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5권] 165회 - 제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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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장은 한창 밝게 빛나가는 동네의 밤거리와 벽시계를 번갈아 보며 퇴근을 기대했다. 열차역의 깊어가는 어둠 속에는 수명이 다해가는 초라한 전구가 몸을 불사르는 가로등 하나와 직원실 안을 비추는 앙상한 촛불만이 빛나고 있었다. 역장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벽에 걸고 외투를 갈아입었다. 그러다 누군가 있는 걸 보고 역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둠 속의 누군가가 쓰고 있는 하얀색 챙모자가 눈에 확 띄었다. 역장이 말을 걸었다.
“거기 누구십니까? 오늘 열차는 끊겼습니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자 열차역장이 질겁했다. 상대가 이쪽으로 다가오자 가로등의 불빛 아래로 그가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거대한 늑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
“진정하시오. 그냥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니까.”
중년 남성은 하얀색 밀짚으로 만든 중절모를 고쳐잡으면서 인자한 말투로 그를 달랬다. 돌처럼 거친 느낌이 드는 검붉은 피부에 얼굴은 파리하고 콧대는 소총의 가늠자처럼 오뚝했다. 눈은 맹수의 것처럼 흰자위와 검은색 눈동자의 경계가 보통 사람보다 유난히 뚜렷했다. 마르고 키가 컸는데 입고 있는 정장에 세련된 세로줄 무늬까지 새겨져서 인상이 더욱 날렵해 보였다. 뺨과 입가에 연륜이 느껴지는 깊은 주름이 파였고 수염은 없었다. 정장 위에 걸친 흑색 프록코트에 잘 닦인 구두까지, 황무지에서는 보기 드문 제대로 차려입은 신사였다.
신사의 옆에는 사람 몸집의 2배는 될 법한 회색 늑대가 무뚝뚝해 보이는 표정과 졸려 보이는 눈으로 역장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평소에 볼 일이 전혀 없는 괴상한 광경이었으나 신사의 차분한 태도와 보면 볼수록 순식간에 친근해지게 되는 늑대의 묘한 표정 덕에 역장은 금방 마음을 다스리고 물었다.
“하지만 선생님,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열차는 끊겼습니다. 친구분께서 열차로 오실 예정이었다면 내일 오실 겁니다.”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리다. 몸조심하면서 들어가시오.”
역장은 상대의 완고한 태도에 이제 신경을 끊고 정중히 고갯짓으로 인사를 남기고 몸을 돌렸다.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옮기다가 역장은 도저히 신경 쓰여서 결국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늑대가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하자 종이처럼 얇고 넓은 분홍색 혓바닥이 팔랑거렸다. 그러다 이쪽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위협하듯 작게 울었다.
“웍!”
역장이 그제야 자리를 떠나자 신사는 한숨 돌리고 이빨 사이에 성냥을 끼우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늑대가 두 번째 하품을 뱉다가 엎드린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저쪽으로 돌렸다. 선로를 따라 이어지는 곳에 나타나는 지평선 너머로 검은색 형체 하나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좀 더 기다리자 귀에 거슬리는 금속이 삐걱거리는 소음이 들렸고 소음은 점점 커졌다. 마침내 신사와 늑대 앞으로 철로의 금속 부분만 따라서 자전거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자전거를 몰고 온 사내는 나무껍질처럼 두꺼운 가죽 외투로 온몸을 가렸고, 얼굴은 앞부분이 뾰족한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목에 두른 머플러를 올려서 가리고 있었다. 거칠게 달려왔던 자전거의 뒷좌석에는 어린아이가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썩을. 썩을. 썩을.”
가죽 외투를 입은 남자가 욕을 중얼거리며 자전거로부터 엉거주춤 내리자 뒷좌석에 앉은 어린아이도 깡총하고 토끼처럼 자리에서 내려왔다. 어린아이는 그대로 늑대에게 달려가 와락 껴안았다.
“슌카와칸! 나 보고 싶었지? 나도 보고 싶었어! 역시 머리 위에 올라타는 것보다 양손으로 안는 게 더 좋아!”
“캉!”
