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음모의 시작점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그리곤 말이 없다. 서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무슨…….
사람들은 뉴욕의 오리지날 중심부를 말할 때 무의식적으로 맨해튼을 꼽는다. ‘New York, NY’라고 주소에 적을 수 있는 유일한 곳, 다른 지역은 모두 해당 구의 이름을 적어야 한다.
뉴욕 중의 뉴욕 맨해튼.
뉴요커들은 맨해튼이라 부르지도 않는다. 그냥 ‘The City’… 하면 맨해튼인 것이다. 대한민국과 굳이 비교를 하자면 그나마 여의도가 비슷하지 않을까?
인류 최초의 현대적 대도시, 그런 맨해튼에서도 가장 유명세를 떨치는 곳은 뭐니뭐니 해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고, 코리아 타운도 그 주위에 형성되어 있었다.
코리아 타운의 작은 식당에 시혁과 정성희가 테이블에 각기 다른 찌개를 시켜 놓고 마주 앉아 있었다.
맹숭맹숭한 분위기를 깨고 정성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에도 여기 와 보셨어요?”
“네, 제가 잡식과라 아무거나 잘 먹지만, 된장찌개랑 김치찌개는 한 번씩 그립죠. 그럴 때 오는 곳입니다.”
“시혁 씨, 아직 여자 친구 없죠?”
“있는데요.”
“핏! 거짓말, 여자친구 있다는 사람이 처음 만나는 여자를 이런 곳으로 불러요?”
“…….”
“여자랑 데이트 한 번도 안 해봤죠?”
“많은 데요?”
“거짓말도 되게 못하네.”
아… 돌겠다. 답답하고, 거북하고, 어색하다.
“시혁 씨, 나이가?”
“68년생입니다만.”
“내가 누나네. 나는 65, 뱀띠.”
“아! ……네.”
“사진 한 장 찍어야 하는데 괜찮죠?”
“뜬금없이 왜요?”
“할아버지 미션을 해결했다는 증거를 보내야 제 카드를 풀어 주거든요.”
“…예, 그러세요.”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 시혁의 옆자리에 털썩 앉더니 가방에서 솥뚜껑만 한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꺼내는 정성희.
저 큰놈이 가방에 들어가는 게 신기하다.
“됐어요. 고맙습니다. 이제 밥 먹어요.”
“네, 드시죠.”
“다음부터는 이런 찌개집 말고 울프강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봐요.”
“쿨럭! 쿨럭! 다음… 이라고요?”
“몰랐어요? 세 번 만나야 하는데?”
진짜 돌겠네. 뭔 소리야?
“오늘 만나서 밥 먹었으니까 카드는 해결됐고, 두 번째 만나면 졸업할 때까지 뉴요커로 사는 거 보장받고, 세 번째까지 만나야 이거, 이거 알죠? 짭짤하게 준다고 하셨거든요.”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서 흔든다.
좋아, 알겠는데… 그럼 나는?
“너무 일방적인 거 아닙니까? 저는 동의한 적 없는데요. 그쪽에서 하도 사정해서 일정 다 취소하고 뉴욕까지 와 준 사람에게 이런 족쇄를 채우면 안 되죠.”
“이 겜블을 만든 할아버지에게 하세요. 불평은…….”
“저는 할아버지와 그런 약속한 적 없습니다.”
“어? 시혁 씨도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네? 그냥 그러려니 해요. 고집 엄청 쎄잖아요. 한편으론 귀엽기도 하고.”
“누가? 할아버지가요?”
“그럼요, 은근 귀여운 구석이 얼마나 많은데요?”
참 발랄하다. 꾸미지 않은 그대로 쌩얼인데 피부도 반짝일 정도로 맑다. 성격처럼.
특히 175가 넘는 늘씬한 키와 어깨 위에서 찰랑이는 생머리. 밥을 먹기 위해 뒤로 질끈 동여매자 미끈한 목선이 드러났다.
뜨거운 찌개를 후후 불면서 떠먹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시혁의 눈초리를 의식한 행동이 아니라 평소에도 저렇게 살아왔다는 반증인 것이다. 현도가의 담백한 가풍이 그대로 드러난다.
현도그룹 정조영 회장의 장손녀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아름다운 자태다.
“내가 왜 그 겜블의 희생양이 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쳇! 희생양은 오히려 나거든요. 시혁 씨와 할아버지는 나름대로 교감이 있다지만, 나야말로 중간에 끼여서 인질이 되어 버렸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다행입니다. 여기까지 하시죠. 다음 약속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나, 그러면 한국으로 소환되요.”
“그건 할아버지와 푸실 문제고요.”
