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제 방에서 차 한잔 나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역대급 계약이 될 텐데, 여기는 사무 공간이라 협소합니다, 박 총괄 대표님.”
“아닙니다. 여기 좋네요. 특히 저기 제 대학 선배가 계셔서 겸사겸사 찾아온 길입니다.”
총무과의 모든 눈길이 조문호를 향했다. 유령처럼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조문호의 얼굴이 홍시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나? 진짜 나?
뭔 일이냐? 조문호와 박하송은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학교에서 몇 번 지나치기는 했지만, 워낙 다른 세상을 사느라 말 한마디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박하송도 아무에게나 삥을 뜯는 바보가 아니었다. 하송이가 손을 내민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반적인 범주에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말이 통하는 사람, 하송의 농짓거리를 웃으며 받아 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
조문호는 그 범주에 있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 뜬금포로 등장한 박하송. 그 유명한 K 타워를 세운 회사의 총괄 대표란다. 그건 좋아. 그럴 수 있다고 쳐.
왜 나야? 졸업하고 본 적도 없는 나를?
내가 있어서 오늘 총무과 사무실로 왔다고? 뭔지 아직 모르겠지만 역대급 계약 건을 가지고? 선배가 근무한다고 했으니 분명 나를 가리킨 것 같다.
오 마이 갓! 존재감 없는 내가 한 방에 뜰 수 있는 기회다. 이유는 따지지 말고 잡아야 산다. 모래알 법대라고 불리는 한국대 법대 동문이 나를 살리는구나.
“87학번 박하송, 와… 이거 얼마만이야? 여기서 보는구나.”
“아이고, 선배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제가 조금 바빠서 자주 연락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여기 근무하신다길래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보험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야지요.”
“그럼그럼, 당연하지. 동문 좋다는 게 뭔가? 이럴 때 서로 돕고 하는 거지.”
박하송은 조문호를 향해 먼저 다가가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삼송생명의 사장 휘하 임원들이 이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란 표정을 짓는 건 당연했다.
올해 갓 입사한 신입 사원, 이름도 모른다. 한국대 법대 졸업생이라는 라벨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급 시 큰 장점으로 작용하겠지만, 지금은 기껏해야 복사 심부름이나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놈이 저런 대형 고객의 선배였다니… 이번 건 계약만 마치면 바로 비서실로 발탁하고, 두둑한 금일봉을 건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장의 이런 생각과 달리, 지뢰 찾기 대리와 무협지 과장은 사색이 되어 버렸다. 지잡대 출신의 두 사람은 은근 조문호를 뺑뺑이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X됐다. 진작 좀 잘해 줄걸.
총무부 1과 한가운데 놓인 소파는 겨우 다섯 명이 앉을 수 있다. 박하송과 산드라가 1인용 소파에 앉고, 건너편의 3인용 소파에 삼송생명 사장과 비서실장과 기획실장이 앉았다. 조문호는 다른 임원들 틈바구니에 끼여 서 있어야 했다.
“에이… 제가 선배님을 세워 두고 앉아 있기 그러네요. 조 선배님, 여기 앉으세요.”
“아이고, 박 대표님. 제가 미처 거기까지 생각 못 했습니다. 오늘 귀빈을 오시도록 만든 당사잔데, 같이 동석해야죠. 기획실장, 당신 저기 접이식 의자 가져와요.”
사장의 호통에 기획실장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문호의 등을 밀었다. 사장도 살짝 엉덩이를 움직여 한쪽 끝으로 이동했다.
본의 아니게 까마득한 하늘 위 존재, 사장님과 비서실장을 양옆으로 밀어내고 중간 자리를 차지한 꼴이 되어 버린 조문호.
“그러니까, K 타워에 입주할 스타트업 기업을 위한 보험을 새로 설계해 달라는 말씀인 거네요?”
“네. 그렇습니다.”
“대충 가입 기업들의 수를 얼마로 예상하십니까?”
“지금 심사 중입니다만 확정적으로 5,000개 업체입니다. 나중에는 조금씩 숫자를 늘려서 총 8,000개 업체가 될 겁니다.”
“헉! 5천 개라고 하셨습니까?”
“네, 지금은요.”
“어떤 식의 보험을 새로 설계해 주길 바라는 것입니까?”
