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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화 〉[5권] 178회 - 동정심 (178/188)



〈 178화 〉[5권] 178회 - 동정심



비가 몇 년이나 내리지 않은 곳이라 산들바람만 불어도 황토색 먼지가 폭풍처럼 날렸다. 윤이 날 정도로  닦인 은색 보안관 훈장을 가슴에 달고, 얼굴을 스카프로 가리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 누군가가 먼지 폭풍 사이를 걸었다. 땅은 쌓인 먼지가 너무 많아 모래사장이나 다름없다. 종종 새겨진 세월이 짐작도  가는 들짐승의 백골도 눈에 밟혔다. 누군가의 뒤로 발자국이 도장처럼 선명하게 꼬리를 끌었다.


안개처럼 부연 먼지들 너머로 석유 시추탑의 윤곽과 그림자가 나타났다. 하늘을 보면 태양이 불분명한 원형의 무언가로만 보인다. 누군가가 잠깐 스카프를 벗고 가래침을 뱉자 수염이 많이 자란 늙은 백인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걸음은 출입금지 팻말이 세워진 곳을 지나 버려진 폐광이 다다랐다. 폐광의 입구에는 이미 누군가가 처마 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가 스카프를 벗고 상대를 노려보면서 다가갔다. 상대는 붓으로 그린  수염을 깔끔하게 다듬고 길게 기른 머리를 뒤통수에 꽁지를 틀어 비녀로 고정한 황인이었다. 모자는 쓰지 않았다.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하고 수염까지 희끗희끗한 사내와는 달리 상대의 외모와 눈에는 활력이 선명했다. 겉옷으로 걸친 외투는 바위 절벽에서 구르며 내려온 것처럼 걸레짝 같았으나 반면 안에 걸친 정장은 갓 재단된 것처럼 먼지 얼룩 하나 없이 비정상적으로 말끔했다.


황인은 회중시계의 뚜껑 안쪽을 빤히 바라보는 중이다. 사내가 황인을 향해 말을 걸었다.

“보안관으로 지낸 지 25년이 넘었는데, 당신에 대한 소문을  번 들어봤소. 황야의 서쪽에서 당신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면 같은 시간의 어느 도시 동쪽에서 누군가가 당신 손에 체포되거나 목이 날아간다지.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면서 달릴 수도 있고.”

땅에 난 발자국은 사내의 것 하나밖에 없었다. 다른 흔적은 없다. 모르스 리 요원은 회중시계 뚜껑을 소리 내서 닫고 상대를 마주 보았다.

“얽힌 소문이 많은 건 피차일반이지. 와이어트 어프. 아메리카에서 제일 유명한 보안관. OK 목장 결투의 주역. 황야의 7인.”

그는 어프의 모자에 손을 뻗어서 마음대로 벗기고는 툭툭 먼지를 털어주고 도로 씌웠다.


“그런데 정작 제일 중요한 사실은 소문이  퍼지고 있지. ‘닥 홀리데이’의 의부.”

어프는 미간을 찡그렸다.

“피카니와는 관계 끊은  오래요. 나랏일 하시는 분이 이런 버려진 곳에 무슨 일이오? 그 녀석 때문인가? 내 입을 다물게 하려고?”

모르스는 고개를 한  좌우로 저었다. 그리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최대한 대비해서 만나자고 전보를 보냈는데, 고작 권총만 가져온 거요?”


어프는 옷자락을 살짝 옆으로 들춰서 허리춤에 단 리볼버를 보였다.

“옐로 보이까지 들고 오기에는  너무 늙었소. 올해로 이제 쉰다섯이라고.”


모르스는 한숨을  쉬고 옷자락을 다듬었다.

“댁과 내가 만나게  건 순전히 우연이야. 마침 볼 일이 생긴 곳에 마침 댁이 있었을 뿐이라고. 어쨌든 이곳을 살펴야겠는데 아는 만큼 설명 부탁드리오. 어프 보안관.”

