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3권] 115회 - 잘 가거라
“난 되게 진지하다만.”
레스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신부도 고해성사실에서 뛰쳐나가겠다! 아아아악! 하느님!”
파스낙은 손으로 감싼 머리를 다리의 난간에 처박고 고함을 질렀다. 기분 탓인지 물고기들도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눈으로 이쪽을 보는 거 같았다. 레스는 아름다운 꽃밭으로 눈을 돌리고 시간을 보내다가 적당히 때가 되었다 싶어서 말을 꺼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그는 난간에 양손과 턱을 대고 기어가는 투로 답했다.
“장소를 바꾸자. 여긴 이제 지겨워.”
둘은 걸었다. 파스낙은 레스를 시가지로 안내했다. 벽돌보다는 나무가 많은 도시였다. 거리의 가게들은 모두 문을 열었으나 안에는 종업원도 손님도 없었다. 그들은 강가가 보이지 않는 노천카페에서 자리를 잡았다. 가게 안으로 들어간 파스낙은 커피가 들어있는 양철 주전자를 들고 돌아왔다. 레스의 찻잔에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채워주며 그가 물었다.
“아까 네가 말했던 마녀와 총잡이에 대해서 말해봐.”
“내 이야기는 더 못 들어주겠다더니?”
“갑자기 너무 신경 쓰여서 그래. 마녀와 총잡이. 이 중에서 총잡이는 너의 스승을 칭하는 거겠지만 마녀는 누구야?”
레스는 감정을 굳히는 티를 내면서까지 태연한 척을 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물론 파스낙은 이 화제가 상대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그냥 궁금해서. 이름이라도 말해봐. 혹시 알아. 마녀라면 내가 이쪽 업계에서 발이 넓으니까 어쩌다 소식을 들은 적이 있을지도 모르고.”
“!”
레스의 동공이 커졌다. 그는 목깃을 가다듬고 뺨을 깨물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알미트라. 그녀의 이름은 알미트라야. 하얀 머리칼에 보라색 눈. 피부도 희어. 예언자다.”
파스낙은 끝까지 듣고 의문과 관심이 섞인 모호한 표정이 됐다.
“비슷한 사람도 없군. 그런데 예언자? 점쟁이가 아니라 예언자라고? 확실해?”
“그게 어떤 건지는 나도 알 만큼은 알고 있어.”
레스는 의자의 등받이에 체중을 싣고 인상을 썼다. 파스낙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마지막 질문이다. 알미트라가 너에게 내려준 계시가 있나?”
“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용사가 될 거라고 하더군.”
레스는 찻잔을 들고 입가로 옮겼다. 파스낙은 상대가 그만 움직일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렸다. 그가 찻잔을 내려놓자 파스낙이 물었다.
“그게 다야?”
“물론 실제로는 서로 주고받은 얘기가 많았는데 핵심만 간추리면 이게 다야. 솔직히 말해서 이게 진짜 계시인지 아니면 날 위해서 꾸민 말인지는 나도 몰라. 뭐가 진짜든 뭐가 문제겠어. 정해진 운명이란 없다.”
“아까 저 다리 위에서는 운명을 느꼈다고 하지 않았던가?”
레스는 찻숟가락을 잔에 꽂고 의미 없이 휘적거리다가 상대에게 눈을 희번덕였다.
“아까 마지막 질문이라고 했었지?”
“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파스낙은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의자에 기대고 다리를 꼬아 깍지낀 양손을 허벅지에 올렸다.
“미안. 마침내 내 차례군. 뭐가 알고 싶어?”
“아자리의 부모님들은 어디 계시지?”
파스낙은 깍지낀 손을 까닥까닥 움직이다가 자기 앞에 놓인 찻잔을 뒤집어서 테이블보에 커피를 쏟았다. 하얀 테이블보에 스며든 커피 얼룩은 순식간에 세계지도로 변했다. 엄밀히 말하면 섬은 제외하고 대륙만 그려져 있었으니 완전한 세계지도는 아니었다. 파스낙은 설탕 종지에서 설탕을 한 자밤 집어서 커피 얼룩 위에 뿌렸다.
“이 지도를 기준으로 너희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중이지. 광활한 황무지를 한참 건너면 너희들의 목적지인 마계가 나온다.”
“그건 나도 알아.”
파스낙은 설탕으로 커피 얼룩 위에 국경선을 그렸다.
