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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4화 (15/222)

14. 살아 계십시오

그레이는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지, 앞발을 이리저리 허우적댔다.

이안은 침을 꿀꺽 삼키며 성검을 뽑아냈다.

“……크워.”

쿵!

그레이의 거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아무리 100년 묵은 괴수라도, 머릿속을 헤집으면 버틸 도리가 없었다.

“어, 이겼다.”

“그럼…… 산 건가?”

“사, 살았다!”

그레이가 쓰러지자, 용병들과 상인들은 그제야 환호성을 내질렀다.

산적과 괴수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는 꼼짝없이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살아남았다.

용병들은 기적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기적을 일으킨 게 에스테반과 이안이라 생각했다.

“기사님! 정말 대단했습니다! 혼자서 전장을 휘저으시다니!”

“종자님도 굉장했어.”

“감사합니다! 둘 다!”

용병들의 칭송에 에스테반은 코피를 닦아냈다.

평소와 비교해서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아이고 머리야. 죽을 맛이군. 그래도 오늘 밤의 전투는 굉장했다. 장담컨대, 앞으로의 내 인생을 통틀어도, 오늘의 모험은 세 손가락 안에 들 거다. 물론, 그 모험담에는 너의 이름이 함께 올라갈 거다. 스콰이어 이안.”

에스테반은 멍하니 서 있던 이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기분이 어떤가? 네가 그 공포스러운 레지스 산맥의 폭군을 마무리 한 거다.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저는 에스테반 경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올렸는데요 뭘.”

“하하.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도 네 업적이 갖는 의미가 퇴색되는 건 아니다.”

이안은 성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직 손에 남아 있는 묵직한 감각을 기억했다.

“그러게요. 제 손으로 이렇게 무언가 대단한 걸 이루어 내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28년 인생 통틀어서…….”

“음? 28년?”

“…….”

시작의 마을에서 제이드를 상대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위업.

대단한 걸 해냈다는 짜릿한 성취감.

그 생소한 감각에, 이안은 성검을 쥐고 가만히 서 있었다.

“뭐, 다수의 운이 따라주기도 했으니까요.”

이안은 상념을 떨쳐내고, 그레이의 사체로 다가갔다.

커다란 곰은 분명 숨을 거뒀지만, 왠지 지금이라도 다시 일어날 것만 같아 모골이 송연해졌다.

물론, 무섭다고 이대로 내버려 두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여기서 웅담을 빼내야 하는데…….’

포식자 그레이의 웅담.

먹으면 근력이 크게 상승하는, 사실상 히든 피스와 다름없는 물건.

‘이걸 어떻게 해체하지.’

게임이었으면 그레이를 쓰러트리면 ‘웅담’ 아이템이 저절로 드랍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직접 해체해야 했다.

“해체를 하려면, 역시 에스테반 경이 다시 한번 검광을 뿜어내야겠는데요?”

“농담하지 마라. 검광이라는 건 그렇게 원한다고 쫙쫙 뽑아낼 수 있는 게 아니야.”

이안도 검광이 얼마나 고등 기술인지 잘 알았다.

검술의 높은 경지에 올라야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

아직 이안에게는 까마득히 먼 얘기였다.

“웅담을 빼내야 하는데 곤란하네요.”

“제가 하겠습니다.”

곤란하던 차, 길을 안내했던 사냥꾼이 앞으로 나섰다.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저희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을 겁니다. 그 은혜를 갚게 해주십시오.”

“저야 해주면 감사하긴 한데, 이 놈의 가죽이 두꺼워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검광으로나마 겨우 베어낼 수 있던 가죽이다.

사냥꾼이 들고 있는 단도로는 해체하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사냥꾼은 결연한 얼굴로 가슴을 두드렸다.

“반평생을 해오던 일입니다. 꼭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음. 그렇다면, 일단 쓸개만 생으로 빼내 주세요.”

옆에서 보고 있던 스텔도 한마디를 얹었다.

“기왕이면 가죽도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손질해서 깔끔하게 팔면 작지 않은 돈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천상 상인인 스텔의 주문에 사냥꾼은 더더욱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결연하게 말한 사냥꾼은 그레이의 목 부분에 벌어진 상처를 시작으로, 차츰차츰 해체를 시작했다.

단도를 숫돌에 갈아 날카롭게 만들고, 가죽을 톱질하듯 썰자. 질긴 가죽도 느릿하게나마 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구경하던 스텔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참 긴 밤이었습니다. 솔직히, 전부 죽는 줄 알았어요.”

용병들에게서 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아니면 오늘 본 활약상 때문인지.

스텔은 예전보다 더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전부 살아남았으면 좋았겠지만요.”

난전 속에서 용병과 상인이 서너 명 죽고, 몇 명은 상처를 입었다.

그 사실에 이안은 찝찝함을 느꼈지만, 스텔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 이상 나은 결과는 나올 수 없었습니다. 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어요.”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용병이나, 상행을 나서는 상인이나. 언제고 죽음을 각오하는 법입니다.”

“......남의 돈 버는 게 참 쉬운 일이 아니네요.”

“그 표현, 마음에 드는군요.”

