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운명 같은 용들의 만남
“헬로우 마운!”
“…….”
“김시혁이다. 벌써 얼굴을 잊었나?”
“…….”
“호텔에서 몰래 빠져나오느라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는데… 괜찮지?”
“…….”
연이어 시혁이 말을 건넸지만 마운은 석상이 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맞았잖아. 옥 목걸이는 서로 끌어당기고 있었던 거야. 나는 환상을 본 게 아니었다고!
“…어서 와, 내 친구 김시혁.”
“오! 다행히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네?”
“자네 눈썹까지 다 그릴 수 있다면 믿겠나?”
“그림도 그려?”
“아니, 젬병이야. 예술 쪽으로는 도통 관심이 없어. 김용 선생의 무협지라면 몰라도.”
풀썩 웃은 시혁이 두 손을 벌렸다.
“친구, 우리 한번 안아 볼까?”
두 남자의 몸이 한 발씩 가까워지더니 덥썩 서로를 껴안았다. 시혁이 꾸부정하게 마운을 안고 토닥이는 모습이었지만 서로 감격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잘 왔다, 친구.”
“응. 너무 늦어서 미안해.”
“꿈만 같아, 자네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는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거야.”
시혁은 차 밭에서 멍하니 바라보는 마운의 아버지를 향해 넙쭉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에구머니! 놀라셨나 보다. 중국에서는 공자와 맹자를 버린 지 오래다. 황실 영화에서나 큰절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을 뿐, 현실에서는 이런 예절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래서 한국이 동방예의지국인 겁니다, 아버지. 친구 아버지면 당연히 제 아버지인 거죠.
“들어가자, 친구야. 이렇게 산다.”
설핏 부끄러운 표정의 마운. 하지만 시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흙바닥에 절을 한 탓인지 시혁의 바지는 흙 범벅이었다.
“아름다운 곳이네. 왜 자네가 여기서 태어났는지 알 것 같다. 정기가 충만하다.”
“그래 봐야 촌구석이야. 조금 있다 집사람이 시장에서 돌아오면 싸구려 백주지만 한잔하세.”
순간, 시혁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졌다.
“이봐, 마운. 나는 거래처 마운 사장을 보러 온 게 아냐. 내 친구 마운을 찾아온 것이지.”
“…그래도 너무 빈약한 내 형편이 부끄럽네.”
“이거이거 약간 실망인데? 장차 천하를 떨어 울릴 사람이 지금 처지를 부끄러워한다? 그것도 친구 앞에서?”
“……!”
“친구, 사람이 말이야. 땅을 보고 걸으면 어쩔 수 없이 어깨가 처지게 되어 있어. 하지만 하늘을 보고 걸으면 자연스럽게 어깨가 펴진다네. 고개를 들어야 하니까 허리가 쫙 펴지지. 요는… 어디를 바라보고 사느냐의 문제야.”
“…….”
“내 장담하지, 우리는 머지않은 장래에 세상을 씹어 먹을 거야.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바뀔 것이고, 우리가 바라보는 대로 세상이 움직일 거야. 자신을 가져. 자네가 천하의 마운이라는 것을 잊지 마.”
“…겨우 항저우 삼류 대학 영어 강사인 내가?”
“그래, 자네는 용이니까.”
“신화 속의 그 용?”
“용은 혼자 승천을 하지 못해. 여의주가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 구름이 있어야 하늘로 오를 수 있는 법. 자네 이름에 왜 구름 운자가 들어갔는지 되새기라고.”
“…….”
안 되겠다. 지금 너무 현실에 짓눌려 자신감을 상실했구나. 이럴 때는 충격요법이 최고지.
“나는 이 년 만에 백억 달러를 모았네. 자네보다 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스스로 극복했어. 자네는?”
“배, 배, 백 억 달러?”
“응, 그 이상일 거야. 그리고 내년이면 적어도 그 몇십 배를 더 가질 수 있을 걸?”
“오오오… 시혁, 자네는 이미 완성됐구나.”
“천만에, 이건 시작이야. 시작에 불과하다고.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은 무한한 자본일세. 내가 가진 자산이 얼마인지 계산조차 불가능한 무한 자본.”
“무한 자본이란 게 가능하단 말인가?”
“해 봐야지. 세상의 모든 돈보다 더 많이 가지면 무한 자본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운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 얼굴에 시혁에 대한 시기심 같은 건 없었다.