“가장 먼저 알려드릴 사실은 혹시 이 폐광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라면 유서부터 쓰시오. 원래는 석탄을 캐던 곳이었는데 도중에 아황산가스가 대량으로 누출되는 바람에 폐쇄됐지. 들어가는 순간 호흡기가 망가질 거요.”

“상관없소. 내 몸은 만독불침(萬毒不侵)이니까.”

“방금 뭐라고?”

어프가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모르스가 헛기침하고 다시 말했다.

“어지간한 화학적 위해는 나한테 안 통한다는 뜻이요. 여기 공용어는 음소 문자지만 내가 살던 곳은 표의 문자도 쓰거든. 말실수였을 뿐 그쪽한테 나쁜 의도는 없었네.”

어프는 잠깐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정말로 모든 독에 면역인 건가?”


“사실 정확히는 모르오. 난 맥주로도 숙취에 걸리거든.”

그가 광산의 입구에 걸린 두꺼운 사슬을 손으로 잡아당기자 철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자물쇠도 사슬과 함께 녹이 가득했다. 모르스가 허공을 향해 빈손을 펼쳐서 뻗자 칼집에 꽂힌 칼  자루가 먼지 폭풍을 가르며 저절로 날아와 손에 잡혔다. 어프는 눈을 크게 떴다.

“바다 건너에서는 무술가와 마법사의 경계가 모호하다더니, 직접 보는  처음이요.”


모르스가 상어 가죽으로 장식된 칼집에서 외날 검을 뽑고는 녹슨 쇠사슬을 향해 내려치자 서늘한 소리와 함께 입구가 열렸다. 땅에 떨어진 흙빛 쇠사슬의 잘린 단면에 은색 광택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검을 도로 칼집에 꽂는 상대를 향해 어프가 다시 물었다.

“모든 물체를 생각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거요?”

“무거운 건 힘들고 가볍거나 손에 익은 물건만.”

모르스는 말하면서 한 손으로는 폐광의 나무문을 열고 다른 손으로는 손에 들고 있는 칼을 들어 보였다.

“내 사부는 검을 다섯 자루까지 동시에 움직여서 자기 제자들을 상대로 한꺼번에 대련하셨지. 어쨌든 잘 들으시오 어프 보안관. 거수자가 보이면 경고 사격은 건너뛰고 바로 쏘시길.”


어프는 먼지 밖에 안 보이는 황야를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되돌렸다.


“이런 곳에 누가?”

모르스는 이미 폐광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어프는 입구로 다가가 안을 살폈다. 깜깜한 어둠과 규칙적으로 들리는 흙 밟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 어프가 중얼거렸다.

“살면서 별꼴을 다 보네.”


그는 벽에 기대어 자리에 주저앉고 스카프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쉬었다. 속으로 노래를  곡 정도 불렀고, 피로와 맞서 싸웠다. 마음 놓고 졸고 싶어도 보안관 훈장을 가슴에  이상 그의 습관은 그를 계속 긴장하게 했다. 그 덕에 어프는 땅으로부터 느껴지는 묘한 진동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한 정부 요원이 가스로 가득한 폐광 속으로 사라진 지 10분도 안 지났다. 어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득히 너머로부터 말발굽이 땅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곳으로 시선을 향하니 코앞의 먼지 폭풍 너머로 더 진하고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총을 뽑을 때라는 건 확실했다. 어프는 총신을 짧게 줄인 보안관용 더블 액션 리볼버를 허리춤에서 뽑고 몸을 폐광의 나무지지대에 쪼그려 숨겼다.


“저 먼지구름…. 이 소리와 진동…. 예순은 되겠는데. 대체 뭐야?”