늑대도 기분 좋은지 입을 헤벌쭉 벌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발로 상대를 껴안았다. 신사는 이빨 사이에 끼웠던 성냥을 손으로 집어서 빼내고 힘겹게 자전거를 끌고 오는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상대가 모자를 벗고 머플러를 내리자 피로에 찌든 백인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입가에는 하얀색 수염이 가득하고 그림자가 질 정도로 깊은 눈두덩 속의 눈동자는 핏덩이처럼 새빨갰다. 모자에 눌린 부스스하고 윤기 없는 하얀 새치들은 덥수룩하게 이리저리 삐쳐있었다. 잠꼬대하는 거 같은 맥빠지는 목소리로 남자가 대답했다.
“안녕 레오포드. 나한테 무슨 일 있었는지 걱정도 안 해줘?”
레오포드는 잇자국이 난 성냥으로 상대를 삿대질했다.
“원래 너한테는 어떤 일이든 일어나잖아.”
“믿거나 말거나 알고 싶든 말든, 오는 길에 우리는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매우 흉포해진 모히칸들을 만났어. 모터바이크를 타고 대형 토마호크와 작열탄이 장전된 총으로 무장해서 우리를 추격해왔는데….”
“캘러헬. 열차를 타고 다녀. 평소에도 철도는 남자의 로망이라며 노래를 불렀잖아.”
캘러헬은 자신의 주머니를 뒤집어 먼지 한 톨도 안 나오는 자신의 상황을 드러냈다.
“나 지금 땡전 하나 없어. 노면전차에 방탄판을 도배할 때 나간 지출이 치명적이었지. 집은 타서 무너졌고 내 장비들과 저축은 물론 한창 조립하고 있던 모터바이크도 잿더미에 묻혔어.”
“너 운전면허 없잖아. 총은 가져왔어?”
“아니. 전혀. 그래서 여태껏 묵혀놨던 빨래 장대의 봉인을 풀어야만 했지.”
캘러헬이 그렇게 말하며 외투 앞섶을 열고 안주머니에 손을 넣자 물리적으로 수납될 리가 없는 길이가 2m는 될법한 굵직한 철봉이 그의 손을 따라 바깥으로 난데없이 튀어나왔다. 레오포드의 눈가에 진 주름이 깊어졌다.
“당장 가진 전차를 처분하면 됐잖아.”
“그걸 어떻게 처분해! 나 같은 사람 아니면 방탄 전차를 누가 만드는데?! 난 은퇴하면 거기서 평화롭게 살 거야! 어쨌든 모히칸들의 추격은 대수롭지 않았어. 자전거 안장의 형편없는 설계가 더 치명적이었지. 내 혈관에 흐르는 악마의 피조차도 여정 내내 전립선에 가해지는 압박에는 답이 없다며 고개를 내젓더라고. 덕분에 라카키만 신났지.”
라카키가 늑대의 북슬북슬한 목덜미를 계속 긁으면서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캘러헬을 올려보았다. 레오포드와 늑대는 나란히 똑같이 뚱한 표정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상회에서 보낸 놈들이었나? 그… 모히칸이?”
캘러헬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충 손으로 빗질하고 모자를 썼다.
“나라는 걸 알고 온 거 같지는 않았어. 저쪽에서 슬슬 돈을 뿌리기 시작한 게지.”
라카키가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학자가 말하듯 설명하는 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모히칸족은 세기말에 특히 기승을 부리며 오물을 소독하려는 습성을 띱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마지막 모히칸족이 몇 세기 전에 있었으니 지금은 죄다 모방하는 놈들뿐이죠.”
늑대가 라카키를 향해 뭐라고 짖자 라카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세기말은 이미 지났다고? 아, 맞다. 지금은 20세기 초지.”
레오포드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어서 가자고 뜻으로 손을 저었다.
“우리가 동시에 현장에 뛰게 될 날이 또 와서 참으로 기쁘군, 토마스 트로이 캘러헬. 케이트한테 상황은 전보로 들었어. 매그놀리아 사건 이후로 핑커튼 사무소는 정부 일을 맡지 말라고 선고가 내려진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역시 언젠가는 이럴 날이 올 줄 알았어.”
