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마운의 겨울, 그리고 희망
항저우에도 겨울이 닥쳤다. 상하이에 인접한 항저우 날씨… 겨울이 더 깊어지면 눈도 오겠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쌀쌀하다.
마운은 병원에서 퇴원한 이후 죽은 듯이 지냈다. 열성적으로 활동했던 학생회 주석 자리는 바로 내려 놓았다. 무엇을 위해서 열과 성을 다한단 말인가?
비로소 세상이 어떤지, 자신이 살고 있는 중국의 현실이 어떤지 알게 되었다. 순진했어. 공산당이 득세한 사회주의 공화국의 실체란 얼마나 더럽고, 부패했으며, 일부 기득권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곳인가…
여기서 내가 할 일이 과연 있을까?
이 참담한 나라에서 무엇을 하며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마운, 오늘 수업 끝나고 시후(西湖)에 낚시 갈까?”
“장영, 오늘은 별로… 다음에 가자.”
1학년 때부터 캠퍼스 커플인 여자친구 장영(張英) 외에는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외톨이로 살았다. 그나마 우 총장과 장영이 없었다면 시후에 몸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장영은 소위 항저우 사범대학교의 퀸카였다. 키도 마운보다 크고 늘씬한 전형적인 미인이다.
주변에서는 왜 장영이 마운을 선택했는지 모르겠다며, 다 미쳤다고 했었다.
장영도 처음에는 그랬다.
장영은 항저우 사범대학에 같이 입학한 마운을 보고 참 특이하게 생긴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리곤 곧 잊어버렸다. 자신의 이상형과 너무 동떨어진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마운은 첫 눈에 반한 장영을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마운의 요구는 단 하나, 세 번만 같이 밥을 먹어 보자. 그래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다시는 앞에 얼씬거리지 않겠다.
자신보다 작은 키, 돌출된 광대뼈, 자글자글 주름이 가득한 얼굴, 가난을 달고 있는 차림새.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는 사람이지만 장영은 이상하게 마운과 세 번 식사하기로 약속했다.
생긴 것과 달리 초롱초롱한 눈빛이 웬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었다.
금요일과 토요일 연달아 두 번의 식사를 근처 허름한 식당에서 같이할 때까지도 장영의 마음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했다. 조금 특이한 남자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사귈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한 번의 식사를 남겨 두고 마운이 한 달 동안 보이지 않았다. 아예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장영은 은근히 신경 쓰였다. 한 달 내내.
그 날도 여전히 비어 있는 마운의 책상을 보면서 심란한 마음을 가졌던 장영. 수업을 마치고 씁쓸하게 귀갓길에 올랐다.
학교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집에 거의 다다르는 순간, 강영은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안녕, 장영.”
“…….”
“마침 너의 집 바로 옆 식당이 항저우에서 제일 맛있는 훠궈(火鍋)요리집이더라. 우리 세 번째 식사를 해 볼까?”
비싼 집이다. 두 번 밥을 먹었던 곳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진짜 부자가 아니면 출입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그 앞에 서서 장영을 기다린 마운. 한 달 동안 뭘 했는지 가뜩이나 작은 몸이 삐쩍 더 말랐다. 입술에 말라붙은 피딱지와 군데군데 핀 마른버짐이 그간의 고생을 보여 주고 있었다.
사연은 모르지만… 장영은 눈물이 핑 돌았다.
“미안, 여기서 세 번째 식사를 하려다 보니 좀 무리했어. 공사판 일도 쉽지 않더라.”
“…….”
“그래도 오늘 저녁 식사 맛있게 먹어 줄래?”
그날 이후 마운과 장영은 공식적인 커플이 되었다.
“장영, 그 꿈을 다시 꾸고 싶은데 안 꿔진다.”
“그건 꺼거(哥哥 오빠)가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 때 잠시 환상을 본 거야. 한국과 우리 중국은 수교도 하지 않은 나라잖아? 잊어버려.”
“아냐, 그건 절대 꿈이 아니라고. 이 옥 목걸이를 우리 둘 모두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빛을 발했어.”
“원래 꿈은 몽환적이야.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는 환상을 봤을 뿐이야. 마음 편히 가져. 내년에 졸업하면 우 총장님이 영어 강사 자리를 알아봐 준다 하셨으니, 너무 절망하지 말고.”
그 뒤로 다시는 목걸이가 빛나지 않았다.
그 생생했던 느낌! 마치 김시혁과 하나로 연결된 듯, 그 간질간질한 기분!
이게 모두 한낱 꿈이었다고? 환상이라고?
모르겠다. 오늘 수업이 끝나면 장영 말대로 시후에서 낚시나 할까 보다.
