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헬로우 마운!
한국에서 시혁이 잭팟을 터트리는 동안 중국의 마운은 완전히 나락으로 처박히고 있었다.
이렇게 썩었을 줄이야…….
항저우 사범대학교는 항저우에서도 이류에 속하는 그저 그런 학교다. 여기도 합격할 성적이 못 되는 마운이지만 우 총장이 후견인 역할을 해 줌으로서 겨우 들어온 처지.
수학은 꽝, 영어는 만렙. 마윈에게 영어 교육과는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해가 갈수록 마운의 지적 능력은 빛의 속도로 발전했다.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 그저 공부만 했어야 했다.
마운은 중국의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발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자신 주변부터.
마운은 활발히 영역을 넓히기 위한 일환으로 대학 주석(회장) 선거에 나섰다.
“재 뭐야?”
“몰라, 다른 애들이 영어 교육과 원숭이라고 부르던데?”
“홍얼다이(紅二代 건국 혁명가 후손)야?”
“저 꼴을 보고도 홍얼다이 생각이 나냐?”
“그럼 관얼다이(官二代 건국 후 고위직 후손)?”
“X신아, 관얼다이는 지하 금고에 황금을 산처럼 쌓아 놓고 살 텐데 뭔 소리야?
“혹시 청렴한 공산당 간부 집안이거나.”
“입 닥쳐! 청렴한 공산당 간부 본 적 있어? 하다못해 지방 현의 당서기도 얼나이(二嬭 첩) 서넛 없는 놈이 어디 있다고… 에잉.”
“홍얼다이도 아니고, 관얼다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직 공산당 간부 아들도 아니네?”
“마운 쟤, 쌩거지야. 학비도 외국의 어떤 후원자가 내주고 있다더라.”
“근데, 무슨 깡다구로 학생회 주석을 하겠다고 저 지랄이지?”
“냅 둬, 주석한테 학점 잘 주니까 눈깔 돌아간 거지. 또, 뒤로 생기는 돈이 짭짤하다는 소문도 있고.”
“얼굴이나 미끈하면 여학생 표라도 받을 거 아냐. 저 키에 저 꼬라지로 어떻게 표를 얻겠다고… 하여튼 세상에 미친놈 많아.”
모두 대동소이한 반응이었다.
163센티미터 작은 키에 네모나고 각진 얼굴, 거기다 유난히 잔주름 많은 마운의 모습은 결코 호감형이 아니었다. 마운이 손으로 쓴 전단지를 들고 나서면 여학생들은 멀찍이 피해 다닐 정도였다.
며칠 뒤 학생회 주석을 뽑는 날, 대학 정문에 기막힌 현수막이 걸렸다.
- 뚜이부치(對不起 미안하다) 나는 홍얼다이도, 관얼다이도, 당 간부 아들도, 키 큰 미남도 아니다. 그래서 나선 것이다. 마음껏 부릴 일꾼으로 만만하고 부담 없는 나 마운을 뽑아 달라.
중국인은 체면을 목숨처럼 여기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절대 미안하다는 의미의 ‘뚜이부치(對不起)’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체면, 즉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 생각하는 뿌리 깊은 인식 탓이다.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홍위병에게 잡힌 지식인들은 죄를 강요받았다. 여기서 인정하면 바로 죽임을 당했다. 이런 아픈 기억이 절대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비틀린 인식을 만들어 낸 것이다.
대신 어쩔 수 없이 사과를 해야 할 입장이 닥치면 ‘부하오이스(不好意思)’… ‘겸연쩍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두리뭉실한 표현을 대신 쓰곤 한다.
최대한 허풍 떨다가 나중에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뻔뻔하게 겸연쩍다… 이 말로 퉁치는 것이다. 그런 중국인에게 마운이 내건 현수막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희한한 놈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종내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문구였다.
그래, 우리가 상전을 뽑는 것이 아니잖아. 우릴 대신해서 일해 줄 주석을 뽑는데 굳이 홍얼다이나 관얼다이를 왜 뽑지?
이날 총 8천 명이 투표를 했다. 그런데 막상 개표가 진행되는 체육관은 정적에 덮이고 말았다. 한 장씩 투표용지를 개봉할수록 체육관이 술렁이고 있었다.
8천 명 중 6천6백 명이 마운의 이름을 적어 낸 것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정말 상상치 않았던 결과였고, 이 투표는 항저우 사범대학의 전설로 남았다.
마운은 진심을 다하면 마음이 움직인다고 믿었다. 마운은 연달아 항저우 학생연합회 주석직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런데, 대의원 전체의 만장일치로 덜컥 항저우 학생연합회 총주석(총회장)에 뽑힌 것이 아닌가?
