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1화 〉[5권] 171회 - 오랜 친구 (171/188)



〈 171화 〉[5권] 171회 - 오랜 친구

“왜 그렇게 죽상이야? 하라는 대로 다 해줬잖아.”

모르스는 자신의 얼굴을 비어있는 손으로 한번 움켜쥐었다가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수화기를 쥔 손의 손등에 핏대가 설 정도로 힘을 줬다.

[무법자는 두 가지로 나뉘지. 법을 어기는 자와 법이 필요 없는 자. 무법자 대부분은 범죄자와 차이가 없어,  외의 경우는 우주로부터 땅까지 무사히 내려오는 희귀재질 운석이나 마찬가지지.  둘의 공통점은 드물다는 것과 붙는 금액이 높다는 것, 그리고 치명적인 방사능이지. 어쨌든  너에게 경의를 표했다. 안 그랬으면 오래전에 네가 자고 있을 때 단검을 들고 찾아가거나 네가 마실 커피에 독이나 탔겠지. 물리적으로 무의미한 짓이라서 관둔  가장  이유라는  부정하지 않겠다만.]

“쌓인 게 많아 보이는데 계속 말해봐.”


[무법자들도 나름의 긍지와 품격이란  있다고 어제까지는 생각했다. 내가 멍청했지.  먹는 곳에 쳐들어오는 새끼를 내가 왜 믿었을까. 토마스 트로이 캘러헬. 왜 야구 감독들이 삼루수 앞에 지뢰를 안 묻을까? 왜 축구 감독들이 골대 앞에다가 기관총 참호를  파는 걸까? 반칙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된 사례도 없는데. 이상하지?]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발상인데 언젠가 우리끼리는 그렇게 해보는 거 어때.”


캘러헬은 상대를 향해 혀를 삐죽 내밀었다.


[어젯밤 너의 역할 수행이 날 엿 먹이기 위한 견제 공격이었다면, 여태껏 우리가 겨뤄온 수많은 싸움 중에서 나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타격을 줬어. 바로 내가 감봉당했다는 뜻이지.]

“해고 안 당한  어디야.”


[철밥통 신세에서 해방되면 나야 좋지. 다만 정부도 그게 나한테 포상이라는  알거든.]

모르스가 주먹을 탁자에 내리치자 캘러헬의 수화기에서 둔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거래하고 싶으면 타협을 해! 높으신 분들이 나를 향해 품고 있는 의심이 강해지면 우리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단 말이다! 이 존나게 유치한 새끼야!]

캘러헬이 바람 빠지는 소리로 길게 폭소를 터트렸다.


“드디어 나오셨군. 그놈의 타협 타령. 그 입버릇만 아니었어도 내가 너한테 10배는 친절하게 굴었을 텐데. 어쩌면 슈슈니에게 널 소개해줬을 수도 있겠다.”


[기특하게도 네가 날 맞수라고 인정은 해주는  같으니 나도 너한테 어떻게든 갚아주는  맞수로서 지킬 도리겠지.]


모르스가 자신의 정장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고 뚜껑을 열었다.

[열차가 노선표대로 정확하게 운행됐으니  4분 안에 내가 보낸 무언가가 그곳에 도착한다. 너에게 거절과 승낙이라는 선택지와 약간의 고민할 여유를 제공하겠다.]

캘러헬은 팔짱을 끼면서 한쪽 눈만 크게 뜨고 모르스를 노려보았다.

“말해.”


[빨갱이 사냥 좋아하냐? 개척시대  원주민들 머리 가죽에 현상금 걸었던 거 알지? 빨갱이들 대가리도 값이 후해. 관심 있나?]

“F, u, c, k. 그리고 y, o, u.”

캘러헬은 철자들을 정성 들여 하나씩 차곡차곡 간드러지게 발음했다. 모르스는 자신의 회중시계를 바라보다가 뚜껑을 절도 있는 동작으로 닫으며 말했다.

