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22화 (23/222)

22. 도살장에 끌려가는

부두에는 이미 코르디스의 관계자들과 지원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 숫자만 어림잡아도 수백.

이 중 절반은 지원자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숫자였다.

‘오늘은 평민들만 모인 것 같은데, 그래도 이 정도나 모이다니.’

그중에는 요전번에 폭풍 쉼터에서 본 적 있는 얼굴들도 있었는데, 하나같이 곧 죽으러 가는 것처럼 비장하게 서 있었다.

실제로도, 여기 있는 대부분은 죽거나 반병신이 될 것이다.

마지막에 용기를 잃고 시험을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한에야 말이다.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시험을 포기하면 지원비를 돌려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배에 타는 순간부터는 환급이 불가합니다.”

직원의 설명에 지원자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직 앳된 얼굴들이다.

플로라랑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어린 느낌.

그런 어린 나이에 벌써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두렵고, 떨릴 터.

하지만 옆에서 기대 가득한 얼굴로 기도하는 부모를 보고도 차마 여기서 포기하고 싶다고 외치는 아이는 없었다.

‘부모의 욕심이란 대체 뭔지.’

입안이 썼다.

게임에서는 그냥 입학시험의 난도가 높은 것만 명시하지, 그 뒤에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까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아니, 있었던가?

어찌 됐든 이안이 신경을 기울일 부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안타깝네요. 저희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더욱 안타까워요.]

‘어쩔 수 없죠.’

사실 지금은 남 걱정할 때가 아니긴 했다.

이안 역시 목숨을 걸고 임하는 시험. 솔직히 자신 있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날을 위해 엄청나게 준비했지만…….’

도시를 뒤지며 조금이라도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모두 했다.

밤은 이네스와의 검술 수련에 전부 쏟아부었다.

이네스는 이제 검술 동작을 넘어서, 스텝을 밟는 방법과 타이밍. 호흡의 배분. 심리전의 기초 등을 가르친 뒤, 간단하게 이안과 대련을 하곤 했다.

쉽지 않은 나날들이었다. 확실한 건, 이곳에 오기 전과 비교해 이안은 많이 강해졌다.

문제는 그게 충분하냐 아닌가냐.

[너무 걱정마세요. 이안이라면 무사히 이겨낼 거예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안의 마음마저 차분해졌다.

이네스의 말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분명, 수백 년 전 악마와의 싸움에서도, 동료들을 그 목소리로 이끌었을 터.

마음을 진정한 이안은 가장 먼저 여객선에 올라탔다.

꽤나 화려한 범선이었는데, 주 이용객인 코르디스의 귀족 학생들의 취향을 맞춘 것 같았다.

갑판에서 작업하던 선원들은 올라서는 참가자들을 왁자하게 웃어댔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들이 또 왔구나!”

“푸하하하! 너무 겁주지 말라고.”

“자자. 이 중에서 누가 살아남을지 내기부터 하자!”

아무래도 이들에게는 입학식에 참가하는 평민들을 실어나르는 게 연례행사인 모양.

바다 사나이들의 거친 환영에 참가자들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아마 평소에는 귀족들이 주로 탑승하니, 그 스트레스를 이런 식으로 푸는 모양이다.

“모두, 그만하시고 준비해주세요.”

“예이. 예이.”

관계자들의 중재에 선원들은 웃음 흘리며 흩어졌다.

이안은 덤덤한 얼굴로 갑판의 최선두에 앉았다.

겨울철임에도 불구하고, 카스크 내해의 아침에는 희미한 해무가 끼어 있었다.

무언가 신비로우면서도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던 이안의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수염과 머리를 아무렇게나 기른 꾀죄죄한 몰골의 선원이었다.

뜬금없이 다가온 선원은 이안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뭐야……?”

이안이 입을 열자, 그제야 선원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이안! 네가 이안 맞지?”

“……날 알아?”

“맞았네! 그래! 네 재수 없는 머리랑 눈 색깔을 보고 바로 알아봤지!”

[…….무례한 사람이군요.]

이네스는 언짢아했지만, 이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거칠고 힘든 일을 하는 사람에게 예의까지 기대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인 법이다.

이안은 목소리에 짜증을 담아 다시 물었다.

“날 아냐고 물었잖아.”

“당연히 알고말고! 그렇게 도시를 들쑤시고 다녔으면서, 소문이 안 날 거라고 생각한 거야?”

“음.”

확실히. 이안은 최근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히든 피스의 주위에는 언제나 방해물들을 배치하는 법.

이안은 그 대부분을 적절하게 돌파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무력을 사용할 필요도 있었다.

