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6화 (17/222)

16. 한목숨 더 줄까

열이 잔뜩 오른 것과는 별개로, 이안은 이 귀족 사내의 행패를 도저히 넘길 수가 없었다.

‘만만하게 보면 잡아먹으려 들겠지.’

요 1년간 이안이 몸으로 배웠던 교훈.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이안은 얕보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이네스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일어선 이안을 엄중히 꾸중했다.

[말은 영혼의 일부고, 그 사람이 하는 언행이 곧 그 사람을 대변하는 법이죠. 앞으로는 주의하세요, 이안.]

‘지금은 일단 제 걱정부터 해야 할 때 아닌가요?’

[저런 난봉꾼한테 이안이 질 리가 없잖아요?]

이네스가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하자, 오히려 민망해진 건 이안이었다.

‘뭐, 여기 있는 것 자체가 급있는 귀족은 아니라는 거니까요.’

만약 고위 귀족이었다면 이곳에 와서 직접 입학 신청을 넣지도 않았으리라.

그저 그런 기사 가문이나 하찮은 작위의 귀족, 혹은 반쯤 몰락한 집안일 터.

‘원래 졸부들이 더 돈 자랑을 하고 다니는 법이니까요.’

게다가 여기는 비록 학사와 떨어져 있다고 해도, 엄연히 코르디스 안이었다.

이안이 급 낮은 귀족을 들이받는다고 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것.

그런 계산하에 이안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사내의 얼굴을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감히…… 네 까짓게…….”

평민이 자신에게 검을 뽑으라 한 게 그렇게 모욕적이었을까.

사내는 이글거리는 눈길로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직원들, 평민들, 귀족들. 그 모두가 자신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절대 거절 못 하지.’

저토록 자존심이 센 사람이다. 평민과의 대결이 무서워서 도망쳤다는 오명이 생기는 건 죽기보다 싫을 터.

결국, 사내는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지금 내게 결투를 신청한 거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결투를 하다가 부상을 입으면, 나는 입학 시험에 불이익이 될 수도 있다. 애초에 가진 게 없는 너희들이랑은 달라. 그런 내가 결투를 해서 얻는 이득은?”

‘어쭈?’

이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무 생각 없이 들이박는 놈인 줄 알았더니, 제법 머리가 굴러가는 모양이었다.

이안은 곧바로 사내의 말에 반박했다.

“네가 아까 씨부린 얘기, 자세히는 못 들었는데. 대충 우리는 안 될 놈들이라며. 그 안 될 놈들과 싸우다 부상을 입을 정도라면, 너도 그냥 진즉에 포기하는 게 낫지 않겠어?”

“하…… 내 말을 증명하라 이건가? 좋…….”

“두 분만 괜찮으시면,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갑작스럽게 끼어든 목소리에 좌중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그곳에 있는 건 아까부터 주위를 싱글거리며 구경하고 있던, 눈이 쫙 째진 사내.

눈치 빠른 이들은 그 사내 역시 귀족이란 걸 알아챘다.

‘말하는 억양이 고급스러워. 일단 평민은 아니다.’

이안에게 시비를 걸던 사내 역시 그 점을 깨달았는지,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

“혹시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제 소개를 아직 안 했군요. 저는 헤더 페어윈드라고 합니다.”

“페어 윈드……!”

이 도시의 이름과 똑같은 페어윈드. 그 말은 이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의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상대가 생각보다 더 거물이라는 걸 깨달은 귀족들이 서둘러 예를 표했지만, 헤더는 싱글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원래는 그냥 적당히 관망만 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면 미래의 후배님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군요.”

“당신도 코르디스의 학생입니까?”

이안의 당돌한 질문에 헤더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작년에 입학해서 이제 2학년을 앞두고 있어요.”

“처음 뵙겠습니다. 선배님. 이안이라고 합니다.”

이안은 이네스가 시키는 대로, 헤더에게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껄렁거리던 이안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자, 헤더도 살짝 당황해 입꼬리를 씰룩였다.

“흠흠. 만나서 반가워요. 이안 씨. 어쨌든, 두 분이 괜찮으시면 제가 도움을 좀 드려도 될까요?”

“도움이요?”

“예. 연무장을 내어드리죠. 제가 심판도 봐 드릴 거고요. 그리고 진검으로 싸우면 위험하잖아요? 목검도 내어드릴게요.”

“하지만…….”

