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5권] 161회 - 안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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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자 마차는 멈췄다. 마차의 양옆에서 나란히 말을 타고 달렸던 피카니와 하딘도 자리에 섰다. 황량한 땅이라 말들이 먹을 풀이 없었다. 피카니는 안장 가방에서 건초를 꺼내 근처에 깔아주고 자신의 모자에 수통을 뒤집어 물을 담아 말에게 내밀었다. 자신의 애마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자 그는 말의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쭉 들이켜 친구.”
하딘이 자신의 말을 이쪽으로 끌고 오면서 그에게 물었다.
“합석해도 되겠나? 가진 먹이가 모자라서 자네 거랑 합쳐서 나눠 먹이고 싶은데.”
“물론이죠.”
두 남자는 자신의 애마에게서 안장을 벗기고 그들이 자유롭게 쉬도록 두었다. 그리고 안장을 땅에 내려놓고 엉거주춤 거기에 걸터앉았다. 빈 담뱃대를 깨문 채 하딘이 피카니의 말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하고 저 녀석이랑은 사이가 얼마나 됐지?”
피카니는 손가락을 펼치고 하나씩 접어가며 수를 세다가 대답했다.
“1년하고도 2개월.”
“이름은?”
“실버. 아름답죠? 머스탱(야생마)이에요.”
피카니의 애마는 그 이름에 걸맞게 얼굴부터 갈기와 꼬리에 이르기까지 잡티나 반점 하나 없이 완벽하게 하얀 털을 갖고 있었다. 몸집은 크고 탄탄했고, 또 사교적이기까지 했다. 하딘의 말을 향해 실버가 발을 살짝 들어 올리거나 얼굴을 갖다 대는 등 친한 척을 하는데 정작 하딘의 말은 내키지 않는 듯 몸을 뒤로 비켰다. 하딘이 깨물고 있던 담뱃대를 빼고 말했다.
“어떻게 야생에서 저런 백마를 찾았나?”
“운이요. 저희 둘 다 우연히 실버를 보자마자 눈이 뒤집혀서 길들이려고 하루를 통째로 날렸죠. 지금 돌이켜보니 좋은 추억이네요. 저희가 가까워진 계기 중 하나고요.”
조금 뜸을 들이고 하딘이 담뱃대의 물부리로 저쪽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누가 가질지는 어떻게 정했나? 유목민이 저걸 그냥 양보했을 리가 없잖아.”
피카니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냥 양보했죠. 이미 타고 왔던 말이 있으니까 자기한테는 필요 없다면서.”
“세상에.”
하딘은 입술을 깨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어떤 사람이든 언젠가는 귀인을 만나는 날이 와. 삶을 뒤바꿀 기회와 계기를 주는 누군가와 만나는 날이. 그런데 넌 그런 사람을 자기 발로 걷어찼어. 그러고도 밥이 넘어가나?”
“원하신다면 아주 자세한 변명을 할 수는 있습니다만. 무슨 소용이겠어요. 어차피 변명인데.”
피카니가 투덜거리면서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려다가 뒤에서 들리는 헛기침을 들었다. 두 남자가 뒤를 돌아보니 여인이 멋쩍어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소심하게 물었다.
“흡연은 나중으로 미뤄주실 수 있을까요? 저도 여기 있고 싶어서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직접 흡연보다 간접적 흡연이 더 몸에 악영향을 끼친답니다. 그냥 그렇다고요.”
가느다란 어깨와 정맥이 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창백한 목덜미, 어색한 미소로 부들거리는 입꼬리와 덜덜 떠는 눈동자 사이에 보랏빛 기미가 퀭하게 끼어 있었다. 귀를 덮을 만큼 자란 머리카락은 황혼의 하늘처럼 검은색과 군청색이 뒤섞여 음침한 음영이 넘실거리고 새끼 사슴처럼 크고 동그란 눈동자는 수천 년 묵은 호박(琥珀)처럼 진하면서도 깊고 맑은 주황빛이 났다. 슬쩍 보면 미인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피로에 찌든 안색과 수분 부족으로 부르튼 입술, 그리고 소용돌이를 치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는 사람에게 표현 못 할 불안을 일으켰다. 화장도 안 했고 장신구도 전혀 없다. 그런 여자답지 못한 차림과는 별개로 무늬 없이 밋밋한 검은색 드레스의 가슴께와 골반에는 남자들의 마음을 흔드는 굴곡이 선명했다.
피카니는 자기 바로 뒤에 선 상대가 말하면서 내쉰 숨결이 귓가에 닿는 걸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으면서 담뱃갑을 꽉 움켜쥐었다. 피카니가 숨 쉬는 방법을 다시 떠올리는 동안 하딘이 물고 있던 담뱃대를 입에서 치우고 여인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면서 그가 상대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루나 마법사님?”
루나는 어색하게 딴청을 피우는 척 뜸을 들이다가 쉰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그냥 저희끼리 요즘 통 얘기를 못 나눴잖아요. 왠지 저 혼자만 왕따 당하는… 느낌?”