“규칙이란 것들은 예외가 있어야 존재하거든.”
캘러헬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질질 끌고 가던 자전거가 도중에 와르르 무너지더니 허공에 자전거 손잡이만 남아버렸다. 그는 손에 들린 손잡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근처에 대충 던졌다. 레오포드는 바닥에 고철들을 내팽개치는 동료의 행동에 불만을 표했다.
“네가 무법자라고 해서 무단 투기를 해도 괜찮은 건 아니야.”
“무단 투기? 저거 두랄루민이야. 폐품팔이하는 거지한테 기부한 거라고.”
그들은 어두운 골목을 골라 점점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라카키는 늑대의 등 뒤로 벌렁 누워서 기이할 정도로 균형을 잘 잡으며 밤하늘을 향해 발을 휘적거리며 놀았다. 레오포드가 깨물고 있던 성냥을 중절모의 리본에 꽂으면서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같은 쇼생 출신의 군인이 우리와 동행할 거라고 들었는데. 어디 있지?”
“내일 열차로 여기에 도착할 거야. 내가 그러라고 했어.”
“왜?”
“내가 먼저 앞질러서 안전한지 확인하려고. 만약 내가 열차에 타서 같이 왔다면 흉포한 습격자들에 의해 열차가 공격받아서 무고한 피해자는 물론 선로가 미리 끊어졌을 수도 있겠지. 아까 네가 말했듯이 나한테는 어떤 일이든 일어나니까.”
“마토아카의 딸에게는 뭐라고 말했어? 이름이…. 요즘 바쁜 일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핑핑 도는군. 그 아이 이름이 뭐였지?”
캘러헬이 들고 있는 철봉을 땅에 찍으며 잠깐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샤카자이아. 무슨 말 하는 거야??”
“그 아이가 물어본 것 빼고 나머지 전부. 그중에서 얼마나 말해줬어?”
캘러헬이 입술을 깨물면서 대답을 뜸 들이자 레오포드가 먼저 말했다.
“참고로 난 아무 말도 안 해줬어. 가뜩이나 힘든 상황이었으니 마음에 짐만 늘릴 거 같아서.”
그제야 캘러헬이 겨우 입을 떼고 검지와 엄지를 들어서 조그맣게 벌렸다.
“이 정도만큼. 그 아이들이 수소문에 성공한다면 마토아카가 ‘어두운 땅’으로 향했다는 걸 눈치채겠지. 똑똑한 녀석들이니 아마 성공할 거야.”
“‘어두운 땅’이 어떤 곳인지 알면서도 조금이나마 단서를 주다니. 세상에, 캘러헬. 왜 그랬어? 희망을 줘서는 안 됐다고.”
레오포드는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고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늑대와 라카키도 심각해지는 분위기에 서로에게 치던 장난을 멈추고 상황을 얌전히 지켜보았다. 레오포드가 책망하는 투로 말을 이었다.
“치기 넘치는 아이들인데 무모한 짓을 할지 누가 알겠어? 어두운 땅에 관한 이야기도 이젠 다 사라져가는 참인데.”
“우리도 맞서 싸우지 못한 적과 맞서 싸우고 우리를 구해준 아이들이야. 자기 어머니의 행방을 묻는데 어떻게 내가 무시할 수 있겠어?”
둘은 계속 눈싸움을 하다가 라카키의 헛기침에 정신을 차리고 서로 옷깃을 가다듬으며 분위기를 정돈했다. 캘러헬이 말했다.
“그것 때문에라도 내가 바깥세상으로 나온 거야. 내 오랜 악연에 머리까지 숙여가면서. 연방이 무슨 생각으로 그랜드 마스터라는 카드를 두 장이나 꺼냈겠어?”
레오포드가 눈을 찌푸렸다.
“이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자. 저기에 네가 할 일이 있어.”
일행은 골목을 나와 인파가 제법 오가는 사거리의 한복판에 섰다. 동네는 도시라고 할 수준으로 규모가 크진 않았으나 제법 높은 건물들이 번화가에 줄을 섰고 전봇대가 길마다 가로수처럼 꽂혀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계속 시선을 던졌다. 캘러헬이 철봉을 자기 어깨에 걸치면서 상대에게 물었다.
