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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화 〉[4권] 145회 - 진정 사라지지 않는다 (145/188)



〈 145화 〉[4권] 145회 - 진정 사라지지 않는다



같은 시간. 황야 어딘가. 단테는 야영한 곳을 정돈하고 있었다. 모포를 털고 있던 그에게 샤카자이아가 옷가지들을 품에 들고 다가왔다. 옷가지들을 받자마자 느껴지는 따끈한 감촉에 단테는 목 안으로 웃었다.

“덜 말랐던 빨래들이 뽀송뽀송해졌네요. 아자리 양에게 마법으로 어떻게 할  없겠냐고 했던 말은 반은 농담이었는데 아이 좋아라.”

샤카자이아가 검지를 조심히 치켜들고 느릿하게 말했다.


“그것에 대해서 말인데. 단테도 아자리한테 가서 뭐라고 말을 해야  거 같아.”

“무슨 소리예요?”


“가서 보면 알아.”

상대의 뒤를 따라서 강가로 향한 단테는 뭔가가 두들겨 맞는 둔탁한 소리를 들었다. 샤카자이아가 저쪽을 가리켰다.

아자리가 빨랫감 하나를 손으로 가리키고 허공을 향해 손짓하자 빨랫감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라 보이지 않는 옷걸이에 걸린  빳빳하게 섰다. 그리고 햇볕처럼 따스한 빛이 휘감긴 지팡이를 양손으로 붙잡고 빨랫감을 뚜드렸다. 그다음 지팡이로 빨랫감의 결을 다듬어줬다. 아자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빨랫감을 손으로 낚아채고 가지런히 개켰다.

“깔린까, 깔린까, 깔린까 마야(칼린카, 칼린카, 나의 칼린카), 브사두 야고다 말린까, 말린까 마야(정원에 딸기, 산딸기가 자라고 있네, 나의 산딸기).”


일행의 시선을 눈치채고 아자리가 이쪽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정리 다 끝났어요?”


단테는 입을 열기 전에 손짓으로 뭔가를 표현하려다가 갈피를 못 잡아서 어색하게 손만 쥐었다 폈다. 그는 표정 관리에 집중하면서 조심히 운을 뗐다.


“저기. 아자리 양.”

“왜요?”

“우리 모두 마족이니까 인간계의 위인들에게 신경  필요가 없다는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제가 틀림없이 기억하기로 그 지팡이는 박물관에 가야 할 물건이라 하지 않았나요?”


“아, 켈커트리 씨는 신경 안 쓸 거예요. 죽었잖아요.”

아자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빨랫감을 향해 지팡이를 몽둥이  다리미로 다루었다. 이번에는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나도 와시추 용사라던가 그 용사의 동료라던가 그런 이야기에는 관심 없어. 하지만 엄연히 추장님이 네게 물려주신 물건인데 조금은 경의를 가져주면 안 될까?”


“오.”


그제야 아자리는 하던 짓을 멈추고 지팡이를 향해 미안해하는 시선을 보냈다.

잠시 후, 샤카자이아는 숲속에서 나무토막이 눈에 띄어서 그것을 손에 들어 감촉과 무게를 느껴보고 다른 손을 턱에 대며 깊이 고민했다. 단단하게 잘 마른 자작나무 토막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길을 떠날 준비를 마친 일행들에게 보여주었다.

“이거라면 적당할까?”


아자리가 그걸 보고는 수첩을 펼쳐서 마른 꽃을 끼워서 표시해둔 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권총 손잡이가 그려져 있었다. 샤카자이아가 자작나무 토막과 수첩에 그려진 권총의 그림에 갖다 대어 크기를 비교했다. 자작나무 토막이 그림보다 훨씬 컸다.


“이거라면 괜찮겠네요.”

그렇게 말하고 아자리는 자작나무 토막을 받아서 자신이 맨 가죽 배낭에 넣었다. 단테가 좌우균형을 철저하게 조절해서 묶은 산더미 같은 봇짐을 등에 메고 외쳤다. 갑시다.


샤카자이아가 활을 들고 앞장서고 단테와 아자리가 뒤를 따랐다. 그녀는 캘러헬에게서 선물 받았던 원주민들의 전통 문양이 수 놓인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긴 머리칼을 한줄기로 가지런히 땋아서 등줄기에 늘어트렸다.


두 여자는 걷는 일에만 열중하는 단테를 대신해서 주변을 계속 살피며 부지런히 단풍이 물든 낙엽들을 밟아갔다. 시간이 지나자 아자리가 평상적인 어투로 단테에게 말을 걸었다.

“어깨랑 발은 괜찮아졌어요?”

“옙. 이제 감이 돌아왔어요.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말할게요.”


