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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화 〉[5권] 180회 - 아직도 가야할 길 (180/188)



〈 180화 〉[5권] 180회 - 아직도 가야할 길

“믿을 수 있는 인연은 고귀하죠. 얼핏 사소해 보이는 사람까지 빠짐없이요.”

[도중에  길로 세서 미안하네. 하던 이야기로 돌아오지. 우리가 문명과 싸운 지 10년가량 되어가자 내 마음속에 불안과 나를 향한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어. 동포들의 존망이 걸렸다는 명분만을 의지하면서 싸워왔으나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사실에 더는 눈을 돌리지 못하게 됐지. 가족들도 내 곁을  떠났고. 우리는 날이 갈수록 줄어가고 굶주리는데 그들은 언제나 우리보다 많았어. 나이를 먹어가니 사로잡은 포로들의 애원도 내 마음을 흔들더군. 내가 죽인 그들도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버지였다. 마침내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맹세했던 혈기왕성한 전사는 현실에 타협하는 겁쟁이가 되었다네.]


“레오포드 씨….”

레스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추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그들에게 설파했지. 그들이 끌고 온 호치키스 리볼버 대포와 개틀링 건의 위력에 대해, 그들이 보유한 기병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우리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 투쟁 외에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고 설득을 시도했지. 안 그래도 부족 간의 단합이 위태로운 시기에 그런 말을 해버렸으니 나는 엄청난 질책을 받았고. 그 회의 이후 동맹은 깨졌다. 내가 깨버렸어.]

마음을 가다듬고 그가 말을 이었다.


[사회 속에서 전사의 역할이란 무엇일까? 적을 죽이는 자인가? 아니면 사람을 지키는 자인가? 상황과 관점에 따라  둘의 차이는 애매해지지. 네바로 부족의 전사로서 나는 싸움을 멈추고 백인과 화평을 꾸려야만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길이라고 나의 추장에게 설득했어. 나의 추장, 투슈가쿡은 침착하게 끝까지 들어주었지. 나 못지않게 투슈가쿡도 전쟁에 지쳐있었어. 하지만 나의 제안을 거절했지. 더 싸워봤자 남는 건 홀로 남을 후손들밖에 없으니 당장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일단 살아야 한다고 나는 재차 말했네.]

“저도 그랬을 겁니다,”

레스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이해했어. 하지만 내가 제안한 타협의 길을 거절했지. 그때 본 투슈가쿡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느낀 슬픔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해. ‘준비된 새여.’ 투슈가쿡이 말했어. ‘우리가 싸움을 포기하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우리 후손들은 선조들을 겁쟁이로 기억할 거야. 싸워야만 남겨진 아이들이 우리가 얼마나 자연을 존중했는지, 와칸 탕카의 가르침을 이어왔는지 알아줄 거야. 그들에게 자신들이 투쟁한 자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남길 필요가 있어. 타협하면 아이들은 노예가  거고 이 땅에 우리가 있었던 기억은 사라질 거야.’ 그리 말했네.]

레오포드는 상대가 감정을 추스르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레스가 힘겹게 말했다.

“굴욕을 삼키고 살아남느냐, 아니면 떳떳하게 죽을 것이냐.”


[레스  하자르. 자네는 고향의 전통과 문화를 사랑하지?]


“하루라도 고향을 생각 안 한 날이 없습니다.”

[그대는 타협하지 않은 투슈가쿡의 마음을 짐작 할 수 있겠나? 자신을 포함해서 수많은 동족이 죽을 게 확실한 싸움에 뛰어들어야만 영혼을 지킬 수 있다면 그럴 건가? 나는 하지 못했어. 그는 했지.]

“당신은 타협한 겁쟁이가 아닙니다.”


마음은 알겠다는  레오포드는 슬픈 미소를 옅게 지었다.


