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한계가 어딘지 모르겠다
이상호 경호과장은 잽싸게 시혁에게 말을 붙였다. 본능적으로 예지의 떼쟁이 짓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시혁이라는 걸 감지한 것이다.
“참, 시혁 군. 전에 약속한 거 기억하고 있나?”
“그럼요. 수컷끼리 서열을 정하자고 했잖습니까?”
“한 판?”
“콜! 언제요?”
“내가 근무 중이라서 말이다. 언제 날 잡자.”
순식간에 둘의 눈빛이 얽혀 들었다. 이건 나이와 상관없는 수컷의 본능이다. 시혁도 자신의 능력 한계치를 아직 보지 못한 상태. 좋은 기회지.
날 잡아서 한번 볼까?
그런 시혁의 바람은 오래 가지 않았다.
“꺄아악! 오빠, 그 새마을호에 나도 있었잖아. 진짜 진짜 멋있었어. 가자. 조금만 가면 권투 도장 있어.”
“…….”
“한 방에 보내 버려. 알았지?”
“…예지야, 그 한 방 맞을 놈이 나……? 아니겠지?”
“맞아, 상호 삼촌.”
“……내가 시혁이를 한 방에 보낼 수도 있는데?”
“그럼 내가 죽여 버릴 거야.”
결국 태식까지 낀 일행은 건널목 너머의 권투 도장까지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시혁도 이상호 과장도 이왕 꺼낸 말이다. 거기다 묘하게 불을 붙이는 예지로 인해 발을 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불구경 다음이 싸움 구경이라고 예지와 태식의 두 볼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겨우 삼십 평 남짓한 작은 권투 도장은 그래도 한 가운데 사각 링이 갖춰져 있었다. 동양 챔피언을 했던 분이 세운 도장이라는 현수막과 사진이 떡하니 걸려 있고 제법 관원들로 북적거렸다.
링 줄에 몸을 기대고 하품을 하던 관장은 바짝 긴장했다. 하나같이 검은 양복에 새까만 선글라스를 쓴 사람들. 귀에는 영화에서나 보던 인이어를 끼고 있는 일행이 들어서자 모두 하던 행동을 멈추고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링을 조금 빌렸으면 합니다만.”
“저도 미안하네요, 모텔이 아닙니다만.”
이상호 과장의 질문에 단호히 거절하는 관장, 뱃살이 볼록하지만 동양 챔피언을 지낸 관록 탓인지 만만치 않다.
“사용료를 지불할 의향이 있습니다만.”
“그러니까요, 대실료는 모텔에서 받는 거죠.”
하지만, 연이어 날아든 예지의 조용한 일갈.
“한 시간에 십만 원!”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오십만 원!”
“고객님, 제대로 오셨습니다. 복싱 글러브와 헤드기어, 낭심 보호대…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후하하하.”
“혹시 시간 추가도 되죠?”
“아이고, 밤새도록 써도 됩니다. 간단한 구급 상자도 구비되어 있습니다. 마음껏 때려 눕히십시오. 아가씨.”
관장은 이게 웬 떡이냐는 듯 두 손을 비볐다. 관원 한달 입관료가 이만 원이다. 가뜩이나 임대료 때문에 갈굼 당하는 판에 제 발로 돈다발이 굴러왔네?
딱 보아하니 배신한 남자친구를 때려 줄려고 사람을 동원한 모양인데 링에서 정식으로 붙여 놓으면 땡이다.
폭력으로 신고를 할 수도 없지. 상호 합의하에 링에 오른 이상 이건 합법이다. 죽도록 두드려 패 줄 찬스지. 암. 잘 선택했습니다요.
그런데, 어린 여자애를 호위한 검은 양복을 걸친 다섯 명과 검은 정장을 걸친 여자 두 명 모두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이다.
- 쯧쯧쯧, 어쩌다 저렇게 예쁘고 돈 많은 집 딸을 울렸냐. 삼가 명복을 빈다. 다시는 그런 얼굴로 여자 후리고 다니지 말아라.
링에 오른 시혁을 보는 관장의 눈길은 한편으론 측은한 듯, 또 한편으론 괘씸하다는 듯 복잡했지만 링 사이드에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는 예지를 향해서는 빙긋 웃어 주었다. 자고로 예쁘면 다 용서가 된다. 거기다 돈까지 두둑히 내는 고객이라면.
“자, 뭐 권투 룰이야 뻔합니다. 오직 주먹만을 사용합니다. 물어서도 안되고 박치기, 발차기 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남자의 소중한 거시기… 거기는 절대, 절대로 가격하지 마세요. 맞은 사람은 지옥을 보게 됩니다.”
“…….”
“다운되면 열까지 셉니다. 못 일어나면 끝, 넘어진 사람을 때려서도 안 되고, 후두부 가격도 반칙입니다. 그 다음은… 맘대로 하세요. 죽기 직전까지 가면 내가 말리겠습니다. 양쪽 선수, 오케이?”
