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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27화 (28/222)

27. 입성

코르디스로 향하는 정기선의 갑판에 쭈그려 앉은 이안은 선물 받은 빵을 우적우적 씹어댔다.

카스크 내해의 아침은 여느 때와 같이 자욱한 해무가 끼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저놈이 바로…….”

“분수도 모르고.”

“쯧.”

정기선에 탄 건 이안 뿐만이 아니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가의 자제들이 이안을 보며 쑥덕거리고 있었다.

신입생 혹은 재학생인 모양.

시선에 깃든 감정은 다양했지만, 대부분은 경멸, 분노, 멸시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들이었다.

그러나 이안은 그런 시선들을 깔끔히 무시했다. 쓸데없는 데에 일일이 마음을 쏟기에는 이안이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았다.

‘벌써 일 년이라……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란 말이죠.’

크레이 사가는 게임 속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이벤트가 나타난다.

우선 흔히 성장기라 부르는 첫 1년. 이 시기에는 커다란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때 플레이어들은 다른 제약 없이 온전히 성장에 집중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음 해부터는 얘기가 달라진다.

‘이제 본격적으로 대륙 이곳저곳에 사건들이 벌어질 텐데…….’

문제는 그 사건들이 추후 스토리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거다.

가령 어떤 가문이 악마 추종자들에게 멸문당하는 걸 그대로 지켜보기만 한다면.

나중에 그 가문에서 얻을 조력이나, 생길 수 있는 이벤트가 모두 사라져 버리는 식이다.

그렇다고 플레이어 혼자서 모든 사건을 다 해결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자신의 처지와 앞으로의 상황을 토대로 플레이어들은 까다로운 선택을 내려야 했다.

자신 선택에 따라 상황이 변화하는 게 크레이 사가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했고.

‘그래도 2, 3년차 까지는 선택이 쉬운 편이죠.’

문제는 각 대륙에서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4년차.

그리고 황태자가 병사를 일으켜, 대전쟁이 벌어지는 5년차.

그 모든 걸 무사히 넘겨도 6년 차에는 악마의 군세가 일어선다. 그리고 마지막에 기다리는 최종보스전.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그 과정들을 헤쳐나갈 걸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첫 1년을 그냥 날린 게 아까워 죽겠네요. 그때부터 성장해나갔다면 훨씬 여유가 있을 텐데…….’

[이제 와서 아쉬워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요. 지금 최선을 다할 뿐이죠.]

‘뭐. 그렇긴 하죠.’

단지 속도만 따지면 이안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 속도가 언제쯤 벽에 가로막힐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이안은 품을 뒤져 자루를 꺼냈다.

평소 돈을 넣어 놓고 다니는 자루는 너무나 가벼웠다.

‘돈이 한 푼도 없는 게 문제네요.’

[…….]

‘등록금을 내고 나니까, 돈 자루가 텅 비어 버렸어요.’

등록금과 시험을 치르기 위해 써야 했던 비용 탓에, 이안은 이제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다.

당장 얼마 후부터는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쪼들리는 상황.

‘한 번이라도 돈 걱정 없이 살아봤으면 좋겠네요.’

한국에서나 이곳에서나. 언제나 이안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돈이었다.

***

이안은 섬에 내려 큰길을 따라 걸었다.

코르디스는 생각보다 커다란 섬이었다.

동쪽에는 나름 숲이라 부를만한 곳도 있었고, 북쪽에는 학생들을 상대로 한 편의시설이 모여 있는 상업지구가.

그리고 섬 이곳저곳에 용도가 다양해 보이는 건물들이 서 있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뜨이는 건, 섬 중앙에 높게 솟아 있는 성벽.

섬 주위를 둘러싼 외벽보다도 훨씬 두껍고 높아 보였다.

[내벽이네요. 제가 학교를 다닐 때보다 훨씬 더 높아졌어요.]

‘내벽이요?’

[저번에 말했었죠? 코르디스는 하나의 요새나 다름없다고. 저 내벽 안에서 수업을 듣는 게 상위 성적을 가진 학생들인 어퍼 클래스. 나머지 학생들을 사이드 클래스라 불러요.]

한 학년에만 학생이 200명을 넘어가지만, 그중에서 어퍼 클래스에 들 수 있는 건 고작 30명뿐.