선원이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말했다.

“뒷골목에서는 재수 없는 검은 머리가 설치고 다닌다고 소문이 자자해! 악마의 하수인이라는 소문도 있는데…… 혹시 진짜냐?”

“진짜겠냐?”

“그렇겠지? 푸하하.”

배를 잡고 껄껄 웃던 선원이 갑자기 이안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러더니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근데 그 우스꽝스러운 로브는 뭐야. 그리고 등 뒤에 멘 건…… 곡괭이? 넌 곡괭이로 싸우냐?”

우스꽝스럽다는 선원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이안은 지금, 이번에 새로 구입한 밝은 연주황색 로브와 곡괭이로 무장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

내심 부끄러워하고 있던 이안이 까칠하게 대답했다.

“신경 쓰지 마. 다 생각이 있는 거니까. 그리고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그러냐?”

별생각 없이 머리를 벅벅 긁던 선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유명인을 보게 돼서 반갑네. 너도 저 높으신 나리들이 다니는 학교로 가는 거지?”

“그래.”

“그럼 열심히 해보라고. 난 너가 살아남을 거라는 데에 한 달 술값 걸었거든. 꼭 너 같이 재수 없이 생긴 애들이 오래 살더라고.”

“……내 덕에 돈 따면 술이나 사던가.”

“물론!”

활기차게 대답한 선원은 서둘러 작업을 위해 떠났다.

그 모습을 흘긋 확인한 이안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무례해요. 마음에 안 드네요.]

‘뭐. 저 정도면 신사적인 편이죠. 딱히 악의도 없고.’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는, 생긴 게 불길하다고 취객한테 얻어맞기 일쑤였다.

그걸 생각하면 저 선원은 양반이었다.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제 소문이 도는 것 같네요.’

[아무래도 좋은 소문은 아닌 것 같지만요.]

소문.

게임에서는 명성치라고 부르는 시스템.

소문은 꽤나 중요한 요소다.

수많은 이벤트가 명성치에 영향을 받으며, 심지어 일부 능력치에도 관여한다.

‘문제는 소문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른다는 건데…….’

여러 사건이 생길 터고, 그중에는 처리하기 곤란한 아주 고약한 것들도 많을 터다.

이안이 고민하고 있자 이네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소문. 그 사람에 대한 소문과 명성은 굉장히 중요하죠. 소문은 곧 믿음이고, 믿음은 힘을 만들어내니까요. 이안이 할 행동은 간단해요.]

‘…….뭔가요?’

[영웅답게 행동할 것. 늘 긍지와 자애를 가지고 남을 도울 것. 용기 있게 앞장설 것. 그리하면 좋은 소문은 자연스레 뒤따를 거예요.]

‘음.’

요컨대 이미지 관리를 하라는 것.

정론이었고, 딱히 반박할 말도 없기도 했다.

‘뭐, 지금의 악마의 하수인이라는 소문은 좀 그렇긴 하네요.’

이러다 교단의 추격을 받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

그런 최악의 미래 만큼은 사양이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저 멀리 안개 사이로 섬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코르디스.

상당히 가파른 섬의 가장자리에는 단단한 성벽이 빈틈없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성벽 중간중간 세워져 있는 첨탑들.

학교가 있는 섬이라기보다는…….

‘요새에 가까운데요?’

[실제로 아주 먼 과거에 전쟁을 수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도 신입생이었을 적에 많이 들었던 여러 전설적인 일화들을 남겼고요.]

악마의 군세는 상대가 어리든, 학생이든 신경 쓰지 않는다.

언젠가 찾아올 또 다른 적을 상대하기 위해, 코르디스는 지금도 꾸준히 방비를 하고 있었다.

“자! 내리세요!”

“휘유! 어디 잘 해보라고!”

“너한테 걸었으니까 죽지 마라! 병신이 되도 좋으니까 숨만 붙어 있으라고!”

선원들의 격한 인사를 뒤로하고, 참가자들이 하나둘 내려섰다.

그리고 미리 준비하고 있던 코르디스 직원들의 인도하에 일렬로 죽 늘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꼭 군대에 다시 가는 기분이네요.’

묘하게 우중충한 분위기가 입대 첫날의 그것과 똑같았다.

이안은 걷는 와중에도 머릿속 기억들을 되새김질했다.

패턴. 함정과 구조물의 위치. 그리고 마지막에 맞닥뜨리게 될 그 녀석까지.

이안은 절로 입술을 깨물었다.

[긴장하고 있나요?]

‘…….아무래도요.’

