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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화 〉[5권] 179회 - 명분 (179/188)



〈 179화 〉[5권] 179회 - 명분

그는 곰방대를 뒤집어 담뱃재를 땅에 버리고 불을 구둣발로 비벼껐다. 와이어트 어프는 몸수색을 받는 포로들, 시체들을 가지고 온 삽으로 순식간에 깊은 구덩이를 파서 묻어버리는 요원들을 차례대로 살펴보고 모르스에게 물었다.


“날 여기로 부른 이유가 뭐지? 내 허락이나  도움 같은 건 필요도 없었을 텐데.”

모르스는 어프와 같이 느리게 걸었다.


“도움이 필요 없기는. 여긴 엄연히 국경 바깥이니까 정부 요원이 외부에서 활동하려면 현지인도 동행해야만 하거든.”


“당신의 조직에도 그런 구색뿐인 절차가 필요한 거요?”

“그런 구색뿐인 절차조차 포기할 때는 사람다움도 포기했다는 뜻이요. 사람다움이 어떤 건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요원 중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와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잡은 놈 중에 핑커튼도 있습니다. 우리 쪽은 아니고 저쪽에서 활동하던 놈이고요.”


모르스는 부하에게 받은 핑커튼 사무소 뱃지를 돌려주고 말했다.

“마담에게 연락해. 꼬리를 잡을  있을지도 몰라.”

부하는 묵례하고 자리를 떠났다.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프가 물었다.

“탐정들은 정부에게 고용될 수 없도록 판결 났잖아. 여기에 핑커튼까지 끼어든 건가?”


모르스는 평소보다 목소리를 높게 내어 다른 사람처럼 살짝 명랑하게 말했다.

“내가 아는 친구 말을 빌리면 예외도 있어야 법칙이 있는 법이니까. 그만큼 상황이 급하오.”

“아무래도  구색뿐인 절차조차 포기한 때는  오래된  같소만.”

어프가 그렇게 빈정거리자 모르스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맞아. 오래됐지. 문명의 역사 그 자체만큼.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선을 넘지 않은  시늉하고 계속 타협할 거요.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거든. 여기서 사적인 질문 하나 던져봅시다. 와이어트 어프 보안관. 당신 인간 편이요? 아니면 마족 편이요?”

어프는 양쪽 눈을 조금 찌푸렸다.

“마누라가 마족이였다면 대답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 그건 왜 묻나?”


“지금 인류 제국이 황무지의 시민들을 묶을 수 있는 명분은 하나뿐이요. 전쟁. 우리 종족의 명운이 걸린 전쟁이라고 내세우는 거. 피.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

“그건 다른 얘기야. 이 전쟁은 외세의 침략을….”

그가 말을 끊었다.


“막는다고? 우리들의 땅을 위해? 여긴 당신들 땅이 아니야. 댁이나 나나 우리는 여기서 이방인이야. 지켜야 할 영혼과 문화를 위해? 그놈들은 인류 본토까지 못 와. 어프 보안관. 나 대신 사람다움이 무엇인지, 문명화되었다는 게 어떤 건지 가르쳐줄 수 있겠소?”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 어프에게 모르스는 주머니에서 새 담뱃갑을 꺼내더니 포장을 뜯고 상대에게 권했다. 어프가 혀를 차면서 담배를 받았고 모르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담배에 불이 붙었다. 점잖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그들이 당신의 양아들을 도금된 철창에 가둬서 서커스를 시키는 거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메리카를 인간들의 땅으로 만들 수 없으니까.”


어프는 연기를 불었다.

“그 녀석 감방에 갇혀서 죽을 팔자일 줄은 알고 있었어. 적어도 경치 좋은 감방에 갇혔군.”








레스는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리차트라. 넌 강해. 그러니까 물어보겠다. 타협은 약자들이나 하는 건가? 너한테도 자기만의 규칙은 있었겠지. 하지만 규칙을 깨야  순간도 아마 있었을 거다. 있었다면 대답해.”


수정 렌즈가 파스낙이 고민에 빠진 모습을 희끄무레한 화상으로 허공에 비췄다. 파스낙은 자신의 이마를 검지로 긁적이다가 힘겹게 한숨을 길게 뱉었다.

[다른 건 없고?]


“내가 전에 말해준  있었지. 옴니아 무탄투르 니힐 인헤리트. 모든 것이 변하더라도 진정 사라지는 것은 없다.  문장을 되새기며 내 믿음을 지켜왔는데 이런 말을 들었다. 모든 게 변한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옴니아 무탄투르 니힐 뮤테이션.’ 네 신조와 반대되는 문장이군. 무슨 기분이 들지?]

“맞서 싸우고 있다. 머리에서 쫓아내려고 애를 쓰고 있지.”


[이런, 이런, 이런.]

파스낙은 한쪽 팔꿈치를 탁자에 올리고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며 멍하니 있었다.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진지하고 순수해서 귀여울 지경이군. 네 나이가 스물일곱이었나?]


