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고난의 세월 마운, 각성한 손창의
그 뒤로 단 한 번도 옥 목걸이가 빛을 발한 적이 없었다. 마운은 강의실을 걸어 나오면서 버릇처럼 목걸이를 만지작거렸지만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빛을 내는 것일까?’
‘왜 그 뒤로 김시혁의 꿈을 꾸지 않는 것일까?’
‘김시혁은 그 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연락조차 없을까?’
뜬금없이 찾아와 시혁의 편지를 전해 준 후진타오라는 인물은 일 년 사이 엄청난 거물이 되었다. 단숨에 국가 부총리로 등극한 것을 TV를 보고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역시 다시는 마운에게 별도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달리 생각하면 마운과 후진타오의 접점은 오직 김시혁뿐이다. 연락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마운을 그렇게 괴롭혔던 항저우 공안국장은 직권남용죄로 끝내 감옥에 갇혔고, 우 총장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또한 우 총장의 적극적인 추천에 힘입어 졸업과 동시에 직장을 구했다. 상하이 과학 기술대학교 영어 강사가 된 것이다. 이 또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2류에 불과한 상하이 사범대학 출신이, 졸업과 동시에 타 대학 영어 강사가 된 사실은 작은 신화가 되어 항저우에 회자되고 있었다.
“강사님, 오늘도 너무 재미있었어요.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는지 모르겠어요.”
“저도요. 어쩌면 발음이 원어민보다 더 매끄러운지… 마 강사님 짱!”
“꼭 공연을 보는 기분이었어요. 기초가 없어서 영포자인 저도 다시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강사님 덕분입니다.”
“강사님, 저는 영어를 수강하지 않은 게 너무 후회되요. 청강을 하고 있는데 다음 수강 신청일을 기다리고 있거든요.”
온통 칭찬일색이다.
그만큼 마운의 강의는 생생하고 살아 있는 내용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마운은 강의에 들어가면 일단 교재를 덮고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 같이 즐기는 강의를 하곤 했다. 당연히 인기 폭발 강사가 되었다.
하지만, 워낙 박봉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내내 곁을 지켜 주었던 장영과 결혼했지만,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차라리 영어 학원으로 자리를 옮길까…….
개혁개방의 여파 탓인지 우후죽순처럼 영어 학원이 생기는 판이다. 전처럼 영어를 무시하는 분위기가 아닌 것이다. 마운 정도의 강의 능력이면 어느 학원이건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실제 수많은 러브콜을 받기도 했었다.
“우 총장님, 좋은 식당으로 모시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마운. 노천 식당이면 어떤가. 자네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
“얼굴에 고민이 가득하구먼. 힘들지?”
“…네, 솔직히.”
“영어 학원 원장들이 자네를 탐내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어. 옮길 생각인가?”
“…아직, 결정을 못 했습니다. 그러나 강사 봉급으로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어렵습니다. 고민하고 있습니다.”
콧구멍만 한 자오즈(만두)집에는 두 사람밖에 손님이 없었다.
“마운, 자네의 꿈이 교수라고 했던가?”
“예, 정교수가 되면 명예도 얻겠지만, 무엇보다 지금 강사 월급보다 몇 배를 더 받으니까요.”
“흠… 살기 위해서, 단순히 돈을 더 버니까 교수를 꿈꾼다는 말이네?”
“……!”
“그럼 자네는 길을 잘못 들어선 거지.”
마운은 우 총장의 말끝에 망치로 머릴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한 번도 왜 교수를 꿈꾸어 왔는지 구체적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나도 자네가 교수로 머물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야. 너무 급한 마음에 껍질에 구멍을 내면 흰자와 노른자가 다 쏟아져 버리지.”
“…….”
“오히려 지금 환경이 자네를 자유롭게 만들 거야. 척박하지만 마음껏 인재를 기를 수도 있고, 마음 맞는 동지를 사귈 수도 있고,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울 수도 있지 않을까?”
“…….”
“조금만 버티게. 힘들어도 더 버티게. 마지막까지 버티게. 그럼 자연스럽게 길이 열릴 거야. 저절로 부화될 때가 올걸세.”
아! 우 총장은 김시혁을 모른다. 그런데 시혁의 편지와 너무 똑같은 말이 우총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친구… 참고, 또 참고, 끝까지 참아라.
* * *
“제리 영?”
“네, 마사요시 손?”
만나고 보니 어린애다. 하지만 손창의는 방심하지 않았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보스와 동갑내기 대학 2학년생이기 때문이다.
