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인연의 고리
“어? 선배님.”
“또 보네, 후배.”
“설마했는데 선배님이 제 담당이 될 줄 몰랐습니다.”
“내가 지원한 거야. 후배 이름이 거론되길래.”
뜻밖이다. 노태후가 붙여 준다는 안기부 담당 직원이 이 사람일 줄이야.
전에 공 아저씨의 일본 출국과 관련해서 서류를 가지고 왔던 안기부 직원. 공 아저씨의 처지를 이해하고 진심으로 사과했던 한국 법대 30년 선배.
그렇잖아도 시혁이 인재풀 바구니에 담아 둔 사람이었다. 명함에는 딱 손미석이라는 이름과 전화번호밖에 없었다. 왜 정보기관 사람들은 이 따위로 명함을 만들까? 미래에도 국정원 직원 명함은 한결같았다.
“오늘 오후 통역할 중국 외빈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아무런 사전 정보를 받지 못했습니다.”
“중국이 아니고, 중공. 우리나라와는 외교관계도 없고, 아직 적성국가니까.”
“중국이나 중공이나 무슨 차입니까? 어차피 올림픽 회의차 참석하는 외빈인데.”
이거 봐라? 이 양반… 은근 공산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이 가득하다.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곤란한데… 한번 머리에 박힌 고정관념은 특별한 동기가 없는 한 바꾸기 쉽지 않다.
미래에는 거기가 돈 밭인데?
“후배님, 그게 아니라 우린 그렇게 교육받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되어 있어요. 쉿! 이건 비밀.”
“아…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도 한국 최고 상아탑을 졸업한 선배님께서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는 줄 알고 살짝 실망할 뻔했어요.”
“앞으로 우린 중공과 교류를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 올걸? 13억 인구를 가진 시장 아닌가? 웃긴 얘기지만 그 인구에게 팬티 한 장씩 팔아도 13억 장일세. 후후후.”
“동감입니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으로 돈맛을 알아 버린 중국이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 시장을 바로 옆에 두고 안 먹을 수는 없죠.”
“호오, 역시 후배. 일본에서 돈을 세 배로 불렸다며? 얼마 전에는 삼성동에 엄청난 토지도 사시고.”
“……매일 저녁 제 집 앞에 서 있는 차가 안기부였군요.”
“부인하지 않겠네. 장사동 부장은 자네를 요시찰로 분류하고 있으니까.”
“저는 그 양반 일면식도 없는데요?”
“노태후 후보가 자네를 아끼니까 더 그런 것이겠지.”
“제기랄, 저도 부인하기 힘들군요. 신세를 진 건 사실이니까.”
“조금만 참으면 될 거야. 나그네는 지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아. 내일 떠오를 뜨거운 태양을 걱정할지언정.”
“까짓것, 이 또한 다 지나가리… 들어가시죠, 선배님.”
올림픽이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전도환 정권은 자신이 유치한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6.29 선언을 지지해야 했다. 그 결과 레임덕을 더 가속시켰다.
이번 각국 IOC 위원 초청 리셉션도 초청자 명의는 대통령 전도환이었으나, 실제 주인은 여당의 대통령 후보 노태후일 수밖에 없었다.
리셉션이 벌어지는 청와대 영빈관에서 전도환은 외빈들을 일일이 맞아들였고 단상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외빈들은 노태후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전도환과 장사동의 눈에 띈 한 사람.
“사동아, 저놈 저거… 그놈 아니냐?”
“예, 각하. 그놈입니다.”
“저놈이 왜 저기 있어?”
“노 선배가 특별 통역으로 천거했답니다.”
“국제적 스포츠 거물들에게 실수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런 경험도 없는 어린놈을…….”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둘의 눈은 휘둥그레 커져 있었다.
노태후의 주변에는 소련과 미국, 그리고 일본의 IOC 위원이 둘러 싸고 있었다. 하지만 통역은… 달랑 저놈 하나.
“놀랍습니다. 어떻게 우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정통 발음을 이토록 정확히 구사할 수 있습니까? 혹시 모스크바에 유학을 다녀왔습니까?”
“아닙니다. 미하엘 위원님, 저는 아직 단 한 번도 외국을 나가보지 못했습니다.”
“믿을 수 없어. 간간이 섞여 나오는 발음 중에 옛적 왕가에서 사용하던 격조 높은 성조가 보입니다. 독학으로 절대 배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요.”
“감사합니다. 미하엘 위원님.”
“대충 짐작하기로 그대의 놀라운 소련 발음에 대해 경탄을 하는 것 같습니다. 나 역시 수많은 통역을 겪어 봤지만 그대처럼 정확한 발음을 하는 사람, 본 적이 없어요. 대단합니다.”
