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3권] 116회 - 교수의 분노
◆
지저분한 지하실이었다. 창고로 쓰이는 곳이어서 주위에는 쓰레기와 비품이 굴러다녔다. 하딘 대위는 공책에서 만년필을 떼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럼 파스낙을 어떻게 쓰러트린 건지는 그 친구가 결국 안 알려준 건가?”
타티아나가 말했다.
“워낙 정신이 없었으니까요.”
그녀는 오른팔에 댄 석고붕대의 어깨끈을 고쳐잡았다. 근처에는 환자복 차림의 아비투스와 카르델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제일 기억에 남았던 건 왼손을 허리 높이로 올리고 좌완투수 자세를 취한 겁니다. 오른손잡이가 그러는 건 본 적이 없었는데.”
카르델이 끼어들었다.
“옛날에 유행했던 수법이야. 총알에 맞을 면적을 줄이고 몸에 박힐 총알을 팔과 어깨로 막는 거지. 결투에서 얼마나 실용적이었을지는 그 시대 사람이 아니라서 난 잘 모르겠다.”
머리에 붕대가 둘둘 감겨 있는 피카니가 말을 받았다. 그는 타티아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상대에게 압박감을 줄 수 있어서 나름의 효과는 있어. 하지만 애초에 팔뼈로는 총알을 막을 수가 없고 어깨에는 동맥이 드러나서 맞으면 위험한 건 똑같았지. 무엇보다 그 불편한 자세로도 상대를 맞출 솜씨라면 그냥 빨리 뽑는 걸 노리는 게 나아.”
피카니는 곧바로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쏘고 나서 그 녀석 왼손이 몸 반대 방향으로 뻗어있지는 않았어? 이런 식으로.”
그가 허공에 따귀를 치듯이 왼손을 잽싸게 움직였다. 타티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았지? 나도 듣고 나서야 기억났는데.”
“세상에 그걸 진짜로 했군.”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로 그는 중얼거렸다. 하딘은 만년필을 쥔 채로 이리저리 돌려대며 설명을 재촉했다.
“우리도 알 수 있게 말해봐.”
피카니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리볼버에서 총알을 빼고 레스의 모습을 재현했다. 오른손으로 총을 뽑으면서 그가 말했다.
“먼저 미리 공이를 걸어둔 총의 방아쇠를 당겨서 쏜다.”
권총을 배꼽 근처로 들면서 피카니가 방아쇠를 당기자 메마른 소리가 울렸다. 철컥.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뒤집어둔다. 그 상태에서 소지로 패닝을 한다.”
피카니는 새끼손가락으로 공이를 건드렸다. 철컥.
“그대로 약지, 중지, 검지, 엄지 순으로 차례대로 패닝으로 연사.”
철컥, 철컥, 철컥, 철컥. 모든 손가락을 이용해서 공이를 움직이는 모습이 이빨이 맞물린 톱니바퀴들을 연상시켰다. 타티아나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총성은 한 번이라고 했잖아, 용사.”
피카니가 현기증이 난다는 듯 고개를 들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당신이 회수했던 권총을 내가 봤었는데 공이하고 방아쇠를 지탱하는 용수철과 금속은 휘어졌고 약실의 축은 닳아버렸더라고. 쏘는 간격이 짧아서 총성이 겹쳤던 거야. 총구 화염이 섬광처럼 보였던 것도 그래서고. 소리가 겹쳐질 정도라면 사격마다 간격이 0.03초 정도 되겠군.”
그는 곧바로 여타 다른 총잡이들도 흔히 쓰는 자세 중 하나로 고쳐잡았다. 오른쪽 옆구리와 팔을 앞으로 향하도록 내밀고 엉거주춤 오른발 끝을 세웠다. 하체를 앞으로 내미는 만큼 상체는 뒤로 쏠렸다.
“그놈이 좌완투수로 자세를 잡은 건 연사 하나에만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발을 넓게 두고 허리를 곧게 세워야 반동을 버틸 수 있으니까요. 지금 제 자세로는 총을 빨리 뽑을 수는 있어도 패닝을 하기가 힘들고 속사를 하면 균형이 흐트러져서 조준이 망가집니다.”
일동 모두 어처구니를 잃었다. 피카니도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 허탈한 얼굴이었다. 하딘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상대에게 물었다.
“자네도 같이 싸웠으니 알다시피 우리는 그놈의 방어를 뚫으려고 안간힘을 썼었지. 레스는 뭘 썼길래 단숨에 뚫은 거지?”
이번에는 타티아나가 대답했다.
“권총과 총알에는 특별한 점이 없었습니다. 카우보이한테서 노획된 물건이라 품질은 뛰어났지만 어디까지나 그저 권총이었습니다.”
