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4권] 146회 - 두려움을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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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우닝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심드렁한 표정으로 멀뚱거리는 레스를 향해 말을 걸었다.
“자네를 두고 논쟁이 참 길어지는군.”
레스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어깨만 살짝 으쓱거렸다. 두 사람으로부터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다른 일행들이 모여서 조금 낮춘 목소리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피카니가 말했다.
“녀석은 맹세를 지킵니다. 위험한 놈이 아니라는 건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하딘이 바로 맞받아쳤다.
“저놈한테 총을 쥐여주고 그 뒤에 일어날 일을 어떻게 장담하려고?”
타티아나가 끼어들었다.
“총은 주되 총알은 주지 말죠. 필요할 때에만 주는 겁니다. 다 같이 무기를 얻는 것으로 비등한 입장이 됐다는 인상을 줄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하딘과 부하들은 마뜩잖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비투스가 말했다.
“아뇨. 예우를 갖춰주는 건 당연하지만 무기를 쥐여주는 건 도가 지나칩니다. 저희가 위험해질 가능성이 티끌만큼이라도 올라갈 일은 피해야 합니다.”
카르델이 이어서 말했다.
“까놓고 말해서 저놈이 여행 도중에 돌변해버리면 우리는 끝장이야. 어? 총을 뽑았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여섯 명은 다 골로 간다고.”
피카니가 반박했다.
“녀석은 맹세를 지키니까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합니까. 레스는 우리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루나가 그들 사이로 들어가서 상황을 진정시켰다.
“어서 타협하죠. 이런지 10분은 지났어요.”
일행이 웅성거리는 모습을 레스는 시큰둥한 얼굴로 계속 보기만 하다가 하품을 길게 했다. 모르스 요원이 팔짱을 끼면서 그의 근처로 기웃거렸다.
“다들 널 정말 좋아하는데?”
“댁은 바쁜 몸이라면서 여기서 빈둥거려도 되는 건가?”
모르스 요원이 한쪽 입가를 살짝 올렸다.
“소문의 실력을 확인할 두 번 없을 기회니까. 여기 브라우닝 선생님도 같은 생각이시지.”
브라우닝이 말했다.
“바다위윤 전사들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네. 전사. 방랑자. 음유시인. 명사수. 신자….”
계속 이어지려던 상대의 말을 레스는 냉소적인 어투로 도중에 끊어버렸다.
“그리고 야만인이자 약탈자.”
브라우닝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사쿠라비는 이 땅의 역사에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해왔지. 지리적 위치 때문에 분쟁이 끊이질 않았고, 척박한 땅임에도 첫 번째 문명이 태어난 곳이지. 그대들의 종교와 우리의 종교는 뿌리가 같으며 그 뿌리는 그 사쿠라비에 있지. 메시아(구원자)께서도 사쿠라비 출신이라네.”
레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신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그래? 특이하군. 그런 사쿠라비는 없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전 진정한 바다위윤 전사가 아니라서 그럴 지도요.”
드디어 논란이 끝났는지 일행들이 이쪽으로 왔다. 하딘이 앞장서서 먼저 말했다.
“일단 어떻게든 결론을 냈다. 레스 알 하자르. 미사는 자유롭게 치러라. 그런데 만약 복음을 받는 일이 생기면 일단 우리가 맡아두겠다.”
타티아나가 말했다.
“위험한 여행이 될 거야. 만약 너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급한 상황에 부닥치면 그때 같이 싸운다. 이해했지?”
레스는 눈썹을 실룩였다.
“이런.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은 총을 쥘 일이 없겠다고 속으로 좋아했었는데.”
루나가 레스와 일행을 번갈아 보다가 머쓱한 투로 말했다.
“정작 본인은 복음에 관해서 관심이 전혀 없나 보네요.”
피카니가 말을 받았다.
“뭐, 그야 원래 쓰던 총이 세상에서 유일한 물건이었으니까.”
브라우닝이 그 말에 관심을 보였다.
“세상에서 유일한 물건? 무슨 소리지?”
레스가 대답했다.
“그냥 싱글 액션 리볼버요. 따로 붙여진 이름은 없습니다.”