[다음 역할을 주겠다. 약 3분 뒤에 그쪽으로 도착할 인물의 입을 열어. 곧 이제  처음에 들었던 제안이 나의 배려였다는 걸 깨달을 거다.]


“그냥 누구인지 말해. 눈 감은 채 포도주 상표 맞추는 놀이도 아니고.”


[네가 자초한 거다.]

모르스가 증오 가득한 눈으로 상대를 째려보다가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캘러헬도 수화기를 내려놓자 수정 렌즈에서 흘러나오던 빛도 꺼졌다. 사람들이 일제히 창가에 쳤던 커튼을 걷자 캄캄했던 내부가 석양의 아늑하면서도 슬픈 햇살로 밝아졌다. 캘러헬은 주머니에 들어있던 동전을  개 꺼내서 가게의  위에 올려두고 가게 물건에 손을 댔다. 커피 내릴 때 쓰는 도구들을 나란히 늘어놓다가 그가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연료가 없네.”


그가 의자에 걸어둔 자신의 외투의 안주머니로 손을 뻗고 무언가를 잡아당기자 길이가 2m는 될법한 철봉이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튀어나왔다. 그가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튼튼한 날붙이 가진 사람 없나?”


그러자 누군가가 허리춤에 달아둔 단검을 손에 들고 손잡이가 향하도록 캘러헬에게 내밀었다.

“미스릴로 만든 거다.”

“개인소장품인가?”

“그래.”


“고맙군.”

캘러헬은 빌린 단검의 몸통을 자신의 철봉 끝부분에 대고 엄청난 속도로 긁었다.  소음이 마치 기관총의 자동사격을 연상시켰다. 30초가량을 비비자 달궈진 철봉에서 휘파람 같은 소리가 저절로 났다.


캘러헬은 정중히 빌렸던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줬다. 철봉의 끝부분을 주전자 안에 꽂아버리자 안에 담아둔 물이 끓었다. 그다음에는 플란넬 재질 거름망을 전용 깔때기에 걸쳐두고 원두를 그라인더에 넣었다. 그리고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그가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커피의 맛은 원산지와 볶는 정도로 결정되고, 바리스타의 손맛은 분쇄에 달렸지. 너무 거칠어도, 너무 고와도 안 돼. 까다로워도 타협하지 말고 정성을 들여야만 해. 모든 좋은 것들은 다 그렇게 탄생했어. 어떻게들 생각해?”

캘러헬에게 단검을 빌려줬던 사람이 말을 받았다.


“난 커피 대신 홍차를 마셔.”


“유감이군.”


커피 2인분이 완성되자 바깥에서 카페의 잠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문을 열어줄  캘러헬이 자기 몫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중얼거렸다.


“물 붓기도 중요해. 물이 너무 빨리 내려가면 쓴맛만 나오고 풍미가 망가지거든. 시간을 들여서 내려가도록 조절해야 부드럽고 진한 맛이 나오지. 급하면 안 돼.”


그는 가게 안으로 나타난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상대는 거동이 불편한지 발자국 사이의 간격이 불규칙했고 지팡이 짚는 소리도 났다. 캘러헬은 참을성 있게 돌아보지 않고 등만 보여주면서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옆으로 슬그머니 밀어서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멋있기 때문이다. 그가 다가오는 상대에게 들리도록 발음에 힘을 줬다.


“하지만 세상에는 취향이라는 게 있어서 완벽하게 정석대로 만든 커피보다도 엉터리로 만든 걸 선호하는 사람도 있지. 그대는 어느 쪽이신가?”


상대가 대답했다.


“비싼 거.”


 한마디에서 느껴진 목소리는 공동묘지의 안개만큼이나 스산하면서 축축했고, 발음은 딱따구리가 둥지 짓는 소리만큼이나 거칠고, 담긴 감정은 상사병처럼 음울하고 짓궂었다. 상대가 잔을 들고 나서야 캘러헬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면서 뇌까렸다.

“하, 뷔떵(시발).”