“마계는 네 국가의 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수십 가지 소국들이 그 틈새에 잡초처럼 피어있지. 너희가 황무지를 다 건널 즈음에는 갈림길이 나올 거다. 욜스카와 셀라렐. 연방을 지탱하는 두 대국이다. 내가 추천하는 방향은 털북숭이들의 나라로 가는 거다.”
“욜스카. 수인들의 고향.”
레스는 자연스럽게 단테를 떠올렸다. 파스낙은 손가락에 묻은 설탕을 쪽 빨고 말을 이었다.
“아자리아의 부모는 살아있어. 하지만 행방은? 글쎄. 아무리 나 정도 사람이라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반란파는 만만하지 않아. 그들은 중요한 수감자들을 한 곳에 묶어두지 않고 계속 옮기고 있어. 어디에서 어디로 옮기고 주기는 어떻게 되는지 물론 나는 모르지.”
“그럼 왜 욜스카를 추천했지?”
“마계에서 가장 감시가 엄중하기로 유명한 감옥이 3개 있다. 그중에 2개가 욜스카에 있어. 또 반란파의 인맥 상당수가 셀라렐보다는 욜스카에 뻗어있으니까 정보를 얻으려면 그쪽부터 시작하는 게 편할 거다.”
“네 말에 거짓이 없다는 근거를 댈 수 있나?”
“날 잡아먹을 눈으로 바라보던 고양이 알지? 그 애한테 물어봐.”
이 정도면 꽤 믿을만하다고 레스는 판단했다. 애초에 눈썰미가 예리하다고 자부하는 레스도 파스낙이 자신을 속이려 드는 낌새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방금 것은 절차적인 질문이었다. 레스는 소매를 걷고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었다.
“반란파에 대해서 말해봐.”
“귀족들은 지역 불문하고 직계 혈통과 방계 혈통끼리 싸운다는 거 알지?”
“대충은.”
“마족 연합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블러디아 제국은 이름 그대로 블러디아 가문이 지배하고 있다. 방계 가문으로는 왈라카이, 체레토아, 레스니크, 글루카벨….”
길어질 거 같아서 레스는 도중에 말을 잘랐다.
“하여튼 엄청 많다는 거지?”
“그리고 이 안에 라프라스 가문도 들어있지.”
“뭐? 뭐? 뭐?!”
레스는 호흡도 안 고르고 외치느라 침이 기도로 들어갔다.
“아자리아의 아버지가 당주라고 생각했나? 그 양반은 호적 파고 들어온 사람이지 가문 내에서 특별한 무언가는 안돼. 예전까지는 그랬지.”
“요지가 뭐야?”
파스낙은 우아하게 손짓했다.
“이름 뒤에 라프라스가 붙는다고 무조건 같은 편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거다. 아자리아의 가족은 마계만이 아니라 가문 안에서도 위치가 애매해.”
한참 생각을 곱씹다가 레스는 안도의 숨을 길게 쉬었다.
“얼마나 대단한 사실인가 했는데, 결론은 아무나 믿으면 안 된다는 거잖아. 그걸 누가 몰라.”
“과연 그렇게 간단할까?”
파스낙은 평소답지 않게 아주 진지한 투였다. 레스도 믿기 어려웠는데 이쪽을 진심으로 걱정해서 건네는 말로 느껴졌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인류 제국도 나름의 꿍꿍이가 있다. 피카니 홀리데이도 어떤 형태로든 위기가 올 거다. 이건 그놈 사정이니까 넘어가고. 슬슬 3차 갈까?”
파스낙은 대뜸 레스의 찻잔을 빼앗아버리고는 커피를 벌컥 들이켜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 일어나면서 레스는 꿍얼거렸다.
“현실도 아닌 곳에서 많이 걸어 다니네.”
파스낙은 상대가 군말 안 하고 자연스레 자신에게 맞춰주는 모습을 보고 매주 흡족해했다. 둘은 다시 걸었다. 바지에 주머니를 넣은 채 상대의 등을 바라보며 레스가 말을 걸었다.
“네 가문은 어떻게 됐지?”
“지금 나한테 관심 가져준 거야? 내가 귀족처럼 보이나?”
뜬금없이 환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면서 반응하자 레스는 당황했다. 떫은 얼굴로 그가 답했다.
“그냥 느낌이 그래서.”
“뭐. 예전에 멸족했어.”
지나가다가 던지는 투로 파스낙이 말했다.
“어쩌다가?”
“잘 기억 안 나. 어렸을 때 일이거든. 흔한 사연이었겠지. 누구 심기를 거슬렸다던가.”
“확실해? 살아남은 가족이나 친척도 전혀 없어?”