“잔인하네. 김시혁 씨!”
“고맙습니다. 정성희 씨도 잘 헤쳐 나가길 빕니다. 그럼…….”
이런 사랑 놀음에 빠질 시간이 없다. 솔직히.
갈 길이 멀고도 멀다.
수저를 놓고 일어섰다. 다소 냉정하게 보일 수 있지만, 이게 서로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정조영 회장이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익히 알기 때문이다. 미련을 갖도록 만들거나 상대방이 오해할 여지를 줘서는 안된다.
혼자 보내려다가 정성희 때문에 같이 뉴욕으로 돌아온 윌슨이 시혁의 한 발 뒤로 따라붙었다. 그동안 정성희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걸어 가는 두 남자의 등을 응시하고 있었다.
“흐응… 멋지네. 쌀쌀한 뉴욕 뒷골목, 코트 깃을 세우고 걷는 남자란…….”
두 남자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간혹 오가는 행인도 뜸해지는 시간이었다.
“왜 할아버지가 그리 닦달을 했는지 이해가 돼. 뇌색남에 나보다 큰 키, 탄탄한 몸, 특히 저 분위기… 죽인다. 또 섹시한 연하남이잖아?”
- 김시혁, 너… 찜했다. 간만에 설레네. 뉴욕이 더 멋있어 졌어.
마지막 말은 차마 입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 * *
“강도로 위장해 달라?”
“그렇소.”
“복잡한데? 그냥 쏴 버리면 안 돼?”
“오만 불을 더 얹어 주겠소.”
“오호!”
“계약금 오만에 일 끝나고 십 만, 만약 당신이 잘못되면 변호사 선임과 보석금까지 책임지는 것으로.”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신분도 까지 않는 동양인을.”
“우리 일본인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툭-
“예금 카드요. 십만 불이 들어 있어요. 성사 후에 비밀 번호를 드리죠. 물론 계약금은 캐시로 주고.”
“여기 십 달러가 있는지 십만 달러가 있는지 어찌 알고?”
펄렁-
“입금 전표요. 찍힌 시간을 보면 여기 오기 전에 넣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상해, 겨우 풋내기 어린놈 하나 보내는 비용치고 너무 많아. 꼭 목에 생선 가시라도 박힌 것처럼 찝찝하네.”
“관심이 없다면 얘기 접읍시다. 할렘에 히트맨이 당신 혼자 있는 것은 아니니까.”
“아, 아… 릴렉스! 너무 조건이 좋아서 해 본 소리야. 오케이! 현금 오만 달러나 줘.”
125번가 일대는 뉴욕 최대의 흑인 거주지로 속칭 할렘이라 불리는 곳이다. 한 세기 넘게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었으며 낮에도 빈번하게 총기 사건이 발생하는 빈민가의 상징, 할렘.
1시간 이상 주차를 하면 타이어 네 짝이 다 없어지고, 창문을 깨고 순식간에 카세트 플레이어를 빼 가는 살벌한 곳이다.
그런 할렘의 깊숙한 골목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레이블 바에는 어울리지 않게 재즈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제이슨은 좀 전까지 옆에 앉아 있었던 동양인이 떠난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오천 달러를 세더니 술잔 위에 올렸다.
“붙였어.”
“택시를 타고 올 정도로 조심스런 놈이야. 오토바이 한 대 더 돌려.”
“일본 놈들이 주도면밀하긴 하지.”
“X신, 너는 그 말을 믿냐? 젭(Jap) 특유의 억양이 전혀 없잖아? 절대 아냐.”
“달라?”
“야쿠자 친구들이 제법 있어서 잘 알지. 저놈은 백 퍼센트 코리안이야.”
“중공 놈들일 수도 있지.”
“하! 어떻게 너 같은 놈이 히트맨 중개인을 하는지 모르겠다. 중공 놈들은 삼합회 바퀴벌레가 득실 거리는데 왜 이리 와? 그리고 그놈들은 이렇게 큰돈을 내놓지 않아. 사람 목숨을 파리보다 더 싸게 생각하는 놈들이거든.”
사내가 놓고 간 봉투를 열어 다시 들여 다 본 제이슨은 사진을 손가락으로 툭 치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사연은 천천히 파보기로 하고, 잘 생겼네. 코리안치고는. 흐음, 아무래도 혼자 하기에는… 뭔가 구려.”
문을 덜 닫았는지 스산한 바람이 바 속을 휘감아 돌았다. 본격적인 뉴욕의 겨울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 * *
“예?”
[어허, 이 친구. 벌써 잊었나? 경호 3과장 이상호라니까.]
“아뇨, 제가 이 과장님을 잊을 리 있겠습니까? 너무 뜻밖이라서.”