“과찬이십니다. 하야시 위원님.”
“일본어는 또 언제 배우셨소? 이것도 독학이오?”
“네. 그저 책을 보고 익혔습니다.”
“발음을 어찌 책 보고 읽힐 수 있다는 말이오? 놀랍습니다.”
“마침 제 집안 삼촌이 게이오대학에서 수학하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발음을 익혔습니다.”
“오! 역시 그렇군요. 게이오 대학이라… 혹시 몇 년도 졸업생입니까? 저도 게이오 출신입니다.”
“정확한 연도는 모르겠지만 졸업한 지 22년 되었습니다.”
“혹시… 럭비부에 있었다는 말은 못 들었나요? 제 절친 중에 재일한국인이 한 명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 그렇다면 맞는 것 같습니다. 제 삼촌이 재학 중 럭비부 주장을 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공사홍… 그 친구의 조카였군요.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한국에 온 김에 꼭 만나 보고 싶습니다.”
“안타깝게 지금 미국에 계십니다. 나중에 꼭 위원님께 연락을 드리도록 말씀 전하겠습니다.”
소련말로 거침없이 대화를 하고, 일본 위원과도 저렇게 자유롭게 말을 나누는 모습이 상식적이지는 않다. 이를 지켜보는 노태후와 미국 위원도 많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Lucky Boy! 언빌리버블… 영어는 기본적으로 하시죠?”
“예. 마이클 위원님. 영어는 제가 가장 자신 있는 언어입니다.”
“약간 뉴욕 브루클린 악센트가 섞인 억양을 쓰는군요.”
“예. 영어는 각 지방마다 독특한 악센트를 가지고 있죠. 그런데 저는 브루클린 흑인들이 가지고 있는 소울틱한 발음을 좋아합니다.”
“……! 그것까지 감안해서 공부를 했다는 말인데, 놀랍습니다. 눈을 감고 들으면 원어민이라고 착각하겠습니다. 정말 경이롭습니다.”
노태후도 영어는 알아들었다. 소련말과 일본말은 정확히 캐치할 수 없었으나, 사관학교 생도 시절부터 영어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노태후다.
이놈은 끝없는 양파다. 영어와 일본어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소련말까지 이토록 능숙하게 구사할 줄 진정 몰랐다.
가만, 처음에는 중공어 때문에 통역 부탁을 했던 것이 아닌가? 노태후는 미국 위원을 배려해 영어로 시혁에게 물었다.
“시혁아. 너 중공어도 할 줄 안다고 하지 않았더냐?”
“예, 중국말도 이 정도는 합니다.”
각국의 IOC 위원 정도 되면 영어는 기본적으로 한다.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천재라지만 어학은 단기간에 습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거기다 이정도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려면 몇 년을 그 나라에서 현지인들과 어울려 살아도 힘들다.
“너 도대체 몇 개국 말을 할 수 있는거냐?”
“글쎄요. 어학에 관심이 많아 닥치는 대로 습득해 왔습니다. 몇십 개국은 될 겁니다.”
“……!”
노태후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각국 위원의 눈빛이 변했다.
한국이 무서운 나라였구나. 이런 천재가 있었다니… 세상은 한 번씩 상상 이상의 천재를 배출하고 이 천재들이 세상을 바꾸는 법이다.
그때 노태후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중국의 IOC 위원. 그는 통역을 데리고 있었다.
노태후를 중심으로 미국과 일본, 소련, 중공의 4대 강국 위원들이 다 모인 셈이다.
“반갑습니다. 노태후 후보님.”
“아, 예. 후진타오 위원님. 여기 통역이 있으니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어색한 영어를 듣고 노태후가 던진 말에 후진타오 위원은 힐끔 시혁을 응시하더니 자기가 데리고 온 통역을 가리켰다.
“저도 통역을 대동했습니다. 귀국말에 익숙한 조선족 출신입니다. 통역하라.”
“예, 지금부터 제가 통역을 하갔슴메다. 옌벤에서 자라서리 조선말에 능숙하디요.”
“…북한 말투로군요. 시혁아 네가 위원님께 말씀을 드려라.”
바로 언짢은 표정을 짓는 노태후, 그도 그럴 것이 너무 티가 났다. 평생을 군에서 살아온 노태후에게 북한 말투가 거슬리는 것은 본능과 같은 것이었다.
시혁도 은근 긴장하고 있었다. 드디어 나왔다. 이 사람을 만나려고 통역을 수락한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후진타오 위원님. 편하게 말씀하시면 위원님의 뜻을 성심껏 통역하도록 하겠습니다.”
“……! 화교였던가?”
“하하하. 아닙니다. 그냥 중국어를 공부한 학생입니다.”
