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4화 〉[5권] 164회 - 와일드 카드 (164/188)



〈 164화 〉[5권] 164회 - 와일드 카드

손님방의 두 아가씨가 독서에 열중하는 동안 단테는 시튼과 함께 서재에 있었다. 방안에는 단테의 주판 두드리는 소리와 만년필 끼적이는 소리로 가득했다. 책상 구석에 놓인 세워둔 송곳에는 전표들이 꽂혀서 층층이 쌓였다. 단테는 자기가 손을 본 회계 장부를 시튼에게 건네주었고 장부를 훑어본 시튼은 감탄했다.


“정말로 수완이 좋으시군요. 산더미처럼 밀린 일감을 순식간에 정리하시다니.”


단테는 간결한 동작으로 만년필 촉에 묻은 먹물을 작은 걸레로 닦았다.

“다른 건 몰라도 시튼 씨가 돈 욕심이 없는 분이라는  이제 확실히 알겠네요. 어쩌다 상회와 연이 닿았나요?”


시튼은 쓰고 있던 동그란 안경을 내리고 손수건으로 닦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선택지가 없었어요. 설명하려면 복잡해요.”

단테는 입가를 오므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뭐. 저희가 상관할 일은 아니죠. 그런데 저희를 마을까지 안내해주신 까닭이 정말로 샤키 때문이었나요? 다른 이유 없이?”


“사실 여러분들이 지나갈 길에 덫이 엄청나게 많았어요. 여러분들도 봤었던 그 양고기는 일부러 허술하게 놓아둔 가짜 미끼였습니다. 진짜 덫이 다른 곳에 수두룩하게 숨겨져 있었죠. 저조차도  외우기 힘들 정도로.”

“오. 하마터면 저희가 공들인 덫들을 망쳤겠군요.”


단테가 허허하고 웃자 시튼도 같이 웃었다. 차분한 말투로 단테가 다시 질문했다.

“예전에도 상회에 소속된 사람과 거래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에서 상회를 만나는  처음이네요. 이해도 안 되고요. 지하 거래도 엄연히 사람 사는 동네에서 해야지 이윤이 남는 법인데 이런 곳에서 혼자 지부를 운영하신다고요?”


“전표하고 장부를 보셨잖습니까. 이윤은 제게 의미가 없어요. 그리고 상회 쪽에서도 딱히 상납금을 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상회가  평화로운 곳에서 얻는 게 뭐죠?”


시튼이 안경을 도로 쓰면서 깍지낀 손을 배에 대었다.


“깃발이요. 근방의 수백 제곱킬로미터가  사유지입니다. 상회의 일원으로서 평소 업무는 여러분들이 이미 만나보셨던 것과 같은 위폐범들을 도와주는 겁니다. 그들이 생산한 위폐를 제가 받아서 물자와 교환해주고 그 위폐는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다른 업자들에게 전달되죠. 가장 중요한 업무는 편지 전달입니다. 물론 누구로부터 누구에게 전해지는지는 저는 관여하지 않고요. 저 홀로 운영하는 개척 시대의 ‘현금 인출기’인 셈이죠. 아는 사람들만 이용하는 무법자들의 중립 구역.”


단테가 조심스레 손을 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니까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을 사들인 돈은 어디서 구하신 거죠?”

서재 안으로 아자리와 샤키가 들어왔다. 단테의 질문에는 시튼 대신 아자리가 대답했다.


“로보의 현상금이죠? 전쟁과 인플레로 물가가 망가지기 전의 1천 탈레르라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높았으니까요. 게다가 원주민들이 갇혀 지내는 땅이면 막말로 똥값이었겠죠.”


시튼은 점잖게, 그리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사실 이곳은 원래 버젓한 문화를 가진 원주민들의 터전이었어요. 들소 떼의 이동에 맞춰서 유목과 수렵, 목축을 위주로 생활하던 부족들이 모여 있었죠.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숲의 움막과 산의 동굴에서 지냈고요. 하지만 전쟁이 와시추들의 승리로 끝나자 들소들은 전멸했고, 숲들은 마을과 도시를 짓는 재료가 되었고, 아이들은 억지로 백인들 가정으로 입양 당했습니다. 부족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자기 친부모와 대화를 할 수 없게 됐죠.”