“모르스한테 이야기를 제대로 안 들었는데 내가 할 일이 뭐야?”
레오포드가 슌카와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으면서 대답했다.
“애새끼들 훈계. 어떤 불법 마법사가 어린 마법사들을 대거 꼬드겨서 문명으로부터 여기까지 데려와서 건달 놀이를 하고 있다더군. 그걸 정리해야 해.”
“본거지는?”
래오포드가 엄지로 자기 뒤쪽에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진짜 문제는 구성원들 상당수가 높으신 분들의 자식들이라는 거지. 나머지는 저절로 알겠지? 어린 애들 마음에 상처 남을 짓은 안돼. 모두 멀쩡하게 돌려보내야 해.”
“좋아.”
캘러헬은 철봉의 중간 부분을 양손으로 잡고 풍차처럼 화려하게 여러 번 휘둘렀다. 상대가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 하자 레오포드가 불러세웠다.
“더 안 들어도 괜찮겠어? 너 기다리는 동안 인원 배치와 잠입 경로 그리고 놈들이 바깥으로 놀러 나오는 일정까지 그사이에 전부 다 알아놨는데.”
“하지만 귀찮잖아?”
“그렇지. 그냥 해본 말이야.”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던 캘러헬이 갑자기 한쪽 발만 든 채 굳었다. 그리고 끼리리릭 절묘한 무게중심 조절로 라카키를 향해 몸의 방향을 바꾸고 말했다.
“라카키. 맛있는 거 먹고 싶지?”
“응.”
“알다시피 우리는 돈이 없어. 그러니까 우리는 돈을 벌어야 해. 난 지금 일하러 갈 테니 너도 어떻게든 돈을 벌어봐.”
“우우우우우우우우우.”
라카키는 야유하는 소리를 장난스럽게 길게 내다가 자기 뒤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시늉을 하더니 어느샌가 거대한 축음기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축음기의 목재 몸통에는 ‘제임스 렉터 소유’라고 새겨져 있다.
일행은 자기 몸집에는 너무 큰 축음기를 낑낑거리며 들고 가는 라카키를 따라서 관심이 가장 잘 모일만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축음기를 내리고 라카키는 자리를 잡았다. 레오포드는 라카키에게 자기가 쓰던 중절모를 씌워줬는데 신기하게도 머리가 작은 라카키에게도 치수가 딱 맞았다. 어느 틈엔가 라카키는 어린이용 가벼운 정장 차림에 윤이 반질반질하고 굽이 딱딱한 구두로 완전 무장하고 있었다. 그 사이 캘러헬은 축음기의 태엽을 감았다. 라카키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커다란 나무 상자에서 레코드판을 뒤적이며 물었다.
“어떤 곡이 좋을까?”
캘러헬이 자기 턱에 난 수염을 손톱으로 긁적이다가 손가락을 튕기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caravan palace의 rock it for me.”
라카키가 봉투 안에 들어있는 레코드판을 꺼내 축음기에 올리는 순간 캘러헬은 철봉을 든 채 자리를 박차고 근처의 건물 2층을 향해 장대 높이 뛰기로 들어갔다. 레코드판에 축음기의 바늘이 내려가자 안에서 스윙 재즈 음악이 나팔에서 뿜어져 나왔다. 트럼펫, 베이스, 드럼, 실로폰, 기타, 오보에, 바이올린으로 이루어진 반주와 함께 성숙한 여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소위 나쁜 남자들이란 항상 싸움을 좋아해, 까다롭지. 여자들은 그걸 즐기고 자기들이 행운아라고 생각해.]
캘러헬이 뛰어 들어간 건물 안으로부터 누군가의 비명과 고함, 그리고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라카키는 없는 일처럼 무시하고 목에 맨 넥타이를 고쳐잡은 다음 반주에 맞춰서 구두 굽과 구두 끝을 축으로 삼아서 이리저리 경쾌하게 발과 몸의 중심을 비틀면서 춤을 추었다.
[약골들이 뛰쳐나오고 바닥을 핥아대며 엄마를 찾아대면 그들은 그걸 향해 비웃는다네.]