이변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 * *
마운은 항저우 공안국 유치장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자신이 얼마나 순진했던 것인지를.
십만 명에 달하는 항저우 소재 대학생들. 그들이 매달 납부하는 학생회비는 작은 돈이 아니었다. 그 돈을 지금껏 마음대로 유용하던 연합회 대의원들, 각 대학 학생회 주석들은 쓰다 버릴 도구로 마운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마운이 입출금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자고 고집을 부리고 나섰으니…….
오히려 대의원들의 단체 고발로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 마운.
공안은 마운의 해명을 귓등으로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공안국장이 직접 지시한 일이다. 미리 만들어 둔 조서에 지장을 받고 넘기면 그만이다.
“너, 결정해. 몸이라도 성하게 감옥 갈래, 아니면 팔다리 다 부러진 채 석 달 동안 여기 있을래?”
“저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억울하다고요.”
“쯧, 덜 맞았구나. 이걸 어쩌나… 죽이진 말라고 하셨는데 말이야.”
“정상적인 조사를 하면 바로 드러날 일입니다. 증거도 다 제시했단 말입니다.”
“증거? 우린 못 봤는데?’
“무슨 소리요? 출납 장부랑 돈을 인출한 대의원 명단도 다 제출했잖습니까?”
“몰라. 받은 적도, 본 적도 없어. 그건 네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고.”
“이익!”
마운은 다시 끌려 나갔다.
웁, 웁-
입에 더러운 걸래를 물린 다음.
공안은 신문지를 둘둘 말아 물을 잔뜩 먹인 몽둥이로 온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 퍽, 퍽.
모래주머니를 때리는 소리가 지하실 벽에 부딪쳐 메아리처럼 허공을 떠돌았다. 마운의 몸이 몇 번 들썩거리다가 꿈틀거림을 멈췄다.
공안의 눈빛은 무표정하고 차가웠다.
“이 새끼, 꽤 독종인데?”
“그래 봐야 자기 손해지. 매에 장사가 있나?”
“더 하면 뒈질 것 같은데?”
“죽으면 그것도 지 운명이지. 그나저나 이 새끼 지장은 다 찍었어?”
“응, 내가 손가락 잡고 찍었어. 그대로 보고하고 종결하자고. 벌써 오후 3시가 다 됐네.”
정신이 까무룩 넘어가는 와중에 마운은 공안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었다.
여기가 지옥이구나.
더러운 공산당이 공맹을 죽이고, 부처를 죽이더니 이젠 인민들까지 마구잡이로 죽이는 세상이었어. 모든 게 일장춘몽이었다. 이런 세상을 바꿔 보겠다고 설친 내가 미친거지. 크크크크.
정신줄을 놓는 그 순간, 마운의 목에서 반짝하는 작은 빛이 보이더니 점점 번지기 시작했다. 마운의 상반신이 푸른 옥빛으로 잠겨 들었다.
* * *
캄캄하다. 밤인가?
죽도록 맞았는데 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혹시 나는 죽었나? 그럴지도. 너무 많이 맞았어. 출혈이 멈추지 않았는데 그래서 죽었는지 모르겠다.
밤에 불어오는 봄 바람이 너무 상큼하다. 꼭 고향 집 풀밭에 드러누운 듯 편안하네. 편안해.
편안해?
아무리 손을 들어 휘저어 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진짜 죽었나? 그럼 여기는 저승?
아냐, 저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하다. 뺨에 살짝살짝 와 닫는 봄바람과 싱그러운 풀내음까지.
그리고, 서서히 다가오는 저 불빛.
화물차다. 항저우에서 보기 힘든 새 차의 헤드라이트로 인해 주변이 환 해졌다. 순식간에 어둠이 물러가고 주변이 밝아졌다. 차는 좁은 농로를 조심스럽게 접근하더니 작은 비닐하우스 앞에 정차하고 사람 둘이 내렸다.
비닐하우스도 쇠파이프로 뼈대를 만든 것이다. 항저우에서는 대나무로 만들지 저런 쇠파이프로 살대를 만들지 않는다. 어디냐? 여긴…….
“김 사장, 김 사장!”
김 사장? 중국말로 하면 진로반(金老板)… 비닐하우스에 무슨 사장이 있다는 말인지.
…내가 조선, 아니 한국말을 알아들어? 평생 한국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 당연히 한 마디도 모른다.
제길, 꿈 치고는. 좀 더 들어보자.
잠시 뒤 비닐하우스에서 눈을 비비며 젊은 청년, 내 또래 정도의 잘생긴 남자가 문을 열었다.
“아… 왜요? 더 이상 드릴 수 없다고요.”
“아냐, 큰일 났어. 한 번만 도와주시오. 제발!”