갑자기 자기 주변에 기척이 연달아 나타나자 어프는 반사적으로 지향 사격 자세로 기척을 겨누었다. 정장에 파란 넥타이 차림을 한 사람들이 어느새 거기 있었다. 검지를 미리 방아쇠에 걸지 않고 방아쇠울에 대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어프는 하마터면 너무 놀라서 쏠 뻔했다. 그들 중 하나가 당황하고 있는 어프의 몸을 일으켜주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이쪽으로 피하시죠 선생님.”

“대체 이게 무슨 일이요?”


시크릿 서비스 요원은 그를 폐광 입구로부터 한참  곳까지 데려가더니 허리춤에 달아둔 무언가를 손에 들었다. 손잡이가 달린 주먹만  크기의 유리구슬이었는데 전구랑 비슷해 보였다. 요원이 유리구슬에 달린 손잡이를 비틀자 난데없이 유리구슬에서 부연 섬광이 터졌다. 어프의 눈에는 자기 자신과 주변 사물,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은 멀쩡하게 보였고 바깥은 마치 색유리를 통해서 보이듯 세피아 톤의 갈색으로만 보였다. 요원이 혼란에 빠진 어프를 진정시키기 위해 침착하게 말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선생님. 저희는 지금 광학 위장 중입니다.”


“뭐라고?”

“여기 안에 있는 한 저희는 거의 투명인간입니다. 차분하게 대기해주시죠. 함부로 움직이면 위장이 풀립니다.”


어프는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살면서 별꼴을  보네!”

저 앞에서는 어떤 요원이 서류 가방을 열더니 안에 들어있는 접힌 철판이  펼쳐지면서 몸을 가리기에 충분한 엄폐물로 변했다. 요원  명이 각기 자리를 잡고 볼트 액션 소총과 자동소총으로  앞을 겨누었다. 희끄무레하게만 보였던  앞의 무리가 가까스로 말을  사람의 형상으로 보일 즈음 그들은 일제히 쏘았다.

이쪽의 일방적인 공격에 기세가 주춤해진 저쪽은 옆으로 방향을 돌렸다. 거기에 맞춰 요원들은 넓게 퍼져서 싸웠다. 요원들의 사격 솜씨는 흠잡을 데가 없었으나 어프가 보기에는 수적 우위를 뒤집을 수준은 아니었다. 그가 자기를 지켜주고 있는 요원에게 청했다.

“나한테도 총 하나 들려주고 싸우게 해주시오. 아직 우리가 너무 불리하잖소.”

그때 폐광에서 모르스 요원이 얼굴에 묻은 검댕을 소매로 문질러 닦으면서 나왔다.  모습을 보면서 요원이 어프에게 덤덤히 말했다.


“이젠 아닙니다.”

한창 소총을 장전하고 있던 요원이 모르스를 보고는 총부리를 내리고 서둘리 다가왔다. 모르스는 들고 있던 소형 금고를 상대에게 던졌다. 금고의 자물쇠는 이미 부서져서 열기만 하면 됐다. 요원이 뚜껑을 열어 안을 살펴보니 작은 금괴들이 가득했다. 모르스가 손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마저 닦으면서 말했다.

“정보가 맞았다. 녀석이 아직은 자기 목숨이 아까운가 보다.”

금고를 닫고 다시 소총을 쥐면서 요원이 침착하게 보고했다.


“부장님. 지금 거수자들의 수가 상당합니다.”

계속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온 탓에 눈이 아팠던 모르스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저쪽을 내다보았다. 말을 타고 달려왔던 무리는 이쪽으로 더 다가와봤자 표적 밖에 안 된다고 판단한 건지 다들 말에서 내리고 있었다. 모르스가 작게 외치면서 손을 올리자 요원들은 일제히 사격을 멈추고 전술 재장전을 했다.


“쌍안경.”


그가 그렇게 말하면서 옆으로 손을 내밀자 근처에 있던 사람이 바로 쌍안경을 건넸다. 저쪽을 쌍안경으로 바라보면서 그가 상황을 줄줄이 읊었다.