[내 이야기는 충분히 했네. 마지막으로 당부 하나 전하고 싶군. 이 광활한 아메리카의 땅에 어느 다섯 부족은 일찍이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고 삶의 방식을 개선했지. 그들도 살던 곳에서 밀려나는 바람에 경제적 기반을 잃었지만, 이내 금방 회복했다네. 비결이 뭐일 거 같나?]

“글쎄요.”

[흑인 노예. 그들이 받아들인 문물 중에는 노예제도 있었어. 내 이야기 때문에 모든 우리 동포들을 피해자로만 봐주길 원치 않네. 객관적인 관점은 전사의 가장 중요한 무기라는 거 명심하도록. 그리고 바다위, 그대가 길을 찾을  있도록 정령들이 인도해주길.]

레스는 침을 삼키고 얼굴을 한 번 쓸었다. 살짝 울먹이면서 그는 말했다.

“긴 이야기 감사합니다.”


그대로 레스는 한참을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자 정오의 평원 위로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으로 일행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스는 말없이 다른 사람이 대신 침묵을 깨주길 원하는 표정으로 시선을 두리번거렸다. 하딘이 심호흡 뒤에 입을 열었다.


“그 전쟁 당시 나와 빈센트는 다른 적과 싸우고 있었다. 마족 연합은 원주민들에게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많은 부족이 그들의 편을 들어주었지. 우리 부대가 맡은 역할은 마족들이 이쪽으로 손을 뻗지 못하도록 막는 거였어.”

루나가 손을 들고 레스에게 물었다.


“그때 캘러헬 씨도 전쟁에 참여했었나요?”

“직접 싸우지는 않았고 다른 방향으로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지금 캘러헬 씨가 정부에게 꼬투리 잡힌 건수 중에 원주민들을 도운 반역 혐의도 있다고 하네요.”

피카니가 말했다.


“캘러헬이 직접 나서서 싸웠다면 그들에게  도움이 됐을 텐데.”


타티아나가  말에 대꾸했다.


“그러면 몇 번은 승리를 누리겠지만 저쪽에서 다른 강자를 보낼 명분과 이유가 생겨, 그래서 직접 나서지 않은 거야. 서로 의미 없이 흘릴 피만 더 늘어나지.”

아비투스가 레스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들을 가치가 있는 이야기이긴 했어. 그래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까닭이 뭐지?”

레스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숨을 고른 다음, 천천히 말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며칠 전에 당신들이  대신 살인을 해준 덕에 나는 살아남았지. 살인으로 사람을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겠어.”


카르델이 말을 받았다.

“흠. 난 딱히 꺼낼 만한 이야기가 없는데.”


레스는 시선을 카르델로부터 하딘을 향해 옮겼다.

“대위. 계속 마음에 걸렸던 게 있어.  여기에 당신 부하가 둘밖에 없지? 아무리 소수 정예로 원정대를 꾸린다 쳐도 둘은 지나치게 적어.”


하딘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고 깜빡이기만 했다. 아비투스와 카르델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레스가 재차 말했다.


“원래는  많았지?”

“그래.”


그는 한  끄덕였다.

“마왕을 데리고 있던 피카니가 당신들과 합류했을 때, 마왕을 구출하러 추적대가 나타났지?”

“그래.”

“그때 얼마나 죽었지?”

하딘은 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레스가 갑자기 온몸을 떨더니 눈이 충혈될 정도로 부릅뜨고 외쳤다.


“얼마나 죽었어?”

눈을 질끈 감은 레스의 눈꺼풀 사이로 굵은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하딘은 고개를 약하게 흔들면서 혀를 한 번 차고 차분히 말했다.


“그 이야기는 들어봤자 의미 없을 걸세.”

레스는 눈가를 움켜쥔 채 말했다.

“아니, 난 들어야 해. 듣고 기억해야만 해.”


피카니가 회중시계를 꺼내서 시간을 살피고 크게 외쳤다.


“휴식 시간 끝.”

