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63화 (63/150)

63화 그랬구나, 운명이었어

시혁이 뇌봉탑의 정상 한가운데 손을 얹는 그 순간, 난데없는 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시혁은 그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이상하게 시혁의 표정은 편안했다. 마치 저 벼락이 자신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굉음은 벼락이 시혁을 향해 내리 꽂힌 후에 울렸다. 윌슨이 귀가 멍할 정도의 굉음을 들은 시점은, 이미 정상에서 파지직거리는 구체가 만들어 지고 난 후였던 것이다.

시혁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구체 속에서 시혁은 뇌를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왔느냐? 아이야.’

귓속으로 들리는 말이 아니라, 머릿속을 파고드는 범어. 시혁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온통 하얀 백색의 구체만 보였다.

‘놀랄 것 없느니, 나는 깨달은 자니라. 너 역시 깨달음을 얻는 순간 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십니까? 혹은 부처님이십니까?”

‘아이야, 야훼도 부처도 모두 네 맘속에 있는 법. 누구나 하나님의 자식이고 부처의 화신이 될 수 있으니, 이를 구분하는 것은 부질없도다.’

“왜 저를 다시 살리셨습니까? 또 지금 제가 당신의 뜻대로 잘 살고 있는 것입니까?”

‘부처는 형체가 없느니라. 해탈한 자에게 무슨 형상이 필요할까. 그러나 세속의 인간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깨달으려고 하지 않으니, 법신불(法身佛)로 하여금 중생을 계도토록 하였도다. 곧 비로자나불은 사바세계의 부처와 같으니라.’

“제가 지고하신 신들의 세계를 어찌 알겠습니까?”

‘비로자나불은 우주 만물을 모두 관장하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주인이며, 석가모니의 응신이고, 화엄경의 주체이니…….’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곧 비로자나불의 현신이니라.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바뀌고, 네가 가지고자 하면 세상을 가질 것이다.’

머릿속으로 울리던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느낌에 시혁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여기 항저우의 마운과 제가 가지고 있는 옥 목걸이는 무엇입니까? 진정 당신의 진신사리입니까?”

‘아직 제10회륜의 법운지(法雲地)에 도달하지 않았음이라. 번뇌의 불길을 모조리 꺼 버린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니, 조급하게 생각지 말거라… 아이야.’

정상을 감싸고 있던 구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쉽다.

아직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지만, 이것도 순리라고 생각하자. 언젠가 다시 기회가 올 것이다.

그때, 시혁의 발밑에 다시 드러난 석판 한 조각.

-제9회륜. 다시 살아나 무애행(無碍行)의 경지를 가진 자가 법장(法藏 진리의 창고)에 들어가 불가사의한 큰 힘을 얻었으니……

또 여기까지밖에 없었다. 그리고 석판은 할 일을 마쳤다는 듯 푸스스 소리와 함께 부서지더니, 재로 변해 흩어져 버렸다.

모든 게 불명확한 퍼즐처럼 모호하다. 하지만 아직 때가 오지 않았을 뿐, 언젠가 알게 될 것이라는 사실.

36년을 거슬러 다시 살아난 것도.

목에 걸린 이 옥 목걸이도.

마운의 목에 걸린 똑같은 목걸이도.

다만, 오늘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천둥 번개를 부리는 방법이 아니라 내 방식대로.

비록 내가 묻는 세속적인 질문에 어려운 화두로 답을 했지만, 절대적인 존재가 그랬었다.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바뀌고, 네가 가지고자 하면 세상을 가질 것이다.’

잘못 가고 있지 않다. 이거면 된 거다.

“갈까요? 오늘 일정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호텔로 돌아가죠.”

시혁의 담담한 말에 안전부 요원을 이끌던 조장이 공손히 대답했다, 두 손까지 모으고서.

서서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천하 십경에 든다는 서호의 낙조가 시혁을 비추고 있었다.

여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시혁 외에는 누구도 모른다. 말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등을 돌린 시혁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조금이나마 열쇠를 얻었다.

이 모든 건 정해진 운명이었어.

* * *

“윌슨.”

“예, 보스.”

“이번 중국 일정 마치고 나면, 경호 팀을 최대한 보강해. 앞으로 식구가 늘어날수록 안전이 문제가 될 거야.”

달라졌다. 윌슨에게 항상 존대를 하던 점잖은 보스가 아니었다. 단호하고, 강인해졌다. 확실히 다르다.

도대체 왜 일순간 보스의 기세가 저리 달라졌을까? 평소와 다를 일이 전혀 없었는데.