“54명. 대부분은 헐값에 고용된 떨거지다. 몸 사리지 않고 싸우는 놈들은 제압만 하고 몸 사리는 놈들은 죽여버려.”


모르스의 말이 멎기 무섭게 요원들은 일제히 쏘았고 그의 명령에 따라 엄폐물에 숨었거나 엄폐물로 달려나가려던 놈들만 쓰러지는 모습이 어프에게도 보였다. 일제 사격이 멈추고 인원이 무기의 장전을 마치자 모르스가 외쳤다.


“전진. 2시 방향 고지대.”

요원들은 소총을 등에 메고 서류 가방에 접이식 방탄 방패를 도로 집어넣었다. 모르스를 포함해서 11명의 사람이 한 몸처럼 일제히 경주마처럼 대량의 흙먼지를 일으키며 저 앞으로 달려갔다. 100m는 될법한 거리인데 도착까지 5초도 안 걸렸다. 살짝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요원들은 다시 서류 가방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저쪽을 겨누었다. 모르스는 다시 쌍안경으로 저쪽을 보려다가 갑자기 고개를 오른쪽으로 젖혔다. 그가 고개를 젖히기 직전 머리가 있던 자리로 총알이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제압 사격.”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고 부하들의 총소리를 한쪽 귀로 흘려넘기며 쌍안경을 눈에 댔다. 시야에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총알들이 빗발치는 와중에 숨지도 않고 겁먹지도 않고 우뚝 서서 이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통이 넓은 소매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모르스가 중얼거렸다.

“하카마에 하오리?”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요원이 물었다.


“HVT(고가치 표적)로 추정되는 인물이 보입니다. 명령 대기.”


“전원 대기. 교전수칙은 자율에 맡긴다. 내가 가서 대화하겠다.”


요원들이 일제히 검지를 방아쇠에서 빼고 방아쇠울에 걸쳤다. 모르스는  한 자루만 들고 흙 언덕의 경사를 따라 주르륵 내려갔다.  그래도 더러웠던 그의 겉옷이 더 더러워졌다. 몇 발자국 모르스가 걷자 어느새 두 무리가 대치하는 벌판의 정 가운데에 두 남자가 마주 섰다.

모르스가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는 말을 걸었다.


“히토키리(칼잡이). 고향에서 멀리도 오셨군.”


“피차 마찬가지.”


히토키리는 자기  뒤편에 숨겨서 들고 있던 우치가타나의 끝부분을 땅에 대고 세웠다. 상대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늙은 황인 남자였다. 아무렇게나 길게 길러서 끈으로 묶은 머리는 늙은 말의 꼬리털 같았고, 눈빛도 흐리멍덩했다. 모르스는 칼을 쥔 손을 코등이로 옮겼다.

“당신도 신정부로부터 버려졌나?”

히토키리는 힘겹게 숨을 쉬었다.

“내가 죽인 사람들의 무덤 너머에 그들은 신분 차별 없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거라고 약속했지. 하지만 새로운 세상은 없었다.”


갑자기 히토키리의 눈에 안광이 번쩍이더니 마른 나무 같았던 육신에 기백이 뿜어져 나왔다. 모르스는 자세를 조금 고쳐잡고 말했다.

“당신, 죽을 곳을 찾으러 떠다녔나.”

“이 죄 많은 생. 할복 따위로 마칠  없었다. 같은 검객에게 죽는 것이 내 마지막 염원. 아폴례크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분의 제자에게 이 한 몸 부탁하리다.”

모르스는 심호흡을 하고 자신의 칼을 허리춤에 대고 양손으로 잡았다. 그가 먼저 운을 뗐다.

“유메오 다이테 우마레 쇼지타오(꿈을 안고 태어났네).”

히토키리는 발도 자세를 잡으며 말을 받았다.


“테츠토 치니 마미레타 진세(쇠와 피로 얼룩진 삶).”

