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신동방보험의 출현
삼송생명은 보험사다. 생명보험업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7명의 소상공인이 모여 만든 동방보험이 전신이었다.
창업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직장인 대상 단체 보험을 설계하여 생보업계 1위로 등극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창업자 중 회장을 맡은 강희소가 암으로 별세한 후 삼송그룹에 먹히고 말았다.
당시 창업자 7명은 울분을 삭인 채 물러나야 했다. 거대 그룹 삼송과 대적할 수 없었으니까.
“한수야, 세탁소는 잘되냐?”
“그럭저럭 밥은 먹고 살지.”
“그러게 왜 보증을 서고 지랄이야?”
“정필아, 산다는 게 말이다. 다 그렇더라. 처남 부탁을 거절하기 쉽냐? 우리 창업할 때 전세금 빼 준 놈이다. 자기는 매달 월세 물면서.”
“미친놈아, 그건 경우가 다르지. 지금 네 꼬락서니를 봐라. 남의 옷이나 다리면서 사는 게 정상이냐?”
“허허허, 이제 꿈도 희망도 다 버렸어. 남은 인생 이렇게 살다가 가는 게지.”
“흐휴…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다른 놈들 사정도 매한가지야.”
“오늘 오기는 온데?”
“6개월 만에 얼굴 보는 자린데, 오긴 오지 않겠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미닫이문이 열렸다. 차례차례 들어서는 3명의 노인들.
“끼리끼리 논다고 그래도 먹고살 만한 놈들끼리 뭉쳐서 오네.”
“뻘소리 지껄이지 말고 국밥이나 시켜. 배고프다.”
마장동 시장의 한편, 수구레 국밥집.
소의 가죽과 고기 사이에 있는 아교질 부위를 수구레라고 부른다. 질기지만 꼬들꼬들한 식감이 일품이다. 육수는 소의 잡뼈 부스러기로 푹 우려낸다. 거기에 얼큰한 다데기를 풀어 놓으면 일미 요리가 된다.
일반 사람들도 잘 모르는 서민 음식. 마장동 도축장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활용한 진짜 저렴한 국밥집이다.
드럼통 탁자에 대충 얼기설기 판자를 엮어 만든 의자. 두 개의 탁자를 합치고서야 5명이 둘러앉았다.
“장가야, 임대료는 잘 걷히냐?”
“…걷힐 임대료라도 있으면 좋겠다. 너무 구석진 곳에 있는 건물이라 보러 오는 사람도 없어. 다음 달 세금 낼 돈도 없다. 팔려고 내놨는데,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김 사장, 공장은 어때?”
“그럭저럭… 밥만 먹으면 되는 게지.”
“까는 소리 하네. 그래서 매달 돈 빌리러 다니냐?”
“들었어? 이상하게 자꾸 반품이 잦고, 결재도 어음 기일이 길어지고, 그나마 있던 기존 거래처들이 피한다.”
“피 말리는 거야, 서서히 고사하도록.”
“잔인한 세월이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국밥이 나오자 허겁지겁 숟가락을 놀리기 시작한 5명의 노인들. 배가 고팠구나. 마음도 고팠겠지.
서로 말들이 없다. 눈물이 살짝 맺힌 노인도 있었다.
“그냥 콱 죽어 버릴까? 이게 사는 거냐?”
“그만해. 죽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허허허. 맞는 말이네. 죽을 용기가 있었으면 회사를 뺏기지도 않았겠지.”
“그러고 보면 일찍 세상을 뜬 강가와 오가가 행복한 거야. 더러운 꼴 안 보고 둘이 만나서 잘 놀겠지?”
“한 놈은 암으로 죽고, 또 한 놈은 울화병에 뒈진 게 어지간히 좋겠다. 저승에서도 이를 갈고 있을걸?”
다시 말이 끊어졌다. 골수까지 맺힌 원한에 할 말을 잊은 것이다.
그때, 다시 허름한 수구레 국밥집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사람이 들어섰다.
외국인?
거의 2미터에 육박하는 엄청난 덩치의 금발 머리 외국인과 그보다는 작지만 역시 훤칠한 키의 청년. 잘 생겼다.
청년은 두어 걸음을 띄더니 바로 5명의 노인들 앞에 멈춰섰다. 그리곤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뉘쉬우?”
“안녕하십니까? 어르신들. 김시혁이라고 합니다.”
“우리, 본 적이 있던가?”
“네. 처음 뵙지만 익히 존함들은 알고 있습니다. 동방보험을 창업하셨던 기업가들 아니십니까?”
“…그 이름을 아직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나?”
“장가야, 삼송생명으로 이름 바꾼 지 얼마 안 된다. 지금도 동방보험으로 부르는 사람들 많아.”
