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금단의 열매를 감춘 비밀의 문
“자! 이제 단둘이다. 망설이지 말고 꺼내 봐.”
“회장님의 일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신상의 문제라… 그건 좀 의외다. 그래서?”
“회장님의 친모가 살아 계십니다.”
“……!”
이 새끼.
이거였구나. 그래서 자기 목숨을 담보로 기어 들어온 것이다. 시혁의 심장이 최고조로 펌핑을 시작했다. 생모라니…….
“계속해.”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그동안 너무 열악한 시설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저희가 최고의 환경으로 바꿔 모셨습니다.”
“어떻게 찾았나?”
“예, 회장님. 저희도 우연한 기회에…….”
시혁은 최대한 침착한 척 반응했다. 백정태의 가슴은 그럴수록 더 타들어 갔다.
“저희?”
“네. 제가 맡고 있는 팀과 이건호 회장님께서 직접 나서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내 생모는 어디 계시지?”
“…그건 제가 답변드릴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나중에 회장님들께서 말씀 나누실 문제입니다.”
“그럼, 너는 왜 왔지? 간 보러 왔나? 생모를 인질로 잡고 있다?”
“…….”
“내가 너 따위에게 조종당할 사람으로 보여? 찍어서 맛보니 어떠냐? 싱거워?”
“아, 아, 아닙니다. 추호도 그럴 마음 없습니다. 고정하십시오, 회장님.”
“간을 보러 올 때, 네 간이 빠질지 모른다는 생각은 안 했나?”
“…….”
“나를 낳아 준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니… 참 다행스럽네. 너희가 잘 모시고 있다니, 그것도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말이야. 너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어.”
“예?”
“나는 너희와 딜을 할 생각이 전혀 없거든. 차라리 지금 당장 삼송을 먹어 주마. 그러면 자연스럽게 생모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허억! 김시혁 회장님!”
조금도 표정 변화가 없는 시혁.
진짜 백정태는 질리고 말았다. 이 카드가 먹히지 않으면, 안 오는 것만 못한 꼴이 된다.
자신은 이 방에서 죽을 것이고, 삼송도 아작이 난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조언한 게 독이 되는 것이다. 평생 고아로 살아온 김시혁이 친모가 있다는 사실에도 흔들리지 않을 줄은 몰랐다.
백정태는 고도의 스파이 교육을 받은 자다. 상대방의 눈동자 움직임, 안면 경련, 목울대의 꿈틀거림, 모공이 열리는 것만으로 진위 여부를 판별할 수 있도록 단련되어 있다.
그런 백정태가 보기에도 저건 페이크가 아니다. 진짜 무심한 표정이다.
지독한 놈.
그러나 시혁은 상상치 않았던 이야기에 심장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이를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회귀한 이후 뇌와 육체가 활성화되면서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게 된 시혁. 이를 백정태가 알 턱이 없다.
‘나를 낳아 준 어머니가, 살아 계셨구나!’
그러나 한번 밀리면, 이놈들의 꼭두각시가 된다. 내 삶을 다시는 그리 살지 않겠다 수십, 수백 번 다짐하지 않았던가. 버텨야 한다. 이놈 따위를 넘어서지 못하면… 뒤의 여우를 끌어내지 못한다.
“다 했지? 할 말.”
“김시혁 회장님, 당신은 진정 냉혈한 입니까? 당신을 낳아 준 친모를 버리실 겁니까?”
“이러이런… 이봐, 백정. 협박은 강자의 몫이야. 개미 새끼에게 목이 졸리는 코끼리는 없어. 착각하지 말라고.”
시혁이 테이블의 버튼을 누르자, 윌슨과 김보성, 캄퐁이 들어왔다.
“윌슨, 이놈을 데려가라. 기억이 안 나는 게 많은 모양이다.”
백정태는 다급했다. 일단 위기를 넘겨야 한다.
“회, 회, 회장님. 박혜선 씨는 삼송 의료원에 계십니다. 의료진의 말에 의하면, 오래 버티지 못할 지경이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처음에는 조문호의 사촌 형이 있는 정신병원에서 모친의 진술을 발견했습니다. 그걸 단서로 많은 공을 들여 알아낸 것입니다. 절대 나쁜 뜻은 없습니다, 회장님!”
또 익숙한 이름이 나온다. 지겹다, 이놈의 악연들.
“애초에, 너희 같은 족속들이, 내 어머니를 인질로 잡고 있다는 사실… 그것 자체만으로도 피가 쏠리는 일이다. 너는 그만 죽어라. 어울리지 않는 자스민 향, 구역질 난다, 백정!”
“회장님, 한마디만 더 들어 주십시오. 그마저 상관없다면, 죽이셔도 무방합니다. 부탁드립니다.”
“…해 봐. 넉넉히 일 분 주마.”