모르스가 마쳤다.


“이와케 시나이 윤친(변명하지 않으리).”


두 남자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체감하는 시간이 평소보다 수십 배로 느려지면서 감각도 극도로 고조되어 날숨은 폭풍처럼 들리고 사소한 발짓과 몸짓 하나까지 심해에서 헤엄을 치는 것 같았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 두 남자는 서로 같은 방향으로 초점을 맞췄다. 히토키리가 칼집을 반대로 잡아당기면서 칼끝을 튕기듯이 머리 높이로 세웠다. 순식간이었다. 모르스는 양손으로 쥔 칼집을 살짝만 잡아당기고 상대를 향해 질주했다.


먹물을 가득 적신 붓이 화폭에 줄을 긋듯, 모르스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칼집으로부터 살짝만 드러난 칼날을 상대에게 내밀어 관성과 체중을 싣자 히토키리가 머리 높이로 들어 올린 칼이 견디지 못하고 젖혀지다가 부러졌다. 작두처럼 양손의 힘으로 칼날을 밀어버리면서 다시 보폭에 힘을 주자 그의 뒤로 부러진 칼날이 떨어지고 몸이 무너지는 소리, 그리고 잘린 머리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그의 칼날에는 피 한 점  묻었다.

반쯤 꺼낸 칼날을 소리 내서 칼집으로 넣고 모르스는 곧게 펼친 한 손을 얼굴 높이로 세우면서 참수된 사체를 향해 중얼거렸다.

“비록 그 새로운 세상이 내 조국을 삼켰지만, 한 많은 세상 잘 떠나길. 나무아미타불.”

방금 일어난 광경에 넋을 잃어버린 무리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모르스의 무방비한 등을 향해 일제히 총부리를 겨누려 했다. 모르스는 그들의 가늠자에 들어가기도 전에 자리에서 잔상만 남기고 사라졌다.


“어디로  거야?!”


방금 그렇게 외친 녀석의 뒤통수를 향해 모르스는 겨드랑이에서 자동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바로 옆에 있던 녀석이 총을 겨누고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자 모르스는 또 잔상만 남기고 사라졌고 총알은 애꿎은 사람에게 박혔다.

무리를 향해 뛰어든 모르스를 보고 요원  하나가 동료에게 물었다.

“교전수칙은 자율에 맡긴다고 하셨는데, 도와드려야 할까?”


질문을 받은 동료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가 괜히 엄호해줬다가 부장님에게 방해만 될 거야.”

모르스가 칼을 뽑고 힘을 실어 수평으로 힘껏 던지자 칼이 허공에서 자기 힘으로 스스로 움직이며 온 사방을 날아다녔다. 주변의 떨거지들이 톱날처럼 머리 높이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전부 도려내는 광경에 공포에 질려 달아나려 했다. 모르스는 그중에서 유독 눈에 띄게 행동이 침착한 놈을 노려서 순식간에 다가가 칼집을 곤봉 삼아 두들겨 무릎 꿇렸다. 냉혹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이름 불어.”


어디선가 총성이 들리자 모르스는 옆으로 목만 슬쩍 움직여서 피하고는 자동권총으로 그쪽을 향해 쳐다보지도 않고 쐈다. 무릎 꿇긴 상대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울분을 전부 담아 외쳤다.

“좆까 개자식아!”

모르스가 상대의 한쪽 어깨를 총으로 쏴버리고 다시 물었다.


“다른 이름.”


“그딴 거 몰라!”

“그렇군.”

“네가 뭔 짓을….”


모르스는 끝까지 듣지 않고 상대의 이마 한가운데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 와중에 총알들이 자신을 향해 날아왔으나, 모르스는 어차피 맞지도 않을 눈먼 총알은 무시해버리고 있었다. 그가 격렬하게 움직인 탓에 겉에 걸쳤던 너덜거리는 외투는 마찰열로 타버렸으며 이제는 안에 입은 정장만 남았다.