게다가 어퍼 클래스는 수업의 질이나 편의시설을 이용하는 데에 있어, 여러 특혜를 받고 있었다.

‘대놓고 차별한다 이거군요. 저야 특혜를 준다면 감사히 받겠지만.’

[어퍼 클래스에는 주로 명망 있는 가문의 자제들이 많이 있어요. 핏줄의 힘이라는 게, 음. 생각보다 강하니까요.]

상위 귀족들이 모이는 어퍼 클래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교의 장이며, 훗날 든든한 인맥을 넓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오죽하면 자제가 어퍼 클래스에 들어가는 데에 성공하면, 그 집안의 급을 두 단계는 높게 쳐준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

그만큼 어퍼 클래스는 코르디스 학생이라면 모두가 탐내는 자리다. 근데 웬 재수 없게 생긴 평민이 그 자리를 날름 차지해 버렸다.

주위에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는 뻔했다.

‘아무튼 저를 가시처럼 여길 사람이 많다는 거죠? 뭐. 그 정도야 각오하고 있어요.’

[단순히 싫어하는 선에서 그치면 다행이겠지만요…….]

자신이 처지를 안다고 해서 딱히 이안이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이안은 생각했다.

이안은 내성 안으로 들어가기 전. 학사를 구경이라도 할까 싶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섬은 의외로 넓었고, 건물을 이곳저곳에 퍼트려 지어 놓다 보니 의외로 길이 꽤 복잡했다.

까딱 잘못하면 신입생들은 길을 잃기 쉬울 것 같았다.

이안은 까마득한 선배인 이네스가 길 안내를 했기에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여기는 화염술사들의 건물이네요. 주위에 가득 심어 놓은 나무가 마치 미로 같죠? 예전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박해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마법사들은 이렇게 꼭꼭 숨어 있는 걸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네요.]

이네스가 설명해주는 알아도 별로 쓸데는 없는 잡학 지식들을 들으며 걷노라면, 마치 어디 외국 관광지에 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걸어 다니길 한참.

꽤 으슥한 장소에 들어왔다 싶었는데, 걷다 보니 저 멀리에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든 눈에 띄는 탐스러운 붉은 머리. 플로라가 물기 맺힌 눈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딱 봐도 길 잃은 것 같죠?’

[…….그러게요.]

평소에 간편한 복장을 입던 것과 달리, 플로라는 붉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거기다 양손에는 하얀색 실크 장갑까지.

어느 누가 보더라도 고귀한 가문의 여식으로 보이지만…… 이곳저곳 꽤 많이 헤맸는지 옷에 나뭇가지며 흙 따위가 묻어 있었다.

‘어쨌든 마침 잘 만났네요. 받을 것도 있었고요.’

이안이 한 걸음 다가서자, 발소리를 들은 플로라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고는 이안의 얼굴을 확인하고 눈에 띄게 화색을 띠었다가, 이내 확 얼굴을 찌푸렸다.

“오랜만이다?”

“…….

“사람이 불렀는데 왜 대답을 안 해.”

“…….

플로라는 대답 없이 이안을 피해 종종걸음으로 도망갔지만, 이내 막다른 길에 막혀 버렸다.

“으…….”

“왜 피하는 거야. 설마 명예로운 피에람 가문의 여식이 내기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 싫다고 도망가는 건 아니지?”

“기억이 잘…….”

“진짜로?”

시치미를 떼려는 플로라의 눈을 이안이 빤히 쳐다보았다.

플로라의 눈이 슬금슬금 아래로 향하더니, 결국 못 참고 빽 소리 질렀다.

“아. 알았어! 주면 되잖아! 주면!”

“진즉 그렇게 나왔으면 좀 좋냐.”

플로라는 가슴에 매단 붉은색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쉽사리 건네주기가 힘든 눈치였다.

물론. 이안은 이미 그 브로치의 효과를 잘 알고 있다.

사용하면 주위에 화염 방어막을 만들어주는 사기적인 아이템.

원래 게임에서는 플로라의 호감도를 꽤 많이 쌓아야만 얻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걸 이런 식으로 운이 좋군. 흐흐.’

[자기보다 어린 소녀에게서 물건을 갈취하고 좋아하다니, 찔리지도 않나요?]

‘갈취라니요. 지극히 정당한 내기였잖아요.’

플로라는 입술을 꽉 깨물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브로치를 떼어냈다.