앞에 있는 샤카자이아가 계속 주변을 살피면서 입을 열었다.

“교대하고 싶어질 때도 언제든지 말해.”

“그럴 일 없어요. 역할 분담은 이대로 지켜갑시다. 전 짐을 나르고. 여러분들은 절 지켜주고. 그리고 봇짐 매고 다니는   못지않게 요령과 경험이 필요하답니다?”


“알았어.”


그들은 경사가 가파른 언덕을 만났다. 샤카자이아는 허리에 매어둔 덩굴과 나무줄기를 엮어서 만든 줄을 풀어서 땅에 늘어트렸다. 곧 뒤따라온 단테가 줄을 집어서 손에 단단히 감았다. 앞서서 언덕을 오른 샤카자이아가 줄을 잡아당겼고 아자리는 단테의 등을 밀어주면서 그들은 언덕을 올랐다. 내려가는 길은 완만했다. 그들은 걷는 속력을 줄여서 천천히 내려갔다.

머리에  후드를 고쳐잡으면서 아자리는 자신의 배낭에서 손잡이가 부서진 권총을 꺼내어 살폈다. 권총의 표면은 수면이나 거울만큼 매끄러웠고 아무리 밝은 곳에 빛을 비추어도 검은색 금속이 빛을 빨아들이듯 은은한 광택만 났다.


“레스가 자작나무를 좋아할까요.”

“나중에 고민합시다.”


단테가 느긋하게 대꾸했다. 아자리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 머저리가 단테 씨에게 이걸 계약금의 담보랍시고 건넸단 말이죠?”


“그랬죠.”


“대체  그랬을까요? 손잡이가 부서져서  수 없는 상태였다는 건 알지만 고향에서 들고 온 몇  되는 소중한 물건일 텐데.”

이야기를 들은 샤카자이아가 말했다.

“그 권총은 레스의 것이 아니니까. 레스의 스승 것이지. 자기가 붙잡히면 그 권총은 주인에게 돌아갈 길이 영영 사라지잖아. 그 의미는….”

단테가 말을 낚아챘다.

“각오한 거죠. 아니면 피할  없는 일이라고 확신했거나.”

아자리가 화 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열 받네.”

단테가 그녀에게 타이르는 투로 말했다.


“진정해요. 놈들이 레스를 제국으로 그냥 보낼 리 없어요. 그들에게 있어서 레스는 저희를 설득시킬 최고의 수단이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추적당하겠죠.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 우리가  일은 계속 나아가면서 그때를 위해 꾸준히 힘을 모으는 겁니다.”


“그렇죠. 고마워요. 저는 있다가 명상을 해야겠어요.”

아자리는 바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자리는 아침 햇살에 이리저리 비춰가며 권총을 관찰하다가 무언가가 나타나는 걸 보았다. 검은색 금속 위로 햇빛 같은 글자가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실눈을 뜨고  신경을 집중했다.

“잠깐! 잠깐! 잠깐! 멈춰봐요!”

아자리가 호들갑을 떨면서 일행을 멈춰 세웠다. 다들 긴장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기에 아자리가 권총의 아랫부분을 보여주자 다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자리는 손이 떨릴 정도로 급하게 수첩을 꺼내서 권총의 총열에 나타난 글귀를 받아적었다. 아자리가 글귀를  적을 때 단테가 말했다.


“여긴 눈에 너무 띄니까 일단 움직입시다.”

그들은 서둘러서 언덕을 내려왔다. 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확실히 살피고 짐을 내리고 그들은 권총 주변에 옹기종기 모였다.

“어? 어어어!”


아자리는 비명에 가까운 단말마를 질렀다. 권총에 나타났던 글자가 불씨가 꺼지듯 사그라들고 있었다. 글귀 하나는 가늠자를 따라서 윗부분을 따라 뻗어있었고, 반대편인 총열 밑부분에도 글귀가 달라붙어 있었다. 글자가 완전히 사라지자 일행은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아자리는 심호흡하고 수첩에 적어둔 글귀를 확인했다.

“침착하죠. 일단 틀림없이 적어뒀으니까요.”


단테가 잠시 봇짐을 내려놓고 어깨에서 멜빵을 풀면서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이 권총은 튼튼한 거 말고는 특별한 힘이 전혀 없다고 했잖아요?”

“그건 틀림없어요. 제가 하루도 빠짐없이 이걸 살폈는데 여기에는 아무 힘도 없어요.”

샤카자이아가 말을 받았다.


“아까 그건 어쩌다가 나타난 걸까?”

“아까 햇살을 비춰주다가 글자가 나타났는데 그게 계기였을 수는 없어요. 햇살에 대고 관찰해봤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아까 글자가 나타난  순간까지도  권총에서는 여전히 특별한 무언가가 느껴지질 않네요.”