브라우닝이 한 손으로 자신의 팔꿈치를 감싸면서 다른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어쨌든 미사를 치르도록 하지. 내가 형제라고 불러도 괜찮겠는가?”
“이교도라고 부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운걸요.”
“형제여. 내게 손을 펼쳐서 보여주겠는가.”
레스는 양손을 펼쳐서 허리 높이로 들었다. 브라우닝이 그의 손을 만지면서 눈을 감고 고갯짓까지 하며 감탄을 했다.
“전사의 손이야. 아름다워. 이 굳은살과 화상 자국. 이 손에 얼마나 많은 적이 쓰러졌을는지.”
레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참고로 전 여태껏 하나만 죽였습니다.”
“지금 뭐라고?”
“하나만 죽였다고요. 그 뒤로 전 죽이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큰 오해하시는 거 같아서요.”
“흥미롭군. 정말로 흥미로워.”
브라우닝이 입가를 오므리면서 눈도 게슴츠레 떴다. 팔짱을 끼고 그가 넌지시 물었다.
“그대는 신을 찬양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형제는 다른 형태로 신을 찬양하는 거 같네. 맹세에 집착하는 게 그 증거지. 하지만, 주께서 말하기를 ‘맹세를 남용하는 자를 멀리하라. 지키지도 못할 맹세를 뿌리는 자의 혀는 독이 묻은 칼보다 위험하다.’”
레스가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그’가 말하기를 ‘그대들 미지의 보물을 저울로 달지 않도록 하라. 마음이야말로 무한의 바다이기 때문에. 절대 말하지 마라, 내가 진리를 찾았다고.’ 함부로 판단하지 마시죠.”
주변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표정이 창백해졌다. 모르스는 재밌다는 듯 목 안으로 킬킬 웃었다. 브라우닝은 조금 당황한 듯 얼굴이 굳어있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신을 찬양하지 않는다는 사람치고는 경전의 문구들은 잘 인용하는군.”
“신앙이 있든 없든 경전과 규율에 적힌 글귀들과 시에 담긴 지혜는 읊는 사람의 마음을 달래줍니다. 수단이죠. 신앙과 맹세, 모두 수단입니다. 중요한 건 무엇을 위한 수단인지 잊지 않는 겁니다. 잊으면 위험해지죠. 마치 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요리에 쓸 수도 있듯이.”
“지금 감히 주님을 물건에 빗대는 건가?”
“아뇨. 형체가 없으니 물건은 아니죠. 물건 이하죠. 그리고 어떤 이름을 가진 신이라도 실천하지 않고 자신을 숭배만 하는 자는 축복해주지 않을 겁니다.”
브라우닝은 지그시 그를 바라보다가 눈을 한 번 감았다.
“형제의 각오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알았네. 형제의 맹세를 조롱한 나를 용서해주게.”
“괜찮습니다. 저한테 사과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요.”
“같이 말을 길게 나누면 꽤 흥미로운 경험이 될 거 같네만 사람들이 기다리니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원하는 사항은 있는가?”
“전 언제나 싱글 액션만 쓰지요.”
지켜보던 사람들은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브라우닝도 원하는 게 고작 겨우 그거냐는 듯 오묘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것도 맹세인가? 한물간 물건만 쓰는 것도?”
“다른 걸 쓸 필요를 못 느껴서.”
“흐음.”
브라우닝은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상자에서 커다란 리볼버를 꺼내 탁자를 올려놓았다.
“45구경. 싱글 액션. 일명 ‘피스메이커’. 개척시대의 상징이지. 일단 한 번 쥐어보게 형제여.”
레스가 한숨을 길게 뱉고 권총을 향해 어색한 손길을 뻗었다. 갑자기 뒤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 뒤를 보니 피카니를 제외한 남자들이 허리춤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정 불안하면 뽑아서 그대로 겨누고 있어.”
하딘이 총을 뽑으면서 말했다.
“사양하지 않겠네.”
