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15화 (15/150)

15화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시혁아, 앞으로 뭘 할 거냐?”

“돈을 벌어야죠.”

“이만큼 벌었는데? 너 평생 호의호식하면서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돈이다.”

맞는 말이죠. 지금 55억이면 김시혁이 땅에 파묻힐 때 당시의 가치로 환산하면 적어도 천억은 넘을 겁니다.

문제는.

“아저씨, 삼송그룹을 먹으려면 얼마나 있어야 할까요?”

넋두리처럼 뱉은 말이었다. 가슴에 맺힌 한이 무심결에 구슬처럼 튀어나온 것이다. 공 처사의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삼송 창업자 이병천 회장의 건강이 심상치 않다. 아마 오래가지 못할 거야. 다음 대 후계 구도는 이미 3남 이건호로 결정이 되었다고 봐야겠지. 나머지 계열사를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형제들 간에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을 거다.”

흠, 거기까지는… 경제계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추론이 가능하지.

“그래서요?”

“작년에 삼송그룹의 전체 매출은 14조 원이었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수위의 재벌이지. 그런데, 지배 구조를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계열사들끼리 순환 출자로 엮어 놓았다. 한두 개 계열사를 먹는다 쳐도 절대 삼송 전체를 장악할 수 없다.”

“……!”

이거이거… 의외다. 뜻밖의 분석이 공 처사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자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공 처사, 일본 게이오 대학 회계학과를 다닌 재원이었지.

“아마 저 구조를 설계한 당사자가 아니고는 누구도 알 방법이 없어. 숨겨진 백기사가 누군지, 각 계열사가 발행한 BW(신주인수권부 사채)의 상세 내역을 확인할 시스템이 아직 없기 때문이지. 결론은 누만금이 있어도 삼송그룹을 먹을 수 없다.”

“…아저씨, 만약에 저에게 무한대의 자금이 있다고 쳐요. 그래도 삼송을 먹을 수 없다는 말인가요?”

“그래. 안 돼, 하지만… 무너뜨릴 수는 있다.”

“……!”

“어차피 곁가지 계열사들은 이병천 회장이 사망하면 다 찟어져 나갈 거야. 가장 알토란 같은 핵심 기업들만 3남이 가지게 되겠지. 그는 너구리상이다. 경영에 있어서 동물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어. 삼송을 똘똘 뭉쳐 몇 단계 도약시킬 것이다.”

대단하다. 이쯤 되면 분석 정도가 아니라 삼송의 미래를 정확히 꿰뚫는 수준이다. 간질간질하다. 공 처사가 어디까지 예측할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욱일승천하는 삼송은 세계로 뻗어 나갈 것인 바, 그런 그들의 머리를 노리는 것은 너무 위험한 싸움이 될 거야. 멍청한 짓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발상의 전환을 하면 돼.”

“…….”

“머리를 자를 수 없다면, 차라리 거꾸로 발목을 잘라 버려야지. 주저앉히고, 융단폭격을 퍼붓는 거야. 그게 삼송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머리는 어떤 회사고, 다리는 어떤 회사를 말하는 겁니까?”

“아직 단정할 수 없다. 이병천 회장의 사망과 3남 이건호의 후계 승계가 완전히 마무리되어야 윤곽이 드러날 거다. 그래도 내 생각에는 삼송생명, 제일방직, 이 두 회사가 머리가 될 가능성이 제일 농후하다.”

“다리는요?”

“변할 거야. 지금도 삼송그룹은 아메바처럼 분열을 시도하고 있으니까. 어차피 잘라 버릴 다리 따위 중요한 게 아냐. 정작 중요한 것은 몸통이 어디냐… 이거지.”

“오! 그래요. 몸통은 어느 회사인데요?”

“삼송전자!”

“아닌데… 전자는 아직 다른 계열사를 압도하는 규모가 아니잖아요? 반도체도 막 시작해서 걸음마 수준이고.”

“모르는 소리, 시혁아. 흐름을 봐야 한다. 삼송전자야말로 삼송의 모든 것이 될 거다. 세상은 그리 가게 되어 있다. 그룹의 모든 계열사를 합해도 삼송전자 하나만 못하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거다.”

“왜 그렇게 단정하시는 겁니까?”

“내가 이건호라면 삼송전자에 목숨을 걸거니까… 그도 반드시 그렇게 할 거다.”

우와! 이 아저씨. 그동안 내가 잘못 봤구나. 콧구멍만 한 절의 불목하니로 생각하다간 큰일 나겠다.

미래에 정보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세상 사람이라면 충분히 추론할 수 있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도 컴퓨터도 정통한 이가 몇 없다. 286이 겨우 보급되는 디지털 태동기가 아닌가.

