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꿈의 끝에는
이안은 쇠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시험장과 시험장 사이의 안전지대.
왼쪽 벽에는 구조 요청을 보낼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했을 사람은 아마 없겠죠.’
시험 3개 중 2개를 돌파해냈다. 아무리 힘겨운 과정이라 해도, 하나만 더 통과하면 원하는 바를 거머쥘 수 있는 것이다.
참가자들은 희망에 차 다음 시험장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을 터다.
그 안에 뭐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 채 말이다.
‘그것도 이제 끝이지만요.’
마음을 추스른 이안은 미련 없이 철문을 열었다.
지금까지는 사람에 의해 인위적으로 지어진 공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달랐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좁은 동굴이 앞으로 쭈욱 이어져 있었다.
이안은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뚝. 뚝.
전체적으로 습한 공간이었다.
이끼 낀 바닥은 미끈거렸고, 이따금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이안의 머리를 적셨다.
‘앞에 뭐가 있는지 아는데도 엄청 쫄리네요.’
이안은 이마에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털어내며 그리 말했다.
이 앞에 뭐가 기다리는지 아는데도. 아니, 오히려 너무 잘 알기에 심장이 쿵쾅 뛰어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긴장할 거 없어요. 이안은 그동안 많이 노력했으니, 이번 시련도 무사히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
신기했다.
이네스의 짧은 격려만으로 세차게 뛰던 심장이 제 속도를 되찾았다.
그녀가 괜찮다고 말해주었으니, 진짜로 모든 게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의 영웅이 지닌 신비로움에 새삼스럽게 감탄하며, 이안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이제 와서 피할 수도 없다. 피할 수 없으면 부딪히는 수밖에.
‘도착했네요.’
좁은 입구를 걸어가길 10여 분. 이안은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다.
축구장 하나는 거뜬히 들어갈 것 같은 넓은 공동에 무릎까지 차오르는 야트막한 호수.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석기둥 다섯 개가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고, 위에는 뾰족한 종유석이 가득 자라 있었다.
공동의 반대편 저 멀리에 밖으로 향하는 자그마한 통로가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눈에 띄는 건, 공동 한 가운데에서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괴생물체.
첨벙.
이안이 호수에 발을 디디자, 일렁이는 파문에 녀석이 눈을 떴다.
“꺼엉?”
사람을 닮았다. 하지만 사람은 아니었다.
족히 4미터는 넘을 체구에 양서류 특유의 매끈한 피부.
가로로 쫙 째진 눈동자는 흐릿했고, 배는 비대하게 부풀어서 둥그렇다.
마치 사람과 거대한 두꺼비를 반쯤 합쳐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어중간하게 사람을 닮았기에 더 혐오스러웠다.
[세상에. 끔찍한 모습이네요. 저게 정말 원래는 사람이 맞았다는 건가요?]
‘아마도요.’
이안이 기억하기로, 유저들은 하나같이 저 두꺼비 괴물을 백작이라고 불렀다.
원래는 백작가의 자제였는데, 사고에 휘말렸다나 뭐라나.
[코르디스에서 이런 걸 사육하고 있었다니…….]
이네스는 모교가 숨기고 있는 어두운 면에 충격을 먹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하나다.
백작은 지금 굶주렸고, 이안을 먹이로 보고 있다는 것.
첨벙. 첨벙.
백작은 뚱뚱한 몸을 이리저리 버둥거리더니, 양 앞발을 물속에 비벼댔다.
그러고는 흥얼거리듯이, 거대한 볼을 부풀려가며 두꺼비 울음소리를 냈다.
“꺼엉 꺼엉 꺼엉.”
공동을 울리는 중저음의 기분 나쁜 울음소리.
묘하게 음의 높낮이도 있고, 리듬감도 있어 기분이 더 나빴다.
‘식사 시간이 되어서 아주 기쁜 모양이네요.’
[설마 저 앞발을 물속에 비벼대는 거…… 손을 씻는 건가요?]
‘인간 시절의 습성이 아직 남아 있나 보죠.’
이안은 백작이 한눈을 판 사이, 슬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시험의 통과 조건은 시험장을 무사히 빠져나오는 것.
가능하다면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게 제일이다.
그래. 가능하다면 말이다.
“꺼엉?”
최소한의 빛만 있는 이 동굴에서 오래 파묻혀 있던 백작은 시력이 그리 좋지 않다.
하지만 호수의 물결을 통해 백작은 주위의 움직임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백작은 살금살금 움직이던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닷없이 아가리를 쩍― 하고 벌렸다.
후욱!
“이런 씨……!”
새빨갛고 기다란 혓바닥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격한 인사에 이안은 급하게 몸을 던져 물속으로 파고들었다.
타앙!
혀에 얻어맞은 벽이 조금 부서지며 주위에 파편을 튀었다.
가공할만한 위력. 믿을 수 없는 사거리. 피하기 힘들 정도의 속도.
