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140화 (140/150)

140화 어머니, 나의 어머니

“당했다. 진짜 무서운 놈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간을 본다는 게 오히려 핵심 정보만 흘린 꼴이 되었습니다.”

“아니, 사전에 거기까지는 공개하기로 했잖나? 수하의 잘못은 장수의 책임이다. 자책하지 마라.”

“……!”

“박혜선 씨는?”

“현도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철통처럼 지키고 있습니다.”

“훗, 대사관 직원이 아니라 CIA 요원이겠지.”

“네, 회장님. 그렇게 보는 게 타당합니다.”

“겨우 이틀 만에 유전자 검사에, 미국 시민권과 여권을 준비한 채 미국 대사를 앞장세웠어. 더 놀라운 건, 미국 대사가 외교 장관에게 에둘러 엄포까지 놨다는 거야. 치밀해. 한 치도 오차가 없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기다린다. 김시혁의 입장에서는 생모를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할 일을 한 것이야. 그렇다고 우리가 잘못한 건 없다. 떳떳하게 약속한 날에 방문하자.”

이게 삼송 회장의 진면목이다. 급습을 당해 조커를 뺏겨 버렸는데도 전혀 당황한 모습이 아니다. 아무나 회장 하나?

“그나저나, 참 순발력 대단해. 미리 외무 장관에게 인권을 핑계로 약을 쳐 놓고 검찰을 움직여 영장까지 받았다? 꼼짝 못하고 당했어. 하하하.”

“회장님, 통쾌하게 웃으실 일이 아닙니다.”

“나는 말일세. 김시혁이 미우면서도 존경스럽네. 번개처럼 해치우는 이 과감한 결단력. 영웅은 영웅이야. 하하하.”

거짓이 아니었다. 비록 승부에서 밀렸다 하나, 자신은 떳떳하다. 9회말 투 아웃이 되어도 완전히 끝난 게 아니다.

김시혁이라면 다를 것이다. 아니, 달라야 한다. 그는 영웅이니까.

아까부터 깜빡이는 핸드폰. 그제서야 상념에서 깨어난 이건호는 전화를 받았다. 자신의 직통 번호를 아는 사람, 몇 안 된다.

“네, 이건홉니다.”

[이 회장, 미국이오?]

“아, 아, 네. 대통령 각하. 미국입니다.”

한 번은 욕먹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담담하게 받자.

[귀국하면 칼국수나 한 그릇 합시다.]

“네, 각하. 그러겠습니다. 심려를 드려 송구합니다.”

[뭘? 김시혁이? 대충 들었어요. 상당히 안 좋은 관계 같은데… 고래끼리 충돌하면 새우들 내장 다 터집디다. 그래도 대왕 고래라고 하는 흰수염 고래는 피하는 게 상책 아인교? 지구 역사상 제일 큰 동물이라 카던데?]

“네, 맞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돌고래는 살려면 흰 수염을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어서 걱정입니다.”

[그라지 마소. 둘 다 한국이 낳은 영웅들. 나는 마 서로 잘 지냈으면 좋겠소.]

“그러려고 미국까지 와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이제 공은 흰수염 고래에게 넘어갔습니다.”

[내가 김시혁이를 쪼매 압니다. 노태후한테 내를 적극적으로 푸시 해 준 사람도 시혁이라요. 글마는 돌아가는 거 벨로 안 좋아합디다. 쫑코를 먹더라도 면전에서 칼을 뽑으면 차라리 봐줄 거요. 그런 놈이라요.]

“…….”

[참, 그때 빚, 다 갚았다고 한 거 기억하이소. 내는 빚을 갚지 않으믄 웬지 뒤통수가 따끔거려서…….]

“네, 각하. 명심하고 있습니다.”

[왜 내가 안 봤는지 아는교? 이상하게 찝찝하더라고. 결국 채점은 답안지를 본 심사 위원 몫인기라요. 잘하실 거라 믿십니다.]

“…네, 절대 각하께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제 책임입니다.”

정치 9단과 경제 9단의 대화가 끝났다.

김양삼은 행여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도록 경고한 것이다. 안기부의 봉인된 파일을 열어 준 것은 자신이니까.

무섭다.

대한민국의 대통령도 두려워하는 존재. 미국 대통령이 전용기를 내어 주는 유일한 사람. 미국 GDP를 능가하는 자금조차 마음대로 꺼내 쓰는 괴물.