단테가 눈을 뜨자 그의 눈에 비스듬히 기울어진 천장이 보였다. 스스로 머릿속에 천장의 풍경을 묘사하고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가만, 왜 내가 3인칭 화자처럼 생각하고 있지? 왜 천장이 기울어져 있지? 아, 여긴 오두막의 다락방이구나. 저건 오두막의 지붕이고. 나도 참. 멍청하네. 누구의 오두막이지?

방금 깬 단테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어이, 형씨. 드디어 일어났군.”

단테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그의 여우 주둥이 때문에 베개가 넓게 눌렸다. 붕대로 몸 곳곳을 감은 사탄타가 의자에 앉아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테가 물었다.

“여기가…. 어디지요? 아 죄송합니다. 당연히 시튼 씨의 오두막일 텐데. 그런데 제가 왜 누워있죠? 아 죄송합니다. 자다가 일어났으니 누워있지.”

그러다 잠깐 멍하니 얼어버리고는 바람에 사시나무 떨리듯 불안하게 단테가 윗몸을 일으켰다.

“제제제제제, 제 친구들은 어떻게 된 거죠? 어디 있죠? 그리고  다치셨습니까?”

“숙녀분들은 무사해. 또 나보다는 그쪽이 걱정이지. 벌써 곧 저녁이야 미스터 팡랑. 몸 상태를 말해줘. 어제 큰일을 겪었거든. 기억은 나?”


단테의 눈동자가 회전하는 카지노 룰렛의 구슬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몸에 아무 감각이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이이이이이이이… 죠?”


사탄타는 침착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형씨는 다시 눕는 게 좋겠어.”

단테의 사방으로 데굴거리던 눈동자가 정중앙으로 위치했다.

“분명 투슈가쿡 추장님의 안내를 따라 표식 나무를 확인했었죠. 하필이면 때마침 로보가 마을에 나타났고요. 아자리하고 샤키는…. 앞뒤 안 가리고 달려갔었고 전 말리려다가 실패했어요. 아자리 양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어른거리네요. ‘그만두라니 무슨 소리야! 저기 로보가 있다는데!’ 그 뒤로는 머리가 아파서 안 떠오르네요.”

말을 마치고 단테는 예고 없이 돌처럼 뒤로 쓰러졌다. 곧 다락방 안에는 단테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사탄타는 그의 목까지 이불을 올려주고 소리 안 나게 조심해서 나왔다.








세리던 대령은 터번과 망토로 차려입은 레스를 훑어보고는 노골적으로 무례하게 굴었다.

“이것이 바로 그 악명높은 사쿠라비 사막의 야만인이군. 흠.”

레스를 집 앞까지 데려온 병사들은 쓸데없이 의장대처럼 앞에 총 제식 자세를 굳힌 채 그를 의장대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이래서야 포로 연행이 아니라 귀빈을 호위하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대령은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레스는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멍하니 눈만 껌뻑거렸다. 대령이 레스의 심장 부분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특히 거기에 새겨진 반짝거리는 자수는 너무 유치해서 문화적 소양이나 지능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군. 너 같은 이교도 놈들은 만국 박람회 전시품으로 출품될 자격도 없어.”

레스는 침을 삼키고 맑고 또렷하게 대꾸했다.


“날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지만. 댁이 지적한 이 자수는 수석 마법사님 작품이야.”


“뭐?”


세리던 대령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레스가 슬그머니 발을 옮기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실례하지 부름대로 용사님에게 심문받으러 가야 해서. 마침 같이 나눌 얘깃거리도 생겼고.”

그가 어찌할  몰라 쩔쩔매는 틈에 레스는 그를 마네킹처럼 무시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닫을 때 바깥으로 한  눈길을 돌리니 억지로 격식 차리고 있던 병사들의 입꼬리가 꿈틀거리는  보였다.


집안은 고요했다. 복도를 걸으면서 레스는 혼잣말했다.

“입만 다물어도 본전은 건지거늘.”


그리고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을 찾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피카니는 이쪽으로 등을 보인 채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레스가 다가가며 물었다.


“내가 고함이나 신음이라도 규칙적으로 지르는 게 좋을까?”