“그나저나 어찌 오셨소? 이런 누추한 곳까지.”
시혁은 비로소 허리를 펴고 빙긋 웃었다. 신뢰를 주는 상큼한 웃음이다.
“듣기만 했지 처음 봅니다. 수구레 국밥, 저도 한 그릇 먹을 수 있겠습니까?”
외국인은 따로 앉고, 김시혁이라고 자신을 밝힌 청년은 5명의 노인들 틈에 끼여 앉더니… 맛있게 먹는다, 얼핏 보면 지방에 근막 덩어리로 보이는 수루레 국밥을.
시혁이 한 그릇을 뚝딱 비울 때까지 5명의 노인들은 신기한 동물을 바라보듯이 말이 없었다.
허름한 노인들이지만 한때 대한민국의 생명보험업계를 들었다 놨다 하던 관록이 어디 가질 않는다. 내공 만렙.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이상 스스로 입을 열겠지. 쓴 소주잔만 꺾어 마시며 노인들은 기다렸다.
“이거이거 맛있는데요? 은근 중독성 쩝니다.”
“젊은 친구가 뭘 아네. 한 번씩 생각나곤 하는 맛이지, 매일 먹기에는 좀 그렇지만.”
“왜 이런 식당이 많이 없을까요?”
“소 한 마리 잡아 봐야 겨우 3kg 정도 나와. 그리고 너무 기름져서 요즘 사람들은 잘 안 먹지.”
“어떻든 귀한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알아왔던 사이 같다. 국밥 한 그릇으로 진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의도적이라면 고단수다.
“수구레 국밥이 귀하지만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다… 어르신들 같군요.”
옳지. 이제 슬슬 본색을 드러내 봐라.
“우리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가 아닌가? 귀한 수구레와 비교하는 건 어폐가 있는 듯하이.”
“제가 좀 알아봤습니다. 이 수구레라는 부위가 꽤 다듬기 까다롭더군요.”
“그런가? 우리도 그건 몰랐네.”
“네. 그렇게 한 점씩 근막과 소가죽을 다 분리하고 또 지방 덩어리를 떼어 내는 일이 귀찮을 정도로 시간을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오래 끓이고 정성을 다해야 완성되는 요리인 셈입니다.”
“…….”
“동방보험에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하셨는데… 국밥은 엉뚱한 곳에서 팔고 있으니, 어르신들의 심정이 어떨지 미루어 짐작이 됩니다.”
“그래? 원래 싸움이 그래. 아무리 좋은 재료를 정성스럽게 준비했어도 선빵을 맞으면 꼬꾸라지게 되어 있거든. 우리는 패배한 거야. 변명의 여지가 없어.”
“그건 동의할 수 없습니다. 군자대로행이라고요? 대로에 잔뜩 비수를 박아 놓은 양아치를 상대로 너무 젊잖게 상대한 건 아닌가요?”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벌써 틀니를 할 나이가 되었네. 다시 칼을 뽑기에는 너무 늙었어.”
“민족의 영웅이신 성웅 이순신 장군께서는 만부부당의 맹장이라서 전장을 호령하신 겁니까? 겨우 12척의 전함으로 133척의 왜군을 떼 몰살한 걸 잊으셨습니까? 노회하지만 지혜로운 장군 한 분의 힘이 그렇게 큰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12척의 전선이 없네.”
“하하하. 아닙니다. 어르신들께는 어마어마한 배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
“보험업의 기본이 뭡니까? 보험업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보험업이 성공하려면 어떤 것을 제일 먼저 갖춰야 할까요?”
“…….”
“결국 보험은 사람입니다. 나중에야 인터넷 세상이 도래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보험모집인이 가가호호를 방문해서 가입자를 설득해야 계약이 체결됩니다.”
“…….”
“어르신들에게는 수천 명의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초창기 동방보험일 때 어르신들은 모든 가치를 사람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보험모집인들에게 파격적인 복지와 장려금을 주셨죠. 지금도 그런 가요?”
“…….”
“삼송생명으로 간판을 바꾸고 대기업의 핵심 계열사가 된 이후, 그분들은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했습니다. 보험모집인이 우선인 동방보험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로지 관리를 받는, 매달 지정된 목표 액수를 채우기 바쁜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
“어르신들이 다시 깃발을 들면, 소외되고 억압받는 보험모집인들이 순식간에 모여들 것입니다. 결국 승부는 거기서 결정됩니다.”
노인들의 표정이 발갛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그래, 우리가 초심을 잃었구나. 보험업의 처음과 끝은 사람이다.
“하지만 막대한 비용이 필요해. 우리는 적잖은 돈을 쥔 채 쫓겨났지만 보다시피 하나같이 거지꼴이라네. 다 삼송의 뒷공작에 사기당하고, 고발당하고, 갖은 방해 공작에 이리되고 말았어.”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제가 돈이 많거든요. 12척의 전선을 병사로 꽉 채울 돈, 드리겠습니다.”