단테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혹시, 아자리 양이 감지하거나 눈치채기에는 권총에 깃든 힘의 수준이 너무 복잡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요?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에요.”

아자리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단테 씨의 가설은 완전히 틀렸어요. 힘의 수준이 복잡하고 강력할수록 흔적이나 기운도 강해요.  점은 일단 수수께끼로 남겨두고, 아까 본 것들부터 해석해보죠. 이건 윗부분에 나타났던 거에요.”


아자리가 수첩을 손으로 쿡 찍으면서 말했다.

[Solem nox vincitur.]

“그리고 이건 아래쪽에 나타났던 거고요.”

[Nocte profectus fefellit solis sibi conciliet.]

샤카자이아가 물었다.

“읽을 수 있겠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이건 고대어니까요.”

“고대어?”

“아주 먼 옛날 고대의 세계가 쓰던 공용어예요.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추측하고 있죠.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배웠죠. 고대어는 학술 용어로 쓰거든요. 죽은 언어는 변하지 않으니까요.”


단테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레스가 전에 고대어로 아자리 양에게 뭐라 말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맞아요.”

아자리가 그렇게 말하면서 수첩의 장을 앞부분으로 넘겼다.

[Omnia Mutantur, Nihil Interit]


“옴니아 무탄투르, 니힐 인헤리트. 무엇이 그를 지탱하는지 물음에 관한 그의 대답이었죠. 뜻은, ‘모든 것은 변한다, 하지만 진정 사라지는 것은 없다.’ 그의 신념은 제가 짐작했던 것보다 아득히 깊어요.”


샤카자이아가 따라서 중얼거렸다.

“진정 사라지는 것은 없다.”


아자리는 다시 원래 펼쳤던 장으로 되돌리면서 말했다.


“레스의 성격으로 봐서는 즉석에서 그런 글귀를 떠올릴 거 같지는 않아요. 분명 원래 있던 문장을 인용했을 텐데 제 지식에는 그런 문장이 없어요.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요.”

아자리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수첩에 적힌 글귀를 가리키며 차분하게 낭송했다.


“솔렘 녹스 빈치터르(Solem nox vincitur). 뜻은, 밤은 태양에게 패배한다. 윗부분에 나타났던 글귀에요.”

아자리는 숨을 고르고 다음 글귀를 낭송했다.


“녹테 프로훽터스 훼휠릿 솔리스 시비 콘실리엣(Nocte profectus fefellit solis sibi conciliet). 뜻은, 밤은 태양이 떠나는 걸 자신이 이겼다고 착각한다.”

단테가 곰곰이 생각하고서 말했다.

“순서를 어떻게 이어야 하는 거죠? 위에서 아래? 아니면 아래에서 위?”

아자리가 권총을 양손으로 받쳐 들면서 말했다.

“이 글귀가 재밌는 점은 어떤 순서로 잇든 말이 된다는 거예요. 밤은 태양에게 질 수밖에 없다. 태양이 자리를 떠나면 밤은 자신이 이긴 줄 안다. 이  문장의 순서를 어떻게 하든. 잇기 위해서 어떤 부사를 사용하든 의미는 같죠.”

샤카자이아가 총구를 가리켰다.


“윗부분과 아랫부분 사이에 이게 있네. 이게 부사에 해당하려나?”

 말을 듣고 아자리는 표정이 대단히 심각해졌다. 생각에 완전히 몰두해져서 남자아이만큼이나 굵어진 목소리로 그녀는 빠르게 중얼거렸다.

“총구. 폭력. 부사. 진실. 아주 단순한 진실이라도 현실로 이루려면 힘이 필요하다는 뜻인가? 대단한 재치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레스,  머저리. 이렇게 재밌는 걸  말  한 거야? 그 자식이 이걸 몰랐을 리가 없을 텐데.”

샤카자이아가 레스의 말투를 흉내 냈다.

“안 물어봤잖아.”

아자리와 단테는 군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자리가 말했다.

“200% 그러고도 남을 놈이죠.”

“이 총을 만든 건 레스의 스승이죠? 이 글귀들을 보니 사람 됨됨이를 알 거 같아요. 분명, 자신의 제자 못지않을 거 같습니다.”

샤카자이아가 말을 받았다.

“어떤 면에서?”

“글쎄, 모든 면에서?”


아자리는 입가를 굳게 다물고 레스의 권총을 옷깃에 닦아서 묻었던 지문을 지우고 가방으로 돌려놓았다.

“옴니아 무탄투르 니힐 인헤리트.”

그들은  같이 주문을 읊듯이 그 말을 따라서 중얼거리며 다시 여로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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