조금만 반응이 늦었다면 그대로 뼈가 박살 났을 거라는 생각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와씨. 진짜 뒤지는 줄 알았네.”
[피해요!]
“아!”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이안은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백작이 느릿하게 뻗었던 혀를 회수하고 있었다.
공격 다음 잠깐의 유예 시간.
백작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이 시간을 잘 활용해야 했다.
‘역시 저 괴물한테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어떻게든 내가 죽여야 해.’
이안은 백작에 대해서 잘 안다.
지금 이안의 수준으로 검을 아무리 휘둘러봤자 절대로 죽일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이는 게임에서도 마찬가지.
하지만 아무리 어렵고 거지 같아도, 게임에는 언제나 파훼법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대부분의 복잡한 일에 대한 해결법은, 간단한 경우가 많죠.’
이안은 서둘러 천장을 받치는 돌기둥 중 하나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등 뒤에 멘 곡괭이를 꺼내 들었다.
이제부터 이안은 이 동굴을 부숴 버릴 생각이었다.
쾅!
곡괭이를 힘껏 휘둘러 가장 가까운 석기둥을 내리치자, 기둥에 살짝 금이 갔다.
‘역시 한 번에 부서지는 건 너무 큰 기대였나?’
이안은 미련 없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탕!
다시 한번 휘둘러진 혓바닥이 방금까지 이안이 서 있던 곳을 강타했다.
“꺼엉! 꺼엉!”
이안이 계속 요리조리 빠져나가자, 백작은 짜증이 났는지 어린애처럼 두 팔을 버둥거렸다.
지금껏 찾아왔던 먹잇감들은 대부분은 첫 일격에 죽었는데, 이놈은 왜 이리 끈질긴지.
그 와중에도 이안은 계속해서 곡괭이를 휘둘렀다.
깡! 깡! 깡!
‘좀 적당히 부서져라!’
하지만 몇 번 두드리면 무너지는 게임에서와 달리, 이곳에서는 아무리 내리찍어도 금만 갈 뿐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설마 게임과 달리 안 부서지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신 차려요!]
이네스의 외침에 이안이 퍼뜩 집중력을 되찾았다.
백작의 혀가 천천히 접근해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피하지 못하게, 아예 둘러싸서 붙잡아 버릴 속셈.
‘점점 학습하고 있다는 건가? 원래 사람이라 쓸데없이 머리는 좋네 씁.’
이안은 성검을 뽑아 번개처럼 휘둘렀다.
촤악!
수십만 번을 연습한 가로 베기가 혓바닥에 기다란 자상을 남겼다.
상처 자체는 작다.
하지만 고통마저 작지는 않았다.
“꺼허엉!”
수십 년 만에 느껴본 고통이라는 감각이 어지간히도 괴로웠는지, 커다란 눈물방울이 백작의 그 흐리멍덩한 눈에서 흘러내렸다.
“너 같은 괴물도 눈물을 흘리는 구나.”
“꺼어엉!”
대답 대신 울부짖은 백작은 누가 봐도 단단히 열을 받은 듯했다.
백작은 뚱뚱한 몸을 뒤척여 호수 속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리고 아가리를 벌려 물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휘이이.
호수의 수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안은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아니 벌써 다음 페이즈는 너무 한 거 아니야?”
순식간에 호숫물을 전부 빨아들인 백작이 하늘을 향해 입을 오므렸다. 그리고 분사.
푸확!
동굴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비 성분이 있는 백작의 체액이 가득 섞인 비다.
저런 거에 맞으면 순식간에 몸이 굳어 버릴 터.
이안은 재빨리 입고 있던 로브를 둘러썼다.
‘돈값 하자!’
무려 연금술사 길드에서 거금 금화 7개를 주고 사 온 로브.
실제로 부유한 연금술사들이 실험 할 때 입는 옷으로, 웬만한 독극물은 다 튕겨 내주는 고급품이다.
보스 하나 잡으려고 피 같은 금화를 무려 일곱 개를 사용하다니.
로브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은 백작의 체액인가, 이안의 눈물인가.
[…….궁상 좀 그만 떨어요.]
어쨌든 이안이 해야 할 일은 여전히 하나였다.
백작을 피해 가면서 기둥을 부수는 것.
물을 잔뜩 머금은 백작은 체구가 완전히 둥글고 반투명하게 변해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탱탱 볼 같아서 우스웠다.
하지만 백작이 둥그런 몸을 통째로 굴러서 다가오기 시작하자, 더는 우습게 생각할 수 없었다.
퉁! 퉁! 퉁!
거대한 공이 이안을 깔아뭉개기 위해 굴러온다.
사색이 된 이안은 곡괭이도 내려놓고 전력으로 달렸다.
기둥이고 뭐고, 일단은 살아야 했다.
쾅!
직선으로 굴러온 백작이 그대로 벽과 부딪힌 뒤, 퉁―하고 튕겨 나갔다.
문제는 백작의 움직임에 점점 가속도가 붙고 있다는 것.