“그렇게 정확한 푸통화(普通話, 표준어)를 구사하는데 화교가 아니라고?”
“예, 위원님. 참고로 남방 광동어뿐만 아니라 7대 지방 사투리 모두 가능합니다.”
“말도 안 돼…….”
이제 한국과 미국, 소련, 중국, 일본의 강대국 IOC 위원들이 시혁을 중심으로 빙 둘러싸고 대화를 하는 이상한 풍경이 펼쳐졌다. 진정 괴사다.
이를 전도환과 장사동이 지켜보고, 각국의 위원들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노태후의 입이 귀 끝에 걸린 것은 당연하다. 평소 그렇게 거만한 강대국 위원들이 존경의 눈길을 보내고 있으니 어깨에 잔뜩 뽕이 들어갈 수밖에.
- 봤냐? 도환아. 이게 너와 나의 클라스 차이다. 크크큭.
“안녕하시오? 혹시 에스파냐어도 됩니까?”
슬며시 끼어드는 스페인 위원.
“당연히 됩니다. 같이 말씀 나누시죠. 아름다운 베로니카 위원님.”
“오우! 제 이름도 알고 계시는 군요.”
“예, 여기 참석하시는 모든 위원님의 성함을 기억하는 것은 통역의 기본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어때요?”
“메스다 이스라엘 위원님 아니십니까? 한국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쯤 되면 진기명기 수준이다. 그냥 어학이 뛰어난 통역 정도가 아니라 세기의 천재를 바라보는 눈길을 한 몸에 받는 시혁이었다.
그럴수록 노태후의 어깨는 더 치솟았고, 전도환과 장사동은 소외된 채, 얼굴이 붉으락거렸다.
오늘의 주인공은 김시혁이다. 국제적 스타의 탄생이었다.
* * *
그래도 기본적으로 각국 외빈을 상대할 각각의 통역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모든 IOC 위원들이 일제히 시혁을 지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비교적 훌륭한 영어 통역조차 마다한 채 미국 위원도 시혁을 원했다.
시혁만 있으면 거의 모든 나라 위원과 소통이 가능하니까. 이건 완전 사기캐다.
결국 시혁은 중국 후진타오 위원을 택했다. 처음부터 중국어 통역으로 지정된 탓도 있지만, 시혁이 원한 것이다.
처음 보지만 후진타오는 미래 중국의 최고 지도자, 주석에 오르는 사람이다. 내년이면 국가 부총리로 발탁되고, 또 십 년후 장쩌민의 뒤를 잇게 되는 거물 중의 초거물.
하긴, 각국 IOC 위원은 어느 나라를 가도 국빈급 대접을 받고 있다. 아무나 맡는 자리가 아니란 뜻이다.
“오늘 하루 수고하셨네. 김시혁 군.”
“감사합니다. 주석님… 아니, 위원님.”
“응? 주석? 듣기 좋구먼. 까마득한 자리에 올려 주니 이거 영광이야. 껄껄껄.”
- 제길. 무의식 중에 본심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당신은 꼭 그 자리에 갑니다. 나중에 14억 인민들 생사여탈권을 한 손에 쥐게 된다고요.
“많이 놀랐네. 한국의 발전상을 눈으로 보는 것도 좋았고, 특히 자네 같은 인재를 만나게 된 것이 큰 소득이었어.”
“과찬이십니다. 위원님.”
“…자네, 우리 중화인민공화국에 유학할 생각 없나?”
“죄송하지만, 아직 한국대학교에서도 배울 것이 많이 남았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시게. 자네 같은 인재라면 언제든 환영하겠네. 우리 중국도 베이징대학이나 칭화대학 같은 우수한 교육기관이 있으니 잘 생각하게나.”
“네. 위원님, 저… 실례지만 개인적인 부탁을 하나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응? 나한테?”
“예, 저는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장래에 중국은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지금도 큰 성과를 내고 있으니까.”
“제 짐작으로는 조만간 미국과 정상회담도 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 오랫동안 소원해진 소련 지도자도 중국을 방문할 것이고요.”
“……!”
“그리 되면, 대한민국과 중국의 수교는 기정사실 아니겠습니까?’
“자네… 도대체 누군가? 지금 한 말은 나조차 접근하기 힘든 특급 국가 기밀이야.”
“겨우 대학교 1학년생이 어떻게 국가 기밀을, 그것도 중국 정부의 특급 기밀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세계 정세가 변할 것이라 짐작할 뿐입니다.”
“무서운 친구로군. 만약, 적이라면… 너무 소름 끼쳐.”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좋아, 이제 자네의 부탁을 들어 보세. 이왕이면 큰 건이길 비네. 자네 같은 세기의 천재에게 호감을 얻을 기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