모르스가 순식간에 움직일 때마다 색이 짙은 정장 때문에 물속에 풀어진 먹물처럼 투명하면서도 불투명한 윤곽의 잔상이 남았다. 의래 거칠고 빠른 동작은 준비 동작과 마무리 동작도 있기 마련인데 그가 나타나고 다시 사라지는 모습에는 그러한 게 없었다. 사라지면 어딘가에서 나타나 방아쇠를 당기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가 다른 장소에서 머리카락만 살짝 흐트러지고 똑같은 자세 그대로 다른 방향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허공을 날아다니던 칼을 도로 붙잡고 모르스는 숨을  번 들이마시고 수평으로 거칠게 베었다. 그리고 낮게 외쳤다.

“삼매진화(三昧眞火).”

굵은 불길이 그가 휘두른 칼의 궤적을 따라 훑어버리자 일당들이 몸에 찬 탄약이 터지고 옷에 불이 붙었다. 굵고도 짧은 싸움 끝에 도망치거나 저항할 의사를 포기하는 자가 점점 늘어나자 모르스는 칼을 칼집에 도로 꽂고 권총에서 탄창을 꺼냈다. 그대로 빈 권총 손잡이가 소매를 향하도록 팔을 길게 뻗자 소매 안에서 용수철 튕기는 소리와 함께 소매 안에서 튀어나온 탄창이 권총 속으로 꽂혔다. 장전된 권총을 겨드랑이 총집에 꽂고 손을 위로 크게 들어 올리자 저편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요원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달려왔다. 부하들이 포로들을 숙련된 솜씨로 순식간에 포박해서 한데 모아 정돈했다.


“두 조로 나눠서 한 명씩 심문해. 교차검증 했을 때 한 명이라도 말이 다르면 전부 죽여버리겠다고 겁주는 거 잊지 말고.”

모르스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요원에게 그리 속삭이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숨을 돌렸다. 마침 근처에는 거울로 만든 공이 굴러다니는 것처럼 공간이 부자연스럽게 보였는데 이내 어프와 그를 봐주고 있던 요원이 그 자리에 홀연히 나타났다. 모르스는 부하가 건네준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자기 손을 튕겨서 만든 불꽃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프를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여기서 본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입막음 비용은 충분히 드리리다.”

어프는 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흘겨보고 가래침을 뱉었다.

“말하고 싶지도 않소. 피카니는…. 지금 이런 세상에서 사는 건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좀 복잡해야지.”

어프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가 감정을 추스르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까 당신과 칼을 맞댔던 남자. 누구였소? 전술적으로 불필요한 행동으로 보이던데.”

모르스는 곰방대를 입에서 빼고 연기를 불었다.

“당신들은 바다 건너라고 한데 묶어서 우리를 부르지만. 우리가 사는 곳은 꽤 범위가 넓어. 대륙에 가장 많이 살고, 대륙에 붙은 반도도 있고, 섬도 있고, 대륙만큼 큰 섬도 있지. 그리고 개척시대 때 변화의 불길에 휩싸인 건 우리도 마찬가지였소.”


목을 가다듬고 모르스는 손짓과 함께 설명했다.

“1800년대 초기부터 바다 건너의 많은 국가가 산업화와 신분제 철폐 같은 개혁으로 성장통을 겪었지. 그 남자는 일명 히토키리, 남의 청을 받아서 사람을 베던 전문 칼잡이였고 개혁파의 더러운 일을 도맡았지. 후에 새로운 정부가 세워졌는데 더러운 일을 도맡던 자들의 말로는 그저 그랬어. 극소수만이 대접받고 대부분은 버림받았지.”


“그 남자가 당신과 동향이었나?”

“아니.”


모르스는 곰방대에서 연기를 크게 빨아들이고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냥 동정심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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