“그래.”

[상처 주기는 싫은데 그런 고민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가리는 것과 똑같아. 그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네가 멍청한 놈은 아니지. 특별한 사연이 느껴지는군. 말해.]

“더 말해줄 사연은 없다. 대답하거나, 말거나. 이제  차례다.”

상대는 등받이에 한쪽 머리를 갸우뚱 올려놓고 팔을 대롱대롱 흔들었다.


[좋아. ‘제로의 법칙’이라는  있다. ‘열역학 제2 법칙’, 혹은 ‘질량보존의 법칙’하고도 비슷한 건데 그것들보다 훨씬 포괄적인 거야. 뜻은 ‘모든 존재와 모든 개념의 합은 제로가 된다,’ 이건 신보다 높은 곳에 있는 거야. 나야 신이 어떤 건지는 모른다만.]

레스는 한숨을 쉬고 파스낙을 게슴츠레 노려보았다.


“이만 끊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 지금 나한테 타협과 관철에 대해서 상담한  맞지?]

“그래.”

[실망스럽게도 네가 품은 질문의 해답은 이미 네가 갖고 있어. 내가 보증해.]


갑자기 파스낙은 마술처럼 아무것도 없는 손에서 동전을 나타나게 하고는 엄지로 튕겼다. 그리고 동전의 앞면을 이쪽으로 향해서 손끝으로 들어 보였다.


[네가 동전의 앞면을  때 나는 뒷면을 볼 수밖에 없어. 모든 존재는 관점의 개수만큼 면이 있지. 한가지 면만 가진 존재는 무한과 허무뿐이야. 언젠가 죽는 존재로 태어난 이상 그 안에서는  달아나. 내가 직접 그 고민의 답을 말해주진 않겠다. 그래선 의미가 없잖아.]


“그래서?”

[너하고 똑같은 고뇌를 겪은 분을 모셔보마. 똑같은 사실도 말을 하는 사람에 따라서 전해지는 무게가 다른 법이니. 잠깐 기다려봐.]

레스는 땅에 대던 시선을 들어 올리고 주변에 모인 일행들을 향했다. 정오의 햇살 아래 갈색 들판이 바람을 따라 너울거리는 모습이 풍성한 융단 같았다. 마차를 끌던 말들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풀을 뜯었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파스낙이 자리를 비우고 잠시 후 레오포드 씨가 녀석 대신에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피카니, 하딘, 아비투스, 카르델, 루나, 타티아나는 숨죽이고 그의 말에  기울였다. 레스가 입을 열면서 다시 회상에 집중했다. 예상치 못한 상대를 대면한 탓에 당황했던 그 순간으로. 레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굉장히 어색하네요.”

레스는 레오포드가 중절모를 벗고 옆에 따라온 늑대의 머리에 씌워주는 모습을 보았다.


[자네가  연방 보안관에게서 구해준 뒤로 오랜만이군. 팔은 어떤가?]


“진행 중입니다.”


[자네 친구들은 찾았나?]


레스는 잠깐 고민하고 자신의 목걸이를 상대에게 보여주었다.

“저녁에 반응이 있었죠. 그리고 언젠가 만난다면 그 쪽에게 묻고 싶은  있었습니다. 왜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으시고  친구들을 추적하셨죠?”

[복잡해. 자네한테  빚을 갚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무사한지 확인도 해야 했고, 무엇보다 주변의 낌새가 심상치 않으니 내  하나 건졌다고 무시해서는  된다는 생각이 들었네. 그래서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지.]

“휘말리게 되셔서 유감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나만이  수 있는 일을 하러 여기 앉았지. 타협과 관철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했나?]


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네. 내 원래 이름은 게안내타하 들로오. 준비된 새라는 뜻이다. 매사에 항상 흔적을 뒤지는 모습이 모이를 쪼는 새 같다고 다들 그랬었지. 슌카와칸은 따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을 거고.]


“슌카와칸한테 만나서 반갑다고 전해주세요.”


레오포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야생의 남자들이 그렇듯 나는 우리 부족의 전사 중 하나였다. 혈기왕성할 시기에 정찰병들을 이끌었지. 캘러헬은 내가 그를 직접 찾아가서 인연이 시작됐어. 우리가 살던  근처에 윈디고가 나타나서 도움이 필요했고 당시 ‘와일드 헌트’는 힘이 대단했거든.]


레스는 눈을 크게 떴다.


“와일드 헌트? 카우보이 아니었어요?”

[캘러헬이 직접 지은 명칭은 와일드 헌트야. 괴물이나 요정,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몰려다니며 사냥을 한다는 전설이 있어. 캘러헬의 제자들은 다들 야생 괴물의 유전 인자를 이용해서 신체가 강화됐었으니 적절한 명칭이었지. 문제는 별명이 너무 굳어버린 바람에 아무도 신경  썼어.]