이안도 돈을 번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았다.

돈이 가진 무서움을 이안 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스텔은 조금씩 해체되어가는 산맥의 폭군을 쳐다보며 주제를 바꿨다.

“포식자 그레이에 대한 소문은 저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현상금도 걸려 있으니, 용병 길드에 가면 꽤 큰돈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저놈의 가죽은 저희에게 판매하지 않겠습니까? 값은 후하게 쳐 드리겠습니다.”

상품이 상품이니만큼. 스텔은 제대로 소문을 내고, 경매를 열어 그레이의 가죽을 판매할 거라 밝혔다.

그 모든 과정을 준비하는 데에 상당히 많은 시간이 들 것은 당연지사.

이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격만 제대로 쳐주신다면야. 저야 거절할 이유가 없죠.”

그레이의 가죽은 분명 좋은 재료 아이템이긴 했지만, 가공하는 데에 그만큼 많은 품이 들기도 한다.

한 푼 한 푼이 아쉬운 이안은 미련 없이 가죽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사냥꾼이 그레이의 사체에서 쓸개를 빼내는 데에 성공했다.

“빼냈습니다!”

“으으. 징그러워.”

“아직도 움직이고 있잖아.”

그레이가 죽은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 녀석의 장기들은 펄떡펄떡 뛰고 있었다.

사냥꾼은 씨익 웃으며 꾸물거리는 검은색 쓸개를 내밀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먹어야죠. 생으로.”

“예? 생으로요?”

“벌레 같은 게 들어있을 수도 있는데…….”

구경하던 용병들이 기겁했다. 그만큼 쓸개의 비주얼이 너무 징그러웠다.

이안도 조금 주저했다.

익혀 먹는 게 낫지 않을까도 잠깐 생각했지만, 결국 생으로 먹는 걸 선택했다.

‘게임에서는 그레이를 사냥하자마자 웅담이 아이템으로 드랍 되었으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익혀 먹는 건 아니었을 거야.’

이안은 사냥꾼에게서 쓸개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 에스테반에게 물었다.

“경. 함께 나눠 먹죠.”

“음?”

“100년을 살아온 곰의 쓸개입니다. 그 자체로 천혜의 영양제겠죠. 먹어서 후회할 일은 없을 겁니다.”

“흠…….”

에스테반은 표정을 찌푸렸다.

미치광이처럼 사는 그도, 아직 살아 움직이는 쓸개를 생으로 먹는 건 꺼려지는 모양.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옛 전사들은 죽인 상대의 내장을 생으로 먹었다고 하더군. 그렇게 하면 상대 영혼의 일부를 자신이 거둘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 생각하면 이건 생 내장을 씹는 역겨운 행위가 아니라, 숭고한 전사의 의식이라 볼 수 있겠군.”

“아, 예.”

“이리 주게 스콰이어 이안.”

에스테반은 능숙한 솜씨로 쓸개를 반으로 갈랐다.

한 쪽이 다른 쪽에 비해 미묘하게 컸는데, 에스테반은 망설임 없이 이안에게 더 큰 쪽을 내밀었다.

이안은 쓸개를 건네 받아 생으로 씹었다.

[으윽. 어떤 맛인가요 이안?]

‘질기고, 쓰고, 뭔가 역겨운 맛이네요. 그래도 생으로 벌레를 씹어 먹던 때를 생각하면 충분히 먹을만해요.’

뜨끈한 기운이 위장을 시작으로 점점 몸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이안은 땅을 부여잡고 가쁜 숨을 토해냈다.

그렇게 숨을 고르길 한참. 마침내 뜨거운 기운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고, 몸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안은 이마에 잔뜩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투덜거렸다.

‘후우. 죽는 줄 알았네. 이래서 한약 같은 건 함부로 먹는 게 아닌데.’

어쨌든 몸이 엄청나게 뜨거워졌었으니, 기생충 같은 것도 다 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얼마나 변했나 시험이나 해볼까?’

적당한 대상을 물색하던 이안은 근처에 서 있던 소나무의 줄기를 발견했다.

“흐읍.”

이안은 주먹을 거두며 숨을 들이켰고, 이내 앞을 향해 힘껏 주먹을 뻗었다.

쿵!

주먹에 직격당한 소나무가 크게 흔들렸고, 매달려 있던 솔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소나무가 부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줄기의 겉껍질에, 주먹 모양으로 으깨진 자국이 남았다.

“워우.”

구경하고 있던 용병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미 이안의 근력은 평범한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한 용병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도 쓸개 조금만 달라고 할 걸.”

“응…….”

이안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려웠던 전투.

그리고 그에 걸맞은 보상.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

그 뒤로 상단은 무사히 레지스 산맥을 넘었다.

이미 습격할 산적단은 남아 있지 않았고, 그레이의 사체가 풍기는 냄새에 괴수들도 알아서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산을 넘고, 길을 따라 이동하길 열흘.

일행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드디어 보이는군.”

에스테반은 저 멀리 해안가에 지어진 도시를 가리켰다.

짙푸른 바다에는 다양한 깃발을 꽂은 상선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카스크 내해. 상당히 오랜만이네요.]

