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39화 (39/150)

39화 먼 원수, 눈앞의 원수

“누굽니까?”

“아! 저는 삼송그룹 비서실 경영전략 본부 대리 백정태라고 합니다.”

그래. 알아. 백정태, 일명 백정.

“그런데요?”

“회장님께서 정중히 청하셨습니다. 며칠째 학교에서 김시혁 군을 기다렸습니다.”

“헛수고하셨군요. 저는 삼송그룹 회장님을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싫습니다. 이런 무례한 초청을 받을 만큼 한가하지 않아요.”

“…….”

저 착하게 생긴 얼굴 어디에 그런 잔인함과 흉폭함이 숨어 있을 줄 누가 알까… 지금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호남형? 아니, 선하게 생겼다. 육중한 덩치가 아니라면 평범한 셀러리맨의 표상 같은 모습이다.

그 빌어먹을 자스민 향수 좀 쓰지 마, 개자식아.

“지금 당장 어려우면 편한 시간에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것도 어렵겠습니까?”

하아… 저 불쌍한 표정과 한없이 낮추는 자세. 저기에 속아서 생매장되거나, 시멘트 드럼통에 담겨 깊은 바다로 잠긴 사람이 한둘일까.

돌이켜 볼 때, 시혁과 백정은 나름 나쁘지 않은 관계였었다. 업무상 정보를 교류할 필요도 있었고, 하는 일이 겹치는 경우도 종종 있었던 이유로 밖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했었다.

시혁은 이자룡의 붙박이 수행비서, 백정태는 글자 그대로 경영전략본부 소속. 그중에서도 회장과 직계 가족의 경호와 지저분한 뒷처리를 담당하는 그림자 조직, 전략본부 11과 소속이었다.

백정태는 시혁에게 깍듯했다. 자신과 다른 부류인 것이다. 시혁은.

이자룡 부회장의 일거수일투족을 같이 하는 수행비서와 어둠 속에서 일하는 처지가 같을 수에 없으니까. 그렇게 동급의 비서도 아닐뿐더러, 주로 시혁의 지시를 받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결국 소속은 같은 비서실이되 격이 달랐고, 신분도 달랐고, 하는 일도 달랐고, 지시를 받는 입장이었기에 깍듯할 수밖에 없었다.

시혁도 백정의 그런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마지막 처리를 백정이 맡지 않았다면… 이토록 증오감을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냥 마지막에 딸을 가지고 협박만 하지 않았어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또 그냥 단숨에 목숨을 끊고 파묻기만 했어도 이토록 살 떨리는 원한을 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시혁을 죽이면서 백정은 선을 넘은 것이다.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것이다.

너는… 결코 용서할 수도, 용서하지도 않아.

가장 치열하게, 가장 처참하게, 가장 비참하고 가장 눈물겹게 죽여 줄 거야. 백정아.

그나저나 이건호가 나를 보고 싶다고… 왜?

미래에서 시혁은 이건호를 셀 수 없도록 많이 봤지만, 개인적으로 말을 섞어 본 적이 없었다. 감히 아들 수행비서 따위가 어떻게?

그런데, 지금은 직접 사람을 보내 오라고 한다. 이 것도 예측하지 못한 변수. 딱히 만날 필요도 없지만 피할 이유도 없다.

“백정태 대리님. 가서 전하세요. 나는 삼송 회장님이 궁금하지 않아요. 그런데 회장님은 내가 궁금한 모양이네요… 오시라 하세요. 학장실을 빌리던 아니면 구내 매점 간이 의자에 걸터앉던, 편한 대로 해도 괜찮은데 내가 갈 일은 없습니다.”

옆에서 귀를 토끼처럼 열고 있던 박하송이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저, 저. 미친놈.

“나는 삼송 직원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삼송 회장님은 TV 화면으로 보면 그만이란 소리죠. 그런데 손짓한다고 쪼르르 달려가 애교 떨 필요 없지 않나요? 평소 알고 지내던 옆집 아저씨도 아닌데.”

이젠 백정이 입을 떡 벌린다. 평소 침착하고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백정도 이쯤 되면 미친놈 아닌가 싶은 것이다.

X신아, 지금 너희보다 순위가 더 높은 현도그룹 회장님도 직접 순대 한 봉지 정도는 사 가지고 오거든. 모르지?

사람의 가치는 스스로 지키는 거야. 가치에 대한 평가는 너네 회장이 해야 하는 거고. 싫으면 안 봐도 돼. 그걸로 그만인 거지.

“…저, 저. 전해 올리겠습니다.”

많이 당황하셨나 봐요? 나도 처음 봐. 뱀처럼 차가운 네 녀석의 당황한 얼굴. 너도 아직까지는 내공이 덜 쌓였나 봐.