“…….”
“두 분 되게 과묵하시네. 그럼 시작할까요?”
관장은 시혁이 긴장한 탓으로 말이 없는 줄 알았다. 넥타이를 풀어 젖힌 검뎅이는 원래 그런 줄 알았고.
“이 과장님, 벗고 하죠?”
“그래, 나도 이런 솜뭉치에 헤드기어를 하니까 영 어색하구나. 또 남자는 맨 몸으로 부딪쳐야 정이 드는 법 아니겠냐?”
“……! 절대 안 됩니다. 제가 허락할 수 없어요. 보호장구 없이 누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제 책임이 된단 말입니다.”
“관장님, 저희들이 책임질게요.”
“어떻게? X발… 오십만 원 쉽게 버나 싶었는데, 여기는 신성한 박싱… 알아? 쉿 쉿! 하는 박싱 도장이라고. 저기 대형 사진 안 보여? 내가 이래 봬도 동양 챔피언을 먹었던 놈이야.”
“동양 챔피언 아저씨… 백만 원! 책임은 전부 우리가 지는 것으로 하고요.”
“…배, 배. 백만 원?”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시합 아닌 시합. 신분증을 확인한 관장은 어정쩡하게 심판을 봐야 했다. 나중에 돈 셀 기쁨을 위해서 발을 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흐흐흐, 백만 원이면 일 년 임대료를 내고도 남는다.
시혁은 185센티미터에 75킬로그램이다. 상의를 탈의한 시혁의 몸은 그림 같았다. 적당한 복근과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끈한 상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 선 이상호 과장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이상호 과장은 192센티미터에 90킬로 그램에 육박한다. 본격적으로 와이셔츠까지 벗어 던진 이 과장의 몸매는 글자 그대로 근육 괴물이었다.
“미리 말하지만, 유도를 기본 베이스로 합기도와 태권도를 극한까지 익혔다. 그리고 특전사에서 체득한 특공무술까지 더한다면 총 25단에 이른다.”
“오호, 대단합니다.”
“맹수는 눈빛만 봐도 대충 각이 나오는 법이다. 저번 새마을호에서 아무리 내가 방심을 했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최선을 다하마.”
“고맙습니다. 저도 제 힘의 한계치를 알 수 없었습니다.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숨을 죽이게 만드는 긴장감. 그제서야 관장도 눈빛이 달라졌다. 이거 둘 다 장난 아니구나. 대충할 일이 아니었어.
“태식아, 나는 시혁 오빠한테 걸래. 너는 상호 삼촌에게 걸어.”
“칫! 돈도 없지만, 내가 시혁이 형님 동생이거든?”
“이 쪼끄만 자식이… 시키는 대로 상호 삼촌에게 걸어. 알았어?”
“싫은데?”
“그래야 나중에 도련님 대접해 준다. 안 그러면 국물도 없어. 명심해라.”
“도련님? 그럼 네가 내 형수님이 된다고?”
“당연하지. 곧 대학에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거머리처럼 시혁 오빠 옆에 붙어 졸라야지.”
“휴우… 예지야, 그게 조른다고 되는 일이냐? 시혁 형님은 너를 귀여운 동생으로만 보는데… 그게 가장 문제다. 쯧쯧.”
링 사이드에서 속삭이는 말과 상관없이 링 위는 서서히 공기가 팽창하고 있었다.
시혁과 이상호 과장 모두 손에 벨크로 붕대만 감고 있는 상태.
두 손을 눈 위로 들어올린 이상호에 비하면 시혁은 그냥 두 손을 늘어 뜨리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은 것 같은 편안한 자세였다. 그러나 이상호는 그런 시혁의 몸에서 어떤 빈틈도 찾을 수 없었다.
맹수다. 조용한 몸짓에 깃든 흉폭함이 확 끼쳐 왔다. 호랑이를 마주한 늑대가 이러할까? 아무리 갈기를 세우고 으르렁거려도 늑대가 호랑이에게 덤빌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손바닥 붕대로 땀이 흥건히 젖어 들었다. 마른침을 연신 삼켰지만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청와대의 무수한 경호원 중 티어 원급으로 거론되는 이상호.
오늘 잘못 걸렸다. 이건 해보나 마나다. 그렇다고 이대로 멈출 수 없다는 것, 까딱하면 대통령과 가족을 지키는 경호실의 위상이 한 방에 무너질 판이다.
기호지세다. 이상호는 시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우선 왼 주먹을 뻗어서 시혁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공중에 뜬 채로 몸을 회전시켜 오른발 뒷굽으로 시혁의 관자놀이를 노린 것이다.