자기 딴에는 나름대로 애교를 부렸던 거 같은데 그녀가 의문형으로 말꼬리를 올리는 순간 하딘은 소름이 돋았고 피카니는 호흡곤란 직전이었다. 남자들이 말을 잃어버리자 루나가 이번에는 뜬금없이 갑자기 차분해진 목소리로 나긋하게 말했다.
“저도 제 처지는 알지만, 영영 이렇게 지낼 수는 없잖아요.”
하딘은 애써 쓴웃음으로 얼버무리며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었다.
“예. 예. 지당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저번 전투 이후로 상태는 어떠십니까? 보통 그만한 경험을 겪고 나면 대부분은 그… 반작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딱 봐도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군요.”
루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본인은 자기 입꼬리가 비대칭으로 올라갔다는 걸 몰랐다. 그녀는 손끝을 붙였다 뗐다 불안해하는 티를 내다가 힘겹게 말했다.
“아직도 저한테 왜 붕대를 낭비하냐며 호통을 치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려요. 학교에서는 온갖 탁상 토론을 다 해봤는데 자기 몸으로 직접 현실과 부딪치니. 아프네요.”
피카니의 머릿속에서는 순간적으로 루나에게 호통을 쳤다는 그 부사관을 올가미에 매달아서 절벽에 던져버리는 광경이 지나갔다. 하딘은 눈가에 힘을 주느라 얼굴에 조금 주름이 졌다.
“마법사님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빈센트도 다친 사람이라면 편을 가르지 않고 치료해줬죠. 피치 못할 상황에서는 우선순위를 고를 수밖에 없고, 거기에서 우리는 선을 넘거나 선을 지키게 되지요. 하지만 마법사님은 선을 지키면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뿐이죠.”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정말로요?”
“생각해보니 그때 마법사님에게 호통을 친 사람 중에는 저도 있었군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죄책감 빼고는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군인다운 행동이 아니었죠.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 자기 역할을 다했을 뿐이에요. 괜찮아요. 일단 털어놓으니까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대위님.”
“마찬가지입니다, 마법사님. 가보겠습니다.”
대위는 자신의 말과 함께 어딘가를 향해 자리를 떠났다. 이제 자리에 루나와 피카니만 남게 되자 루나가 먼저 대뜸 말문을 텄다.
“사실 피카니 씨하고 이야기하러 왔어요.”
“누구? 저요? 아. 예! 그렇군요. 예?”
“괜찮으세요?”
루나가 걱정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잠깐 발작 증상을 보이던 피카니는 어떤 재주를 부린 건지 바로 침착한 태도를 되찾았다.
“당연히 괜찮죠. 무슨 일이시죠?”
“그냥 저희끼리만 얘기할 일이 요즘 없었잖아요. 다 큰 어른끼리 계속 어색하게 거리 두는 게 장기적으로 좋은 행동도 아니고요. 요즘은 피카니 씨의 등 뒤에 같이 말을 타면서 느꼈던 예전의 느낌이 그리워요. 아, 연애 감정 아녜요. 진짜 아니에요.”
그녀의 냉정한 목소리에 피카니는 침울한 표정으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두 번이나 말할 필요는 없잖아. 어 흠! 그러니까, 예전의 그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다고 하셨죠. …그게 뭔데요?”
“어……. 어……. 어…….”
루나는 한동안 백치처럼 똑같은 소리만 반복하다가 낮게 헛기침하고 공들여서 말했다.
“희망이요. 순수하고 좋은 친구가 생길 거라는 희망. 전 출가하고 나서 수도원, 교회, 학교에만 줄곧 갇혀 살았거든요. 그런데 그 쪽에게는 제가 접하지 못했던 것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어요. 전 갇혀 살았고, 피카니 씨는 자유롭게 살아오셨으니 그랬던 거겠죠.”
피카니는 눈알을 위로 한 번 들었다가 가운데로 되돌렸다.
“지나치게 자유롭게 살았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레스도 친구 삼기에는 제법 괜찮은 남자 아닌가요? 저보다요. 전 여장만 해봤지 여자가 된 적 없으니까 그놈이 연애 상대로서는 어떤지 모릅니다만.”
“질투하는 거예요? 제 관심이 저쪽으로 향했을까 봐?”
루나가 짓궂은 목소리로 기습하자 피카니는 영혼 없는 표정과 함께 목으로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 아뇨. 아뇨.”
상대와 시선을 한 번 교환하고 더욱 무게 잡는 목소리로 그가 재차 말했다. “아니요.”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농담한 거였어요.”
피카니는 얼굴을 긁적이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표정이 풀리려는 걸 감추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루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루나가 운을 띄었다.
“그러고 보니 피카니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여태 몰랐다니 믿기지 않네요.”
“스물둘이요.”
루나와 정상적인 질문과 대답이 이루어지자 피카니는 기분이 뿌듯했다. 반면 루나는 전신이 얼어버렸다. 루나는 그를 향해 양해를 부탁하는 손짓을 하고 냅다 자리를 박찼다. 그리고 곧장 마차의 짐칸 문을 쾅쾅 두드렸다.
“하자르 씨? 하자르 씨?! 레스! 당장 나와봐요!”
