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12화 (12/150)

12화 잭팟! (3)

“그래서? 완전히 얼굴에 똥칠을 했단 말이야?”

“네, 각하. 저도 창피해서 혼났습니다. 국빈으로 초청한 외국 정상에게 뭐라 핑계를 댈 수도 없고 말입니다.”

“이, 이. 이. 거지 같은 놈들. 박세진이 당장 연결해!”

씩씩거리는 전도환의 추상같은 명령에 비서관이 급히 올림픽 조직위와 연결되는 전용 전화기를 들었다.

[넵, 각하. 박세진입니다. 웬일이십니까?]

“너, 뭐 하는 사람이야?”

[네?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말이야. 재직 기간 중 제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내년 올림픽 아니겠어?”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총력을 다해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중입니다만… 어떤 점이 각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까?]

“우리 호돌이 깃발, 그거 깨끗하게 관리 못 해? 꼭 이리 내 얼굴에 먹칠을 해야겠냐 이 말이야.”

[…….]

“방금 코모로 대통령을 맞이한 외무부 장관의 보고에 의하면 우리 호돌이가 회색이란다. 새까맣게 때에 절어서 깃발 원래 색깔이 회색으로 알았다 이거야. 이게 말이 돼? 엉?”

[각하, 죄송하지만 그건 저희들 소관이 아닙니다. 서울시나 경기도에서 별도로 관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장 시장하고 도지사에게 연락해 시정, 조치토록 하겠습니다.]

“그래? 너는 가만 있어. 내가 직접 연락하지.”

눈치로 먹고사는 비서관은 즉시 서울시장에게 전화를 돌렸다.

[각하, 억울합니다. 올림픽은 전 행정력이 총동원되서 서포트하고 있습니다만, 그 예산을 내무부에서 안 줍니다. 깃발 구입 예산을 내려 줘야 저희가 구매해서 관리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에는 내무부 장관이다.

“장관, 요즘 골프 치느라 바쁘다며? 영원히 골프만 치게 해 줘?”

[죄송합니다. 각하. 제가 미처 챙기지 못했습니다. 당장 예산을 내려보내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장관, 잘 들어.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매일 새것으로 갈라고 해. 서울시와 경기도만 할 게 아니라 전국 행정 단위에 다 깔란 말이야. 외국인들이 서울만 있나? 발 달린 짐승이 어딘들 안 가겠어? 안 그래?”

[넵, 각하. 각골명심하여 삼천리 방방곡곡에 우리 호돌이가 깨끗하게 휘날리도록 하겠습니다.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시장과 도지사, 군수 불문하고 문책하겠습니다.]

“문책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바로 모가지 날린다고 고지해. 알아들어?”

각 시와 군청 단위까지 내무부 장관 명의의 긴급 통지문이 팩스로 도달했다. 첫머리에 대통령 각하 특별 지시 사항이라는 굵은 제목이 달린 채로.

- 마스코트 호돌이와 올림픽 오륜 엠블럼 깃발 관리에 만전을 기한다.

- 매일 새 깃발로 교체하여 가로기를 깨끗하게 관리한다.

- 방한하는 외국 선수단과 기자단에게 절대 지저분한 가로기가 노출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한다.

- 이에 따른 예산은 우선 국고 수표로 대체하고, 수급에 차질이 없도록 물량을 안정적으로 비축한다.

- 본 지침은 올림픽이 끝나는 날까지 유효하며, 차질을 빗을 시 해당 지사와 시장, 군수의 인사 고과에 적극 반영할 것임을 통지한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5공화국 당시 시장과 도지사, 군수도 중앙정부에서 임명해 내려보내는 때다. 너, 좀 쉬어… 하면 당일로 짐을 싸던 살벌한 시절.

이 공문에 의하면 자신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겨우 깃발 때문에.

- X발, 이거 어디서 사는 거야? 분명히 맘대로 인쇄했다간 또 아작 날 텐데.

조직위 사무실의 모든 전화가 불통이 되었다. 전국에서 호돌이와 엠블럼 깃발을 사기 위해 일제히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주무관, 제발 우리한테 먼저 좀 보내 줘.]

“군수님. 저희한테도 그걸 맘대로 공급할 권한이 없습니다. 이건 민간업자가 조직위와 독점 공급에 대한 파트너 계약을 했단 말입니다.”

[그럼 어쩌란 말이야?]

“당연히 그 파트너 업체에서 사야죠. 조직위는 그 업체에게 한 장당 얼마씩 책정된 금액만 받으면 그만입니다.”

[전화번호, 그 업체 전화번호… 빨리!]

늦으면 똥 된다. 보나마나 이 공문을 받은 전국의 모든 시장, 군수가 움직일 것이다. 벌써 늦었는지 모르겠다.