“우리 K 미르 그룹은 이번에 입주하는 기업들의 모든 것을 케어합니다. 자금이 부족하면 창업 자금도 지원하죠. 기술 개발 자금, 홍보 자금, 영업 자금까지 감당할 생각입니다.”
“…….”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하겠죠. 기술과 아이디어만 확실하다면 성공할 여건이 다 갖춰져 있으니까요.”
“네. 저라도 밤잠을 잊고 일에 매달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걱정입니다. 입주사 직원들 모두에게 생명보험을 지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박하송 대표님, 생명보험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리고 입주사 직원들 전원이라고요?”
“물론이죠. 한 회사당 5명씩만 잡아도 2만 5천 명 정도 되겠죠.”
삼송생명 사장은 벌떡 일어섰다. 무의식 중에 나온 행동이다.
이건 말도 안돼.
우선 저렇게 파격적인 조건으로 입주사를 위한 지원을 하면서, 왜 생명보험까지 책임을 진단 말인가? 이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지나치다. 대충 일 인당 월 만 원씩만 보험료를 납입한다 해도 2억 5천만 원이다. 대부분 스타트업 직원들은 귓때기 시퍼런 젊은 친구들, 사망할 확률은 0.1%도 안 될 것 아닌가?
“K 미르 그룹의 숭고한 뜻은 알겠는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지 여쭤봐도 될는지…….”
“아! 그건 단순합니다. 보다 많은 벤처기업이나 스타트업 기업이 성공해야 우리 그룹에도 이익이 돌아오니까요. 입주할 때, 모든 입주사는 주식의 5%를 우리 그룹에 제공합니다. 또 추가로 자금을 지원할 때는 그에 걸맞는 지분을 쉐어 하게 되죠. 결국 입주사가 성공하면 할수록 우리 수익도 커지는 구조입니다.”
사장은 바로 감을 잡았다. 이건 엄청난 프로젝트다. 마치 실리콘밸리에 엔젤 투자자가 하는 행동 방식. 한국에서는 아직 이런 투자를 하는 곳이 없을 뿐이다.
그러나.
“외람되지만, 엄청난 자금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뜻은 알겠는데 너네들, 그만한 돈이 있냐는 물음이다. 이건 정부 차원에서도 쉽지 않은, 현도나 삼송도 선뜻 시도하지 못한다. 일개 민간 기업이 감당하기 힘든 프로젝트고 장기간 투자할 여력이 없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박하송도 여맹구 사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이왕 띄워 주려면 더 확실하게 해 볼까나?
“산드라 실장님, 법인 등기부 등본 가져왔죠? 드리세요.”
산드라가 브라운 서류 가방에서 꺼내어 건네준 법인 등기부 등본을 받아 든 여맹구 사장은 조용히 시립하고 서 있는 기획실장에게 다시 건네줬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감추지 못했다. 여맹구 사장 옆에 인형처럼 앉아 있던 조문호도 곁눈질로 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획실장의 반응은 여맹구 사장과 달랐다. 관록의 차이다. 엉덩이에 화살이 꽂힌 고라니처럼 화들짝 놀라 서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한국 법인의 대표이사는 당연히 박하송이었지만, 감사로 등재된 이가… 동명이인은 아니겠지? 정조영? 대충 주민등록번호를 보건대, 그 정조영이 맞네?
무엇보다 자본금이… 잘못 본 건 아니겠지?
“잘 오셨습니다. 저희 삼송생명은 K 미르그룹이 원하는 어떤 보험 상품도 맞춰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국내 탑입니다.”
여맹구 사장은 거듭 고개를 숙였다. 이젠 의심의 여지가 없다. K 미르그룹은 진짜배기다. 왕건이 중 초대박 왕건이.
“예, 우리나라 사람들은 꼭 이렇게 증명을 해 줘야 믿더라고요. 자본금은 잘못 인쇄된 게 아닙니다. 거기 적혀 있는 오천억, 맞습니다.”
“……!”
“그리고 지속적으로 자본금을 증자할 생각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한국 법인이 문제가 아니라 그룹 지주사에게 이 정도 자금은… 표현이 조금 거시기 한데, 새 발의 피 한 방울 정도거든요.”
이쯤되면 삼송생명 전 직원이 도열해서 구십 도로 절을 해야 할 판이다.
“참, 생명보험도 등급이 있더라고요. 보장 금액이 오억 원까지 되려면 대충 매월 5만 원 정도 되나요?”