“라카키와 캘러헬 씨는 한 번도 언급  하셨는데.”

그는 못 말리겠다는 듯 지그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봐서 알잖아. 그런 친구들이니까. 어쨌든 좋은 시절이었지. 하지만 어느 날 인류 연방에서 사절을 보내더니, 우리가 조약을 어겼다며 무장 해제 및 거주지 이주를 명령했지. 문명에서 온 사람들이 금을 캐러 산과 계곡을 드나들었는데, 그런 곳들은 부족들이 성지로 정하고 사람의 출입을 제한했었지. 하지만 아무리 겁을 줘도 금 때문에 사람들이 계속 성지를 침범했어. 금을 캐면 수질과 토양이 망가지지. 서로 싸움이 났고 이것이 그들의 명분이었어.]


“명분은 강자들만의 무기죠.”


[그게 30년쯤 전이었을 거야. 백인들과의 마찰이야 우리에게는 하루 이틀도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조짐이 들었지. 안 좋은 예감들은 항상 들어맞지. 그들은 버펄로를 학살했어, 고기나 가죽도 가져가지 않았지. 석유를 뿌려서 들판을 불태우고 오염시켰어. 버펄로가 굶으면 우리도 굶으니까. 싸움을 피하고 평화를 추구하려던 부족은 화해의 의미로 저쪽과 담요를 서로 교환했는데 그 담요에 천연두 병균이 묻어있었어. 치료할 방법이 없었으니 감염이 번지기 전에 환자들의 숨을 끊어주고 천막째로 불태워야만 했어.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딸을 나와 내 친구들이 숨을 끊어주고 불을 질렀어. 그들의 가족들이 직접  수는 없었으니까 우리가 대신했지.]


레스는 계속 듣기가 괴로워 표정에 고통이 가득했다. 레오포드는 숨을 고르고 계속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한 번은 커스터라는 졸장 덕분에 우리가 대승을 거둔 날도 있었어. 그가 이끌던 기병 연대를 몰살시키면서 우리들의 사기가 하늘까지 치솟았지. 다른 싸움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  너무 흥분해서 그들의 마을까지 불태우자는 소리까지 하고 있었지. 끓어오르는 증오와 그걸 갚아줄  느낀 복수의 쾌감, 정욕과도 같은 전투들의 희열.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평생 못 잊지.]


레스는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 이해합니다.”

[어떤 것을?]

“제가 고향에서 쫓겨나 여기까지 오게  까닭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술탄의 장남에게 결투를 걸었고. 최대한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죽였죠. 그 과정 내내 온몸을 흐르던 전율은 천국 같았고 뒤늦게 찾아오는 그 감각은… 평생 남죠.”

레스의 이야기를 듣던 일행들이 경악했다. 루나가 반사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온 비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맥을 끊어버렸다. 타티아나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날 마담의 카페에서 모르스가 너한테 했던 협박, 술탄에게 넘기겠다는 뜻이 그거였어?”

레스는 끄덕였다.


“나하고 댁들과 계속 얽히는 한 언젠가 드러날 사실 같아서 여기서 그냥 밝히는 거야. 아직은 사쿠라비에서 날 노리고 나타난 추격자는 없었지만, 시간 문제겠지.”

하딘이 말했다.

“왕 시해자가 어떻게 무사히 추격을 따돌리고 달아났지? 차기 계승자라면 예니체리가 경호하고 있었을 텐데.”

“마침 머물던 곳이 바깥으로 향하는 국경과 가까웠습니다. 부족이 교역을 위해 이동했는데 전쟁 때문에 거래처까지 갈 길이 막혀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 중이었죠. 그리고 지금이니까 생각나는 건데 제 스승이 뭔가 했을 겁니다. 제 스승은 예니체리 중에서도 훈련 교관이어서 놈들하고 면식이 있는 눈치였으니. 딱히 내색은 안 했지만.”


타티아나가 끼어들었다.


“그럼 지금 네 스승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상황 아니야?”

“그 양반은 무사해.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지.”


레스는 이야기가 늘어지기 전에 서둘러서 화제를 돌렸다.

레오포드는 눈가를 한 번 감싸 쥐었다가 다시 수화기를 얼굴에 대고 말했다.

[내가 흥분해서 백인들의 마을을 습격하자는 생각까지 품었다고 말한 거 기억나나?]

“어떻게 하셨죠?”

[하진 않았어. 캘러헬과 톤토가 말렸거든. 말릴 사람이 없었다면 정말 했을지도 몰라. 아직 이야기하는 도중이라는 거 아네만 이건 꼭 기억하게.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자기 자신을 멈추지 못할 때가 있어. 그럴 때는 오직 주변 사람만이 그걸 막아줄  있네. 막지 못하면 누군가가 해를 입어.]

그는 말하면서 감정이 차올랐는지 도중에 말을 살짝 더듬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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