레스는 등 뒤로 긴장 서린 시선을 받으면서 권총의 약실 마개를 열고 총알을 회전 탄창에 한땀 한땀 넣었다. 그리고 표적지를 향해 겨누었다. 레스는 공이에 엄지를 대는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팔은 떨리고 숨은 가빠졌다. 그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면서 어떻게든 진정하려고 했으나 결국 손을 내리고 총을 놓았다. 그걸 본 모르스가 실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이게? 팔은 다 나았다면서?”
레스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쇼는 끝났어. 댁은 이제 갈 길 가시지.”
타티아나가 레스에게 다가와서는 그의 오른팔을 살짝 붙잡았다.
“이상한 점은 없군. 그래도 경혈을 눌러서 피의 흐름을 풀어줄게. 도움이 될 거야.”
“갑자기 부담스럽게 왜 그래?”
“됐으니까 가만히 있어.”
레스는 묵묵히 타티아나가 자신의 팔을 주무르는 걸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르스는 아직도 자리를 떠날 기미가 없었다. 아무래도 아직 할 말이 남은 거 같아서 레스는 시선을 저쪽으로 옮겼다.
“용건 있으면 그냥 말해.”
“사실 선물이 있어. 이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내주는 거야.”
모르스가 검지를 위로 치켜들며 새침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다른 사람? 누구?”
“파스낙 리차트라. 꼭 네게 돌려달라 하더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모르스가 주머니에서 하얗고 낡은 천을 꺼냈다. 그에게는 못 알아볼 수 없는 물건이었다. 레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뭐 하자는 거지?”
“지금 손이 떨리는 건 의지가 모자라서 그러는 거야. 이거라면 의욕이 생기겠지? 이 자리에서 실력을 증명해봐. 그럼 돌려주겠다. 못하겠다면 넌 그거 밖에 안 되는 사내라는 거고.”
피카니가 날 선 목소리로 외쳤다.
“주인에게 돌려줘. 그게 도리잖아.”
“난 내기를 제시했을 뿐이다.”
모르스는 태연히 말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레스의 눈빛에 잠깐 살기가 감돌고 온몸에서 뿜어져 나온 영문 모를 기척이 주변 사람들의 피부를 찔렀다. 타티아나는 레스가 뼈 꺾이는 소리가 날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펴서 깜짝 놀라 눈꺼풀이 위로 치솟았다. 레스는 주먹 쥔 손의 손목을 우둑우둑 돌리면서 모르스를 째려보았다.
“장전된 총을 가진 사람을 열 받게 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억양 없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모르스는 태연하게 받았다.
“결투 신청이라면 사양하지. 여기서 자네가 죽으면 골치 아파. 그냥 저 종이에다가 구멍만 잘 뚫으면 끝날 일이야. 진정하라고 사쿠라비.”
레스는 다시 권총을 쥐었다. 그는 떨림을 어떻게든 억눌러보려고 했으나 손은 그의 말을 듣질 않았다. 머리가 혼탁하다. 그는 눈꺼풀을 닫고 어떻게든 마음부터 진정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모습을 조마조마하는 눈으로 지켜보던 루나가 갑자기 불쑥 말을 꺼냈다.
“제가 미사를 진행할게요.”
사람들의 주목이 전부 자신에게 쏠리자 루나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브라우닝 선생님 대신 미사를 진행하겠습니다. 괜찮을까요?”
브라우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일세. 같은 신을 섬기는 사람인데 안 될 거 없지.”
브라우닝이 눈치껏 루나의 부탁대로 자리를 비켜주자 그녀는 레스의 바로 옆으로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레스 씨. 제게 허락해주신다면 간단한 암시를 걸어드릴게요. 저는 당신이 영혼을 안정시키고 필요한 목표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인도해드릴 수 있어요.”
레스는 일단 손에서 권총을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아 루나를 정중한 태도로 마주 봤다.
“암시요? 최면 말인가요?”
“제 뜻대로 레스 씨를 조종하거나 하는 건 아니에요. 마음의 길을 따라갈 길잡이가 되어드릴 거예요. 제 말 이해하시나요?”
레스는 3초 동안 생각하고 말했다.
“이제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말해주시죠.”
“일단 손에 권총을 쥐세요.”