“…….”
“물론, 2만 5천 명 전체 입주사 직원을 대상으로 말하는 겁니다. 조금 차이는 있겠지만 매월 납입할 보험료가 12억 5천만 원? 그쯤 되겠군요. 맞나요?”
“…만 원도 계약 연도에 따라, 그러니까 대부분 젊은 직원들이 될 텐데, 5억 원까지 보장받도록 설계할 수 있습니다만.”
“에이… 우리 총회장님이 들으면 저보고 째째하다고 욕하실 겁니다. 그냥 일 인당 매달 오만 원씩 불입하는 것으로 하죠. 그 대신 보장 금액을 더 높이면 되겠네.”
“…….”
“조문호 선배님, 안 그래요?”
박하송이 조문호를 향해 갑자기 질문을 던지자 화색이 만연한 얼굴이 된 조문호. 너무 엄청난 대화가 오고 가는 중이라 감히 끼어들 타이밍을 못 찾던 중이었다.
“그러엄! 우리 후배님 통이 그 정도는 되야지.”
“역시, 우리 조문호 선배님. 지금 직급이 대리 정도 되시나요? 이 계약은 선배님 덕분에 이뤄지는 건데, 바로 진급하시겠네. 하하하.”
“으, 으, 응. 곧 대리도 되겠지 뭐.”
신데렐라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어. 그래서 보상을 받는 거야. 하루아침에 이 조문호 인생이 활짝 피는구나. 까짓것 대리 건너뛰고 과장을 달아 줘도 괜찮아. 자그마치 한 달에 12억 5천만 원을 벌어들이는 계약이 나 때문에 된 거잖아.
만세, 한국대 법대. 앞으로 절대 모래알 법대라고 부르지 않을게. 이제부터 찰떡 법대다.
조문호의 가슴이 공갈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당장 선망의 눈초리를 보내는 저 무협지 과장과 지뢰 찾기 대리의 표정을 봐라. 벅차다. 뿌듯한 이 기분.
“자, 오늘은 이 정도로 하시죠. 정확한 보험 설계가 끝나면 양사 간 정식 계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때는 아마 우리 본사의 총회장님이 참석하실 겁니다. 의전에 만전을 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서 완벽하게 설계된 보험 약관과 계약서를 준비하고 총회장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사홍 총괄 대표님.”
“조 선배님, 저녁을 먹기에는 너무 늦었네요. 제가 일정이 조금 바쁩니다. 나중에 계약 끝나고 근사한 곳을 잡아 놓을 테니, 동문끼리 뭉치도록 하시죠.”
“그래, 사홍아. 아무튼 고맙다. 선배를 잊지 않고 찾아와 줘서.”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조문호 선배님은 우리 법대의 얼굴 아니었습니까? 하하하.”
이토록 훈훈한 선후배 관계가 있었던가?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딱 두 사람, 지뢰 찾기와 무협지를 빼고.
* * *
[야, 끝냈다.]
“어, 수고했어.”
[미친 새끼, 일단 신데렐라를 만들어 놨다만, 어쩔 생각인 거야? 그 재수 덩어리 조문호를.]
“하송아, 너 왜 조문호에게는 한 번도 500원, 삥 뜯지 않았니?”
[삥 뜯을 가치도 없는 인간이니까. 그건 내 나름대로의 애정 표현이었거든.]
“그래, 지금 조문호는 구름 위에 둥실 떠 있겠네?”
[당연하지. 그러라고 일부러 총무과 사무실로 쳐들어간 건데?]
“하송아, 그거 아니?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는 말.”
[그래, 이문열 선생님 소설 제목이잖아?]
“그런데 추락하는 것에서 날개를 떼 버리면 어떻게 될까?”
[사악한 놈, 너는 애당초 천당 가긴 글렀다.]
“신데렐라를 만들어 놨다고 그랬지? 신데렐라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 12시가 땡 하고 울리면 모든 게 없어지거든.”
[무섭다. 너하고 절대 척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시혁아, 나는 신데렐라 안 할래.]
이번 일에 귀한 너를 동원해서 미안해, 친구야.
하지만 말이다. 네가 모르는, 너무 아픈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구나. 차마 말 못할 이야기다. 이해 바란다, 친구야.
이제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해 보자.
‘문호야, 조문호야. 맑은 하늘에서도 벼락이 떨어진다는 사실, 혹시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