친구는 확고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네. 거기다 벌써 상상할 수 없는 돈을 벌었다. 나보다 훨씬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 부끄럽다. 이건 누추한 환경 때문이 아니라 마음가짐이 이토록 차이 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고맙다, 친구야. 정신이 번쩍 든다.”
“마운, 용은 승천하기까지 시련을 겪기 마련이야. 더군다나 우리처럼 개천에서 태어난 용이라면 더 그래. 어쩌면 지금보다 힘든 고비를 넘겨야 할지도 모르지.”
“그래. 시혁, 이젠 흔들리지 않으련다. 시련이 오면 당당히 맞서 싸워 주지. 아직 어떤 길을 가겠다는 목표도 정하지 못했지만, 자네가 편지에서 말했던 대로 참고, 또 참고, 마지막까지 참으면 등대가 나올 것으로 믿겠다.”
됐다. 마운의 시련은 많이 남았다. 그걸 시혁이 개입해서 바꿔 버릴 수도 있지만, 참기로 했다.
혹시 시혁의 개입으로 마운의 창창한 미래가 엉뚱한 방향으로 바뀐다면 그건 진짜 큰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어차피 마운은 몇 년 후면 스스로 길을 찾게 되어 있다. 손창의와의 만남도 운명적으로 이뤄진다.
지금은 연단의 시간.
보검은 여러 겹의 쇠를 겹쳐 두드려야 완성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보검은 어떤 충격에도 부러지지 않는다.
지금은 딱 여기까지.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번 의지를 확인하자.
“마운, 내가 도와줄까?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네.”
“아니, 마음만 받겠네.”
“왜? 지갑이 두둑해야 어떤 일이든 도모하기 편하다는 걸 모르나?”
“친구, 내가 변할까 봐 두려워.”
“……!”
“자네의 마음은 익히 알겠지만, 나는 아직 목표를 정하지 못한 상태일세. 그런데 지금 풍족한 돈이 생긴다면… 어떨 것 같나? 안주하고, 현재에 주저앉아 버릴지 몰라. 그럼 내 미래와 내 갈 길은 사라지는 것이지.”
“…….”
“자네도 그걸 바라지는 않을 거라 믿네, 시혁.”
이놈, 역시다.
그래서 전 세계를 떨어 울리는 영웅이 된 거다. 저 마음가짐이면 마운은 됐다. 승천할 때까지 지켜보면 되는 거다.
같이 가는 거야, 우리는 용이니까.
* * *
“보스, 시킨 대로 했습니다.”
“그냥 받던가?”
“부인은 아직 봉투에 카드가 들어 있는 것도 모를 겁니다. 보스가 떠나고 나서 남편께 주라 했습니다.”
“아내를 정말 잘 만났어. 저런 와이프가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우군인 거지. 오히려 마운보다 훨씬 더 신념이 뚜렷해.”
마운은 비로소 자괴감을 떨쳐 냈다. 이젠 앞으로 다가올 본격적인 시련에 당당할 수 있을 것이다.
시혁과 윌슨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마운을 두고 집을 나선 참이었다. 시혁에게 자극을 받은 마운은 대취했다. 와이프 장청이 사온 백주를 연거푸 들이붓더니 인사불성이 된 것이다.
너무 짧은 시간, 벼르고 벼르던 것치고 허망하다 싶을 정도의 만남이었지만… 더 개입하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이미 완성 직전이었던 노태후나 조지 부시와 달리 마운은 시작도 하지 못한 미완의 대기 아닌가. 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운명적 친구 아닌가.
기다리자, 용이 자력으로 헤엄쳐 강물에 도달할 때까지. 그게 도리다.
“보스, 귀한 친구인 것 같은데 이대로 가도 괜찮습니까?”
윌슨도 슬며시 시혁의 의중을 물어왔다. 왜 돕지 않느냐? 시혁이 조금만 도우면 이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바로 탈출할 수 있지 않느냐? 이런 뜻이겠지.
“내가 도움의 손길을 준들, 친구가 받을까?”
“아!”
“어떨 때 그 도움은 독이 되기도 해. 내 친구는 멀지 않은 장래에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위치까지 올라올 거야. 그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거든.”
“보스! 저기.”
좁은 농로를 다 걸어 나온 시혁이 차를 타려고 하는 순간, 윌슨의 말에 다시 문을 닫아야 했다. 마운의 처 장청이 맨발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시혁의 앞에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장청. 만삭의 몸이다. 숨도 채 고르지 못하고 상기된 얼굴로 시혁을 바라보았다.