이안은 플로라가 내민 손에서 브로치를 가져가려 했지만…… 플로라가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

“어허. 놔. 빨리.”

“다, 다른 거로 바꾸면 아, 안 될까?”

“다른 거? 다른 거 뭐?”

“돈이라거나…….”

제법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단호히 거절했다.

“안 돼.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야. 내가 어퍼클래스에 들어가는 데에 성공하면 그 브로치를 주는 것. 그게 약속이었잖아? 아니면 설마. 그 유명한 피에람 가문의 여식이…….”

“알았어! 주면 되잖아! 주면!”

가문을 살살 들먹이자 쉽게 넘어가는 플로라.

결국, 플로라는 울상을 지은 채 브로치를 이안에게 넘겨주었다.

“고마워 잘 쓸게.”

“으으…….”

“앞으로는 함부로 내기하지 말고. 사람을 신분이나 생김새로 재단하지 말고. 알았지?”

“시끄러워!”

플로라는 입을 꾹 다물었고, 이안은 피식 웃었다.

‘이걸로 사람을 신분으로 차별하는 그 성격이 좀 누그러질까?’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 같은데요?]

어쨌든 좋은 수확이다.

이안은 시민들이 선물해준 바구니에서 빵을 꺼내 만족스럽게 씹어댔다.

그러다 자신을 노려보는 플로라를 보고 빵을 하나 건네며 물었다.

“먹을래?”

“안 먹어! 그리고 내가 친한 척하지 말라 했지!”

빽 소리를 지른 플로라는 그대로 분을 못 이겨, 씩씩거리며 떠나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온 플로라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특별히 기숙사까지 안내할 기회를 줄게.”

“응? 난 안 친한 사람이랑은 같이 갈 생각이 없는데?”

“너! 너 진짜…….”

플로라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여러모로 놀려먹는 맛이 있었다.

이안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자 따라 해봐. 우리는 친합니다. 어서!”

“…친…….”

“친?”

“미친놈아 빨리 길 안내나 하라고!”

***

그대로 플로라를 데려다주고, 이안은 기숙사 건물로 향했다.

기숙사 사감은 이안을 보고는 어쩐지 화들짝 놀라며, 열쇠를 급히 넘겨주었다.

“토, 통금 시간만 지키면 특별한 다른 규칙은 없단다. 그냥 상식. 상식적으로만 행동하면 문제없을 거야.”

“아, 예.”

“그리고 기숙사 내에서 싸움은 금지야! 부탁이니 싸움만은 하지 말아다오!”

대체 이안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사감은 이안이 제발 사고만 안 치기를 간절히 바라는 모양이었다.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배정받은 기숙사 방으로 향했다.

1층은 신입생들에게 배정되어 있었는데, 이안의 방은 가장 안쪽에 있었다.

“와아.”

어퍼 클래스라 그런지, 아니면 귀족 학교라 그런지. 기숙사 방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제 자취방보다 한 10배는 큰 것 같네요.’

딱딱한 바닥과 허름한 지붕에 익숙한 이안에게는 궁전이나 다름없는 내부.

한동안은 이런 시설에서 생활할 걸 생각하니, 기분이 꽤나 좋아졌다.

이안은 과할 정도로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제대로 된 매트리스가 있는 침대는 진짜 오랜만이네요. 너무 푹신해서 일어나기 시작할 정도예요.’

[가끔은 휴식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잠시 그렇게 멍하니 누워 있던 이안은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역시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잠시뿐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해이해질 뻔했다.

상황이 좀 나아졌다고 배불러졌다는 건가.

‘헝그리정신이 벌써 사라지면 안 되는데.’

[조금쯤은 쉬어도 좋을 텐데. 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의외로 이안은 자신에게 엄격한 편이네요.]

‘살아남으려면 게으름 피울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이안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기숙사 복도에서 어퍼 클래스의 선배들이나 동기들이 보였지만, 하나같이 이안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익숙한 반응이다.

그들을 빠르게 지나친 이안은 플로라 때문에 가지 못했던 내성 내부의 건물로 향했다.

웅장하다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정육면체의 검은색 석조 건물.

이곳은 코르디스가 그간 모아 온 유물이나 고서, 무기나 마법 지팡이 따위가 보관되어있는 창고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이안이 코르디스로 찾아온 가장 큰 이유.

성검의 조각 중 하나가 바로 이곳에 잠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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