가수가 도중에 숨을 언제 쉬나 궁금할 정도로 가사의 호흡이 굉장히 길었다. 건물 안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엄마아아아아아!”
캘러헬은 근처에 굴러다니던 잡지 다발을 둘둘 말아 자기 앞에 있는 소년의 정수리를 가볍게 후려치고 3층으로 향했다. 그러다 가는 길에 패거리들의 간식으로 추정되는 하얀 빵과 치즈, 햄 조각이 탁자 위에 놓인 걸 보았다. 캘러헬은 콧노래로 샹송을 부르며 손에 묻은 이물질을 털고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1층에서 올라온 패거리와 3층에서 내려온 패거리가 2층에 모여 지팡이를 들어 그를 향해 겨누었다. 한창 포위되는 와중에도 캘러헬은 자기가 들고 있는 샌드위치만 구경하듯 이리저리 기울이고 있었다. 청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셋, 둘, 하나! 포르차 데르피 스포르티 페카!”
라카키는 캘러헬이 들어간 건물의 2층으로부터 불꽃과 파편이 바깥으로 뿜어져 나와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공연에만 집중했다. 레오포드는 라카키가 앞에 놓아둔 빈 상자에 지폐와 동전을 좀 넣어주고 멀찍이 떨어져서 슌카와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공연을 감상했다. 사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다른 곳에 있던 사람들까지 그곳으로 몰려왔다. 그리고 어느 쪽에 집중해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졌다.
건물 안의 패거리들은 자욱한 연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숨죽이고 캘러헬이 있는 자리를 노려보았다. 연기가 옅어지자 사람의 형상이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걸 보고 소년과 소녀 무리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캘러헬이 노릇노릇하게 익은 치즈 햄 샌드위치를 자랑하듯이 가리키면서 그들에게 말했다.
“크로크므시외 플람베. 역시 직화가 최고야.”
건물 안에서는 앳된 목소리의 비명이 가득했지만, 여태껏 일어난 소란에 비하면 별거 아닌지라 인파의 집중이 라카키를 향하고 있었다. 신명 나게 춤을 추던 라카키가 갑자기 안무 도중에 동작을 멈추고 얼어붙자 음악도 멈췄다. 라카키의 공연에 몰입하던 관객 중 몇 명이 동전을 상자에 던져주자 축음기의 태엽이 저절로 돌아가더니 음악이 다시 흘러나왔고 라카키도 공연을 재개했다.
[내가 말한 약골들 때문에 저곳에 선혈이 낭자할 거라고 누가 믿어주겠어.]
라카키는 쓰고 있는 중절모를 위로 들었다 내렸다 들썩이며 탭댄스를 췄다.
[이건 좋지 않은데. 자기야. 이러면 안 돼. 저런 저런. 이건 좋지 않은데. 자기야. 이러면 안 돼. 저런 저런. 엄마가 그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 다 알고 있었으면서.]
레오포드에게 남자가 다가오더니 수첩을 펼쳐서 그에게 보여줬다. 수첩 안에는 은빛 별을 발톱으로 움켜쥔 독수리의 형상을 한 인장이 박혀있었다. 남자가 애써 들끓는 감정을 억누르며 레오포드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이건 신중히 다뤄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잖습니까.”
레오포드는 성냥개비를 손가락 사이로 이리저리 굴리면서 담백하게 대답했다.
“중병에는 극약을. 이 정도 부작용은 예상했어야지.”
“저희는 이 사태를 어떻게 보고하라는 겁니까? 부장님이 분명 저희를 죽일 겁니다.”
“그럼 죽어버리게.”
남자는 레오포드의 경멸 섞인 냉담한 대꾸를 듣고 어금니를 잘근거리며 라카키의 공연을 향해 동전이나 하나 던져줬다. 축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무에 맞춰서 머리를 흔들던 늑대가 레오포드를 향해 빤히 바라보자 그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가서 도와줘.”