* * *

“……끄응, 그런 놈이 다 있나?”

“제가 다시 가서 혼쭐을 내겠습니다. 어린놈이 머리 하나 믿고 세상 물정을 도통 모르는 모양입니다.”

“그만 해, 이 실장. 내가 얼마나 더 창피를 당해야 하겠나?”

“……!”

“맹랑한 놈이다. 그리고 확실히 알았어. 놈은 왜인지 몰라도 우리 삼송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어. 그냥 학생의 치기 어린 행동이 아냐.”

“…….”

“학장실을 빌리던지, 교내 매점 간이 의자로 오던지 하라고? 허허허.”

“예, 그리 말했다 합니다.”

“그럼 더해 주지. 얼마나 코가 높은 지 꼭 봐야 겠어. 이 건방진 놈.”

그때 이 실장 옆에 앉아 있던 이자룡이 나섰다.

“아버지, 왜 그어린놈에게 굽히면서까지 만나려고 합니까? 그냥 무시하십시오. 제깟 놈이 고시 삼관왕이 되었다고 하지만 기껏해야 법관 나부랭이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때 찍어 눌러서 출셋길을 막아 버리면 그만입니다.”

“닥쳐! 너는… 하아, 한숨밖에 안 나오네. 이십 년? 삼십 년? 그때도 삼송의 이름을 온전히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

“아니, 삼송의 이름은 천년 제국이 남겠지만, 여전히 우리 이씨 가문이 주인으로 남아 있을지 그게 걱정이구나. 한심한 놈!”

“제가 어쨌다고 이런 망신을 주십니까? 저도 한국대학교에 입학했잖습니까?”

“쯧! 실력이 없으면 끈기라도 있던지, 머리가 없으면 배짱이라도 있던지… 겨우 삼류 깡패들 동원했다가 개망신을 당한 너 따위가 저런 엄청난 놈을 상대한다고?”

“…그, 그건 여기 이 실장님이 고른 겁니다. 나는 깡패들 모른다고요.”

“하아… 어쩌다 사자가 하이에나를 낳았을까. 밭이 문제였나?”

“……!”

그걸 변명이라 지껄이는 거냐? 책임을 회피하는 지도자를 바라보는 것처럼 비참한 경우가 없는 법이다. X신 같은 놈아.”

“아… 아버지.”

* * *

“후아! 전보다 더 다가가기 쉽지 않네.”

“멋지다.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아. 저 큰 키에 가슴은 또 왜 저리 단단하지?”

“꿈 깨라. 너는 저기 안기면 배꼽하고 인사해야 하거등?”

“너는 지집애야, 아버지가 국회의원이야? 변호사야? 삼송 이건호냐? 뭐 믿고 그리 냄새를 피우면서 주변을 맴돌아?”

“둘 다 아서라. 누군가 봤다는데 현도그룹 정조영 회장님하고 요 앞 닭발집에서 소주잔 기울이는 사이라더라. 졸업하기도 전에 이미 낙점받은 거야.”

“후아! 그 집 자식들 다 짝이 있지 않나?”

“자식만 생각해? 그 영감님 힘이 좋아서 자식이 득실거려. 밑으로 손녀들이 몇인 줄 알아?”

“좋겠다. 잡기만 하면 주택복권 백 번 당첨된 것보다 더 확실한 보증수표인데.”

“요즘 확실히 법대 주변에 야사시 화장한 기집애들이 많아지긴 했어.”

“뻔하지. 어떡하든 한번 엮어 보려는 여우들이 가만 있겠냐? 경제학과 퀸카랑 무용학과, 체육학과 여신들 보려면 법대로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안 돼, 법대는 법대끼리… 몰라?”

“닥쳐! 네 꼬라지부터 거울에 비춰보고 말해. 법대 여학생들 누가 화장하든? 당장 고시 붙지 않으면 머리 좋은 여자는 오히려 주홍글씨야. 바로 노처녀로 늙는 거 몰라?”

다시 학교에 나온 시혁 때문에 교정이 들썩거렸다. 변한 게 있다면 전처럼 시기하는 눈길이 자취를 감췄다는 것. 그 단계를 넘어서 버린 것이다.

너무 빛이 나면 사람은 두려워한다. 자신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를 경애하고, 그저 바라보는 단계로 돌입한 거다. 감히 시기를 하다니…….

다른 대학은 고시 1차 패스만 해도 법학과목 수업을 면제해 주는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한국대학교는 그딴 거 없었다. 곧 다가올 2차 시험을 위해 별도 배려? 어림없는 소리다. 교수들은 어김없이 출석을 챙겼고 빠지면 아낌없이 쌍권총을 날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시혁에게는 은근히 배려를 하는 눈치가 보였다. 자신들도 도달해 보지 못한 경지로 들어가 버린 시혁이 쉽지 않은 것이다.