지금 공 처사의 분석은 원시인이 미분과 적분을 논하는 수준 이상이다. 진흙속에 묻혀 있어도 언젠가 보석은 빛을 발한다더니… 바로 옆에 찐천재가 있었어.

브라보! 왕건이를 건졌다.

시혁은 휘장사업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것보다 공 처사의 진면목을 알게 된 것이 더 기뻤다.

돈? 얼마든지 긁어모을 수 있다. 앞으로 닥칠 IMF 사태와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비트코인의 미친 듯한 폭등… 호재와 대박의 기회는 차고 넘친다.

문제는 사람. 삼송과 싸우려면 그에 걸맞은 인재가 필수적인 상황에서 갑툭튀로 공 처사가 나왔으니.

이거야말로 진짜 잭팟이지.

“아저씨는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른다. 네가 왜 삼송을 적으로 상정하는지도 몰라… 시혁아. 발톱을 숨겨라. 섣불리 설익은 발톱을 드러내면 반드시 공격을 당한다.”

“……!”

“삼송은 단순한 재벌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대한민국 전체 하늘을 덮고도 남는다. 미안하지만 현도나 금송은 삼송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게 될 거다. 틀림없어.”

“…….”

“네가 확실히 삼송의 목을 물고 흔들 정도로 힘을 비축한 뒤가 아니면… 그들과 친해져라. 삼송이 아니라 비삼송 연대를 구성한 뒤 동굴로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법이다.”

“에이… 아저씨, 겨우 돈 좀 벌었다고 감히 삼송 같은 거대 재벌과 싸우겠어요?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에요.”

공 처사, 피식 웃는다.

“쯧쯧, 내가 너를 모르랴… 처음 절에 들어오는 너를 스님이 안아 올릴 때 옆에 있었다. 그뒤로 장장 19년을 하루같이 살았다.”

“도와줄 거죠?”

“힘이 닫는 데까지… 같이 가주마.”

오늘 장사 끝내주게 했다.

처음으로 마운과 운명적으로 연결되는 진귀한 경험을 했고, 한 달간 벌어들인 돈의 결산도 했고, 무엇보다 앞마당 흙 속에 묻혀 있던 진짜 보석을 찾았다.

이런 분과 함께라면 삼송 할아비라도 해볼 만하다.

아저씨 말대로 삼송의 다리를 자르려면 자금이 얼마나 필요할까? 계산하기 쉽지 않다.

그럼 돈을 더 벌어야지. 삼송의 발목을 자르고 융단폭격을 가하려면 지금 돈 가지고는 발톱도 못 자른다.

더, 더,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나는 그 방법을 알고 있고, 시드 머니도 마련되었다.

‘슬슬 돈을 불려 볼까? 그것도 몇백 배로.’

* * *

양들이 들판에서 맛있는 풀을 뜯고 있다.

잠시 후 먹구름과 함께 비가 후드득 내리자 양들은 목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계곡을 지나는 중 갑자기 한 발의 총성이 들렸다. 양치기 목동이 멀리 있는 늑대에게 총을 쏜 것뿐인데, 겁에 질린 양 떼는 좁은 계곡 입구를 빠져나가기 위해 미친 듯 달렸다.

양 떼 사이에 공포가 전염되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동료의 몸을 밟고 맹렬하게 도망쳤다. 도주하는 양 떼 사이로 피를 흘리며 나자빠진 양들의 시신이 즐비하게 널렸다. 아직 입구에 도달하지 못한 양들은 피를 보고 한층 더 광분했다.

태반이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들판은 피로 물들었다.

금융시장의 패닉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우화다.

증권시장은 주기적으로 폭락한다. 그렇게 주기적인 폭락장에서 잘못된 신호 한 방이 투자자들의 공포가 합쳐지면… 금융시장은 예측하지 못하는 대폭락, 경험하지 못한 혼란을 맞이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올해 10월달이면 사상 유래가 없는 증권 파동이 발생한다. 마치 1929년 대공황처럼.

블랙 먼데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는 폭탄 같은 날.

뉴욕 증시 다우존스 지수 22.6% 폭락. 사상 최대의 낙폭이다. 뉴욕 증권거래소(NYSE)가 개장하자마자 매물 폭탄이 쏟아졌고, 주가는 바로 곤두박질쳤다.

양 떼들이 갑자기 좁은 탈출구를 향해 돌진하자 수많은 금융기관들이 밟혀 죽었고, 돈을 잃은 투자자들은 하루아침에 거지로 전락했다.

단 하루만에, 그 공포스러운 월요일, 블랙 먼데이…….