그는 하라는 대로 했다. 팔꿈치부터 시작된 경련이 손끝까지 퍼졌다.
“눈을 감고 제 말에 집중하세요.”
눈을 감았다. 루나가 길게 심호흡하더니 입을 열었다.
“더는 고독을 참지 말지어다. 이제 내가 있으니 고독을 참을 이유가 없도다.”
마치 깊은 동굴, 아니면 저 하늘 저편에서 들려오는 듯 목소리에 헤아리기 어려운 울림이 느껴졌다. 가녀린 여자의 목과 혀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레스는 눈을 감은 채 규칙적으로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루나가 다시 한번 그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움을 마주 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두려움은 바라보면 그저 그뿐. 바라볼 수 있다면 표적과 다르지 않다.”
레스가 몽롱한 목소리로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루나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 모두 당황했다. 루나는 같이 눈을 감고 말했다.
“두려움을 향해 쏠 수 있겠는가?”
“할 수 없다.”
“두려움은 표적과 다르지 않은데 어째서 쏠 수 없는가?”
“그 표적은 나 자신이며 더는 방아쇠를 당기고 싶지 않다.”
“방아쇠를 당기고 싶지 않다면 그 이유는 어째서인가?”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누군가는 소중한 것을 잃는다. 그래서 나는 대가를 치렀다.”
“표적이 그대 자신인 까닭은 두려움이 그대의 일부분이기 때문인가?”
“두려움이 나의 힘이오, 책임이다.”
루나는 자신의 이마에 손을 대고 정신을 집중했다. 길게 뜸을 들여서 그녀는 생각을 마치고 운을 뗐다.
“더는 고독을 참지 말지어다. 그대의 상실을 이해하는 내가 있으니. 참을 이유가 없도다.”
레스의 얼굴이 평온해지더니 손의 떨림도 크게 줄었다.
“전사여, 지금까지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어떻게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상실의 두려움을 극복해왔는가?”
레스는 눈을 떴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눈으로 표적을 바라보고 바위 같은 자세로 겨누었다.
“아인다마 라 야브퀴니 아흐드, 픈 누크티이 아흐다나.”
“지켜주는 이 없을 때 우리는 누구에겐가 죄를 짓는다.”
레스가 선창하자 루나가 뒤따라서 불렀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자 표적지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렸다. 레스가 다시 중얼거렸다.
“알하티 아히야난 후 알샥스 알디히 야타하말 에입 알 아브리아디.”
“죄인이란 때론 죄 없는 자의 짐을 지고 가는 자.”
그가 다시 방아쇠를 당기자 표적지가 살짝 흔들렸다.
“클 민 알아스라리 와살이힌 훔 라줄 와히드 파캇트 야퀴프 피 알샤프크.”
“악한 자 의로운 자 모두 황혼 속에 서 있는 하나의 사람일 뿐.”
총성이 외로이 울려 퍼졌다.
“사투스비 알아스리하 툴밧, 왈담 사야쿤 마.”
“무기는 흙이 되고 피는 물이 되리라.”
사람들은 넋을 잃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
“나흔 가리븐 와타리큰.”
“우리는 나그네이자 길이다.”
레스는 엄지만 움직여서 공이를 잡아당기고 마치 석고로 굳힌 듯 꿈쩍도 하지 않는 조준 너머의 구멍을 노려보았다. 검지를 움직이자 그는 다른 사람이 방아쇠를 눌러주는 기분을 느꼈다.
“아나 가리븐 와타리큰.”
“나는 나그네이자 길이다.”
저 앞에 걸린 표적지의 가운데에 고독한 구멍만 하나 있었다. 딱 총알 하나만큼의 크기였으며 테두리가 거의 완벽하게 깔끔한 동그라미였다. 레스는 팔꿈치를 접어서 총을 거두고 탄피 마개를 열어서 회전 탄창을 빙그르르 돌려 탄피들을 와르르 쏟아냈다.
“나에게는 맹세가 있다. 잊고 싶은 사실을 계속 떠올리는 한 내게 두려움은 바라보면 그뿐.”
루나가 평소의 목소리로 외쳤다.
“레스 씨.”