게다가 혀를 이용해 계속해서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그 경로를 예측하기도 쉽지 않았다.
‘집중하자. 집중. 도망치기만 해서는 안 돼. 지금이라면…….’
이안은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려서, 가장 가까운 석기둥에 등을 맞댔다.
혀를 내뻗어 방향을 순식간에 전환한 백작이 이안을 향해 맹렬히 굴러왔다.
이안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점점 다가오는 백작을 보면 다리가 저도 모르게 후들거렸지만, 이안은 억지로 버텼다.
‘이건 이제 담력 싸움이야. 숫자. 숫자를 세자. 십, 구, 팔, 육…… 어라. 어디까지 셌더라?’
[지금이에요!]
이네스의 신호에 이안은 곧바로 몸을 던졌다.
소싯적 많이 했던 깔끔한 슬라이딩. 이안은 축축한 바닥을 빠르게 미끄러졌다.
옆으로 아슬하게 스쳐간 백작이 석벽과 부딪혔다.
꽈릉!
강한 충격에 온 공동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석기둥에 내놓은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 나갔다.
“돼, 됐다!”
돌기둥이 무너진다.
무너진 돌기둥이 또 다른 돌기둥에 부딪히고, 연쇄적인 충돌이 일어난다.
이는 곧 공동의 붕괴를 의미했다.
하지만 기뻐할 틈은 없었다.
“윽!”
콰직! 콱!
천장에 달려 있던 뾰족한 종유석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저 무차별적인 낙하엔 게임 속 지식이고 뭐고 소용이 없었다.
이안의 동체시력과 신체 능력으로만 극복해야 했다.
저 멀리서 종유석에 얻어맞은 백작이 꺼엉―하는 비명이 들렸지만, 이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서 죽을 수 없지.’
이런 상황을 대비해 지난 한 달 동안 온 도시를 헤집은 거다.
이안은 발을 쉬지 않으면서도, 시선은 하늘에 고정했다.
조금이라도 흔들림을 줄이기 위해 숨마저 참았다.
그렇게 집중을 하니…… 보였다!
종유석이 떨어지는 궤적이 깔끔한 선이 되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이안은 거금을 주고 산 로브마저 집어 던지고 달렸다.
기장이 긴 옷은 달릴 때 거추장스럽기만 한 법이다.
‘어떻게든 출구까지만…….’
안전구역까지만 간다면 이안의 승리. 그때. 무언가가 턱―하고 이안의 발목을 휘감았다.
“꺼, 꺼엉.”
종유석에 찔려 만신창이가 된 백작이 기다란 혀를 내뻗은 것.
먹이에 대한 그 집착과 집념에 소름 끼칠 새도 없이, 이안의 몸이 빠르게 끌려가기 시작했다.
“으윽!”
이안은 급하게 품을 뒤져, 푸른 액체가 든 약병을 꺼냈다. 뒷골목 마녀에게서 훔쳐온 약병.
이안은 그대로 놈의 두꺼운 혀에 약병을 내리쳤다.
“이거나 먹어!”
챙캉!
유리병이 깨지며 새하얀 얼음 꽃이 피어올랐다.
이 또한 이안이 준비한 보험 중 하나였다. 무릇 양서류는 냉기에 약하니 말이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꺼엉!”
“놔 이 새끼야!”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백작은 이안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안의 몸이 점점 끌려들어 갔다. 언제 머리 위로 종유석을 얻어맞을지 알 수 없는 위기.
어찌할 줄 몰라, 갈피를 못 잡고 있던 그때.
이네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이안. 검을 드세요. 왼발을 디딤발 삼아, 오른발을 앞으로 뻗어 검을 내려치는 것. 기억하시죠?]
‘예?’
디딤발이고 자시고, 이안은 지금 혀에 묶여 끌려가는 중이다.
힘을 싣기는커녕, 무게 중심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이후로 이네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이상의 조언은 필요 없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네스의 태도에, 이안의 마음도 이상하리 만치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왼발은 디딤발. 오른발은 앞으로…….’
마음이 가라앉으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혓바닥의 얼어붙은 부위에 보이는 기다란 자상.
아까 이안이 낸 상처가 미처 다 아물지 못한 모양이었다.
또 하나 보이는 건 하늘에서 떨어지는 종유석.
그 끝이 섬뜩할 정도로 뾰족한 녀석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옆면은 제법 평평해 보였다.
그래. 발을 디딜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아.’
길이 보였다. 가능할지 말지 계산하는 건 그만두었다.
모든 것들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그 타이밍.
이안은 공중에서 몸을 비틀었고. 왼발로 종유석을 걷어찼다.
그 앞부분을 내딛는 오른발.
공중에 떠 있지만, 땅에 서 있는 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그 한순간에.
이안은 검을 휘둘렀다.
그저 몸에 밴 대로.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텅!
얼어붙은 백작의 두꺼운 혓바닥이 잘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