“김시혁 회장님의 부친은 이효수 박사입니다. 그는 한국 정부의 음모로 미국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 삼송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
“그렇습니다. 안기부의 절대 비밀 금고를 열었습니다. 저는 그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지만… 우리 회장님은 그 파일을 직접 보셨습니다.”
“어디 있나?”
“허락하신다면, 언제든 만나 뵙도록 주선하겠습니다. 저는 메신저에 불과합니다.”
“주선?”
“아, 아닙니다. 모셔 오겠습니다.”
“좋아, 일주일 후 여기로 데리고 와. 그때는 보다 확실한 뭔가를 들고 와야 할 거야. 삼송을 살리려면… 정확히 알아들었나?”
“넵, 한 자도 빠짐없이, 정확히.”
“그래, 오늘은 보내 주마. 꺼져라, 백정.”
* * *
백정태가 구사일생으로 비틀거리며 방을 나간 후, 소식을 전해 들은 모든 임원이 시혁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하늘이 뒤집힐 사건이다.
보스의 생모가 나타났다. 지금껏 출생에 대한 것들을 애써 외면해 왔던 보스. 그러나 윌슨과 바바라를 비롯한 공사홍까지 모른 척한 것은 아니었다.
전국의 출생 기록을 뒤지고, 당시 시혁을 처음 발견한 공원 관리소의 직원과 임시 보호 기관의 모든 담당자를 면밀히 추적해 왔다.
그러나 오리무중.
하늘에서 떨어진 듯, 보스의 과거는 철저히 가려져 있었다.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였는데 엉뚱하게 보스가 경멸해 마지 않는 놈에게서 소식이 왔다.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반가운 일입니다. 오래전 놈을 죽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모난 돌도 다 쓸모가 있다더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윌슨과 공사홍은 감격했다. 얼마나 좋은 소식인가?
“부친은 고 이효수 박사, 한국 정부에 의해 미국에서 사망했고, 모친은 현재 삼성 의료원에 입원 중인 박혜선, 온전치 못한 기억… 저놈에게 알아낸 전부다.”
시혁의 조용한 울림이 끝나자 각기 할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시혁아, 너와 나는 바로 한국으로 가자. 만나 봐야지. 모친을 삼송의 손아귀에 둘 수는 없는 일이다. 가장 안전한 곳으로 모시도록 하자.”
공사홍.
“보스, 저는 CIA 비밀 자료실을 열겠습니다. 거기에는 부친에 대한 파일이 있을 겁니다. 비밀 취급 인가 1급을 가진 놈, SS 웨인 요원이라면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윌슨.
“백정태, 아무리 훈련받은 놈이라 해도, 뉴욕은 우리 앞마당입니다. 헬기까지 떨쳐 낼 수 없죠. 삼송 회장의 목숨은 손바닥 위에 있습니다.”
김보성.
“제 동창이 국과수에 있습니다. 친자 관계 증명을 바로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이현.
“박혜선 님의 미국 시민권과 여권은 미국 대사관에서 바로 현장 발급하도록 요청할게요. 영국이든, 프랑스든, 독일이든 상관없어요.”
산드라.
“첫 단서를 찾은 놈이 조문호라고 했지? 그놈을 좀 더 족쳐 볼게.”
박하송.
다들 일사불란하게 자신의 일을 찾아 움직였다. 이건 세상 어떤 일보다 최우선적으로 처리할 사안이다. 보스의 모친을 모시는 일. K 미르 그룹의 숨겨진 모든 힘이 한국으로 집중되었다.
“대사, 갑자기 웬일이십니까?”
“장관님, 이번 유엔 총회에서 북한의 인권 문제를 다시 거론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대북 제재를 한층 더 옥죌 생각입니다.”
“예……?”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한국의 인권 실태가 어떤지 국가적으로 점검해 주시길 바랍니다. 괜히 빌미를 잡히면 안 되니까 말입니다.”
“당연한 말씀, 이제 한국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래로 인권에 대해서는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그동안 미루고 있었던 비전향 장기수를 조건 없이 북한으로 보냈지 않습니까?”
“네,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끝까지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지 않겠다면, 보내 줘야죠. 자신들이 북한에 가 보면, 정신 차릴 겁니다.”
“네, 대한민국은 건강합니다. 인권 문제 따위 없습니다.”
“그런데…….”
“네, 대사. 뭐… 짚이는 부분이라도 있습니까?”
“한국 일부 병원에서 아무 근거도 없이 사람을 가두는 경우가 있습니까?”
“웬걸요! 절대 불가능합니다. 물론, 일부 정신병원에 그런 환자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건 본인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정상적인 병원이라면 그런 일, 없습니다.”
“그래요? 장관님 말씀을 믿겠습니다.”
뜬금없이 방문한 미국 대사와 외교부 장관의 대화가 야릇했다.
“최 간호사, 여긴 웬일이야?”
“응, VIP 병실이 어떤지 한번 보고 싶어서.”