뭔 놈의 천재가 이토록 널리고 널렸단 말인가? 스스로 천재라 소개하고 다녔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제리 영도 겨우 대학교 2학년이 벌써 CEO 겸업 중이다. 그것도 막 태동하는 인터넷 세상에서 검색 엔진… 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개척하는 벤처 기업의 CEO.
보스는 뭘 보고 이 친구를 만나라 했을까? 그리고 이 허접한 회사에 투자해 보라고 권했을까?
아직 아무런 수익 구조도 없고, 이용하는 유저도 변변찮다. 만약 투자를 결정한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해야 하고, 이 친구는 돈 먹는 하마가 될 게 뻔하다.
먼저 이 친구의 속내가 궁금하다.
“제리, 지난 일 년 동안 얼마나 적자를 봤나요?”
“손,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야호는 앞으로도 더 많은 적자를 볼 겁니다.”
“…그게 자랑은 아니지 않나요?”
“적자를 본다는 것이 슬픈 일도 아니죠. 당신은 저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을 살았어요. 지난날들이 슬픈가요?”
“무슨 뜻이죠?”
“켜켜히 쌓인 지난날들이 지금의 당신을 만든 겁니다. 혜성이 돌연 나타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먼 거리를 쉼없이 날아왔기 때문에 우리 눈에 띄는 겁니다. 야호는 앞으로 더 적자를 봐야 합니다.”
“눈에 띈다?”
“그렇죠, 그게 키워드입니다. 지금 세상은 486의 등장을 앞두고 있습니다. 엄청난 속도로 컴퓨터가 보급될 거고, 그에 따라 인터넷이라는 세상은 폭발하겠죠.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혜성이 날아오는 것처럼요.”
“…….’
“나는 투자를 구걸하지 않아요. 미래를 살거냐? 아니면 현재 보이는 적자에 등을 돌릴 것이냐? 그건 손 사장의 판단입니다.”
“…얼마나 있어야 혜성을 볼 수 있습니까?”
“최소한 1억 달러는 있어야 합니다.”
“잠시 제 보스와 통화를 해 봐도 될까요?”
“보스? 손 사장님이 모시는 분이 있었습니까? 놀랍군요.”
“나중에 제리가 직접 만나면 더 놀랄겁니다. 세상은 확실히 천재가 널렸다지만 그분이야말로 구름 위의 존재거든요.”
잠시 로비로 나간 손창의는 프런트로 걸어가 국제전화를 신청했다.
“보스, 손입니다.”
[네, 손 사장.]
“야호의 CEO가 보스와 똑같은 나이입니다. 역시 천재가 맞습니다. 보스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얼마를 요청하던가요?]
“일억 달러입니다. 하지만 안심할 단계는 아닙니다. 그야말로 적자의 바다를 헤엄쳐 나가야 합니다.”
[일억 오천만 달러를 주세요. 그리고 그 자금이 소진되면 더 주겠다고 약속하세요.]
“지분은 어떻게 할까요?”
[49%만. 경영권을 아예 가져오면 의욕이 저하될 뿐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추가 투자 시 지분은 자연스럽게 더 확보될 겁니다.]
“보스, 제가 야호 재팬의 권한을 같이 넘겨받는 조건은 어떠십니까?”
[…손 사장은 진짜 승부사 기질이 있군요. 굿딜!]
제리 영은 일본에서 온 마사요시 손의 소문을 들었다. 오만하고 안하무인한 성격의 미크로소프트 빌 게이트를 설득, 일본 총판권을 따낸 사나이.
갑자기 투자에 대한 상의를 하자고 찾아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본이 든든하지 않다면 미크로소프트의 총판권을 가질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투자를 받을 것이란 생각은 일도 없었다. 머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지금 야호에 투자를 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라 자포자기하던 참이다.
세상은 아직 자기 같은 천재의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스?
손 사장에게 보스가 있었나?
이윽고 통화를 끝낸 손창의가 다시 로비 라운지로 돌아왔다. 표정이 달라졌다. 상기된 얼굴이다.
“제리, 일억 오천만 달러를 드리지요.”
“…저는 일억 달러를 요청했습니다만?”
“지분도 49%만 받겠습니다. 금액을 올린데 따른 추가 지분 요구, 하지 않겠습니다.”
“왜죠? 보스라는 분 결정인가요?”
“네, 거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추가 조건이 없다면 이상한 것이다.
“보스는 나중에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도 투자한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삽입해도 무방합니다. 그 시점의 야호 가치를 평가해서 말이죠.”
“그건 오히려 저에게 더 좋은 조건이군요. 다른 하나는 뭡니까?”