그런데 나쁘지 않다. 얼마 전까지 조금은 망설이던 보스의 모습과 비교하면 훨씬 믿음직스럽다. 비로소 보스가 완전체로 각성한 것 같아 보였다.

“윌슨, 나는 앞으로 더 험난한 피의 길을 갈 거야. 그럴 때 주저하면 안 된다는 것을 겨우 알았어. 뒤돌아보지 않겠다. 같이 가 줄 거지?”

“예, 맡겨 주시면… 보스가 가시는 길에 걸리적거리는 놈들을 다 지옥으로 보내겠습니다.”

시혁과 윌슨은 손을 맞잡았다. 뜨거웠다.

윌슨은 순간 손에 너무 힘을 줬다는 생각에 퍼뜩 시혁을 바라보았으나, 담담하다.

그저 돈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한국 청년. 자살 일보 직전 자신을 고용해 준 의뢰인. 어찌 보면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그것도 명예를 존중하면서.

세기의 천재로 불리지만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사람. 그게 내 보스.

문제는 지금 감정이 격해서 너무 힘을 줘 버렸다는 것. 웬만한 사람은 손가락 뼈가 나간다. 윌슨의 악력은 자신도 어떨 때는 통제가 안 되는 흉기와 같은 힘이었다.

그런데 이를 아무렇지 않게 쥐고 있다.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다.

내가 보스를 잘못 보고 있었구나.

“괜찮아, 윌슨.”

“……!”

“한국 청와대 경호실에 박상호 과장이라는 사람이 있어. 윌슨 못지않은 괴물이지. 체득한 무술 단수가 28단이나 되니까. 그 사람도 나를 어쩌지 못 했어.”

“동양 무술을 익힌 것입니까?”

“하하하. 아니. 나는 평생 태권도 도장조차 다녀 본 적이 없어. 어떤 운동도 배운 적 없고… 그냥, 이렇게 태어났을 뿐이야.”

-다시 태어난 거지만.

“윌슨, 나는 처음부터 그랬어. 왜 하늘이 나를 이렇게 변화시킨 것인지 아직 몰라. 하지만 주어진 힘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야. 빌런이 되어야 한다면, 그것도 운명… 피하지 않겠다.”

“…….”

“그 길, 험난할 거야. 그냥저냥 살 수는 없거든. 일종의 사명감? 인간의 역사는 더 이상 진화할 방향을 못 잡은 것 같아. 그래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그대로 놓고 경기를 하라는 거지. 세상이 이미 만들어진 구조를 바꿀 생각이 없다면… 내가 바꾼다, 내 맘대로.”

저렇게 빛이 날 수도 있구나.

그냥 담담히 맘에 있는 말을 하는 것뿐인데… 윌슨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삭이기 힘들었다. 내가 죽지 않고 모진 생명을 이어 가는 이유는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어.

내가 저런 사람을 모시고 있는 거구나.

“아아아… 보스, 당신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 목숨, 이제부터 보스 것입니다.”

무의식 중에 시혁을 향해 무릎을 꿇는 윌슨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미국 최고의 데브그루에서 CIA의 블랙으로 차출되어 수많은 목숨을 거두다가 소련에서 망명한 정치인 경호 임무를 맡았었다. 그놈의 거지 같은 짓을 참다못해 목을 부러뜨리고 윌슨은 졸지에 냉혹한 사회로 내몰렸었다.

배운 게 도둑질, 있는 돈을 탈탈 털어 탐정 사무소를 차렸지만 일 년도 못 버티고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직원들도 급여가 밀리자 모두 떠나고, 윌슨은 텅 빈 사무실에서 죽기로 작정했었다.

30대 중반까지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하고 국가에 충성한 대가치고는 너무 초라한 상황에 염증이 났던 것이다.

솔직히… 삼 일을 내리 굶었다. 윌슨에게 남은 길은 구차하게 옛 동료들에게 손을 벌리든가 아니면… 죽음밖에 없었다.

그래, 명예롭게 가자.

서랍 안의 서플러스 권총을 만지작거리는 그때, 시혁이 들어온 것이었다.

네이비 씰 문신을 보고 그 명예를 믿겠다며 일을 맡긴 시혁.

처음에는 500달러를 받고 일을 맡았었다. 그런데, 결과물을 보고하자 잠시 후 5만 달러가 입금되었다.

“의뢰인 양반, 이거 뭡니까?”

[미스터 윌슨, 이번 일은 그만한 가치가 있어요. 부담 없이 쓰세요.]