* * *
삼송생명 빌딩은 불이 꺼지지 않았다. 거의 반복되는 야근은 일상이 되고 말았다.
조문호는 서서히 지쳐 가고 있었다. 이러려고 한국대 법학과를 나왔던가. 차라리 외국계 회사로 갈 걸 잘못했나. 공무원으로 들어간 친구들은 탱자탱자 놀고먹던데.
1차 합격자라는 것도 나름 한국 사회에서 먹히는 훈장임에 분명하다. 법학 직렬로 취업 시 우대 점수를 받기도 하고 어떤 직장이건 눈에 띄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문호는 법학 직렬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보나마나 까마득한 상사들은 모두 동문 선배들일 테고, 나중에 뒤늦게 입사하는 후배가 2차라도 붙은 다음 변호사 배지를 달고 들어오면… 바로 상사가 된다. 그 꼴을 어떻게 보나, 개 쪽이지.
고민 끝에 전혀 관계없지만, 나름 1차 합격장을 써먹을 수 있는 곳으로 삼송생명 총무과를 골랐던 것인데.
이게 뭐냐? 몇 개월이 지났건만 커피 심부름과 복사기를 돌리는 건 여전했다. 그래도 지금은 간간이 일을 맡긴다. 조금 더 버티면 곧 멋진 프로젝트를 맡을 것이라는 희망을 붙잡고 매일 야근을 참고 있는 것이다.
실상은 저 배불뚝이 과장의 늦은 퇴근 때문이지만. 슬쩍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도대체 뭔 지랄을 하기에 매일 저렇게 늦게까지 일하는 것인지.
지랄… 돌겠다, 미친 새끼. 칸막이 너머로 보이는 저 책, 표지를 신문지로 감쌌지만, 저거 무협지잖아?
그러니까 바가지 긁는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지도 않은 참에, 야근으로 퇴근 카드에 도장을 찍으면 수당도 나오니까……. 그래서 회사에서 개기는 거야? 무협지 보면서?
우리는? 저 대리는 지뢰 찾기 하면서 네 퇴근만을 기다리고, 나도 낙서하면서 기다리는 걸 몰라? 제발 좀 집에 가서 보면 안 되겠니? 그 무협지.
그런데.
갑자기 총무부 사무실로 사장이 내려왔다. 뒤에 수행원들을 가득 데리고. 부장은 물론, 임원들이 따라붙었다. 이게 뭔 일이야?
“사, 사, 사장님!”
“오! 이 과장, 늦게까지 고생이 많네. 총무부 1과답네.”
슬그머니 무협지를 서랍에 넣고 몸을 일으킨 과장과 급히 지뢰 찾기를 꺼 버린 대리. 총무과 내에 유일하게 컴퓨터를 쓰고 있는 대리도 깜놀한 모양이다.
“입구에는 누가 마중 나갔나?”
“예, 사장님, 비서실장과 기획이사가 영접 나갔습니다.”
“음. 그 정도면 크게 실례가 안 되겠군. 근데 왜 하필 총무과에서 보자고 했는지 모르겠어.”
“…기획실로 전화가 왔답니다. 저희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급히 사장님과 임원들께 회사로 복귀하십사 연락을 드린 겁니다.”
“하여튼 이거 꼭 성사시켜야 해. 대한민국에서 이만큼 큰 단체 보험은 전례가 없는 일이야. 대단해.”
“예, 우리가 요청한 것도 아니고 상대 측에서 먼저 의사를 밝힌 만큼, 성사 가능성이 큽니다. 성심을 다해서 모시면 좋은 결과를 내지 않을까 합니다.”
뭔 소리야? 사장이 직접 올 정도의 큰 계약이 여기서 이뤄진다는 말인가? 여기는 회사의 자금 관리와 운영을 지원하는 총무관데?
조문호도 잔뜩 쫄았다. 괜히 기침이라도 터지면 큰 일이다.
이윽고 총무과로 몇 명의 사람이 들어서자 사장은 잽싸게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낮이 익다. 제일 앞에서 외국 미녀와 들어온 귀빈… 아는 놈이다.
“아이고, 귀한 걸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삼송생명 사장 여맹구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K 미르 그룹 총괄 사장 박하송입니다. 여기는 산드라 리페어 비서실장입니다.”
뜨악! 박하송? 그 500원 삥 뜯고 다니던 괴짜 박하송?
이제 졸업반 아닌가?
조문호는 사장의 인사를 받는 박하송을 보고 넋이 나가 버렸다. K 미르 그룹 총괄 사장이란다.
저… 500원 있냐? 박하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