남자가 낸 몽롱한 비명과 함께 짐칸 안쪽에서 뭔가 우당탕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내 누군가가 짐칸의 문을 조심스레 열고 바깥으로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내디디며 땅을 밟았다.
마른 몸매와 껑충한 키. 구멍 나기 직전에 이른 낡은 부츠를 신었고 청바지는 무릎에 구멍이 난데다 수채화 물감이 뒤섞인 구정물처럼 칙칙했다. 셔츠에는 구김살이 가득하고 목깃은 때가 찌들어 검은색으로 염색됐다. 머리는 작고 얼굴은 갸름한데 입가와 턱에 목탄으로 칠한 듯 짧게 자란 수염이 가득하고 핏기가 풍부한 갈색 피부는 모래처럼 푸석거렸다. 이목구비는 바람에 깎인 사암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워 영원히 그 표정 그대로 변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입체감이 선명했다. 눈매는 맹금류처럼 눈꼬리가 위로 솟았고 눈두덩이 넓게 펴지고 깊게 파였다. 그리고 과녁의 정중앙처럼 색소가 무척 진한 검은색 눈동자는 살짝 눈꺼풀에 가려져서 눈자위가 많이 보이는 삼백안을 띄어 계속 노려보는 인상을 품었다.
레스는 최근에 삭발했다가 다시 자라난 머리칼을 굳은살 가득한 손으로 헝클어트리고 머리를 긁적이며 표정 변화 없이 루나를 향해 말했다.
“왜요.”
땅속에서 튀어나왔나 싶을 정도로 거칠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마른 몸집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루나는 상대의 태도는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피카니랑 당신 동갑 아니었어요?!”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그럼 왜 다섯 살이나 어렸다고 미리 말 안 했어요?”
“안 물어보셨잖아요.”
먼지만큼이나 물기나 감정 하나 없는 건조한 말투로 레스는 바로 대꾸했다. 루나는 머리를 감싸고 목을 졸여가며 계속 언성을 높였다.
“신이시여, 스물둘이라니!”
“이미 그놈보다 연상이셨는데 그놈이 다섯 살 더 어려진 게 뭐가 문젭니까?”
레스는 계속 심드렁한 태도를 지켰다.
“제 나이보다 절반 이하가 되니까요! 스물아홉에서 한 살 더 먹고 삼십 대가 되는 순간 영영 청춘을 다 잃어버리는 기분만큼이나 심각하고 거대한 문제라고요!”
“일단 비극적인 청춘을 보내셨다는 건 짐작이 가는군요.”
레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넌지시 불만을 목소리로 드러냈다. 루나는 얼굴 높이로 양손을 들어 올리고 움켜쥐는 손짓까지 해가며 자신의 주장을 강조했다.
“어쨌든 자기 나이의 절반 이하는 애라고 애! 나 좋아한다는 사람이 그런 존재가 되면 기분이 얼마나 이상한지 알아요? 객관적으로도 스물 둘은 지나치게 어리잖아요!”
레스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자기 손톱이나 아무 의미 없이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남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철 안 든다는 말 들어보셨죠?”
“예!”
루나는 레스를 노려보며 아주 굵게 대답했다.
“피카니는 진짜로 그런 부류에요. 그놈이 애처럼 느껴진다면, 자연의 섭리입니다. 유난 떨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이런 식으로 관점을 바꾸는 건 어떻습니까?”
루나는 그 말을 천천히 곰 씹어가며 서서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아주 차분하게 이해했다는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피카니 씨한테 제 나이는 절대로 밝히지 않았으면 하네요.”
레스는 지휘봉을 드는 듯한 손짓을 하면서 뭔가 말하려다가 자세를 뒤로 물리고 말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녀는 턱에 손을 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자가 마담이나 맴 대신에 레이디라고 불릴 수 있는 나이의 허용범위가 어디까지죠?”
“글쎄요. 전 문명인도 아닌걸요.”
루나가 지극히 진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뭐라 말했다.
잠시 후, 다른 장소에서 레스의 앞에는 타티아나가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고 쪼그려 앉아있었다. 레스는 하던 말을 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루나 씨는 이제부터 나하고 동갑이야.”
“네가 웬일로 나한테 먼저 말을 거나 싶었는데 이딴 소리나 듣다니.”
타티아나가 얼굴을 감싸 쥔 채 뇌까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스가 한쪽 눈살을 찌푸렸다.
“이딴 소리라니, 이곳에서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사람이 내린 청이라고.”
그녀는 진저리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무릎에 손을 대고 일어났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나저나 너 요즘 말이 없었잖아. 웬일이야?”
레스는 바람에 흔들린 거처럼 아주 살짝 고갯짓했다.
“최근 내가 이상하게 굴긴 했지. 그냥 저절로 괜찮아졌어.”
“신기하네. 사람들 대부분은 저절로 괜찮아지지 않거든.”
“난 그게 되니까 아직도 살아있는 거겠지.”
타티아나의 의뭉에 찬 물음에 레스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상대를 삐딱하게 바라보며 이번에는 그가 물었다.
“그런데 넌 몇 살이야?”
타티아나는 뚱한 표정으로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안 알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