“제가 너무 경황 중이라 대접이 소홀했습니다. 남편이 그토록 기다리던 친구를 이렇게 보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제수씨. 몸도 무거운데 왜 이리 급하게 오셨습니까?”
“제 남편을 높게 보아 주시고, 여러 가지 희망과 용기를 주신 점, 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
장청이 수줍게 내미는 것은 카드 한 장. 윌슨을 시켜 전달한 아멕스 블랙 카드였다. 봉투를 열어 보고 미친 듯 달려온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제수씨,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그 카드는 넣어 두십시오. 언젠가 친구가 꼭 필요한 시점이 올지 모릅니다. 그때를 위해서 비상용으로 가지고 계시란 뜻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전혀 불쾌하지 않아요. 저도 아멕스 블랙카드를 본 적은 없지만, 이게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남편에게 큰 도움이 되겠지요.”
“네.”
“그래도 안 됩니다. 기댈 언덕이 생기면 소는 게을러 집니다. 먹이를 먹는 것도, 근력을 기르는 것도 소홀하게 생각합니다. 본능적으로 나태해집니다. 저는 남편을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친구에게 말하지 말고 제수씨가 보관을 하시다가…….”
“저는 감히 남편을 속일 수 없어요. 부부 간에 비밀을 가지기 시작하면 불신이 싹틉니다.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후와! 이렇게 똑 부러질 수가 있나. 상상했던 것보다 더 여걸이다.
시혁의 중국어가 얼마나 훌륭한지 알고 있으면서 일부로 영어로 말을 건넨다. 윌슨까지 배려한 지혜로운 행동이다.
이렇게 되면 돌려받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작전을 망쳤다.
“알겠습니다. 제수씨의 뜻을 존중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시혁 씨 같은 큰 인물이 남편의 친구라는 사실, 너무 놀랐습니다. 오늘 와서 남편을 일깨워 주신 점… 안사람으로서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고마워요, 시혁 씨.”
“대신, 이건 꼭 받아 주십시오. 곧 태어날 내 조카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부디 거절하지 마세요, 제수씨.”
지갑을 털어 만 달러를 건넸다.
비로소 빙긋 웃으며 두 손으로 받는 장청. 정말 지혜로운 여자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던데…….
“보스, 멋진 여잡니다.”
“응, 저런 와이프가 뒤를 받쳐 주면 저절로 힘이 나겠어. 마운이 든든하겠다.”
“산드라도 똑소리 나던데, 좀 맹한 구석이 있기는 해도.”
“…….”
이것 봐라? 갑자기 거기서 왜 산드라가 튀어나와?
“지금쯤 미국에 도착했을 텐데, 전화라도 해 보지?”
“예, 벌써 미스터 공과 사무실 정리 중이랍니다.”
어쭈?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의외였어. 미국 변호사 자격증까지 가지고 있을 줄 몰랐거든.”
“…산드라가 국제 변호사 자격을 딴 겁니까?”
“아니, 국제 변호사 자격을 주는 나라는 없어. 그 용어 자체가 불법이야. 국제 변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은 사기꾼이거나 멍청이, 둘 중 하나라고 봐야 해. 산드라는 영국과 미국에서 각기 변호사 자격증을 딴 거야.”
“아… 그렇군요. 우리 산드라는 정말 총명한 여자였네요.”
우리 산드라? 요거요거 냄새가 풀풀 난다. 35살 노총각의 가슴에 드디어 불씨가 옮겨붙었구나. 흐흐흐. 잘 살피면 재미있는 스토리가 나오겠다.
“이제 베이징으로 돌아가자. 잠시 후진타오 부총리를 보고 미뤄 두었던 인삼 밭 수확하러 가야지.”
“보스, 농장도 있습니까?”
“응, 내 조국 대한민국에 수십만 평 농장이 있지. 지금쯤 그 농장의 인삼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값을 헤아릴 수 없을 거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경이다. 한국에서 박하송이 발악하는 중이다.
자기는 부동산 업자가 아니라고. 매일 밀어닥치는 건설사와 복부인 등쌀에 피가 쭉쭉 빨리고 있다며 빨리 오라고.
이 자식, 오백 원씩 삥 뜯다가 다구리 당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 보자, 더 미루다가 인삼이 썩어 버리면 농사를 망칠 수도 있으니까. 참! 이 인삼은 절대 썩지 않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