날이 퍼렇게 선 시튼의 말에 방 안의 분위기가 어두워지자 시튼은 서둘러 헛기침했다.

“죄송해요. 쓸데없는 말을 해버렸네요. 이제 본론으로 돌아갈까요?”

아자리와 샤카자이아는 단테하고 시선을  번 교환하고 서로 고갯짓을 했다. 아자리가 허리춤에 단 가방에서 동판을 꺼내서 다들 볼  있게 들었다. 시튼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 동판을 손으로 가리켰다.

“일단, 그건 상회에 등록된 동판이에요. 아까 사탄타 씨의 토템이 반응했던 건 아자리아 양이 마법사라서 그랬던 게 아니에요.  동판 때문에 그랬던 거죠. 마법이 걸려있거든요.”


단테가 말했다.

“상회는 장물을 시장가의 절반으로 매입한다고 들었습니다. 비록 상회에 소속된 장물이라고 해도 엄연히 우리 손에 있으니 거래할 수 있겠죠?”


시튼이 바로 대답했다.


“가능합니다. 규칙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뺏긴 시점에서 진 거니까요. 문제는 절반으로 깎여도 동판은 가치가 너무 높습니다. 제가 가진 화폐나 재화로는 값을 치를 방법이 없습니다.”

“다른 지부에 연락해서 특별 접대를 구매할 수는 없겠습니까?”

아자리가 단테의 말에 의문을 갖고 말을 걸었다.


“특별 접대를 구매한다고요?”

단테가 아자리를 바라보며 설명했다.

“상회는 모든 것을 사고파는 곳이에요. 충분히 낼 능력만 있다면 군대를 부르거나 비밀 철도를 통해 대륙을 횡단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시튼이 말을 받았다.


“물리적으로 다른 지부와 연락할 방법이 없습니다. 여긴 전보 기계나 전서구가 없어요. 업자가 한 달에 한 번 지나가는데 이미 며칠 전에 들러갔어요. 아까 단테 씨하고 미리 말한 사항인데 전 지부의 운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죄송하게 됐군요.”


아자리가 시튼에게 물었다.


“하다못해 저희에게 걸린 현상 수배라도 내릴 수는 없나요?”


“원하신다면 연락이 전달되는 대로 처리되기는 할 겁니다. 하지만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왜죠?”


“바로 여러분에게 현상금을 걸었던 누군가가 액수를 더 높여서 갱신할 겁니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장물을 거래하는 거니 명세서를 통해 여러분의 흔적이 남을 겁니다. 상회는 그런 정보까지도 돈으로 팔아버리는 자들입니다.”


단테가 중얼거렸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어디로 가고.”


“기회의 땅은 빈말이고 이곳은 무법자들의 땅이니까요. 제가 할 말은 아닙니다만.”

시튼의 말이 끝날 때까지 아자리는 뺨 안쪽을 깨물면서 생각을 곱씹었다.


“위험을 감수할 각오는 되어 있어요. 뭐가 제일 나은 방법이냐가 문제죠. 마침 현상금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어째서 시튼 씨는 저희를 경계하지 않으시나요?”

시튼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상회의 현상금 명단에 걸린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정말로요?”


“정보가 공개되지 않았고, 또 거액의 액수가 걸렸다면 흉악범이 아니라 사정이 복잡하다는 뜻이죠. 여러분에게 걸린 액수는 전성기의 ‘와일드번치’보다도 더 높아요. 전 그러한 사람과는 적대하기보다는 먼저 친구가 되고 싶답니다.”


“시튼 씨는 정말로 특이하신 분이군요.”


아자리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시튼도 은은하게 웃었다.


“예시를 하나 들자면 지금 명단 윗부분에 자리 잡은 2인조가 있겠군요. 1년쯤 전에 이 정체불명의 2인조가 상회 산하의 유정과 지부를 박살 내버리고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풀어준 적이 있었죠.  지부의 금고까지 털어서 계약서를 태워버리고 돈도 골고루 나눠줬다죠. 그리고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네요. 전설의 ‘가면 쓴 조로’처럼.”

 이야기를 들은 샤카자이아가 아자리에게 속삭였다.

“왜 저 2인조에서 영문모를 친숙함이 느껴지는 걸까?”

“저도 비슷한 예감이 드는데 지금은 그냥 넘어가죠.”