레스를 제외한 일행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어색하게 자기 자리를 서성이는 와중에 하딘이 레스에게 다가와 쪼그리고 작게 말했다.

“내가 당장 해줄 이야기는 그쪽이 지금 너무 흥분한 상태라는 거고. 우리는 갈 길이 급해. 이야기는 저녁에 이어서 하지.”


말을 마치고 하딘은 레스의 손을 붙잡아서 일으켜주었다. 레스는 주변 사람들의 손길을 따라 힘없이 마차 짐칸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풀어둔 말들을 마차에 묶고 출발했다.


짐칸 안에는 우울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레스는 뒤늦게 다른 사람에게 민폐 끼치지 않으려 목을 가다듬고 평상적인 어조로 말을 꺼냈다.

“시튼 빌리지까지 얼마나 남았지?”


타티아나가 지도를 펼쳐서 확인하고 대답했다.


“지금까지 1/3 왔어.”

“거기서 마침 봐야만 했던 일이라는 건 뭐야?”

“내가 리차트라의 밑에 있었을 때 그곳에 맡겨놓은 위폐 동판이 있어. 가치가 높은 물건이니까 회수해두면 나중에 도움이 되잖아. 하지만 우리 목표물들이 그곳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비하면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 솔직히 회수할 수 있을 거라고 크게 기대되지도 않아. 시튼과 마을 주민들이 우리를 반겨줘야 할 텐데.”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 남긴 인상이 별로였나?”

그녀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일할 때는 항상 복면을 썼고 볼일만 마치면 자리를 떴으니까 마을 사람 중에 날 기억하는 사람은 없어. 시튼도 나에 대해서는 지저분한 일을 하는 흔한 끄나풀 정도로만 알지. 마지막으로 그곳에 가본지 몇 년은 지났으니 지금 마을이 어떤 모습일지는 나도 몰라.”

“애들이 나쁜 일만 안 겪었으면 좋겠는데.”

레스는 괜히 속이 답답해져서 미닫이 창문을 열고 바깥바람을 안으로 들였다. 옷깃에 넣어둔 목걸이를 손에 쥐고 허공에 들어 올린 다음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집중했다. 머리카락으로 만든  덫의 거미줄 장식에는 명주실 같은 윤기만 흘렀다. 레스는 눈을 반쯤 감고 목걸이를 옆에 내려놓았다.

여태껏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루나가 어쩌다 상대와 눈이 맞자 조금 음정이 엇나간 목소리로 갑자기 운을 띄웠다.

“저기. 레스?”

“왜요?”

“제가 최면 마법 같은 걸  익혔는지 궁금하지 않으시나요?”

뜬금없이 튀어나온 엉뚱한 화제였으나 레스는 능숙하게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왜 익히셨죠?”


“요즘 제가 가장 관심에 두고 있는 학문은 심리학이랍니다. 1900년에 프로이트라는 사람이 ‘꿈의 해석’이라는 책을 발표했는데 발전 잠재력이 대단한 학문이에요. 책 자체는 마음의 준비 없이 읽으면 굉장히 음란한 내용으로 보이지만요.”


분위기가 묘해지자 루나가 괜히 헛기침으로 더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이어서 말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마음이 항상 눌려있어요.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예외가 없죠.”


타티아나와 레스는 고개를 끄덕여주면서 말을 받아주었다. 타티아나가 말했다.


“그래서 루나 씨는 심리학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시나요?”

루나는 한층 더 용기를 얻은 목소리로 능숙하게 말했다.

“다친 마음을 치료해주고 싶어요. 저는 종종 공직자 신분으로 교회에서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듣는답니다. 하지만 단순한 고백만으로는 마음을 고칠 수가 없어요. 근원을 내버려 두고 증상만 덮는 격이죠.”


두 사람은 루나의 말에 집중하고 들었다.