“야호 재팬을 완전 독립 법인으로 설립하고 싶습니다. 물론 모든 투자는 소프트파워가 독자적으로 할 겁니다. 그 대신 제리에게 야호 재팬의 49% 지분을 공여하겠습니다.”
……미쳤구나.
이건 그냥 퍼준다는 말과 다름없지 않나? 부가 조건이 아니라 어드벤티지를 준다는 것이네? 추가로 오천만 달러의 돈과 야호 재팬의 지분까지.
“손, 당신 보스는… 미쳤군요.”
“하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야호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본 현자로 보세요. 솔직히 나는 그만큼 미래를 내다볼 능력이 없습니다.”
“누굽니까? 당신 보스?”
“당신과 동갑이죠. 한국대학교 법학과 학생이에요.”
“……!”
* * *
서로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손창의 사장은 이제 투자자의 능력을 각성하기 시작했다. 이번 경험이 눈을 뜨게 한 것이다.
그는 단순히 일본 소프트웨어 유통사업가로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국제적인 투자자로서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다. 실제 그렇게 되는 인물이었다.
다만, 시혁이 알고 있는 몇 개의 팁과 자본을 얹어 주면 알아서 무섭게 성장할 인재를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소프트파워의 지분 51%는 시혁이 이미 확보했다. 손창의의 성공은 곧 시혁의 성공이 되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숟가락을 한 번 보러 가야 겠다. 최소한 10년은 밥을 떠먹여 줄 내 숟가락.
무한 자본을 향한 본격적인 시동은 거기서 시작이니까.
미국을 갈 방법… 이게 문제다. 그런 고민에 빠진 시혁을 현실로 끌어낸 인물이 바로 옆에 있었다.
“오빠, 이 문제 좀 봐줘.”
“예지야. 이거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닌데?”
“……몰라. 그냥 모르니까 다시 설명해 줘.”
고개를 쭈욱 빼물고 문제를 본 태식이 중얼거렸다.
“예지, 너… 이거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나 같은 돌대가리도 풀 수 있는 간단한 건데?”
순간 몽롱한 눈으로 시혁을 바라보던 노예지의 눈빛에 희번덕 살기가 감돌았다.
“자칭 돌대가리 태식아. 너는 머리가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 밥을 얻어먹는다… 이런 말도 안 들어 봤니?”
“나, 눈치 겁나 빠른데?”
“운 좋은 줄 알아라. 어제 손톱만 안 깎았어도 확 긁어 주는 건데… 멍충아!”
시혁은 한 살 차이로 말을 트고 지내는 예지와 태식의 푸닥거리를 바라보면서 무슨 뜻인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예지와 태식은 그런 시혁이… 복장 터지도록 답답했던 것이다.
“예지야. 사전 찾아보면서 다시 해 봐. 어렵지 않아.”
“씨… 투자 건 통화 끝났으면 나도 좀 봐달라고오.”
“이런 간단한 영작 문제를 벅벅거리면서 내 통화가 투자관련 내용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나……?”
“몰라, 모른다고오… 나한테 신경 좀 써 달라고오!”
아이고, 머리야.
고삼이 된 마당에 대통령의 딸 신분으로 틈만 나면 삼성동에 와서 죽치는 노예지. 점점 생떼가 늘어가고 있었다. 저 시커멓게 썬팅된 차와 경호원을 치울 수 있으면 꿀밤이라도 때리련만…….
그때 낯익은 얼굴이 시혁과 예지를 향해 다가왔다. 시혁이 먼저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넸다.
“경호 3과장 이상호 아저씨… 오랜만이네요?”
“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네. 영광이다, 만점 수집가.”
“에이… 쑥스럽게. 여긴 웬일 이세요?”
“응, 아가씨 경호팀을 내가 맡게 되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제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 말썽꾸러기 뒤치다꺼리하려면 골치 꽤나 썩겠습니다.”
“응, 그렇잖아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가만 있을 예지가 아니다.
“상호 삼촌, 죽을래?”
“…그냥 살려 주면 안 되겠니?”
“흥! 오늘 햄버거집하고, 떡볶이집, 거기다 아이스크림 가게까지 다 들러서 갈 거야.”
“아이쿠… 그건 진짜 고문이다. 차라리 곱게 죽여라.”
경호과장과 이정도 허물없게 농담을 나누는 예지가 살짝 예쁘긴 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권력자는 누가 뭐래도 대통령, 그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막내딸이면 날아가는 기러기도 떨어트릴 수 있을 텐데… 소탈한 모습이 예쁘다.
에구… 무슨 생각, 고삐리를 상대로.
하지만, 태식의 중얼거림을 시혁은 듣지 못했다.
‘형님… 네가 진짜 헛똑똑이다. 에구 바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