[시혁아, 너한테 처참하게 깨지고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린 거 아니?]
“하하하. 새삼스럽게 그 이야긴 왜 또 꺼내십니까? 초장에 엄살을 늘어놓는 걸 보니 진짜 본론이 궁금한데요?”
[…괴력을 가지고 있으면 머리라도 나쁘던지. 세상 참 불공평하단 말이야. 여기 미국이다.]
“에? 한국이 아니고요?”
[그래, 너 미국에 오더니 아예 한국 소식을 닫고 사는구나. 각하, 일주일 후에 오신다. 나는 선발대로 먼저 온 거지.]
“아! 정상회담.”
[응, 이번 정상회담 한국 측 통역을 너에게 맡아 달라고 하시는 데… 어떠냐?]
제기랄, 며칠 전에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왔건만… 이건 거절하기 힘들다. 도움을 받은 게 있으면 갚아야지.
“알겠습니다. 여기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각하 도착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가겠습니다.”
[아니, 미안하지만 내일 좀 와주면 안 되겠니? 선발대로 온 우리 팀을 케어하는 대사관 통역이 시원찮다. 경호 문제로 SS(Secret Service비밀 경호국) 애들이랑 디테일한 논의를 해야 하는데, 이 새끼들이 못 알아듣는 것인지 일부러 무시하는지 협조가 안 돼.]
“…그래요. 밤에 출발하면 고속도로가 안 막힐 테니 차로 갈게요. 계신 호텔로 바로 가겠습니다.”
다시 태어나면서 냉정하자 결심했었다. 잔인해 지겠다 맹세했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었다.
거지 같은 인생을 살았던 기억,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 않으려고 빌런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선의를 가지고 있는 주위 사람과 정으로 다가오는 사람에게는… 그게 안 된다. 무장해제를 당하고 만다.
더구나 이상호는 남자다. 몸으로 부딪쳐 무참히 박살이 나도 쿨하게 인정하는 그야말로 상남자. 오히려 수시로 전화하고 챙기려 드는, 형 같은 사람이다. 거절할 수가 없다.
시혁은 공사홍이 발급받아 온 아멕스 블랙 카드를 챙겨 들고 호텔을 나섰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준비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어서 오세요… 구경하시게?”
“예. 차 좀 보려고요.”
“…그래, 보쇼. 그 대신 지문은 묻히지 마셔. 곧 퇴근 시간인데 또 닦으려면 힘들어. 알았지?”
시혁이 방문한 곳은 명차들을 판매하는 편집샵이었다. 하나의 브랜드를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벤츠부터 BMW, 아우디 같은 고급 차부터 하이엔드 급의 차까지 즐비하게 있는 전시장이었던 것이다.
그런 곳에 젊은 동양인이 방문하자 딜러의 눈에 구경꾼으로 보일 수밖에.
이 새끼 드러내 놓고 하품을…….
“이건 얼마나 하나요?’
“…….”
“안 팔아요?”
“휴우… 그냥 가쇼. 내가 일주일째 공쳐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요.”
“마음에 안 들지만, 끝까지 반말을 안 하는 것을 보니 본성이 나쁜 분은 아니네요. 그게 당신을 살렸습니다.”
“…….”
“한 시간 내로 출고 가능하도록 등록할 자신 있으면 사죠. 롤스로이스 실버스퍼 88년형.”
시혁이 손가락에 꽂고 흔드는 아멕스 블랙카드를 본 딜러는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흔들기 시작했다. 눈에 초점도 잡히지 않는 모양이다.
롤스로이스 팬텀이 등장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영국제 세단 실버스퍼는 그냥 파는 차가 아니었다.
지랄 같은 영국 본사의 심사 기준을 통과해야 판매 허가가 떨어지는 갑질을 일삼는 더럽게 까다로운 차였으니까.
“못 해요? 한 푼도 깎지 않을 생각인데?”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고객님.”
시혁도 알고 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롤스로이스를 사려고 했으나 성악가도 아닌 대중 가수에게 팔 수 없다고 퇴짜를 놓았다는 일화는 워낙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 롤스로이스는 창사 이래 최대의 혼란기였다. 원래 항공기 엔진을 만드는 회사였던 롤스로이스가 새로 출시한 엔진이 죽을 쑤면서 비커스 중공업에게 자동차 부분을 매각했고, 지금은 BMW와 폭스바겐 그룹이 인수하려고 박 터지게 싸우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런 판에 무슨 판매 적격 심사? 임자 만나면 팔아야지.
헐레벌떡 뛰어오는 딜러와 매니저를 보며 시혁은 빙긋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