레스가 그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리자 그의 온몸에 감돌던 안개처럼 정적인 기척이 자취를 감췄다. 그는 미간을 살짝 긁적이고 머쓱한 듯 루나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뭔가 창피하네요.”
모르스가 저쪽으로 가서 표적지를 가져오고는 가장자리가 새까맣게 탄 구멍을 만지작거리면서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그걸 일동에게 보여주었다. 브라우닝은 언제부터 입이 벌어졌는지도 몰라서 입안이 바싹 마른 걸 느끼고 나서 떨군 턱을 다시 다물었다. 다들 경악하는 와중에 피카니만 표정이 침착했다. 레스는 권총을 내려놓고 모르스를 노려보았다.
“이거면 만족하겠나?”
“좋은 걸 봤다.”
모르스는 그에게 다가와서 터번을 돌려줬다. 접힌 천을 살펴보니 매듭이 규칙적으로 꼬여있는 머리띠도 함께 있었다. 레스는 입술을 깨물고 깊은 감회를 느끼며 터번을 자신의 머리에 두르고 낙타 털 머리띠로 고정했다. 그리고 터번의 끝자락은 옷깃 속으로 넣어서 정돈했다. 터번 때문에 그의 눈가가 옅은 그림자로 덮였다. 그는 다시 자락들을 다듬으면서 루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첫 여정을 시작했을 때 다짐했던 저의 각오와 맹세가 다시 살아났어요. 그리고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제 의지로 움직이면서도 제가 아닌 거 같았어요.”
루나는 조금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래전에 큰 아픔을 겪으셨겠죠. 그리고 이번에 친구들을 잃은 경험이 그 아픔까지 떠올리게 했고요. 마음의 상처는 아물기가 어렵죠. 상처가 쌓이고 또 쌓이고. 저희 때문에….”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의 손목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시험 삼아 빈 권총을 쥐었다. 손은 그럭저럭 자기 뜻대로 움직였으나 그의 얼굴에는 아픔을 견디는 듯 힘겨워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갑자기 브라우닝이 다가오더니 그가 쥔 권총을 빼앗아버렸다. 레스는 눈으로 무슨 일이냐고 묻자 상대가 말했다.
“바다위윤 전사에게 이따위 흔한 걸 줄 수는 없어.”
레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에 쓰던 총이 세상에서 유일한 물건이랬지. 무슨 물건이길래 세상에서 유일하지?”
“그건 오리칼쿰으로 만든 거였어요. 엄밀히 말하면 제 물건은 아니고 제 스승의 것이죠.”
“오리칼쿰으로 권총을 만들었다고?! 세상에!”
브라우닝이 경악했다.
“제 스승이 그걸 만들었을 시기에는 싱글 액션이 최신 기술이었죠. 38구경. 흑단 손잡이. 총알에 문제가 없거나 평소에 손질만 잘하면 절대 고장 안 나죠. 그게 전부예요.”
브라우닝은 목 안으로 험악한 울음을 짖었다.
“딱 기다려. 거기에 밀리지 않는 작품을 선사해 주지.”
솔직히 레스는 기대가 되기보다는 무서웠다. 브라우닝이 화가 담긴 걸음을 딛으며 자리를 떠나자 피카니와 타티아나가 은근슬쩍 근처로 왔다. 타티아나가 말했다.
“난 하나도 안 놀랐어. 전에 봤으니까.”
대체 왜 그런 소릴 하는지 레스는 영문을 몰랐으나 일단 대꾸했다.
“팔 주물러 줘서 고마웠어.”
피카니가 물었다.
“증상은 나아졌어?”
레스는 오른손을 들어서 쥐었다 펴보았다.
“무리만 안 하면 될 거 같아. 시간이 해결해준다면 좋겠는데.”
“나중에 마법사님에게 더 상담을 해봐. 아까처럼 좋은 진전이 있을 거 같아.”
“이 자리에서 다짜고짜 이런 말 하기는 좀 뭐하지만 너 질투 안 나냐?”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를 한차례 넘기고 그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괜찮아. 난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됐지?”
“흐음.”