늑대가 라카키의 옆으로 뛰어들자 미리 합이라도 맞춘 듯 둘은 같이 어우러졌고 관객들은 열광했다. 노래가 끝나는 순간에 맞춰서 라카키가 늑대와 같이 위로 펄쩍 뛰어서 공중제비를 돌고는 다리를 꼬아 몸을 돌려서 모자를 쟁반처럼 휙 던져 레오포드에게 돌려주었다. 라카키가 양팔을 머리 위로 번쩍 올리고 양손을 활짝 펼쳐 관객들에게 흔들어주었다.
“쇼다운! 성원 감사합니다! 안녕히들 가세요!”
레오포드는 돌려받은 중절모를 도로 썼다. 라카키의 공연이 끝나자 캘러헬이 자신의 철봉에 청년을 묶어버리고는 양어깨에 걸쳐서 데려왔다. 마치 먹잇감을 도수 운반하는 식인종 같았다. 그의 뒤를 따라 생기가 빨려 나간 듯 기운이 하나도 없는 소년 소녀 무리가 줄줄이 따라왔다. 다 합쳐서 서른 명은 되어 보였다.
잠시 후, 동네 보안관 사무소 지하의 유치장에서 그들은 모였다. 일행은 수갑에 묶인 청년의 맞은편에 모여 있었다. 캘러헬이 모자를 벗고 얼굴을 가렸던 머플러를 내리자 청년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애써 침착해 보이려는 말투를 냈다.
“그래. 그랜드 마스터를 잡으려면 그랜드 마스터가 나서야겠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캘러헬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가 상대를 가리키며 주변의 의견을 물어보듯이 일행에게 시선을 돌리자 레오포드가 말했다.
“네가 상대해. 너 기다리는 동안 난 충분히 많이 일했어.”
캘러헬은 한숨을 깊게 내쉬고 상대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존재하지도 않는 의자에 앉은 듯 자세를 낮추고 보이지 않는 책상 위로 체중을 기울이는 동작을 했다. 그렇게 팬터마임을 계속하며 그가 무게 잡는 목소리로 상대에게 질문했다.
“누구한테서 돈 받았어? 최대한 구체적으로 대답해.”
“전 권력으로부터 억압받는 아이들을 자유롭게 풀어줬을 뿐입니다. 허황한 신의 가르침에 억눌려서 진짜 배워야 할 학문을 배우지 못하고 결국 다른 마법사들처럼 노예가 됐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쪽은 자유의 투사라는 거지?”
캘러헬이 외투 안 주머니에서 뜬금없이 포도주 한 병을 쏙 꺼내고는 겉의 상표를 읽었다.
“아르노 봉프라 그랑쿠르. 자유의 투사가 즐기기엔 너무 비싸지 않나? 혁명가들은 원래 애들한테 싸구려 밥을 먹이고 자기 금고에 이런 걸 넣어두던가?”
청년이 비굴한 태도로 얼버무렸다.
“그냥 어쩌다가 얻은걸…. 보관했을 뿐….”
포도주병의 내용물은 이미 절반 정도 비어 있었다. 캘러헬은 포도주병을 뒤로 뻗어서 라카키에게 건네고 보이지 않는 의자를 뒤로 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늉을 했다.
“내가 나설 가치가 없는 놈이야. 댁들이 알아서 처리해.”
그 말을 들은 시크릿 서비스 요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년이 소리 높여 외쳤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 같은 사람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인데 왜 모르는 척하시는 겁니까! 지금 시대가 정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보다는 왜 날 댁이랑 같은 부류로 취급하는지가 더 신경 쓰여.”
시큰둥하게 그는 대꾸했다.
“사람들의 눈을 아무리 가리고 귀를 막아도 결국 새로운 국가는 탄생할 것이다! 이 기회의 땅 위에서! 마족과 인간들 사이에서! 모든 종족이 공평하게 살아가는 국가가! 모든 이가 생산하고 생산물을 공유하는 시대가 오리라! 제국주의를 물리칠 공산주의 아메리카 합중국의 탄생은 누구도 막지 못해!”
라카키는 그 소리를 듣고는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풉. 푸흐흐흐흐흡. 푸합. 푸크흐흐흐흐흐흐흐. 흑흑흑흑. 죄송해요. 아 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아 하하하하하! 정말 죄송해요. 이건 진짜….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