제기랄… 전화는 또 왜 안 받아? 시간이 저녁 7시, 밤새 달려가서 줄서야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스피드!

서울 은평구 불광동으로. 빨리.

* * *

시혁은 이자룡을 수행해 박세진 씨를 만났었다. 삼송의 구미 공장 확장을 위해 박세진의 도움이 필요해 마련된 자리였다. 박세진은 당시 고향인 구미에서 내리 재선에 성공한 국회의원 신분이었다.

“이거 황태자께서 친히 오셨으니 무조건 해 드려야죠. 그까짓 농가 몇십 채 밀어내는 것이 뭐 대수라고. 껄껄껄.”

“감사합니다. 의원님. 88올림픽 위원장을 하실 때 할아버지를 모시고 뵈었던 기억이 납니다. 범국가적인 행사를 훌륭히 마무리하셨습니다.”

“기억 납니다. 조부께서 워낙 예뻐하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한국대에 자신의 실력으로 들어갔다고 그렇게 자랑을 하셨었지요.”

“예, 여기 김 비서가 의원님께 자주 찾아뵐 것입니다. 오늘은 사과가 아주 실해서 세 박스 차에 실었습니다. 시장님께도 드리고 싶은 데 워낙 눈들이 많아서…….”

“아! 걱정 마세요. 내가 나중에 만나서 좀 나눠 드리면 됩니다. 그 친구도 사과를 아주 좋아해요. 껄껄껄.”

이자룡이 처음으로 일다운 일을 해낸 첫 사례였다. 사전에 비서실의 모든 인맥이 총동원되어 조율을 마친 걸 모른 채 자기가 박세진을 설득한 것으로 알고 있겠지만. X신…….

이 일을 계기로 김시혁은 박세진 의원을 몇 번 더 만났다. 뻘쭘하게 사과 박스만 전달하기 뭐해서 단둘이 식사를 한 적도 있었다.

그 자리에서 올림픽과 관련된 재미있는 비사를 들었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휘장 사업을 신청하는 파트너 업체가 없어서 조직위가 진땀을 뺐다는 얘기와, 전도환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급조한 깃발을 마구 찍느라 개고생을 했다는 얘기도.

이번 생의 시드 머니는 당신의 과거 추억담에서 받아먹어 줄게. 4월달이라는 것만 알지, 정확한 날짜는 못 들어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땡큐! 박세진 위원장.’

시혁과 공 처사는 비닐하우스 한쪽에 나무 상자를 쌓아서 침상을 만들었다. 거기에 이불을 깔고 자는 것이다. 도리가 없다. 스님과 공 처사에게 받은 천만 원의 자금은 몽땅 인쇄소 계약금으로 지급했다. 30% 이상 줘야 했지만, 잉크 값에 불과한 1%에 설득했다. 반신반의하는 인쇄소에게 들이민 조직위원회의 파트너 협약서는 임명장처럼 보였을 것이다.

국가 기관의 빨간 도장이 찍힌 협약서를 보고 인쇄소 사장들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문제는 5월 1일에 깃발을 인수해야 한다. 오만 장씩 열 곳으로 나눠 발주한 수량이 자그마치 오십만 장이다.

공 처사는 내심 쫄리는 가슴을 숨겼다. 여차직하면 시혁이 대신 나서서 뒤집어쓸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아 온 시혁은 절대 무모한 애가 아니었다. 똥 귀저기를 갈아 준 사람도, 싸구려 미국 구호품 분유를 온도 맞춰 먹인 사람도, 스님과 공 처사였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할 때부터 시혁과 함께했던 공 처사에게 시혁은 자식이었던 것이다.

삼십 대에 청운의 꿈을 품고 귀국한 고국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재일 교포 2세로 일본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조총련에 가입한 전력 때문에 무작정 공항에서 당시 중앙정보부로 끌려갔었다.

빨갱이 간첩 새끼라는 결론을 내려놓은 중앙정보부는 나중에야 공 처사를 풀어 줬지만 이미 야구 방망이에 망가진 다리는 뒤틀려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갈 곳 없던 공 처사를 품어 준 것이 스님. 절망에 빠져 있던 공 처사를 절의 불목하니로 불러 놓고, 아침 저녁으로 백팔 배를 시키며 원한을 잊도록 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줄기 희망을 준 것은 시혁. 시혁의 꼬물거림이 공 처사를 힐링케 하고 상처를 어루만진 것이다.

공 처사는 새벽잠이 없는 편이다. 오랜 절 생활로 굳은 습관인 셈이다. 곤히 잠든 시혁의 평화로운 얼굴을 보면서 공 처사는 미소를 지었다.