피카니가 담백하고도 매끄럽게 말했다.
“총알 뒤에 총알을 박아서 착암기처럼 뚫은 겁니다. 여섯 발 전부 같은 곳에 맞춰서.”
그 말을 들은 일행 중에 타티아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어딘지 일리가 있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물론 타티아나는 당연한 반응을 보였다.
“말도 안 돼. 거리가 20m는 됐는데.”
그때 오랜만에 아비투스가 입을 열고 가래 낀 목소리로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저희는 국경을 넘을 때 더 굉장한 것도 봤습니다. 소위.”
농담을 안 할 거 같은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타티아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듣는 자세로 돌아왔다. 심란해지는 분위기를 정리하기 위해 하딘은 판사가 망치질하듯 만년필을 책상에 두드렸다. 그대로 자연스럽게 말할 차례를 돌려받았다.
“그 친구는 오른팔이 망가지지 않았던가?”
피카니가 답했다.
“각성제 같은 걸 마시고 버텼는데 마법사님이 말씀하시길 레스와 만났을 때 약효는 떨어진 상태였다고 하더군요.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는 거 아십니까 대위님?”
조금 뜸을 들이고 눈도 깜빡 안 하면서 그가 답했다.
“여기 있는 사람은 모두 겪어봤지.”
“어떤 사람은 그 힘을 다른 사람보다 더 능숙하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게 반복된 훈련이나 재능으로 체득할 수 있는 영역인지, 아니면 어딘가에 문제가 생긴 건지 저야 모릅니다만 그런 사람이 정말 있기는 합니다.”
공기가 가라앉았다. 하딘은 엄격한 모습으로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처럼 또박또박 말했다.
“보고서에 안 넣는 편이 좋겠군.”
아무도 군말하지 않았다. 이유는 다들 알고 있었다. 공책에 여태껏 적어둔 내용을 만년필로 찍찍 그어서 지워버리고 하딘이 다시 화제를 이었다.
“좋아. 그 뒤로 어떻게 됐던 거야?”
◆
“아야야야야야야야야!”
레스는 발작을 일으키면서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꿈에서 깨어날 때 언제나 그렇듯 그는 자연스럽게 모든 현실을 받아들였다. 축축해진 옷과 새벽의 냉기, 오른팔의 아픔과 근육통 등 잊고 있었던 모든 안 좋은 감각들을 한꺼번에 되찾자 레스는 전신이 쪼개지는 줄 알았다. 아자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다가가고는 뺨을 찰싹찰싹 때리면서 말했다.
“저의 천재적인 두뇌로 질문을 예측해서 미리 답하자면 당신은 5초 만에 돌아왔어요.”
아자리는 레스가 발작을 이미 멈췄는데도 계속 때렸다. 그가 버럭 외쳤다.
“그만! 이제 괜찮다고! 넌 뭐가 그렇게 신난 건데?!”
“걱정했으니까 그런다! 일어나!”
아자리는 자신의 지팡이를 레스에게 쥐여주고 그를 부축했다. 샤카자이아는 자신의 물건들을 챙기고 떠날 준비를 마쳤다. 거대한 짐승의 울음 같은 불길한 소리가 사방에 울리고 있었다.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여기서 너무 오래 끌었어! 당장 나와야 한다!”
레스는 힘이 빠져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아자리는 그를 챙겨주느라 바빴다. 샤카자이아는 일행과 같이 움직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타티아나에게 시선이 멎었다. 타티아나는 파스낙을 버려두고 떠날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샤카자이아는 그쪽으로 다가가면서 파스낙의 한쪽 어깨를 붙잡고 잡아당겼다. 타티아나는 당황했다.
“어?!”
“꾸물대지 말고 너도 어서 잡아! 같이 나간다!”
“진심이야? 아까 나하고 싸웠으면서….”
“그럼 나중에 싸우면 되잖아! 움직여!”
파스낙은 완전히 실신해있었다. 타티아나는 샤카자이아와 같이 그를 붙잡고 일행을 따라 움직였다. 어쩌다가 상대의 기세에 휘말려서 따라갔던 타티아나는 저쪽이 어떻게 나설지 내심 걱정됐었는데 레스와 아자리는 샤카자이아의 행동을 나무라지 않고 서두르자는 간단한 재촉만 할 뿐이었다. 최대한 부지런히 걸으면서 레스가 물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냐?”
“핑커튼 사람들하고 나중에 만나기로 약속한 곳이 있어요! 오늘 여기서 탈출할 거예요!”
“단테는 어떻게 하고?!”