카스크 내해는 둥그런 모양으로, 바다 대부분이 육지에 둘러싸여 있다.

언뜻 보면 커다란 호수로 보일 정도.

하지만 대양으로 통하는 좁은 길이 나 있었기에, 엄연히 바다였다.

‘저기가 바로…….’

카스크 내해의 한복판에는 커다란 섬이 있다.

그리고 섬 위에는 대륙 제일의 교육기관이자, 이안의 목적지인 코르디스가 자리해 있다.

‘드디어 도착했네.’

이안은 새삼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저 멀리 섬을 쳐다보았다.

마찬가지로 바다에 떠다니는 상선을 보며 서 있던 스텔이 입맛을 다셨다.

“쩝. 원래도 이 근방은 나름 중요한 해상 교역로로 사람들이 북적이던 곳입니다. 한데, 요즘 들어 더더욱 사람들이 몰려들더군요.”

“뭐 축제라도 하나요?”

“아뇨. 그건 아니고. 몇 해 전부터 이 근방에서 청어가 잡히기 시작했다 하더군요.”

청어는 추운 바다에 사는 물고기다. 원래 북해에서나 잡히는 물고긴데, 그런 청어가 카스크 내해 근방에서 잡힌다는 의미는 간단했다.

“바다가 좀 더 차가워진 게 아니냐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해 주변 도시들은 연일 밀려오는 금화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답니다. 우리 상단도 미리 어업에 한 발 걸쳐야 했는데…… 허허.”

스텔은 어지간히도 배가 아픈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지극히 상인스러운 대화에 이안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가 차가워진다라.’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이 또한 훗날 있을 사건들의 전조일까.

잡담을 나누는 사이. 상단은 도시로 들어섰고, 마침내 이별의 시간이 왔다.

“종자님과 기사님이 아니었으면, 저희는 지금쯤 레지스 산맥 어딘가에 묻혀 있었을 겁니다. 역시, 두 분은 반가운 손님이 맞았네요.”

그리 말하며 스텔은 보수와 그레이의 가죽값까지 건네주었다.

용병들은 하나하나 찾아와 이안에게 목숨을 빚진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했다.

특히 대머리 용병 스튜어트는 너무 고맙다며 눈물까지 흘렸다.

이안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메리와 함께 잘 살라며, 스튜어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마지막으로, 에스테반은 의뢰 보수와 현상금, 가죽값을 정확히 반으로 나눈 뒤, 말했다.

“수고 많았다. 스콰이어 이안.”

“수고는요 뭐…….”

“나랑 같이 계속 다닐 생각은 없나? 나는 널 세상에서 두 번째로 위대한 기사로 만들어줄 수 있어.”

“첫 번째는 경인가요?”

“물론!”

이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에스테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더 권유하지 않았다. 대신, 이안의 손에 목걸이 하나를 쥐여 주었다.

하얀 방패에 롱소드가 겹쳐진 문양이 새겨진 목걸이였다.

“이건……?”

“만약 우리 가문의 도움이 필요할 일이 생기면, 그걸 내밀어라.”

에스테반은 스스로의 가문을 자랑스러워하지만, 그 가문에 손을 벌리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런 에스테반이 건넨 가문의 문양이다.

이안은 그 안에 들어있는 마음의 깊이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고개를 숙이는 이안의 어깨를 에스테반이 가볍게 두드렸다.

“스콰이어 이안. 진정으로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해라. 원치 않은 일을 억지로 해봤자, 그 끝에 남는 건 후회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경.”

“다음에는 이안 경이라 부를 수 있기를 바란다.”

“경도…….”

이안은 주저하며 말했다.

“경도 다시 만날 때까지 꼭 몸 건강히 살아 계십시오.”

“하하! 죽음이 내 뒤를 쫓아오면, 레이야드를 타고 도망치면 될 뿐이야. 나중에 만나, 술이나 한잔하지!”

“……그건 싫습니다. 절대로.”

“하하. 이 친구, 좋으면서 튕기긴. 가자, 레이야드!”

“푸르르!”

레이야드는 기다란 꼬리로 이안의 볼을 슬쩍 치고, 터벅터벅 북쪽으로 걸어나갔다.

이안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에스테반은 어느 순간, 게임에서 모습을 감춰요.’

플레이어와 함께하면, 에스테반은 반드시 죽는다.

플레이어와 함께하지 않으면, 에스테반은 어느 순간 게임에서 사라진다.

아마 죽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겠지.

결국, 에스테반의 미래는 썩 밝지 않았다.

‘워낙 위험한 곳만 들쑤시고 다니니까.’

그래도 이안은 에스테반이 죽지 않길 바랐다.

저 바보 같고, 머리에 나사가 반쯤 풀리고, 낮에는 과격하고 새벽에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지만, 그래도 정의로운.

저 미치광이 기사가 죽지 않길 바랐다.

진심으로.

‘언젠가 다시 볼 수 있겠지. 그때는, 죽게 하지 않겠어요.’

에스테반과 레이야드가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던 이안은 고개를 돌려 걷기 시작했다.

하나의 여정이 막을 내렸으니, 이제 다음으로 넘어갈 때였다.

코르디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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