이안의 옆에서 눈동자만 굴리던 사내가 반발하려고 했지만, 헤더는 손바닥을 척 내밀었다.

“그만. 서로의 목숨을 뺏는 결투는 교단에서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곳이 코르디스라 하나, 또한 페어윈드의 영토 안.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사내는 더 반박할 수 없었다.

이곳은 페어윈드고, 페어윈드에서는 페어윈드의 법을 따라야 한다.

사내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목검으로 결투를 하도록 하죠. 어차피 결과는 변하지 않으니.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예. 사실 이 결투는 저에게 아무런 득이 없습니다. 제가 이기는 게 당연하기 때문에, 이긴다고 해도 명예를 얻지도 못하겠죠.”

“흐음.”

“그러니, 제안하겠습니다. 제가 이 결투를 이기면, 저기 있는 평민 참가자들은 그대로 신청하지 않고 돌아가는 거로.”

갑자기 불똥이 튕기자, 참가자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그런.”

“갑자기 우리는 왜…….”

사내는 그런 반응들을 무시하며, 꿋꿋이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이번 결투는, 결국. 평민과 귀족의 차이를 보여주게 되겠지요. 대표로 나온 이 검은 머리 놈팽이가 형편없이 깨진다면, 다른 놈들은 더 볼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얌전히 돌아가는 게 낫죠. 저는 제 모교가 될 코르디스에 저 무능한 놈들이 잠시라도 발을 들이는 걸 용납할 수 없습니다.”

“흠. 대충 어떤 의민지 알겠군요.”

페어윈드는 고개를 돌려 다른 참여자들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에 반박하실 분이라도?”

“맘에 안 들면 이놈 다음에 나랑 결투하면 된다. 아니면 한꺼번에 덤벼도 되고. 어차피 나를 못 넘으면 입학이고 뭐고 없어.”

다 대 일로 덤비라니.

사내의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태도에 참가자들은 분한 얼굴로, 눈동자만 굴렸다.

불합리한 상황임을 알아도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차마 사내에게 대들 용기도, 사내랑 싸울 의지도 없는 것이다.

내심 반발할 걸 기대하던 사내는 그 모습에 혀를 찼다.

“쯧. 근성 없기는.”

“그럼 두 분 다 가시죠. 다른 분들도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공정한 결투를 위해 관람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누가 이곳에서 페어윈드의 말을 거역하겠는가.

귀족들은 기세등등하게. 평민들은 풀 죽은 얼굴로 헤더의 뒤를 따라나섰다.

이안은 갑작스럽게 진행된 상황에 머리를 긁적였다.

‘본의 아니게 저 사람들 입학까지 책임지게 되었네요.’

[어쩌면 저 사내의 말마따나 시험 자체를 치지 않는 게, 저 사람들한테 좋을지도 모르겠죠. 아니, 아마 그게 더 좋을 거예요. 하지만…… 누구나 꿈을 꿀 권리는 있는 법이에요.]

‘어차피 질 생각도 없지만요.’

연무장은 건물의 바로 근처에 있었다.

페어윈드가에서 코르디스 학생들을 위해 특별히 지어줬다고 한다.

“코르디스는 이곳 페어윈드의 중요한 관광 자원 중 하나니까요. 이 정도 투자는 당연합니다.”

헤더는 싱긋 웃으면서 두 사람에게 목검을 내밀었다.

척 봐도 질이 좋아 보이는 목검이었다.

‘쉽사리 부러지지는 않겠네.’

헤더는 규칙을 설명했다.

“한쪽이 전투가 불가능해지거나 항복을 선언하면 결투는 끝입니다. 다만, 서로의 목숨을 해하는 일은 엄격히 금지하겠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코르디스의 예비 입학생들간의 대련이니까요.”

요는, 이건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결투가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큰 의미가 있는 경고는 아니었다.

아무리 목검이어도 급소에 맞으면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고, 대련 중에 ‘불운한 사고’ 따위는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으니.

‘저 새끼는 도무지 속을 모르겠네.’

이안은 헤더를 흘끗 살폈다.

눈동자를 볼 수 없으니,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상대편을 들 수도 있어. 그것도 조심해야 해야겠어.’

사내는 목검을 쥐어 들었다.

언뜻 드러나는 팔목이나 검을 쥔 자세에서, 꽤나 혹독한 단련의 증거가 엿보였다.

아마 이 사내도 보통 각오로 이 코르디스로 향하는 건 아닐 터.