“똑같은 사람은 없듯이 똑같은 고통도 없어요. 하지만 다친 마음을 치료하는 길은 언제나 가장 깊은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부터 시작돼요. 그리고 그게 가장 어렵죠. 덮어둔 아픔과 자기도 모르는 마음보다 깊은 곳에 있는 건 없답니다.”

타티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마법으로 직접 최면을 거는 방법을 생각하셨나요?”

“누군가의 마음을 파헤치는  보통 해선 안 되지만, 비밀이 보장되는 고해성사실이라면 상대와 서로 합의하고 시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직 시도를 안 해봐서 성과도 없지만요. 한창 연구하던 와중에 어디선가 마법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지금 여기 있죠.”


루나는 배시시 쑥스럽게 웃었다. 레스는  박자 늦게 예의를 위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루나가 그를 향해 말했다.

“사쿠라비의 레스. 아픔은 모두에게 동등하답니다. 약한 자, 강한 자 구분 없이요.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되돌아갈 수는 없어요. 그러니 자신을 조금은 놓아주세요. 한계가 오면 레오포드 씨의 말씀처럼 자기 힘으로 자신을 막을 수 없게  테니.”

레스는 표정을 굳히려다가 입을 질끈 다물고 눈가를 소매로 가렸다. 한참을 그렇게 흐느끼면서 소매를 눈물로 적시고는 새빨개진 눈으로 그는 루나를 한 번 쳐다보고, 이내 부끄러워서 시선을 땅에 대었다. 그는 천천히 진심을 담아 한마디씩 정성을 들여 말했다.


“따듯한 위로가 얼마나 값진지 세상은 알아야 해요. 고맙습니다.”

타티아나는 자기도 모르게 레스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는데 어느새 손이 그의 어깨에 얹혀 있었다. 레스는 놀랐고 그녀도 놀랐다. 타티아나는 손을 치워야 할지 내심 고민하고 있었는데 상대로부터 감사가 담긴 고갯짓이 돌아오자 그녀는 좀 더 손을 올려두었다.

잠시  레스는 말했다.

“믿음에 정답은 없어. 아무리 밝은 면을 추구하더라도 누군가는 어두운 면을 보게 돼. 내가 저지른 결과를 모두 확인하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저절로 알 수 있겠지.”


타티아나가 말을 받았다.


“나는 직접 전장에서 뛰어본 적은 없지만, 분명 그들이 저녁에 들려줄 이야기는 가혹할 거야. 마음이 꺾일지도 몰라.”

레스는 덤덤히 대답했다.


“앞으로 나아가야지.”

갑자기 바깥에서 남자들의 고함이 들렸다. 피카니와 하딘이 마차 뒤쪽을 향해 뭐라 소리를 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신경 쓰여서 창문으로 뒤쪽을 내다보니 누군가가 조랑말을 타고 급하게 이쪽을 쫓아오고 있었다. 마차를 쫓아오는 사람은 몸집이 작은 10대 중반의 소년으로 보였고 총이나 칼 같은 무기는 전혀 지니고 있지 않았다. 소년이 이쪽을 향해 외쳤다.


“저는 전령입니다! 아이스 맨이 보냈습니다!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하딘이 마부석에 앉은 부하들을 향해 마차를 멈추라고 손짓했다. 일행은 잠시 멈춰서 쫓아오느라 헐떡이는 소년이 숨을 고를 때까지 기다렸다. 짐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얌전히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레스가 말했다.


“무슨 일 같아요?”

 여자는 고개를 젓고 어깨만 으쓱거렸다. 바깥에서 피카니의 외마디 비명이  번 들리자 레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표정을 찡그렸다. 하딘이 전령하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피카니가 짐칸의 창문 쪽으로 터덜터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레스가 창문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고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피카니는 양손으로 자기 얼굴을 걸레 쥐어짜듯이 움켜쥐면서 말했다.

“대대가 통째로 우리를 따라서 쫓아오는 중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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