오후 민법 강의를 마친 교수가 분필을 내려놓으며 시혁에게 말을 던졌다.

“김시혁, 다음 수업이 형사소송법이지? 담당 교수님께 말씀드려 놓을 테니까 총장님실로 가 봐라.”

“예? 총장님요?”

“그래, 총장님이 찾으신다고 수업 전에 연락받았다.”

그럼 자기 수업을 빼고 보낼 것이지. 자기 자존심은 지키고 싶은 것이다. 어찌 보면 이기적인 행동이고, 어쭙잖은 지식인의 자기 합리화다. 나는 권력에 굴복하지 않았어… 이런 식이다.

흠, 그나저나 총장실이라… 답 나왔네.

학장실이든, 구내 매점이든 오라고 했더니 아예 더 등급을 높여서 총장실로? 삼송답구나.

현도 정 회장을 매번 투덜거리면서도 흔쾌히 만나는 이유가 뭔지… 너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야.

사람은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또 나는 너희들이 상상도 못할 돈을 번다는 사실도.

“총장님 부름 받고 왔는데요. 김시혁입니다.”

“아! 어서 들어가요. 한시간 반이나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시간 동안 우리 총장님 장사 잘하셨나 모르겠다. 천하의 삼송 이건호 회장과 고스톱치면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고, 부족한 기숙사 좀 얻어 내시지.

나이 많은 할머니를 비서로 두신 것을 보면 이번 총장님 보통 아닌 모양인데?

열린 문으로 시혁이 들어서자 백발의 멋진 신사가 반겨 주었다.

“어서 오게. 김시혁 군.”

“찾으셨습니까? 총장님.”

“응, 수업 중에 대단히 미안하네. 그렇다고 학점을 내 마음대로 더 주지는 못 하니 그 또한 이해하게.”

“아닙니다. 제 학점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오! 패기… 자네다워. 하긴 올 에이 플러스를 받는 시혁 군에게 쓸데없는 소리였겠구먼.”

“예, 그런데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시혁은 뻔뻔하게 이건호 회장을 응시하면서 총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대답하라는 무언의 항변이었다.

“총장님, 제가 말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울까 합니다.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하여튼 이번 삼송의 지원, 총장으로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역시, 굿! 우리 총장님. 야무지게 한입 베어 드셨구나.

이윽고 도서관을 방불케하는 총장실에 둘만 남았다.

“반갑네. 김시혁 군. 나 이건호일세.”

“네, 김시혁입니다. 먼 길 오시게 해서 송구합니다.”

“그래, 내 아들하고 같은 나이니까 반말해도 상관없겠지?”

“네, 거기까지는 괜찮습니다.”

“왜 그러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의 지난 행동을 보면, 또 지금 딱 선을 긋는 자네의 말투를 보면, 흡사 생사대적 원수를 대하는 기분이 들어. 삼송이 자네에게 무슨 말 못 할 실수라도 한 적이 있나?”

“없습니다.”

“아니, 분명 뭔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게 분명해. 자넨 지금 나에게도 적대감… 이랄까, 노골적인 반감을 내비치고 있지 않나?”

“그걸 삼송그룹에 대한 적대감이라고 표현하는 건 회장님의 관점이고요. 저는 삼송을 존중합니다. 장차 대한민국을 이끌 최고 회사를 제가 왜 적대하겠습니까?”

팽팽하다.

한 사람이 줄을 놓으면 잔뜩 당겨진 고무줄이 튀어 나갈 것만 같다. 내친 기세 싸움이다.

“그럼 결국 사람에 대한 적의란 말이군.”

“네.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자신은 있고?”

“지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만…….”

“……!”

“아드님에 대한 소소한 감정 따위, 하찮아졌습니다. 이제는 목표를 좀 더 크게 가지기로 했습니다.”

“남자가 한세상 살면서 꿈을 가지는 것 이야말로, 중요하지. 그러나 너무 환상에 젖으면 인생이 고달퍼질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나?”

“꿈과 환상을 섞지 마십시오. 그건 모순입니다. 저는 환상 같은 거 가지지 않습니다. 꿈이라면 또 모르지만요.”

“내가 사과해도 안 되겠나?”

와! 이건 좀 쎄다. 이렇게 솔직하게 훅 들어올 줄 미처 몰랐다.

“죄송하지만 이 회장님께 사과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 되면 감정선만 복잡해집니다.”

“물러서지 않겠다?”

“예, 회장님이 이룩하신 삼송을 제가 꼭 갖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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