“으흠. 틀림없지.”
레스는 뜸을 들이고 무겁게 말했다.
“힘든 시절을 보냈겠군.”
“그다지. 밀고하고 챙긴 돈이 두둑했거든.”
파스낙의 말투는 방금과 변함없었다. 레스는 그에게 다른 질문을 던질 마음이 싹 사라졌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간판도 유리창도 없는 건물 앞에서 멈췄다. 파스낙이 옆으로 길을 비켜주면서 정중히 문을 열자 레스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어제 들어갔던 파스낙의 영화관이었다. 어제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자세한 곳까지 기억할 틈이 없었지만 틀림없었다. 레스는 기억을 따라 복도를 걸어 상영관을 찾아갔다. 상영관 바로 앞에서 파스낙이 종업원처럼 다시 정중히 문을 열어주었고 두 남자는 어제 대화를 나눈 곳과 같은 자리로 향했다. 파스낙이 늙은이처럼 골골거리며 레스의 옆에 앉고 나서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상대가 여유만 부리기에 레스는 재촉했다.
“굳이 여기로 데려온 이유는 뭐야?”
파스낙이 손뼉을 치자 끼리리릭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가 나면서 장막에 화면이 나타났다. 어제 봤던 영화의 초반부가 지나가고 있었다.
“마왕과 용사에 대해 말하겠다. 좋든 싫든 너희들이 알아둘 필요가 있어.”
뜬금없는 화제였지만 동시에 무시하고 넘겨버릴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레스는 눈짓으로 계속 말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일단 물어보는 건데 평행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나?”
“뭐야 그게?”
레스는 단어 자체도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
“좋아. 그럼 설명이 장황해지는 내용은 넘어가고 필수적인 부분만 짚어주지. 마왕의 힘은 혈통을 따라 계승된다. 하지만 용사의 힘은 계승에 일관성이 없어. 때로는 혈통을 따라 이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혈통하고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 용사로 각성하기도 한다.”
레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 알았어. 그리고?”
“때로는 마왕이 이기고 때로는 용사가 이겼지.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기년법 이전의 고대로부터 두 존재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면서 계속 대립해왔어. 어떤 마왕과 어떤 용사가 언제 어떻게 이겼는지는 지배자들의 입맛에 맞춰서 기록이 바뀌었고. 제대로 따라오고 있나?”
영사막에서는 한창 용사와 마왕이 싸우는 중이다. 레스는 일단 끄덕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2세기 전에 용사 아서 아카수스가 마왕 차카드 비온 블러디아를 상대로 이겼지. 아서 아카수스는 여정으로부터 돌아와서 왕관을 썼고 그의 제국은 지금까지 인류 연방의 머리와 척추를 맡고 있지. 분명 지금쯤 이런 생각을 하겠지. 왜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하지? 반전은 언제 나오는데?”
“난 그냥 듣는 중이야.”
“흐음.”
파스낙은 턱을 쓰다듬으며 뜸을 들였다. 영화에서는 피카니가 등장하는 중이었다. 그가 짓궂게 입가를 씰룩이며 단숨에 말했다.
“사실 반전은 없어. 동화적인 마법과 모험의 시대는 정말로 있었지만 알다시피 그건 예전 이야기지. 우리 시대에 진짜 마왕과 용사는 존재하지 않아. 여기까지 듣고 무슨 궁금증이 생겼지 사쿠라비? 핵심만 말하라는 재촉 말고 질문을 해봐. 난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어떻게 고대로부터 이어지던 순환이 갑자기 끊어진 거야?”
레스는 바로 답했다. 파스낙은 뺨을 살짝 깨물고 고개를 까딱이며 그의 반응에 만족했다.
“어떻게? 그건 나도 몰라. 추측만 무성하지. 누가? 그리고 왜? 그것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딱 하나 확실한 게 있는데 과거에 끊어진 이 순환을 되살리고 싶은 사람이 아주 많다는 거지.”
한참을 기다려도 파스낙은 말을 더 잇지 않았다. 할 말을 마친 건지 그의 반응을 기다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레스는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한 손으로 감싸 쥐다가 운을 떼었다.
“확실히 신경은 쓰이지만 나하고 내 친구들에게 그따위 장황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아. 구체적으로 쓸모 있는 정보는 없어?”
“말만 하라고.”
파스낙이 손뼉을 치자 필름이 끊어진 영사기가 세계지도를 영사막에 비췄다. 뭘 원하는지 파스낙은 이미 다 예상하고 기다리던 눈치였다. 레스는 세계지도를 보면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말했다.