그는 이미 유럽의 경제 주권을 한 손에 거머쥐었다. 그의 다음 행보에 전 세계가 주목하는 상황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이 할 일을 다 해 놓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게 정도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이건호의 표정이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 * *

넓은 병실에 사람이 꽉 찼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꽤 시간이 흘렀지만 감히 앞으로 나서는 이도, 말을 꺼내는 이도 없었다. 모두 병상에 누운 한 여인과 그 손을 잡고 있는 한 사람의 등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침묵을 깬 사람은 현도 그룹의 정조영 명예회장.

“험, 험, 시혁아, 좀 쉬어라. 벌써 몇 시간째 그러고 있는 게냐?”

“네, 할아버지.”

“답답하겠지만, 여기 의료진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곧 정신을 차리시겠지.”

“네.”

이분이 내 생모, 나를 낳아 준 분이셨구나.

처음 마주했을 때, 시혁은 한 눈에 알았다. 가슴이 ‘쩡’ 하고 깨지는 느낌, 숨이 가빴다. 심장이 제어가 안 될 정도로 뛰고 있었다. 펑 하고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시혁은 자신이 어머니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이 너무 아프게 눈에 박혔다.

그냥 아무 말없이 손을 잡아 드렸다.

아… 이 온기, 이 따뜻함, 이 피의 끌림.

억지로 눌러 참았다. 대성통곡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죽을 힘을 다해 참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시혁이 손을 잡고 눈을 맞춰도 여전히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낯선 이를 대하듯.

그게 너무 서러웠다. 26년 만에 만났건만… 아들을 못 알아보는 내 어머니.

왜 나를 버렸는지, 왜 이토록 정신 줄을 놓고 있는지. 어머니가 입을 열지 않는 한 알 길이 없다.

“그래, 차라리 우리가 나가세. 둘만의 시간을 갖도록 두는 것이 좋겠어. 어여 다 나가자고.”

정조영의 말에 따라 모두 병실을 나섰다. 그래도 시혁은 움직이지 않고 손을 부여잡은 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마치 그 손을 놓으면 다시 못 볼 것처럼.

‘어머니, 괜찮습니다. 다 이해합니다. 그냥 아들의 애절한 마음 한 토막만 알아주세요.’

얼마나 고초를 겪으셨을까? 겨우 56살인데, 마치 70대 노인을 보는 것만 같다. 뼈에 살가죽만 씌워 놓은 미이라 같은 형상의 어머니를 보면서, 시혁은 피눈물을 삼켰다.

시혁도 백정이 아버지라고 밝힌 이효수 박사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알고 있었다. 천재를 뛰어 넘는 천재. 한국이 낳은 물리학계의 거성.

생존하고 있었다면 노벨상은 당연히 수상했을 것이다. 노벨상은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상을 주지 않는다. 이효수 박사의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상을 수상한 학자가 한둘인가?

끝까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던 애국자였으나, 1967년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서 돌연 미국 국적을 취득해 버린 점이 의문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교통사고로 사망하기까지 다시는 한국을 찾지 않으신 것으로 알고 있다.

가만!

1967년. 시혁은 1968년생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한국에 일시 귀국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났다면, 두 분이 불 같은 사랑을 했다면, 내가 태어난 것이 이해된다.

왜 아버지는 어머니를 두고 홀로 귀국하셨을까? 백정의 말대로 중앙정보부의 공작이 개입된 것이 맞을까? 왜 중앙정보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갈라 놓았을까? 아버지는 왜 어머니를 돌보지 않으셨을까? 이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생을 이어 가도록.

모든 게 모호한 연기처럼 숨어 있다. 슬쩍슬쩍 고개를 내밀고 있으나 아직 진실은 드러난 것보다 감춰진 것이 훨씬 더 많고 많다.

어차피 어머니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

지금은 어머니의 건강이 제일 문제다. 서두르지 말자. 미국으로 돌아가면 진실의 열쇠를 들고 있는 사람이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 *

조문호는 갑작스럽게 대리 진급 임명장을 받고 기뻐 죽을 것만 같았다. 모로 돌아가도 서울만 도착하면 되는 거 아닌가? 같이 입사한 동기들은 겨우 말단 사원으로 바닥을 기고 있지만, 자신은 벌써 대리를 달았다.