아자리는 샤카자이아에게 속삭이고 서재의 벽에 기댔다. 시튼이 손짓과 함께 말을 덧붙였다.


“심지어 죽은 사람조차 아무도 없었대요.”


아자리, 단테, 샤카자이아는 눈을 지그시 감고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튼은 일행의 반응에 도리어 당황하고 하려던 말을 잊어버렸다. 때마침 벽시계가 9시 정각을 이루자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분위기가 환기되자 여태껏 말을 꺼낼 기회가 없었던 샤카자이아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양손으로 잡고 있었던 책을 들어 올리고 어린아이처럼 또렷하게 말했다.


“제가 처음으로 읽어본 책인데. 정말로 좋았어요. 책 안에서 로보와 시튼 씨가 살아 움직이는 걸 느꼈어요. 꾸준히 글을 배워서 다른 이야기들도 다 읽을 생각이에요.”

시튼은 허탈하면서도 씁쓸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러운 찬사네요. 참고로 책을 낸 이후로 어느 10살짜리 애한테 ‘당신은 참으로 무자비하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에요 시튼 씨’라고 엽서로 혼난 적이 있답니다. 그럴 만도 하죠.”


바깥에서 누군가가 방문을 똑똑 두드리고 문을 살짝 열었다. 사탄타가 틈 사이로 입을 대고 말했다.

“선생님. 식사 시간이 한참 늦었습니다. 오늘은 추장님네 댁에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시튼이 자기 이마를 때리며 눈을 껌뻑거리다가 뒤늦게 벽시계를 보았다.

“벌써 그렇게 됐나? 이런.”


“참고로 추장님께서 오늘  손님들도 환영한다고 하셨습니다.”

“고마워요!  출발하겠습니다.”

사탄타가 나가자 시튼이 바로 일행에게 물었다.

“만약 원하신다면….”

“당연히 좋죠.”

시튼의 질문을 다 듣지도 않고 아자리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소총을 껴안고 피카니는 홀로 불가를 지키고 있었다. 달빛이 거의 없는 깜깜한 밤이었다. 벌레 소리와 바람이 귓가를 스치는 감촉을 벗 삼아 모닥불을 지켜보는데 레스가 저벅저벅 걸어와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요즘 어떠냐?”


피카니는 어색하게 표정 없이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저으며 낮게 답했다.


“그냥 그래.”

“합석해도 될까?”

피카니는 옷 속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나 지금 불침번 중인데.”

“나하고 같이 하면 되겠네. 얘기 좀 하지. 갖고 놀 것도 가져왔어.”


그렇게 말하며 레스는 허리 뒤에 숨겨놨던 카드 다발을 보였다. 피카니가 그걸 보며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그건 어디서 가져왔…. 마담의 살롱에서 여기까지 갖고 왔어?”

“여태껏 너하고 단둘이 되기를 기다렸지.”


레스는 상대의 맞은편에 한쪽 무릎을 세우면서 털썩 땅바닥에 앉았다. 카드 다발을 자기  위에 올려놓으면서 그가 물었다.

“질문 포커 어때?”


피카니는 잠깐 생각하고 상대에게 눈짓했다.

“파이브 카드? 아니면 홀덤?”


“홀덤.”

“좋아. 카드 돌려.”

피카니가 몸에 두르고 있던 모포를 땅에 펼치자 레스는 카드 다발에서 조커 2장을 따로 꺼내서 제거하고 한 번 더 섞은 다음 피카니에게 뒤가 보이게 놓인 카드를 2장 건넸다. 그리고 자기 몫으로 카드를 2장 뽑고 뒤가 보이게 놓았다. 피카니는 자기 패를 흘겨보고 땅바닥을 손등으로 두  살짝 두드렸다.

“하나.”
레스도 땅을 손등으로 두드렸다.


“체크.”


각자의 패를 확인하고 베팅이 끝나자 딜러를 맡은 레스는 다발에서 카드를 3장을 판에 펼쳤다. [7♠ 6♠ 3♠] 레스는 자신의 패를 흘겼다. [A♠ K♥] 레스는 근처의 돌멩이를 2개 가져와 칩 대용으로 썼다.


“질문을 하나 레이즈. 이제 질문 2개야.”

피카니는 자기 패를 곁눈질하고 자신도 돌멩이를 2개 가져와 앞에 놓았다.