‘내 아이야. 너를 위해서라면 뭘 못 하리.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그리고, 여느 때처럼 쌀을 씻기 위해 비닐하우스를 감싸고 있는 천막을 젖히며 나섰다. 물을 길러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열악한 환경이다.

순간 공 처사는 눈을 비볐다.

‘이게… 뭐냐? 진짜 전쟁이라도 난 건가?’

“시혁아! 빨리 일어나라. 밖에 좀 나가 봐야겠다.

“…몇 시예요? 아직 캄캄한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밖에 지금 전쟁 난 것처럼 난리가 아냐.”

벌떡 몸을 일으킨 시혁.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왔구나. 드디어 왔어.’

“아저씨, 당황하지 말고 제가 만들어 둔 예약 신청서 있죠? 그거 쫙 나눠 주세요.”

“너, 밖에 나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저 사람들, 다 지방에서 깃발 사려고 온 사람들이겠죠. 새벽 공기가 찬데 큰 주전자에 보리차라도 끓여서 한 잔씩 돌리고요.”

“……예상했구나. 넌 다 내다보고 있었어.”

“예, 접수는 제가 할 테니까 미리 예약 신청서부터 받으세요.”

아직 절의 전화는 불통이다. 태수 이 자식 때문이다. 조직위에 등록한 번호가 절의 유일한 전화였는데, 태수가 분해한 전화기는 아직 죽어 있다. 어쩔 수 없이 무작정 비닐하우스 주소만 들고 물어물어 왔을 것이다.

“죄송한데요. 5월 1일부터 가능하거든요.”

“조금이라도 주면 안 됩니까?”

“예, 오늘 먼저 예약하시고, 5월 1일에 지정된 인쇄소로 가서 깃발 인수하시면 됩니다.”

“아… 큰일이네.”

“겨우 이십 일 기다리는 건데, 좀 참으세요. 그쪽만 그런 게 아니라 서울, 경기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위에서 뭐라 하시면 예약 접수증을 보여 주세요.”

“할 수 없지요. 알겠습니다. 꼭 5월 1일에는 수령하도록 부탁드립니다.”

“참! 돈은 지금 전액 선납하셔야 하고요. 수량도 한 곳당 이만 장 이상 안 됩니다. 나중에 추가 인쇄에 들어가면 다시 통보할 테니 그리 아세요.”

“물건을 한 장도 못 받았는데 계약금이 아니라 전액을 선납해야 한다고요?”

“선결제 안 하시면… 5월 물량은 못 드리고요. 다음 번 물량도 장담 못 할 텐데요. 알아서 하세요. 다음 분!”

듣고 있던 다음 사람이 먼저 돈부터 꺼내며 벙찐 사람을 밀치고 들었다.

“급해서 현금을 못 찾고 국고 수료로 가져왔는데 상관없죠? 무조건 예약하겠습니다. 그 대신 이 사람 몫까지 사만 장을 주세요.”

“어, 어. 이 사람이? 이런 경우가 어딨어? 아직 내 차례잖아?”

“지랄, 아까 안 한다며?”

“내가 언제 안 한다고 했나? 지금 협상 중인 거 안 보여?”

“협상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저 뒤에 줄 선 사람들 안 보여? 다들 시장님 직접 지시를 받고 온 처지야. 더 날 밝기 전에 돌아가서 보고를 드려야 한단 말이야. 걸리적거리지 말고 뒤로 빠져.”

“야, 너 몇 살이야? 아니, 너 몇 급이야. 나 지방 사무관 5호봉이야. 새끼야.”

“예. 그러셔요? 조금 동안이죠? 소인은 겨우 지방 도의 국장이올시다.”

“……!”

크흐흐. 오십만 장 가지고 턱도 없다. 전국의 모든 지방 시, 군에서 다 몰려왔다. 어두운 여명, 날도 밝지 않았건만 1톤 봉고 트럭이 끝없이 줄을 지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비닐하우스로 진입하는 좁은 농로는 말할 것도 없고 왕복 2차선 도로 한 차선은 깃발을 사려는 봉고가 점령하고 말았다.

뒤늦게 출동한 순찰 차가 다급히 무전을 날리고, 추가로 교통경찰이 도로를 통제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혁은 옆의 비료 포대에 현금과 국고 수표를 가득 담았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아먹듯이 실물 깃발 한 장 없이 이백만 장을 팔아 치웠다.

아직 이십 일의 여유가 있다. 이 돈이면 인쇄소에 왕창 결제하고 야간 작업을 시켜 더 찍으면 된다. 장당 이백 원씩 더 준다고 하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 24시간 인쇄기를 돌릴 것이다. 조금 더 옥죄면 오십만 장 정도는 더 찍을 수 있다.

돈이다.

‘잭팟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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