시혁은 그런 이상호의 움직임을 예상이나 했다는 듯 뻗어오는 왼 주먹을 무시하고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돌풍처럼 다가오는 발뒤축은 머리를 젖혀 피한 뒤, 오히려 이상호의 목덜미를 잡아채 그대로 링 바닥에 내다 꽂아 버렸다.
쿵-
육중한 몸이 링 바닥에 거꾸로 내리꽂혔지만, 탑 티어급 고수답게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운 이상호. 곧바로 시혁의 양쪽 어깨를 움켜쥐더니 자신의 오른발을 시혁의 다리 사이로 밀어 넣고 발뒤축을 차올렸다. 유도의 엎어치기를 시전한 것이다.
그런데, 꼼짝을 하지 않는다. 별다른 방어 자세를 취한 것도 아니건만 시혁의 몸은 강철 기둥이라도 되는 양 미동도 하지 않았다.
즉시 이상호는 붙잡고 있던 양어깨를 놓고 굳은살이 박힌 정권을 연타로 날렸다. 최소한 시혁에게 거리를 벌릴 심산이었다.
시혁은 두 번의 격돌 중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다 보인다. 마치 상대의 행동이 무얼 의미하는지, 어떤 행동이 페이크인지, 다음에는 어떤 공격이 가해질 것인지… 특히, 이상호의 맹렬한 공격이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느리게 보였다.
너무 신기한 경험이었다. 마치 절대음감 같은 절대시력을 얻은 느낌이었다. 더구나 이상호가 양어깨를 잡았을 때도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버텼고, 예상대로 이상호는 어깨를 놓은 채 재차 공격을 해 오기 시작했다.
텅- 텅- 텅-
통나무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이상호의 주먹은 시혁의 손바닥에 모두 막히고 있었다. 이게 가능해?
서로 미리 합을 맞춘 것도 아닌데 무지막지한 정권을 손바닥으로 다 막는다고?
이를 악다문 이상호의 계속된 공격과 무심한 듯 손바닥만으로 방어하는 시혁의 이상한 공방이 한동안 지속되다가… 훌쩍 이상호가 뒤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권투 도장 안은 침묵에 잠겼다. 심판을 봐야 할 관장은 침을 헤 흘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하자. 사정을 봐줘서 고맙다.”
“예, 저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아저씨.”
“쑥스럽구나. 네가 공격을 했다면 벌써 끝났을 승부였다. 네가 최고다. 김시혁.”
침을 흘리는 것은 관장만이 아니었다.
“태, 태. 태식아, 우리 오빤 사람이 아닌가 봐.”
“…응, 예지야. 나도 처음 보는데 진짜 X나 쎄다. 앞으로 말 잘 들어야겠다.”
비로소 정신을 수습한 관장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저… 이럴 게 아니라 저기 샌드백 한번 쳐주면 안 될까? 펀치는 얼마나 되는지 제발 한 번 보여줘. 응?”
시혁은 링을 내려와 샌드백 앞으로 다가갔다. 자신도 궁금한 것이다. 내 몸의 한계를 보려고 했던 일이 방어만 하다 끝난 것이니까. 도저히 이상호를 가격할 수 없었다. 결과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모래로 속을 채운 샌드백을 잘못 치면 손목이 나가고 어깨가 빠지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두툼한 글러브로 충격을 완화하는 것이다.
시혁은 그냥 붕대를 맨 그대로 샌드백을 툭툭 건드려 보았다. 왠지 괜찮을 것 같았다.
이어서 하체에 힘을 주고 오른 주먹을 있는 힘껏 휘둘러 샌드백을 가격했다.
뻐엉-
모든 이의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굉음이 터져 나왔지만 도장 안은 조용했다. 오직 관장의 쌍욕만 들렸다.
“썅, X발… 터졌다. 모래 샌드백이 터지는 것은 내 평생 처음 봐. 비싼 건데…….”
“…….”
“너, 누구냐? 이렇게 하드한 주먹은 지금 세계에서 제일 쎄다는 마이크 타이슨도 불가능해.”
“…….”
“당장 시합을 붙여도 타이슨 찜 쪄 먹겠다. 동체 시력 짱에, 저 순발력과 펀치면 세계 챔피언은 거저 먹을 수 있는데… 선수할 생각, 없는 거지?”
“…….”
“너무 하잖아. 누구는 평생 동양 챔피언 하나 따려고 그 고생을 다했는데… 한 방에 샌드백을 터트려? 하아… 쪽팔린다.”
출렁거리던 샌드백이 터져 모래가 흘러내리자 관장의 푸념은 더해 갔다.
“오빠… 어쩜 좋아, 앞으로 더 잘 지켜야 되겠네.”
“예지야, 뭘?”
“X신아 그런 게 있어. 한국대학교 여우들이 가만두겠냐? 접근했다간 다 죽여 버릴 거야. 오호호호.”
“너… 좀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