“콜.”

레스는 다발의 가장 맨 위에 있는 카드를 한 장 밑으로 내리고 다음 카드를 판에 펼쳤다.


[7♠ 6♠ 3♠ 2♣] 레스는 뺨을 깨물고 입속에서 입술을 핥았다. 피카니는  하나 껌뻑이지 않고 레스를 향해 삿대질하며 근처의 돌멩이를 2개 더 가져와 자기 앞에 놓았다.


“2개 더 레이즈.”

레스는 뺨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고심 끝에 들고 있던 패를 덮었다.


“여기서 죽을게. 뭐였어?”


피카니가 패를 보여줬다. [9♣ 8◆] 레스는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었으나 그냥 재미로 자신의 패를 피카니에게 보여줬다. 피카니가 코웃음을 쳤다.


“첫판부터 재밌어질 뻔했는데 너무 일찍 죽었잖아.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패였는데.”


“난 워낙 겁이 많아서.”


“난 네 표정을 보고 개패를 들고 있는 줄 알았지.”

“네 차례야. 질문 2개.”


피카니는 눈을 감으면서 평온한 표정으로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항상 묻고 싶었던 건데 대체 누구를 죽였기에 추방당한 거야?”


레스는 한쪽 입가를 팽팽하게 잡아당기면서 인상을 쓰다가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 붙은 죄목은 왕 시해자야.”

무거운 침묵 뒤에 피카니가 단말마를 냈다.

“뭐?”

“정확히는 술탄의 장남을 죽였어. 술탄은 노환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였고.”


“차기 계승자를 죽였군. 왕 시해자라는 딱지가 붙는 것도 당연하겠네. 왜?”

“그거 두 번째 질문이야? 내가 왜 죽였는지에 대해서?”


“그래.”

“세 번째 맹세를 지켜야만 했거든. ‘냐 아우 바달’. 정의가 실패한 곳에 복수가 있노라.”


피카니는 경악으로 벌어지려는 입을 손으로 가리면서 상대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2개  썼어. 계속할 거야?”


“물론이지.”


피카니는 카드 다발을 내놓으라는 의미로 손바닥을 보였다. 레스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피카니에게 다발을 내놓았다. 딜러를 맡은 피카니는 세련되고 재빠른 솜씨로 카드를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서 퍼펙트 셔플을 했다. 마치 화살처럼 레스를 향해 2장의 카드가 모포 위를 낮게 날아왔다. 그는 패를 확인하고는 낮게 까는 목소리로 외쳤다.

[A♠ A♣]

“야  개자식아.”


피카니는 레스의 불만에 무슨 소리냐는 듯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장난치지 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베팅할 차례야.”

레스는 숨을 길게 내쉬고 돌맹이를 3개 쌓았다. 피카니는 자기 패를 보지도 않고 콜이라고 외쳤다. 곧 모포 위로 카드가 펼쳐졌다. [A♥ A◆ K◆] 피카니가 웃었다.

“판 한  재밌게 흘러가네.”

“내가 장난치지 말랬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난 죽을래. 겁나서 못 들어가겠다.”


레스가 한숨을 쉬면서 쥐고 있던 에이스 2장을 내팽개치다시피 판에 던졌다. 피카니가 능글맞게 웃었다.


“질문 3개. 그쪽 차례야.”


“루나 씨의 어떤 점을 보고 반했어?”


피카니는 콧등을 긁적이고 헛기침을 하며 쑥스러워하는 티를 냈다.

“그냥. 딱 봐도 알잖아. 객관적으로 아름답고, 순수한 분이라는 거.”


“나도 알아. 나조차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내가 본 사람 중에서 손꼽히게 매력적인 분이라는 걸 알겠어. 그러니까 어떤 점을 보고 반한 거야?”

피카니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괜히 주변을 살피고 레스를 향해 얼굴을 기울였다.


“이건 진짜,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대답이나 해.”

심호흡 뒤에 피카니가 조심스럽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나 씨를 보면…. 내 어머니가 떠올라.”

“네 어머니?”

“마법사님을 보고 있으면 아버지로부터 지켜드리지 못했던 어머니가 떠올라. 그 이야기는 전에 했었지?”

“기억하고 있어.”