“무진시만 더 드리면 다른 시, 군에서 가만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김 사장, 몇 배든 드릴 테니까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오. 내무부 장관이 방문한다는데 새 깃발을 걸지 않았다간 무슨 경을 칠지 모르는 상황, 진짜 이번 한 번만 편리를 봐주쇼.”
“아무리 그래도 없어요. 다 뒤져 보세요.”
“알지, 알아. 여기서 달라는 게 아니잖소? 담당 인쇄소에 오더만 내려 주면 됩니다.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하리다.”
“거기도 이미 24시간 철야 작업을 한 달째 하고 있어요. 하루하루 예약이 꽉 차 있는데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글쎄, 내 여기 오기 전에 인쇄소 사장하고 말을 다 맞추고 왔다니깐… 특별 공임을 얹어 주기로 했어요. 내가 세무국 동기에게 말해서 세금도 깎아 주기로 했고. 이제 김 사장 작업 지시서만 있으면 돼요. 부탁합니다. 돈도 세 배… 응? 표 안 나게 현찰로 준비해 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저 청년이 무슨 물건을 독점하고 있구나. 대단하다. 무진시가 얼마나 어딘지 몰라도 공무원이 일개 민간업자에게 고개를 숙이다 못해 웃돈을 더 주겠다고 사정을?
그건 그렇고 확실히 한국말을 백 퍼센트 알아듣고 있다. 단순히 해석 차원이 아니라 말의 행간에 숨은 의미까지 속속들이 인식되어 머리에 박힌다.
젠장… 꿈은 꿈이구나.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과장님, 이번은 장관이 오신다고 하니 예외로 치고 물량을 배정해 드릴게요. 딱 한 번입니다. 그리고 저 도둑놈 아닙니다. 원래 가격만 주시면 됩니다. 나중에 무진시에 확인할 거예요. 중간에 돈 새지 않도록 하세요.”
“……!”
“알았죠?”
- 크크크, 저 공무원 놈 깜짝 놀란다. 아마 다섯 배쯤 받아 왔을 것이다. 그러다가 정곡을 찔리니 앗 뜨거 하는 표정일세.
꿈일지라도 마운은 즐거웠다. 청년의 시원시원하게 잘생긴 얼굴도 보기 좋고, 행동거지도 너무 멋있다. 현실에서 만난다면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은데, 아쉽다.
이윽고 차가 급히 떠난 후 청년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꼭 내가 있는 빈 공간을 보는 것만 같다. 그럴 리 없겠지만.
빙긋이 웃는 청년의 얼굴이 봄바람보다 더 상큼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운은 심장이 터져 버리는 줄 알았다.
“헬로우, 마운!”
- ……!
“나도 당신의 꿈을 꿔.”
- …….
“왜 그런지 아직 모르겠어. 어떤 조건이 맞아야 꿈으로 들어가 당신을 볼 수 있는지. 하지만,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인가 봐.”
- …….
“우린 서로 소통할 단계는 아닌 게 분명하네. 아직 당신을 볼 수 있는 눈이 안 열렸거든.”
마운도 너무 물어볼 게 많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큰소리를 치고 싶었다. 그러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몸도 형체가 없는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들린다. 너무 또렷하게 귀에 박힌다.
- 너, 도대체 누구냐?
“오늘 꿈에 당신이 나왔어. 전과 달리 당신의 주변 풍경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오직 당신의 목걸이가 빛을 내는 것만 보였지.”
- …….
“처음이야. 당신의 목걸이가 빛을 내는 것을 본 것은.”
- …….
“당신에게 보일지 모르겠는데… 여기, 이 목걸이… 황홀한 색깔이군. 내 목걸이가 빛을 낸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네. 멋있지 않나?”
목걸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이 볼품없는 옥 쪼가리? 아쉽지만 확인할 수가 없다. 내 몸은 형체가 없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운, 자네는 장차 중국뿐만 아니라 세상이 인정하는 거물, 세계인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될 거야. 이건 변하지 않는 흐름이고 역사거든. 과장된 말이 아냐. 확신이지.”
뭔 소리야? 근근이 먹고살며 졸업을 앞둔 놈이 나라고. 거물은 고사하고 뛸 수 있는 개구리라도 되었으면 원이 없겠다.
“자네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건 느낌이 와. 내 눈에 보이지 않아서 섭섭하지만 말이야. 조금만 기다려 줘. 우린 멀지 않은 날에 곧 조우하게 될 거야. 그날을 기대할게.”
- X발… 너 도대체 누구냐고?
“참, 내 이름은 김시혁. 비로소 시(始)자와, 붉을 혁(赫)… 나를 키워 준 스님 말씀에 의하면 새벽이 열리는 일출 무렵 나를 처음 보고 그렇게 지었다고 하더군.”
- 김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