그때, 수업 중이던 강의실 앞문이 열렸다. 저 문은 총장이라도 수업 중에 열지 못한다. 공자를 죽였지만 뿌리 깊게 박힌 스승에 대한 존경의 의미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거침없이.
앞 문을 열고 들어선 코트 차림의 사내 둘.
X발! 직감적으로 느꼈다. 기관원 아니면 사복 공안이다. 저들이 수업 중에 강의실로 쳐들어올 이유는… ‘나구나’
아니나 다를까 분필을 내려놓고 한쪽으로 물러서는 교수는 보지도 않은 채.
“마운! 손들어.”
지긋지긋하다. 이놈의 공산당. 공안국장이 또 뭔가 꼬투리를 만들어서 보낸 거지. 이미 우 총장도 내년 신 학기부터 절강성 교육총국으로 근무지 변경을 하라는 통보를 받은 상태다. 정말 집요하다. 개자식들.
사복조는 마운이 대답을 하지 않자 교수를 향해 다시 물었다.
“여기 마운이라는 학생이 누구요?”
“저기 맨 뒷줄 네 번째 앉아 있는 학생이오만.”
가뜩이나 미운털이 박힌 마운을 찾자 지체없이 대답하는 영어 교육과 장 교수.
“나와, 같이 좀 가야겠다.”
“…….”
아… 또 그 지하 고문실로 끌려가는 건가? 차라리 죽고 싶다. 출입구는 하나, 도망갈 수도 없다. 영화처럼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면 좋으련만… 여기는 5층이다.
* * *
“자네가 마운인가?”
“예.”
“반갑네. 나는 IOC 위원 후진타오야. 마침 상하이에 볼일이 있던 참에 자네 생각이 나서 불렀어.”
“…….”
아직 영문을 모르겠다. 정확한 당 서열을 모르겠지만, 적어도 14억 인구를 한 줄로 세우면 이 사람은 앞에서 몇십 등 안에 무조건 들어갈 것이다.
왜?
이런 고위직이 나를 콕 찍어서 불러낸 것일까?
불안감에 오줌이 마려웠지만 분위기에 압도되어 말을 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 붙들려 곧바로 달려온 곳은 상하이의 공산주의 청년단 판공실(공청단 사무실).
상하이는 중국에서 베이징, 텐진(천진), 충칭(중경)과 함께 4대 직할시에 속한다. 같은 절강성에 있지만 항저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곳이다. 상하이 시장은 절강 성장과 동급, 어쩌면 그 이상의 대우를 받는 정말 요직이다.
그런데 그런 시장을 배석시켜 놓고 홀로 담배를 피우는 이 사람. 아직 마운도 이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후진타오라고 이름을 밝혔지만… 모르겠다.
이때 후진타오는 구이저우성(귀주성) 당 서기를 마치고 중앙정치 무대로 가기 전 잠시 IOC 위원을 맡은 것이니 잘 모를 수밖에. 구이저우성은 깡촌 중의 깡촌이다.
가뜩이나 쫄리는 심정으로 대답도 못 하는 마운을 지긋이 바라보던 후진타오의 입에서 마운은 의외의 이름을 듣고 소름이 확 돋는 것을 느꼈다.
“마운 학생. 자네, 한국의 김시혁을 아는가?’
“……!”
“음, 아는군. 어떤 사이인지 모르지만 특별히 부탁을 받아서 자네를 부른 걸세. 여기 편지부터 받게나.”
“……무슨 말씀이신지?”
“껄껄껄. 아마 세상 천지에 나, 후진타오를 우편 배달부로 써먹는 사람은 그놈밖에 없을 거야. 대단한 놈이야.”
‘X발… 보라고! 진짜잖아.’
편지를 건네받은 마운의 가슴은 터질 듯 쿵쾅거렸다.
‘그건 꿈이 아니었어.’
“이제 두 번째 숙제를 풀어 볼까? 자! 뭘 원하나?”
“예?”
“김시혁이 말이야. 건방지게 두 가지 부탁을 했네. 하나는 이미 전달했으니 됐고, 나머지 하나… 뭘 원하나? 공산당에 가입을 시켜 줄까? 내가 이끌고 있는 공청단에 들어오는 것도 괜찮겠네. 어떤 것이라도 좋아. 들어주지.”
- 공산당은 싫습니다. 비록 제가 중국인이지만 부패하고 비정상적인 공산당에 가입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복수를 원합니다.”
“…뭐? 뭐라 했나?”
“속담에 청산이 평지되고 녹수가 마르지 않는 한 남자의 복수는 잊으면 안 된다 했습니다.”
“…자네도 김시혁 못지않은 괴짜구먼. 계속해 보게.”
