안전한지 알 수가 없을 테니까.”


여태껏 잠자코 있던 히콕이 오랜만에 말을 꺼냈다.

“그런데 애초에 그놈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한 거야?”


“우리의 제국은 이것으로 완성된다. 녀석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타티아나가 이어서 말했다.

“파스낙 리차트라는 누구도 믿지 않는 사내입니다. 득실관계 정도로는 밑의 사람들에게 진정한 충성을 받을 수 없다는  놈도 알고 있습니다. 왕관은 군사로 지켜야 하듯이 뚜렷하고 확실한 수단으로 무장하길 원했죠. 그리고 이 도시에서 답을 찾은 겁니다.”

“돌았군.”

타티아나는 속으로부터 무언가가 울컥하고 올라와서 숨을 삼키고 심호흡을 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이제 긴 말을 할거라는 낌새를 느끼고 가만히 기다렸다. 타티아나는 눈물 없이 우는 표정으로 자신의 양손을 들어 올렸다.


“제 손은 더럽습니다. 오랜 세월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면서 살아왔고 파스낙 밑에서 때로는 그의 사상에 감화된 적도 있었죠. 배신하고 이쪽으로 온 절 믿지 못한다는 거 이해합니다. 전 마족하고 인간 사이의 분쟁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전쟁은 비극이지만  하나가 노력한다고 뭐가 바뀌겠냐며 외면했죠. 어차피 삶은 날 위해서 쓰는  전부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고 울분을 터트렸다.


“그런데 녀석은 자기가 투자한 건설 회사의 채권 때문에 도시 한 곳을 부수고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지금 같은 과도기에 건설업은 끝이 없는 금광이죠. 싱크홀이 얼마나 일어나던 인간들은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 다시 모래성을 지을 겁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파스낙은 피로 물든 악순환을 조종하면서 막대한 이득도  생각입니다.”


레오포드가 물고 있던 성냥을 손으로 집으면서 말했다.


“우리 부족은 와시추들에게  성스러운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그토록 경고했는데, 그들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우리 부족을 보호구역에 가둬버렸지.  죄악을 또 다른 악인이 이용하다니.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게 이런 건가.”

“저도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눈을 감고 그 제국의 일부가  수 있었죠. 하지만  하나가 마음을 돌리면 이 역겨운 현실이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몇  전에서야 위선인 걸 알면서도 결심했죠. 파스낙이 제게 낙원을 만들어줘도 어차피 전 여전히 노예일 테니까요. 저의 더러워진 손을 씻고 싶은  아닙니다. 구원하고 면죄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원하는 건 오직 그놈입니다. 할 말은… 끝났습니다.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여태껏 속으로 얼마나 되새겼을까. 얼마나 털어놓고 싶었을까.  심정만 헤아려질  아무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 조용히 있을 시간은 충분하다 싶어서 하딘은 손가락을 튀겨 주의를 끌었다.


“일단은 회의 종료. 이제  좀 붙이시오.”


히콕과 윈프리, 레오포드는 서로 모여서 쑥덕거리며 다른 곳으로 갔고 군인들은 타티아나에게 모였다. 피카니가 그녀에게 말했다.


“자유의 몸이 된다면 직접 막을 생각이라고 하셨죠.”

“네.”

타티아나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파스낙을 맞상대할 자신이 있습니까?”

“이 중에서  말고 놈을 제대로 상대할 사람은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당신 강화되어 있습니까? 히콕처럼?”

“그건 아닙니다.”


고개를 저으면서 그녀가 답했다.

“그럼 당신 종족들은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까?”


“반사신경이 다소 빠를 뿐 초인적인 힘은 없습니다. 하지만 공작원 시절부터 애용해온 특수도구들과 저만의 기술이 있습니다.”


대화가 점점 점점 피카니와 타티아나 사이의 기 싸움이 되고 있었다. 하딘이 끼어들었다.

“거기까지. 아비투스. 타티아나 양을 잘 곳으로 모셔드려라. 많이 피곤하실 거다.”


아비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타티아나의 팔을 붙잡고 부드럽게 끌었다. 이제 자리에는 하딘과 카르델, 피카니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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