피카니가 느릿한 손길로 창문을 커튼으로 스르륵 덮었다.


“다과가 차려진 우아한 밀실 속에서 남자 둘이 규칙적으로 고함과 신음을 내자고?”

커튼으로 창가를 완전히 덮어버리자 밀실은 거의 깜깜해졌다. 성냥불 켜는 마찰음 뒤에 피카니의 얼굴 앞으로 불빛이 하나 떠올랐다. 그리고 탁자 가운데에 있는 촛대에 불이 켜졌다. 레스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굳이 초를 켜야겠어?”

“뭐가 불만이야.”


“다과가 차려진 우아하고 캄캄한 밀실 속에서 남자 둘이 촛불 하나를 마주 보고 자리 잡는 건 좋은 생각처럼 보이지 않아.”


피카니가 인상을  우그러트리고 허공을 향해 주먹을 움켜쥐면서 팔을 부들거렸다.

“이 촛불은 그냥 조명이야. 여긴 전기가 안 들어온다고. 그리고 우리가 평화롭게 대화하는 모습을 여기 사람들에게 보여줘서는 안 돼. 다시 말하는데 이 촛불은 조명이야!”

“힘든 시간을 보냈나 보네.”


레스가 낭만적이고 아늑한 분위기가 감도는 탁자에 자리 잡자 피카니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레스가 반사적으로 투덜거렸다.

“꼭 이렇게 마주 앉아야겠어?”

“그럼 네 바로 옆으로 가서 앉을까?! 한 번만 더 불평하면 내가 손수 양초의 또 다른 사용법을 알려주겠어!  몸으로!”

잠깐 어색한 침묵 뒤에 레스가 헛기침했다.

“미안. 나 알잖아. 습관이라서.”

피카니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도 미안하다. 우리가  주둔지에 도착한 뒤로 한나절이 지났고, 그동안 내가 정신적으로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거든.  어땠어?”


“난 육체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어.”


피카니가 고개를 인형처럼 끄덕끄덕 기운 없이 흔들었다.

“우리 둘이 합쳐지면 한 사람은 완벽하게 좆되고 한 사람은 정상인이 되겠군. 역시 우린 완벽한 짝이야.”

레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뭣 하러 우리 둘이 합쳐져야 하는데?”

또 어색한 침묵 뒤에 피카니가 헛기침을 하고 얼굴을 탁자에 한 번 처박았다. 쾅.

“아무래도 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게 확실하다. 우리 서로 그런 느낌이 드는 어휘 사용은 자중하자고.”


“그건 아주 좋은 생각이야.”

레스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심호흡 뒤에 피카니가 자신의 잔에 홍차를 따랐다.

“널 따로 불러서 여기로 모신 행위에 특별한 이유는 없어. 그냥 내가 사적으로 안식을 갖고 싶었을 뿐이지.”

잠깐 자신의 말을 되새김질하고 피카니가 연달아 말했다.

“그런 의미 아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넘어가고. 육체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었지. 무슨 일이 있었는데?”

레스는 탁자에 놓여있는 과자를 하나 집어 먹고 삼킨 다음에 말했다.

“우리가 병원에 있었을 때, 나하고 타티아나가 같이 들고 왔던 그 이상한 통나무 기억해?”

“기억하지. 그쪽 문화권 사람들이 무술을 단련할 때 쓰는 도구라며.”

“지금으로부터  한나절 전에 타티아나가 이렇게 말했어.”

타티아나는 말했다.

“목인장으로 훈련할 수 있는 동작이 100가지가 넘는다고 말했던 거 기억하지? 유용하지만 그래도 목인장은 어디까지나 혼자서 단련해야만 할  어쩔 수 없이 쓰는 도구에 불과해. 가장 훌륭한 도구는 역시 사람이지.”


레스가 피카니에게 말했다.


“라고 말하고는 웃으면서 손깍지를 우두둑 꺾더라.”