“보호해드리고 싶어지고.  근처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그분이  감싸주는 기분이 들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숙한 매력이 있으시니까. 난… 다른 사람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어.”

“그 기분은 나도 이해해. 두 번째 질문.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자기 무덤을 팠냐?”

“무슨 소리야?”


“너하고 내가 처음 만났던 순간을 루나 씨 앞에서 그대로 말해버렸다며. 그나마 루나 씨가 워낙 마음이 넓으신 분이라 지금처럼 지내는 거지 네가 꿈꾸는 미래는 끝장났어.”

“말은 정확하게 해야지.  미래는 병원에서 내 정체를 밝혔을 때 끝장났어. 나도 주제 파악 정도는 할 줄 안다고.”

“그래서 대답은?”

피카니는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그대로 얼굴을 잡아당기며 뒤통수까지 손을 뒤로 넘겼다. 그대로 밤하늘을 바라보며 입김을 피워 올리다가 피카니는 고개를 내렸다.

“용사가 된 이후로 내가 한 거는 모조리 거짓말에 거짓말과 거짓말뿐이었어. 숨기는 건 고통이야. 너무 지겨워서 너하고 만나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털어놓은 건가 봐. 나한테는 아무 이득도 없는 짓이었는데.”

“나쁜 짓도 가끔 해야 재밌지 일이 되어버리면 고통이라더라.”


“내 말이! 방금 말은 잊어줘.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그런 짓하고 싶지 않았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봐주셨으면 했지. 결과가 어떻든 간에 난 받아들일 각오가 됐다고.”

“진짜?”

잠깐 어색한 침묵 뒤에 피카니가 레스의 시선을 피하면서 얼버무렸다.


“내가 반성하는 모습을 마법사님이 보시고 마음이 움직일 미래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그럼 그렇지.”


“그러고 보니 내일 일정 들었어? 우리는 근처의 주둔지에 들를 거 같아.”

“안 그래도 이곳에는 지역을 담당하는 부대가 없는지 물어보려던 참이었어. 어떤 곳이야?”

“예비군, 예비장교, 아니면 돈 많거나 높으신 분들의 자녀들이 뒷돈 주고 들어가는 제일 안전한 부대야. 왜 제일 안전한지 알아?”


“마왕군이 딱히 쳐들어올 가치가 없는 허허벌판이니까?”

“정확히는 보호구역을 담당하니까. 마왕군이 온다면 그 부대는 부리나케 튀었다가 주력군에게 소식을 전하지. 그게 놈들 담당이야.”


“원주민들을 침략자들로부터 지켜줄 생각은 전혀 안 하는군.”

피카니는 다리를 꼬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잠깐 이야기가 딴 길로 새버렸군. 질문 하나 남았네.  말 있어? 아니면 남겨둘 거야?”


“내가 언젠가는 평화로운 존재가   있을까?”


피카니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건 질문이 아니잖아.”


“내가 선을 넘었을  그냥 고집부리지 말고 죽었어야 했을까? 살 의미를 잃어버리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로보처럼.”

“레스?”

“내 고집 때문에 죽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만해.”


“우리가 보급 행렬과 같이 움직였을 때 전선으로 갈 신병 중에 내가 눈여겨본 꼬마가 하나 있었어. 싸움이 끝나고 나서 녀석이 무사한지 찾아다녔는데 어디에도 없었지. 어디에도 없었어.”


“그런 식으로 계속 파고들면 끝이 없어. 가서  자.”

피카니는 모포에 펼쳐진 카드들을 한데 모아 정돈하고 레스에게 돌려주었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야. 루나 씨나 다른 일행들마저 나보다 널 더 좋아해. 요즘 계속 쓸쓸했는데 방금 오랜만에 같이 놀아서 즐거웠어. 모르스의 말은 잊어버리고 눈앞의 일에만 집중해.”


레스는 카드 다발을 묘한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피카니에게 눈짓했다. ‘그래’. 그는 자리에서 사라졌다. 피카니는 은근슬쩍 카드 다발 사이에서 훔치고 손바닥 밑에 숨겨둔 조커 카드를 꺼내 멍하니 구경했다.

“와일드 카드…. 와일드 카드는 두 장이지. 무적처럼 보이지만 약점도 분명한 패. 마치 너처럼. 한 장은 네가 분명하고. 다른 하나는 누가 될까? 누가 되어야만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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