“어떤 길로 가야 우리가 추적을 피하면서 목적지로 갈 수 있지?”
갑자기 영사막에 비친 세계지도 곳곳에 하얀색 점과 검은색 점이 나타났다. 그 수가 못해도 수백 개는 되어 보인다. 파스낙이 검지로 가리키면서 넌지시 말했다.
“하얀색은 인류 쪽 주둔지, 검은색은 마족 것이다. 안전한 길은 어디에도 없어. 전쟁 자체가 병신 같은 짓이기는 해도 먹어놔야 할 땅이 어디인지는 서로 다 알고 있으니까.”
“이런 씹…!”
굳이 지도 보는 기술에 능통하지 않더라도 화면에 드러난 정보는 레스의 입에서 욕설이 저절로 나오게 했다. 파스낙은 소식을 하나 덧붙였다.
“게다가 네놈들이 날 쓰러트렸으니 너희에 대한 소식이 온 사방으로 쫘악 퍼질 거다. 이제 너희들은 현상금이 마계에도 걸릴 거야. 경사일세 경사일세.”
눈가를 부여잡고 고개를 숙인 레스에게 파스낙은 능청스럽게 커다란 유리잔에 담긴 콜라를 건넸다. 두 남자는 술을 들이켜듯이 음료를 벌컥 마시고 숨을 골랐다. 입가를 주먹으로 문지르면서 레스가 물었다.
“이건 그렇다 치고. 반란파 우두머리는 누구야?”
“당연히 방계 가문 중에서 가장 센 놈이지. 들어봤자 의미 없는 정보다.”
“무슨 소리야?”
“겉으로 보이는 우두머리는 아자리도 알 수 있어. 하지만 진짜는 그림자에 숨는 법이다.”
“그럼 우리가 쳐야 할 그 진짜 우두머리에 대해서 말해.”
“그걸 알면 내가 직접 마왕이 되지 뭐하러 이러고 있겠냐?”
표정이 썩어버리는 레스의 얼굴을 보고 파스낙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히히히히. 농담이야. 난 왕관 따위는 관심 없어. 단서를 원한다면 셀라렐로 가봐.”
레스는 어금니를 깨물면서 중얼거렸다.
“셀라렐? 거기가 무슨 나라였더라…?”
“엘프와 페어리들의 나라. 극도로 폐쇄적이고. 고상 떠는 놈들 동네. 딱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정보를 많이 캐고 싶다면 욜스카로 가면 돼. 하지만 더 은밀하고 위험한 걸 알아내려면 셀라렐에서 찾아라. 구체적인 정보도 말해줄 수 있는데 그건 세월이 지나서 신선도가 떨어졌으니 넘어가지.”
파스낙은 다 마신 유리잔을 뒤로 휙 던졌다. 유리 깨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계속 대화하느라 피곤해진 레스는 유리잔을 자기 발밑에 조용히 내려놓고 쿠션에 몸을 파묻었다. 눈을 껌뻑거리면서 그가 꿍얼거렸다.
“슬슬 떠날 때가 됐나 봐.”
“흐으음.”
파스낙은 이별이 아쉽다는 듯 입술을 핥다가 생각이 떠올라 눈꺼풀이 번쩍 올라갔다.
“아아 맞아. 말하는 걸 깜빡할 뻔했네. 이건 너도 마음에 들 거야.”
“뭔데?”
뒤로 눕혔던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면서 레스는 경청한 자세를 갖추었다. 파스낙도 팔걸이에 올린 손아귀에 힘을 주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레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예전 동무들에 대한 거야. 소식이 끊어진 지는 한참 됐다만. 그중에서 지금까지도 살아있을 게 확실한 놈이 세 명 있어.”
레스는 상대를 계속 노려보다가 차분하게 물었다.
“널 포함해서 마왕이 직접 부렸다는 요원들을 말하는 거야?”
“물론 제일 강한 건 나야. 그래도 골치 아픈 놈들이라는 건 인정해야지.”
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지를 위로 세웠다.
“한 놈은 매우 이기적이다.”
이번에는 중지를 세웠다.
“한 놈은 엄청 자유분방하다.”
마지막으로 약지를 세웠다.
“그리고 한 놈은 매우 강직하며 정의롭지. 굳이 나까지 포함해서 촌스럽게 통칭하면 전 마왕의 마하라자(사천왕)라고 할 수 있겠군. 너희들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놈들하고 마주칠 확률이 필연적이다. 잘 대처해봐. 내 머리로는 절대 상상이 안 가지만 그놈들이 너희를 도와준다면 뭐든 할 수 있을걸.”