“헤이, 존! 자네 위험해.”

“조까!”

“올해 말이면 회장이 자네 목을 바로 날릴 거야.”

“맘대로 하라고 해.”

“왜 사사건건 회장에게 반기를 드는 건가?”

“틀렸으니까. 회장은 너무 경직되어 있어. 그가 추구하는 방향이 틀렸다고.”

“지랄… 시한부 목숨치고는 너무 씩씩한데?”

옆 팀의 팀장이 또 속을 긁기 시작하자 존 메리웨더는 짜증 난 말투로 쌍욕을 퍼부었다.

다 마음에 안 든다.

살로만 브라더스는 얼마 전 시티은행 그룹에 매각되었다. 당연히 새로운 회장이 부임했고, 그는 안정적인 은행 문화를 강조하곤 했다. 덕분에 공격적인 성향의 펀드 매니저 존 메리웨더와 수시로 부딪쳤다.

제기랄, 살로만 브라더스는 투자 은행이라고. 안정만 찾다가 수익률이 떨어지면 또 그걸 이유로 목을 날릴 것이면서… 어쩌란 말이냐.

월가에서는 회장이라고 해도 개별 펀드 매니저의 투자에 관여하지 못한다. 다만, 연말까지 수익을 내지 못하는 펀드 매니저를 해고할 권한은 회장에게 있다.

“와그너, 아무래도 올해 말이면 우리 팀 폭발… 하겠지?”

“그렇다고 봐야지. 보스가 저렇게 회장과 사사건건 대립을 하는데 그냥 두고 보겠어?”

“도대체 보스는 무슨 생각인 거야?”

“몰라. 나도 속을 모르겠어.”

“침몰하는 배에 계속 타고 있어야 하나? 온종일 사표를 만지작거리느라 일이 손에 안 잡혀.”

“이봐, 지미. 가려면 혼자 가. 나는 끝장을 볼 거야.”

“…….”

“너는 아이비리그 출신이지만, 나는 보스가 발탁해 줘서 월가에 입성했어. 사내새끼가 불알 달고 나와 그런 은혜를 배신하면 말이야. 떼 버려야지.”

“와그너, 후회할걸?”

“지미, 네가 벌써 회장 쪽에 팀 정보를 넘기고 있다는 거 다 알아.”

“흐흐흐, 살 놈은 살아야 하지 않겠나?”

“그냥 가라. 나까지 흔들지 말고. 원래 난파선에서 가장 먼저 뛰어내리는 것이 쥐새끼잖아. 안 그래?”

아직은 이 둘의 운명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었다. 회장 굿 프랜드와 펀드 매니저 존 메리웨더의 운명도.

* * *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시혁도.

1987년 10월 18일 양 떼들이 좁은 계곡 입구로 미친 듯 돌진하면서 블랙 먼데이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기회다.

공 처사가 말한 삼송의 발목을 자르고 주저앉힐 자금, 이를 마련한 천재일우의 기회.

그러나, 지금 쥐고 있는 돈으로 들어가본 들 효과가 미미할 것이다. 55억이 큰돈이긴 하지만 국제 금융이라는 무대에서 보면 너무 작다. 큰판에 진입하기에는 부족한 자본이다.

무언가 다른 꺼리가 필요하다. 단기간에 몇 배, 몇십 배, 몇백 배로 뻥튀기 할 꺼리.

시혁의 머리가 열리기 시작했다. 활성화된 기억의 창고에서 각종 자료를 꼼꼼히 되새김질했다.

노련한 사냥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맹수와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는다.

제일 상책은 함정에 빠트리는 것, 통째 맹수를 포획하는 것이야말로 가죽을 상하지 않고 잡을 최고 좋은 방법이다.

차선책은 올무로 잡는 것, 비록 다리 한쪽 가죽이 상하지만 이도 나쁘지 않다. 직접 상대할 필요가 없으니까.

제일 하책은 총을 들고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이건 굉장히 위험한 방법이다. 자칫 잘못하면 맹수의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에 갈기갈기 찢길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시혁은 결정을 내렸다. 그는 이미 노련한 사냥꾼이다. 어떻게 함정을 파고, 어떻게 올무를 깔고, 만약 최후의 순간이 오더라도 상처 없이 가죽을 건질 방법을 통달하고 있다.

단타로 일단 불리자.

55억이 1,000억 이상으로 불어나면 그걸 밑천으로 블랙 먼데이 때 뻥튀기를 한판 더 하자.

삼송의 발톱이 아니라 아예 발목을 자를 자금은 여기서 만든다.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적기일 수도 있음을…….

‘열도 침공이다. 야무지게 털어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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