또 꿈에 그리던 미국 지사 발령까지. 더 이상 좋을 수 없지. 이제 출세의 탄탄대로를 달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조문호.

그렇게 도착한 뉴욕. 전 세계 직장인들이 바라 마지않는 근무지다. 드디어 나도 뉴요커가 되는구나. 여기서 몇 년 있다가 금의환향하면 떡 하니 과장이다.

회사에서 마련해 준 숙소는 널찍했다. 삼송 같은 대기업은 회사의 체면을 생각해서 직급보다 한 단계 위의 숙소와 체류비를 준다. 월급은 손댈 필요가 없을 정도다. 흐흐흐.

지사장은 조문호의 발령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다만, 찝찝한 것은… 당분간이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비서실 차명진 대리와 같이 있으라는 것.

백정태 팀에 배속된 이래로 찬밥 취급을 받을 때도 차명진 대리는 웬지 꺼려졌던 조문호. 미국까지 와서도 그와 같이 생활하는 것이 너무 싫었으나 도리가 없었다.

“큰 방은 제가 써도 되겠죠? 차 대리님은 곧 귀국하신다면서요?”

“편한 대로.”

“…그럼 제 짐을 풀겠습니다. 차 대리님은 짐도 없으시네요?”

“귀찮아서.”

“그런데, 미국에 먼저 오셨는데 그동안 어디 근무하시다 뉴욕으로 발령난 겁니까?”

“플로리다.”

“우와! 그 마이애미 비치가 있는 곳, 팔 등신들이 비키니만 입고 다닌다는 거기 아닙니까?”

“조문호 대리, 입 좀 닫으면 안 될까? 안 피곤해?”

“……!”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한 명은 철부지에 운 좋게 미국으로 온 놈, 한 명은 안기부 송무처장의 약쟁이 아들을 감시하다가 대사관에 구금까지 당한 처지.

이젠 또 조문호를 감시하라고 하자, 차명진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제기랄, 내 팔자 더럽게 꼬이네. 이젠 백정 형님은 얼굴도 안 보인다. 천상계에서 회장님하고 같이 노는 신분이 되었으니, 나는 보이지도 않겠지.’

낙담한 차명진과 신이 난 조문호는 사뭇 달랐다.

“조 대리, 아까 음식 시킨 거, 아직 안 온다. 독촉해 봐.”

“네. 차 대리님, 여기 레지던스는 호텔보다 서비스가 더 좋다고 인터넷에 나와 있더라고요. 죽이지 않습니까?”

“아… 그 입 닥치고, 음식 독촉이나 하라니까.”

“예…….”

독촉할 필요가 없었다. 초인종 소리가 났던 것이다.

영어가 서툰 차명진 대신 조문호가 시킨 음식이 도착한 모양이다. 문을 열려는 조문호를 제지한 차명진은 다가가 문에 뚫린 보안경으로 밖을 살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나름 차명진도 프로다.

이상 없다. 문 밖에는 단정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레지던스 직원이 빙긋 미소 짓고 있었다.

차명진은 체인을 풀고 현관문을 열었다. 조문호의 약빤 소리를 들어 줄 바에는 대충 먹고 잠이 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 왁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여전히 빙긋 웃고 있는 제복 차림의 직원.

총? 당연히 일련번호가 지워진 암시장 글록을 가지고 있지만… 뒷춤에서 뽑기 전에 벌집이 될 판이다. 새 됐다.

상대방은 이미 알고 온 것이다. 와락 들이닥친 다섯 놈 모두 차명진만 겨누고 있었다. 조문호는 없는 놈처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Don't move! If you don't want to get a hole in the wind.”

“X발,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저… 차 대리님, 바람구멍 나기 싫으면 움직이지 말라고 하는데요?”

그때 상상도 안 했던 사람이 한 명 더 나타났다.

빼꼼 고개만 내밀고 안을 살피던 그 사람은 안으로 들어와서도 집구경을 하듯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조문호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잘 있었어요? 조문호 선배님.”

“네, 네, 네가 어떻게?”

“됐고, 그쪽이 감시자로 붙은 사람인가 보네? 조용히 계실래요? 아니면, 끽!”

차명진을 향해 장난스레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이… 박하송이었다.

“아저씨, 나는 아직 사람 죽는 것도 본 적이 없는데, 저분들은 조금 달라요. 저기 구석에 찌그러져 있으면…… 괜찮을 거예요. 언더스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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