사내는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이베르 가문의 녹스다.”

“이안.”

“쯧. 건방진 새끼.”

녹스는 자세를 잡고 이안을 신중하게 살폈다.

‘평민이지만 코르디스에 지원할 정도. 게다가 어딘가 믿는 구석도 있는 것 같다.’

녹스는 방심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이안을 찍어누르고, 자신의 말을 증명할 생각뿐.

반대로 이안 역시 녹스를 분석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네스가.

[상단 자세만 보면 제국 검술의 느낌이 많이 나네요. 물론, 훨씬 열화판이겠지만요.]

‘어떻게 할까요?’

[제국 검술의 특징은 거리를 좁히고 싸우는 데에 있어요. 멀리서 견제한다거나 하는 동작이 거의 없죠. 아마 곧장 거리를 좁혀 공격을 가해 올 거예요. ]

서로 간에 딱 달라붙어서 힘과 기술을 겨루는 게 바로 제국 검술.

그 특징을 잘 아는 이네스가 이안에게 조언했다.

[기본적으로 신체 능력은 이안이 압도할 거예요. 명문가가 아니라면, 이안의 또래 중에는 이안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적을 테니까요.]

이네스에게서 물려받은 힘. 그리고 그레이의 웅담을 먹고 얻은 근력.

다른 이들과 직접 겨뤄본 적은 없지만, 이안의 신체 능력은 일반인을 크게 상회하고 있었다.

[반면,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이안이 아직 부족할 거예요. 그러니 기술의 영역보다는, 힘의 영역에서 싸우는 게 낫겠죠.]

‘불리한 영역보다, 유리한 영역에서 싸우라는 거죠. 알겠습니다.’

이안을 노려보던 녹스가 분석이 끝났는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검을 내지를 것만 같은 위압감.

구경하던 귀족들이 한마디씩 얹었다.

“아들아! 간단하게 끝내버려라!”

“녹스 님의 상대를 한 저 평민이 가여울 지경이네요.”

“저 사람…… 기사 가문이래.”

“그러면 저 검은 머리한테는 승산이 없는 게…….”

모두가 녹스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심지어 같은 평민들도 내심 이안이 이기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반쯤은 체념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 기대들을 등에 업고, 녹스는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내달렸다.

‘간단히는 끝내주지 않겠다.’

괘씸하게 자신에게 대든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진검이 아닌 목검?

오히려 좋다.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패서, 평생 검을 쥐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면 될 뿐.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모를 헤더 페어윈드가 신경 쓰이지만, 그 역시 귀족이다.

웬만하면 자신을 말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녹스는 오른발을 한 걸음 크게 전진.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빠르고 정확한 검격이었다.

‘일단 가볍게 왼쪽 어깨부터 박살 낸다!’

녹스는 온 힘을 다해 검을 찔러 넣었다.

그 검의 궤적을 멀뚱히 쳐다보던 이안은 손에서 목검을 놓아 버렸다.

녹스는 진한 비웃음을 입에 걸었다.

‘검 한번 섞어보지도 않고 포긴가? 근성 없는 새끼. 결국 평민이라 이거구나!’

전의를 잃었다 해서 봐줄 생각은 없었다.

녹스는 한껏 신이나 목검에 더더욱 힘을 줬다.

그리고…… 탁!

녹스의 몸이 우뚝 멈췄다.

“뭐, 뭐야?”

“어?”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경악했다.

녹스가 내뻗었던 목검은…… 그대로 이안의 양손에 붙들려 있었다.

이네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기술의 영역보다 힘의 영역에서 싸우라고 했어도…… 검사가 검을 놓아 버리다니요.]

‘생각보다 너무 눈에 잘 보여서요.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요근래 수련한 찌르기만 수만 번이다.

이안은 녹스가 그리는 궤적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녹스의 검이, 이안의 향상된 동체시력을 상회할 정도로 빠르지 못하기도 했고.

그래서 예상되는 지점에 손을 가져갔고, 그대로 손바닥을 오므려 목검을 쥐었다.

“으…… 윽!”

얼굴이 새빨개진 녹스가 안간힘을 쓰며 목검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목검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추태를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던 이안이 이내 팔에 힘을 줘, 목검을 아예 빼앗아 버렸다.

“아앗!”

그러고는 비웃듯이 말했다.

“어때. 한목숨 더 줄까?”

이안

불길한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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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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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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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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