“흐응, 여긴 완전 별세계지. 의사 선생님들도 출입 허가 없는 분들은 못 들어와.”
“부럽다. 나는 언제 이런 곳에 배치받아 보나?”
“꿈 깨셔, 여기 배정된 간호사들은 다 에이스라고. 그리고 비밀 엄수 각서까지 써야 하는걸.”
“그래도 수당이 세잖아? 일반 병동 간호사에 비하면 거의 두 배 이상이라며?”
“호호호, 그렇긴 하지. 또 간혹 VIP 환자들에게 거액의 수고비가 나올 때도 있고.”
“기집애, 동기 좋다는 게 뭐냐? 구경시켜 주라. 응? 내가 저녁 근사하게 살 게.”
“으, 응… 뭐, 그렇다면야. 그 대신 입도 벙긋하면 안 된다. 여긴 진짜 보안을 철저하게 지키거든. 저기 병실 복도에 진치고 있는 보안 요원들 보이지? 모른 척 내 뒤만 따라와. 여기 배정받은 것처럼.”
VIP 병동 당직 간호사는 일반 병실 간호사로 있는 동기와 함께 각 병실을 방문했다. 주기적으로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는 건 자연스러운 업무였다.
“잠깐, 처음 보는 분이시네요?”
“아, 오늘 근무 바꿨어요. 신경 끄세요, 덩치 씨.”
“출입증 확인 좀 할게요.”
“아! 씨… 광호 씨, 내가 알아서 한다니깐.”
“…….”
“휴가 계획이나 잘 짜요. 광호 씨는 너무 융통성이 없어.”
VIP 병동 중에서도 특별 관리 하는 병실 앞에서 제재를 당한 두 간호사. 하지만, 보안 요원과 연인 사이로 보인다. 가볍게 제치고 들어섰다.
“이 병실은 정말 화려하고 특별하다.”
“응, 나도 몰라. 이 환자는 약간 정신이 왔다 갔다 하거든. 그런데 24시간 관찰 대상으로 지정되어 있어. 제일 비싼 곳에 입원한 걸 보면 어디 재벌가 같아. 드라마에 많이 나오잖니?”
“덕분에 호강한다, VIP 병동에 다 들어와 보고. 나중에 근무 교대하면 내려와, 약속대로 한턱 쏠게.”
일반 병동으로 내려온 간호사는 작은 비닐에 넣은 머리카락 몇 올을 봉인한 후 비상계단으로 들어섰다.
“여기요, 떨려서 혼났어요.”
“감사합니다, 간호사님.”
“혈액 채취는 도저히 불가능해요. 그래도 이 모근만 있으면 친자 감별은 될 거예요.”
“환자 파일은 못 구하셨나요?”
“여기, 핸드폰 만지는 척하면서 찍었거든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계좌 확인해 보세요. 오천만 원 입금되었을 겁니다.”
“어머어머? 너무 많아요.”
“그 대신 절대 비밀입니다. 명심하세요.”
삼송의료원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삼송의료원이 생긴 이래로 이런 난리가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여긴 병원입니다.”
“여기 병원인 건 알아요. 그런데 미합중국의 국민이 여기 있잖아요? 적법한 절차에 의해 미합중국은 자국민의 신상을 확보하러 왔습니다.”
“우리 의료원에는 외국인들도 많이 입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미국인을 말하는 겁니까?”
“흠… 그래요? 여기 19층 VIP 병동에 제니퍼 박이라는 분이 입원하고 계시지 않나요?”
“제니퍼 박? 우리 의료원에 그런 분, 없습니다.”
“아닌데요? 한국명 박혜선, 미국명 제니퍼 박, 이분이 분명 19층 VIP 병동에 입원 중일 텐데요?”
옥신각신, 병원 로비가 시끄러웠다. 병원의 보안 책임자와 부원장까지 나와서 막는 상황이다. 환자의 존재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한 쪽은… 주한 미국 대사관의 대사, 본인이다.
막무가내로 밀어낼 일반인이 아니라 미국을 대표하는 사람이 직접 나선 것이다. 자국민이라고 주장하면서, 미합중국 여권과 시민권까지 내밀면서.
경찰을 부를 일도 아니다. 경찰이 출동하면 더 우스워진다. 결국 원장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안 돼, 대사가 아니라 미국 대통령이 와도 안 돼. 그런 환자, 우리 의료원에 없어요. 돌아가시오, 더 소란 피우면 경찰을 부를 거요.”
여기서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삼송의료원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오! 원장님, 고마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 검사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대한민국 법상 필요할까 봐 당연히 영장도 받아 왔죠.”
“…….”
“아! 착각하실까 봐 말하는데, 귀국의 외무 장관에게도 통보했어요. 인권에 대해서 귀국은 너무 완벽한 나라입니다.”
금단의 열매를 감춘 비밀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