[요근래 이안은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돌아다녔잖아요. 신체 능력도 크게 상승하고. 자신감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요?]

‘함부로 제 능력을 과신하지 않는 게 제 신조인지라.’

그렇게 멍하니 기다리고 있자니, 차가운 인상의 사내가 절도 있게 걸어와 설명을 시작했다.

“이번 시험의 총책임을 맡은 도노반 페리다. 짧게 설명하겠다.”

페리라 자신을 소개한 사내는 조금 떨어져 곳에 있는 동굴을 가리켰다.

“저기가 바로 시험장이다. 저곳에서 너희들은 지혜와 용기, 순발력 등 종합적인 능력을 평가받게 된다. 시험장을 무사히 통과하면, 합격이다.”

페리는 절도 있게 설명을 이어갔다.

“시험을 통과한 시간에 따라 어퍼 클래스와 사이드 클래스가 갈리니 참고하도록. 그리고 기본적으로 위험한 곳이지만, 중간중간 안전지대가 있을 거다. 안전지대에서 포기하기로 결정하면, 우리가 구조하러 가겠다. 이상 설명 끝이다. 질문 있는 사람 있나?”

페리는 참가자들을 휙 둘러보았다. 겁을 먹은 참가자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지만, 그중에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뭐지?”

“혹시 시험 중에 지켜야 할 규칙이 있나요? 해서는 안 될 행동이라거나?”

“그런 건 없다. 어떤 수를 써서든, 시험장의 반대편 출구로 나오면 합격이다.”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은 이안은 손을 내렸다.

이안을 잠시 날카롭게 훑은 페리가 선언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겠다. 1번부터 앞으로 나오도록.”

“네…… 네!”

앳되어 보이는 소년이 허겁지겁 앞으로 달려갔다.

페리는 동굴을 막고 있던 철문을 열며 말했다.

“그럼 건투를 빌겠다.”

***

시험을 맡은 다른 감독관들은 한가하게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예상과 달리, 그들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시험장 안에서 구조 신호가 오면 설렁설렁 걸어가 참가자를 꺼내오면 되는 정도.

혹여라도 돌발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에, 감시하는 게 도의적으로는 옳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평민의 죽음 따위에 신경을 쓰겠는가?

시험 중에 ‘불운한 사고’가 좀 있어도, 그들이 징계를 받을 일은 추호도 없었다.

총감독관 페리만이 홀로 꼿꼿이 서 자신의 직무를 다 할 뿐이었다.

“총감독관님도 같이 차 마시면 좋을 텐데요.”

“냅둬. 원래 꽉 막힌 사람이잖아.”

“그건 그래요.”

작은 목소리로 페리를 한번 씹어준 감독관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작년보다 지원한 참가자가 눈에 띄게 늘었네요? 특히 시골 쪽에서 많이들 왔어요.”

“뭣 하러 그 고생하며 여기까지 오는지 몰라.”

“듣자 하니 대륙의 외곽에서는 날씨 때문에 농사가 잘 안된다나 봐. 상황이 힘들수록 헛된 꿈에 매달리는 거지.”

추운 겨울. 감독관들은 따뜻한 차를 호호 불어가며 담소를 나누었다.

주제는 당연히 지금 펼쳐지는 시험이었다.

한 감독관이 연민 가득한 얼굴로 멀찍이서 앉아 있는 참가자들을 쳐다봤다.

“참…… 측은해요. 애초에 통과하라고 만든 시험이 아닌데.”

“씁.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엄연히 다 통과할 수 있어. 단지 조금 어려울 뿐이지.”

“몇십 년 동안 합격생이 없을 정도로요?”

“갑자기 왜 그래. 우리야 편하고 좋잖아.”

통과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감독관들은 시험장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시험 내용이 세간에 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럴 필요도 없다.

“총 3구역으로 나뉜 시험장에서 대부분 1구역에서 멈추니까. 3구역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솔직히 1구역을 통과하는 것만으로도 나름 애쓴 거죠. 최소 20분은 그곳에서 헤매야 하는데, 나라면 그냥 포기할 거예요.”

“맞아. 미리 시험 내용을 알고 대비하는 것 아니라면…….”

그때.

홀로 서 있던 페리가 감독관들에게 손짓했다.

드문 일이었기에, 감독관들이 서둘러 잔을 내려놓고 달려갔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1차 구역의 통과자가 나왔다.”

“아, 그런가요? 제법 실력이 뛰어난 놈인가 보네요.”

“4분.”

“예?”

“통과하는 데에 단 4분이 걸렸다.”

페리의 덤덤한 선언에 감독관들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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