그건 미처 생각 못 한 아자리는 난처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레스는 추궁하는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하여튼 나가기나 하자!”
진동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샤카자이아는 라카키를 향해 늦장 부려서 미안하다고 외쳤다. 타티아나는 그들과 같이 있다 보니 점점 자기가 무슨 기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같은 순간 그들 중에서 오감이 제일 예민한 두 사람, 샤카자이아와 타티아나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끼고 멈칫 굳었다. 두 여자가 거의 같은 순간에 말했다.
“애들아.”
“잠깐만.”
지진파가 그들 발밑을 휩쓸었다. 서두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모두 알았다. 레스가 무릎을 땅에 대면서 외쳤다.
“꽉 잡아!”
시야가 흔들리는 와중에 일행은 모두 그의 망토 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날 잡는데?!”
◆
타티아나가 먼 산 보는 눈으로 덤덤히 중얼거렸다.
“잡을만한 게 그거밖에 없었으니.”
하딘이 만년필 뒷부분으로 자신의 부하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희들은 그때 무슨 상황이었어?”
아비투스는 피카니하고 시선을 교환하다가 먼저 말하라는 눈짓을 받았다.
“캘러헬을 맡고 있었던 히콕과 합류했습니다. 그동안 저희는….”
“기절한 날 챙기느라 바빴겠지.”
하딘은 만년필을 끼적이면서 눈은 상대에게 향한 채로 계속 말하라고 턱짓했다. 그래서 아비투스는 말했다.
“캘러헬은 그 새 두 다리로 걸어 다닐 정도로 회복했더군요.”
“그랬나.”
못마땅하다는 어투로 하딘이 중얼거리자 타티아나가 말을 받았다.
“괜히 리차트라가 제일 경계했던 남자가 아닙니다. 마계에서도 그하고 악연으로 얽힌 전설이 여럿 됩니다.”
“그래서?”
하딘은 흘려넘기고 아비투스를 쳐다보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어떻게 할지 열심히 상의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땅이 크게 흔들리더군요. 소위가 있던 곳만큼 심하지는 않았어도 도우러 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타티아나는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1분 가까이 지진이 지나가기를 빌면서 버텼습니다. 많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루나 센델자레 수석 마법사가 저희를 구해주러 왔습니다.”
◆
아자리는 지팡이를 타고 나타난 루나를 보고 얼굴에 반가움과 놀라움이 섞였다.
“오랜만… 은 아니고 상상 이상으로 건강하시네요?”
루나의 눈에서는 태양에 비친 사파이어처럼 눈 부시는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다짜고짜 외쳤다.
“아다치아 계열 17번!”
“네?”
루나는 아자리에게서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지팡이를 땅에 대고 무언가 하려고 했었다. 상대의 자신 없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녀는 몸을 거칠게 돌리고 잡아먹을 기세로 이쪽을 보았다.
“아다치아 계열 17번! 모릅니까?!”
루나의 일갈에서 타티아나의 간담까지 서늘하게 만드는 미지의 공포가 느껴졌다. 급하면 누구나 행동이 거칠어지기 마련인데 루나는 그 정도가 유난히 심한 부류 같았다. 레스는 막연히 그런 거리라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모릅니다!”
아자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레스의 망토 자락을 잡아당기고 방패라도 되는 양 앞을 가렸다.
“모르면 따라서 합니다!”
방금 외침을 기합 삼아서 루나는 지팡이를 땅에 힘껏 찍었다. 아자리도 따라서 지팡이를 땅에 찍자 루나가 광선이 나올 듯한 (실제로도 빛이 나고 있는) 시선으로 아자리를 째려보았다.
“거기는 반대쪽 맡아야지!”
“죄송합니다!”
루나의 지시를 따라 허겁지겁 방향을 바꾸는 아자리의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거기에서부터 그녀의 몸에 나쁜 방향으로 뿌리 박힌 습관과 심리적 외상에서 기인한 반사적 행동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말로, 지금 아자리는 누군가의 꾸지람을 들으면서 살아온 경험이 상당하다는 걸 누구든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말과 행동에서 티가 팍팍 났다. 당황해서 어쩌다가 남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표현 따위로는 지켜보는 사람들의 감상을 대변할 수 없었다.
◆
피카니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려서 타티아나의 이야기를 끊어버렸다.
“마법사님한테 그런 일면이 있었군.”
“평소에 화 안 내던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이지.”
그녀는 덤덤히 그의 생각에 공감했다. 카르델이 입방정을 주체못하고 거기에 또 끼어들었다.
“대학교에서 대체 무슨 생활을 하셨던 걸까?”
“입 닥쳐 카르델.”
하딘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다시 원래 화제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