레스는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흥분했다.
“강직하며 정의롭다는 사람은 어떻게 찾으면 되지?”
“다 말하면 재미없으니까 나머지는 너희 숙제로 맡겨두지. 나도 이제 한계가 온 거 같고.”
말 끝나기 무섭게 파스낙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다시 그 자리에 나타났다. 마치 중간에 필름이 빠져버린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수명이 다 된 전구의 불빛 같기도 했다. 파스낙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헐떡이면서 레스에게 상영관의 출입구를 양손으로 정중히 가리켰다. 그 안내에 따라 레스는 일어났다. 파스낙은 절룩거리며 걷는 와중에도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레스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가 혀를 차고는 중얼거렸다. 에라 모르겠다.
파스낙은 갑자기 레스가 옆에서 어깨와 겨드랑이를 잡고 부축을 해주자 표정 없이 담백하게 코웃음을 쳤다. 둘은 상영관의 입구 앞에 다다랐다. 파스낙은 천천히 문을 열어주고 종업원처럼 깍듯한 자세로 우뚝 섰다. 문 너머의 바깥에는 오로지 하얀 공간뿐이다. 레스는 그쪽을 노려보다가 파스낙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물었다.
“마지막으로 잠깐 말 좀 나눌까? 마지막으로.”
파스낙은 웃었다. 레스는 바로 말했다.
“왜 우리를 도와주지? 나도 믿기지 않는데 아까부터 네가 친구처럼 느껴져.”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나도 몰라. 죽기 직전에 이르러서 갑자기 얼어붙은 가슴 어딘가에 숨어있던 따뜻한 마음이 다시 살아났나? 아니면 그냥 내가 실성을 했나? 일단 기분은 참 후련하군. 너무 심하게 화가 나면 웃음이 나오는 것처럼.”
“언제부터 줄곧 혼자였지?”
“아마도 가족들을 다 팔아버리고 이름을 포기했을 때부터. 그때는 잘 한 거라고 확신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다 모르겠군.”
“그럼 파스낙 리차트라는 스스로 지은 이름이었어?”
“10초 만에 지었지. 특별한 의미는 없어. 이름은 도구일 뿐이야.”
레스가 씁쓸하게 말했다.
“이름은 다른 이에게 부여받는 것이거늘….”
파스낙은 비꼬는 듯이 헛웃음을 내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래. 딱 하나 그럴싸한 이유가 있기는 하다. 너희를 돕는 이유.”
“뭐?”
“너희가 저 앞으로 나아가면서 또 어떤 깽판을 칠지 진심으로 궁금하더라고. 운이 좋다면 나도 직접 소식을 들을 수 있겠지. 충분한 답이 되었나?”
레스는 뭐라 할지 몰랐다. 적당히 시간을 두고 파스낙이 차례를 다시 받았다.
“다리 위에서 들었던 얘기나 마무리해야겠다. 무엇이 널 지탱하기에 포기를 안 하지?”
“최대한 짧게?”
“그래. 최대한 짧게.”
한참을 생각을 곱씹다가 간신히 그가 말했다.
“옴니아 무탄투르 니힐 인헤리트.”
“‘모든 것은 변하지만 진정 사라지는 것도 없다.’ 겨우 그거?”
관악기처럼 낮게 울리는 어조로 레스는 또박또박 말했다.
“싸움이란 간단한 거야. 언젠가 죽을 걸 알면서도 생존하는 거. 모든 사람은 유목민과도 같아. 자신만의 부족을 갖고 떠돌아야만 하고 방랑의 의미를 절대 이해할 수 없지.”
파스낙은 크게 숨을 들이쉬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진저리난다는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그가 말했다.
“역시 넌 맛이 갔어.”
갑자기 파스낙은 한쪽 눈썹을 까닥이면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변화는 언제나 너처럼 이상한 놈들이 일으키는 법이지.”
때가 됐다. 레스는 옷자락을 가다듬고 상대의 배웅을 받으면서 공허한 저편으로 걸어갔다. 바닥도 천장도 없는 곳이었는데 발이 닿았다. 등 뒤에서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혀갔다. 레스는 고개만 돌려서 뒤를 지켜보았다. 출구가 반쯤 닫혔을 때 파스낙이 틈새로 이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영광이었다 레스 알 하자르. 여태껏 만나본 무법자 중에서 네가 최고다.”
문이 닫혔다. 레스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