곧 브라우닝이 굳게 잠긴 나무 상자를 품에 안고 이쪽으로 왔다. 대체 어떤 물건일지 일동은 궁금해서 이쪽으로 우르르 모였다. 브라우닝은 레스가 보는 앞에서 상자의 잠금장치를 풀고 덮개를 열어서 틀에 딱 맞춰서 끼워져있는 권총을 선보였다.
일단 회전 탄창의 크기가 아주 거대했다. 보통 리볼버 권총의 탄창은 손가락으로 감싸 쥘 수 있는데 이건 손을 통째로 써야 겨우 쥘만했다. 총구는 2개였다. 총열이 아니라 총구. 그렇다 보니 당연히 권총은 아주 컸다.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먹빛 강철 위로 아름다운 은제 세공 장식이 박혀있었다. 손잡이는 하얀색 나무로 만들어졌고 미끄럼방지 처리가 됐다.
하딘은 그 권총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눈치였다.
“오 하나님 맙소사.”
브라우닝이 장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르맷이다. 어떤 총인지 들어봤나?”
레스의 기억에는 없어서 그는 몸짓으로 대충 모른다고 했다.
“44구경. 9연발. 그리고, 산탄 하나.”
“뭣?”
레스는 목소리가 뒤집혔다. 브라우닝은 권총을 비단으로 장식한 틀에서 끄집어내고 손잡이와 총몸을 양손으로 붙잡고 휙 젖혔다. 그러자 총몸 한가운데, 약실 부분에 큼직한 구멍이 하나 보였다.
“여기, 산탄은 이쪽으로 장전한다.”
중절식으로 젖혀진 권총을 원래대로 합치고 그는 탄피 마개를 열면서 설명을 이었다.
“권총탄은 여타 싱글 액션처럼 이쪽으로 장전한다. 당연히 싱글 액션이니까 속사하려면 패닝을 해야 해.”
커다란 회전 탄창의 정중앙에 산탄이 들어가고 권총탄은 산탄을 둘러싸는 구조였다. 브라우닝이 공이에 달린 걸쇠를 가리켰다.
“산탄을 쏠 때는 이 부분을 앞쪽으로 젖혀주면 돼. 그럼 젖혀진 곳이 산탄의 뇌관을 때리지.”
하딘은 노골적으로 탐난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앞으로 뻗었다.
“르맷 리볼버는 기병들의 성검이야. 워낙 소량으로 생산돼서 나조차도 실물을 못 봤는데.”
브라우닝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그냥 르맷이 아니야. 내가 직접 개조해서 현대식 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다. 오래전에 변덕이 들어서 만들어놓고 고이 간직해놨지. 이제, 이 녀석이 세상의 바람을 마실 때가 됐어. 기병들의 성검이 유목민에게 갔군. 의미심장하지 않나?”
레스는 그 권총을 받기가 부담스러웠다.
“이건 나한테 너무 과한데요.”
타티아나가 말했다.
“그냥 받아.”
브라우닝이 권총을 다시 틀에 끼우고 덮개를 닫으면서 상자를 이쪽으로 내밀었다.
“날 기억해달라는 의미로 주는 선물이네. 언젠가 여정을 마치고 인간들의 땅으로 온다면 부디 나를 만나러 와주게나. 우리 모두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말이야. 자네라면 올바르게 써줄 거라는 확신이 드네. 아무도 죽지 않도록 말이야.”
레스는 상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덮개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낭송하는 어조로 눈을 감고 목소리를 흥얼거렸다.
“태양이 다가와 희미하던 잠은 완전히 깨어버리고. 이제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만약 기억의 새벽빛 속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 다시 함께 이야기하고, 너는 내게 노래 불러주게 될 것을. 우리의 손이 또 다른 꿈속에서 만날 수 있다면 우리 함께 또 하나의 탑을 쌓으리라. 우리는 죽지 않는 씨앗. 언젠가 무르익고 가슴 그득해지면 우리의 몸은 바람에 맡겨져 이윽고 흩어진다. 우리는 나그네이자 길이오. 방랑자라고 모두 길을 잃은 자는 아니다.”
레스는 눈을 뜨고 상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