“나는 거지가 아니오. 동정 따위 필요 없소만.”

[하하하. 거지에게 5만 달러를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의 정보는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받을 만큼 훌륭했어요.]

“…….”

[윌슨, 주제넘지만 충고 한마디 할까요?]

“얼마든지.”

[스스로를 쓰레기 취급하면, 남들도 당신을 그렇게 봅니다. 당신은 명예를 아는 남자. 귀하게 생각하시오, 당신 자신을.]

“…….”

[당장 숍에 가서 수염을 밀고, 머리도 다듬어요. 옷도 명품으로 사세요. 그리고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을 잡은 다음 푹 쉬어요. 그런 다음 거울에 당신의 모습을 비춰 보고 연락 줘요.]

“으흐흐!”

[해야 할 일이 또 있습니다. 나는 당신 개인이 아니라 윌슨 잭 다니엘의 명예를 사고 싶어요.]

통화를 끝낸 윌슨은 벌써 흘러내리는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마 이때부터 시혁을 보스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랬던 윌슨에게 지금 보스는 손을 잡고 같이 가자고 한다, 죽을 때까지.

* * *

“아버지, 하나 물어볼 것이 있는데요?”

“오늘 학교 강의 없니?”

“일요일에 무슨 강의가 있다고… 날짜도 모르세요?”

“아! 그렇구나. 나 같은 농사꾼에게 요일이 뭔 상관이겠냐? 그래, 뭔데?”

“이 옥 목걸이, 아버지는 누구에게 받으신 거예요?”

“당연히 돌아가신 네 할아버지에게 받았지.”

“할아버지는?”

“…글쎄다. 그 윗대 할아버지에게 받으셨겠지. 왜?”

“언제부터 대를 물려 내려왔는지 모른단 말이네. 우리 조상님은 뭐 하던 분이셨어요?”

“허허허. 조상님이라…….”

“예, 먼 옛날 우리 조상님.”

마운은 그동안 가슴속에 담아 둔 질문을 아버지에게 던졌다. 그런데, 아버지의 눈빛이 아련하게 변한다.

돈이 아까워 잘 피우지 않던 봉지 담배를 돌돌 말아 침을 바르더니 한 모금 시원하게 빨아 댄 아버지의 대답.

“믿거나 말거나지만… 먼 옛날 우리 조상님은, 승려셨다고 하더라. 그것도 도력이 굉장히 높은 고승이셨다더구나.”

“엥? 승려였다고요?”

“그래, 뇌봉탑을 부처님께 바친 분이라는 말도 있고, 남송시대 때 황사(皇師)를 지냈다는 말도 있더라만… 다 전설이지. 나도 믿기 힘든 판에.”

“뇌봉탑을 만든 황사였다는 전설… 만약에 진짜면 이게 혹시 부처님의 진신사리 아닐까요?”

“옛끼, 이놈아.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아버지가 어릴 때 증조 할아버지에게 들은 말이 있기는 하다. 그 옥 목걸이가 원래 한 쌍이었다면서… 거 뭐라시더라? 두 개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서 언젠가 하나가 된다던가? 허허허. 다 전설이지.”

“……!”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전설을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그 말이 다 맞을지도 모른다.

실제 김시혁과 자신은 시공간을 격하고, 서로 마주 봤으니까. 또 김시혁은 현실 세계에서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나.

최소한 이 목걸이가 한 쌍이라는 것과 서로 끌어당기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증명된 셈이다.

생활은 큰 변화가 없었다. 임신한 아내 장청은 만삭의 몸으로 여전히 회사를 다니고 있다. 둘이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입에 풀칠하기 힘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참고, 또 참고, 끝까지 참으라는 시혁의 편지와 조금만 버티고, 힘들어도 버티고, 마지막까지 버티라는 우 총장의 조언은 일치하고 있었다.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인내하는 중이지만… 현실은 너무 힘들었다.

마운은 아버지를 도와 산 중턱의 차 밭을 정리하다가 잠시 허리를 펴고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본격적인 봄에 접어든 항저우의 날씨는 슬슬 더워지고 있었다.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이 아지랑이처럼 시야를 막을 정도였다.

그때, 아지랑이 사이로 걸어오는 두 사람.

둘 다 이런 시골에서 도저히 볼 수 없는 멋진 정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무엇보다 키가… 엄청나게 크다. 옆에 나란히 서면 자신은 어깨에나 닿으려나?

멀리 차를 세워 두고 논길을 따라 걷는 두 사람.

여긴데? 이 차 밭 뒤로는 거친 돌산이다.

마운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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