레스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우울해하는 눈빛만 보냈다. 피카니는 입을 닫고, 눈을 감고 동정하듯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줬다. 레스는 목이 말라져서 의자에서 살짝 일어나 피카니의 자리에 있는 홍차가 담긴 주전자에 팔을 길게 뻗어서 가져왔다. 그대로 주전자를 자신의 잔에 기울이려다가 레스는 주전자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주전자와 잔을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피카니가 팔걸이에 체중을 기울이며 레스를 이상해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 하려고?”

“이러려고.”


레스는 주전자를 머리 위로 최대한 높게 들어 올리고 잔을 향해 기울였다. 그러자 주전자의 주둥이로부터 홍차가 가느다란 폭포와 주황색 무지개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날렵한 물줄기가 되어 잔을 향해 쏟아졌다. 레스가 기울였던 주전자를 거두자 잔에는 완벽한 용량의 홍차가 한 방울도 튀지 않고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레스가 눈을 살짝 감고 말했다.


“그 오랜 세월이 흘러도 내 몸은 아직도 기억하는군. 우리 문화권에서는 방금 내가 한 짓이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어.”

“예쁜 아가씨가 그렇게 대접해주면 정말 보기 좋겠네. 언젠가 사쿠라비에  이유가 생겼어.”

“사쿠라비에서는 여자가 바깥에 나가서 일하는 걸 천대하기 때문에 네가 바라는 일은 벌어지지 않아. 이렇게 해줄 사람은 수염 기른 아저씨들밖에 없어.”


“그래도 방금 그 모습은 굉장히 우아하고 아름다웠……. 아 썩을.”

“음…….”


레스는 주전자와 찻잔을 든 채 일어난 모습 그대로 굳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어색한 침묵이  감돌자 피카니는 한숨으로 서둘러서 분위기를 정돈했다. 입술이 하얘질 정도로 한  깨물고 그가 말했다.

“아까 했던 이야기 말인데, 그 뒤로 한나절 내내 계속 두들겨 맞기만 한 거야?”

주전자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레스는 일어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다른 것도 했지. 반사신경 측정, 균형감각 측정, 기초체력 측정, 판단력 등등. 싸울  필요한 온갖 자질들을 내가 얼마나 가졌는지 타티아나가 알아보더라고.”


“너야 그런 거라면 전부 다 수준급이잖아.”


“그런데 타티아나가 나더러 부족한 게 하나 있다고 그러더라. 유연성. 그래서.”


레스는 제자리에서 다리를 앞뒤로 유연하게 쫘악 찢어서 그대로 가랑이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주저앉았다. 그러자 레스가 탁자에 가려져서 피카니에게는 안 보이게 됐다. 피카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를 앞뒤로  뻗은 레스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세상에! 너한테 발레라도 시킨 거냐? 어떻게 한나절 만에 그게 됐지?”


레스가 고통을 참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고 말했다.

“그 자리에 루나 씨도 있었어. 다른 설명은 더 필요 없을 거라고 믿는다. 루나 씨도 총잡이 생활 그만두고 발레를 하는 게 어떻냐고 그러시더라. 웃음 참으면서.”

피카니가 키득거리면서 레스를 삿대질했다.

“네가 몸에 쫙 달라붙는 발레 복장 입은 거 돈 내서라도 보고 싶기는 하다. 아하하하하하!”

레스가 째려보자 피카니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터트린 폭소를 조금씩 거뒀다.

“하하… 하하하. 그래 이건 내가 잘못했다.”

“대체 넌 뭐가 문제냐?”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피카니가 목울대를 가다듬고 외쳤다.


“누구십니까?”


“시크릿 서비스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앞머리를 일자로 가지런히 정돈하고 길게 기른 흑발을 포니테일로 정돈한 여인이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여인은 사복 차림에  손으로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양쪽으로 쫙 찢은 채 주저앉은 레스를 보고 화들짝 놀라서 주춤거렸다. 레스는 시치미 뚝 떼고 손으로 바닥을 살짝만 민 다음 다리 힘만으로 스르륵 솟아 두 다리로 일어섰다. 레스가 상대를 바라보고는 눈을 크게 뜨고 단말마를 냈다.