“당장 존경하는 은사님이 저로 인해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제 힘으로 하는 것이 좋겠지만, 위원님께서 먼저 말씀을 하셨으니… 저는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항저우 공안국장 말이구먼… 오기 전에 자네에 대한 주변 환경을 좀 흝어봤지. 억울하게 모함을 당해 고생한 것도 알고 있어.”
“……!”
“좋아, 이 순간 자네의 복수는 달성된 것일세. 약속하지… 자네, 정말 대단한 친구를 뒀어. 그것도 복이야. 껄껄껄.”
아! 나에게 이런 날도 있구나. 살다 보니… 이 암울한 세상에 이런 희망도 있구나.
“나는 자네 친구와의 약속을 다 이행했네. 이로서 김시혁에게 큰 빚을 하나 지운 셈일세. 그걸로 됐어.”
그랬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친구 김시혁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던 거야. 이런 거물을 보낼 수 있는 김시혁의 능력이 부럽다.
* * *
검정색 세단이 항저우시 공안국에 도착했다. 차에서 한 사람이 내리더니 정문의 경비실로 들어간 직후 바로 차단기가 올라갔다.
경비실의 공안들은 한쪽으로 물러나 숨을 죽였고, 차에서 내린 사람은 다리를 책상에 올린 채 경비실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위로 연락 가는 것을 원천 차단한 것이다.
“뭐야? 누군데 감히 내 방문을 이토록 거칠게 여는 거야?”
“국장, 갑시다.”
“누구냐고 물었다.”
“허어, 이 양반 영 분위기 파악이 느리네. 당기율에서 왔어요. 얌전히 갑시다.”
뜨악한 표정이다. 공무원들의 저승사자가 당기율위원회다. 십 년 전 눈깔사탕 뺏어 먹은 것까지 다 토해 내게 만든다는 살벌한 공산당 직속 감찰기관.
“…왜 당기율에서 나를 소환하는 것이오. 나도 베이징에 아는 사람이 꽤 많소이다.”
“마지막으로 당신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전화하는 거, 허용하겠소. 마음대로 해 보시오.”
책상에 놓인 전화기를 돌려주는 남자, 그리고는 무심한 듯 수갑에 입김을 불어 닦고 있다. 마치 망나니가 사형수의 목을 치기 전 칼을 닦는 모습이다.
“저… 장인어른. 큰일 났습니다. 여기 예고도 없이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저를 잡아가려고 합니다.”
[어떤 놈이 감히 내 사위를… 전화 바꿔!]
“저… 무슨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이 전화 좀 받아 보시죠.”
“오홍! 당신을 구명할 전화군요. 그래요. 통화해 봅시다.”
이런 일은 숱하게 겪었다는 듯 사내는 전화를 넘겨 받았다.
[이봐! 너 누구야.]
“에이… 그쪽부터 신분을 밝혀 주셔야 저도 누군지 말할 거 아니겠습니까?”
[나는 베이징 정협위원 판공실 주임 첸순강이다. 네가 지금 누구를 건드렸는지 알아? 바로 내 사위야. 그놈이.]
“아… 첸 주임이시군요. 저는 중앙 당기율위원회 13처장 오장위요만, 조금만 기다리시오. 우리 조만간 볼 기회가 있을 것 같은데 뭐가 급해서 미리 닦달을 하십니까?”
[…….]
“여보세요? 말을 하세요… 어? 끊었네? 국장, 다시 걸어 보세요. 말을 하다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리네? 사위나 장인이나 싸가지 하고는…….”
“…….”
열린 국장실 문밖에서 차가운 눈길로 이 상황을 보고 있는 왕 처장.
‘너, X된 거야. 당기율위원회 들어가서 몸 성히 나온 사람 없어. 끝났다고 새끼야.’
* * *
- 친구, 드디어 현실에서 이렇게 연락할 수 있게 됐다. 너무 기쁘다. 우리 사이에 놓인 공간적, 시간적 장애는 몇 년이면 다 해소될 거야. 그동안 참고, 또 참고, 끝까지 참아야 한다. 그때 너에게 여의주를 보내 줄게. 기대하시게나… 자네의 친구 김시혁.
짧은 단문의 편지는 이게 전부였다.
아직 마운이 시혁의 의중을 파악하기에는 너무 짧고 함축적이다. 그러나 마운은 가슴이 벅차 참기 힘들었다.
잊지 않았구나. 시혁은.
마운은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목걸이가 조금 더 밝아졌다. 둘의 인연은 운명처럼 연결되고 있었다.
이런 막강한 권력자를 우편 배달부로 쓰는 시혁이나, 일개 복수를 위해 이권청탁을 마다한 마운이나… 도찐개찐이었다.
‘참고, 또 참고, 끝까지 참아라. 친구의 눈물겨운 조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