“당신 기억나, 덤플링(만두) 가게에서 봤던 카타나 아가씨. 이름이 분명 릴리 맞죠?”

릴리는 들고 온 상자를 탁자 위에 놓았다.

“예. 기억해주셔서 고맙군요.”


레스는 릴리와 마주 서서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어떻게 여기 있는지 알고 찾아왔는지는 안 물을 건가요?”


“이 정도 일로 놀라기에는 며칠 전에 겪은 게 있어서.”

릴리는 코웃음을 치고 자신이 가져온 상자의 내용물을 꺼내기 시작했다. 받침대가 달린 커다란 수정 렌즈, 그리고 전화기였다. 레스는 대체 뭘 하려는 건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고 피카니는 그걸 알아보는 눈치였다. 피카니가 릴리를 향해 외쳤다.


“이건 원거리 화상 연락에 쓰는 도구들인데. 무슨 일입니까?”

릴리가 자신의 겉옷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열어서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회중시계 뚜껑 안쪽에 달린 투명한 보석에 붉은빛이 전구처럼 껌뻑껌뻑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회중시계 뚜껑을 소리 나게 닫고 말했다.

“전 그저 미리 정해진 절차에 따라 신호를 받고 행동하는 겁니다. 누가 우리에게 연락을 시도하려는지는 아직 저도 모릅니다. 뭐, 어차피  사부님이겠죠.”


상대가 그렇게 말하면서 탁자를 정리하자 레스도 손을 거들어줬고 피카니는 가만히 있으려다가 눈치 보여서 어쩔 수 없이 도와줬다. 원거리 화상 연락 준비는 금방 마쳐졌다. 피카니가 탁자 가운데에 세워진 수정 렌즈를 가리키며 레스에게 설명해줬다.

“수정 렌즈 하나는  얼굴을 향해 광선을 뿜어서 시각 정보를 빨아들일 거야. 다른 거는 저쪽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이곳에 영사기처럼 비추지. 물론 저쪽은 이쪽을 볼 거고.”

레스가 탁자 가운데에 놓인 전화기를 가리켰다.


“저거 전화선이  꽂혀있는데.”

“이 정도로 이상하다고 지적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 안 들어?”


전화기가 울리자 레스는 릴리를 향해 물었다.


“저 전화는 누가 받죠?”

릴리가 들고 있는 유일한 조명이었던 불붙인 양초에 바람을 휙 불고 대답했다.


“당신이요.”

따르르릉. 레스는 전화기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노려만 보았다. 피카니가 옆에서 그의 어깨를 밀고 나서야 레스는 어둠을 헤매며 자리에 앉았다. 수화기를 집기 직전에 레스가 피카니를 향해 물었다.


“‘여보세요’는 내가 먼저 하면 돼? 아니면 저쪽이 인사하면 하는 건가?”

“전화를 받는 사람이 먼저.”

드디어 레스는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너머로는 숨소리 같은 묘한 기척만 느껴졌고 아무 말이 없었다. 수정 렌즈가 레스의 모습을 훑듯이 가느다란 빛줄기로 비췄고, 다른 수정 렌즈는 광선과 빛의 입자를 뿜어내어 사람의 모습을 어둠 속에 띄우기 시작했다. 영상이 떠오르는 속도가 느려서 아직 레스의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건 상대가 마른 체격의 남자라는 게 고작이었다. 레스는 아차 하고 급하게 말했다.


“여보세요. 죄송합니다. 전화기는 처음 써봐서.”


[안녕, 데스페라도.]

레스는 그 목소리를 듣고 얼어붙었다. 그리고 때마침 탁자 건너편에 떠오르는 사람의 모습도 제법 선명해져 있었다. 그는 상대를 노려보았고, 상대도 그를 노려보았다. 레스가 말했다.

“파스낙 리차트라.”


[요즘 고생이 많다고 들었네. 자네의 맹세는 여전한가?]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부터 바람 빠지는 듯한 힘없는 웃음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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