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벌써 일년
“그러니까 총감독관의 말은…… 그자가 황태자 전하께서 보낸 인물이라는 거요?”
“예. 근거라면 있습니다.”
분위기가 한층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지만, 페리는 변함없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첫째로는 그가 첫 번째 시험과 두 번째 시험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통과했다는 겁니다. 이건 명백히 비정상적인 기록입니다.”
“정보가 유출되었을 가능성은?”
“첫 번째 시험은 몰라도, 두 번째 시험의 관리는 저 혼자서 맡습니다. 저를 통하지 않고는 정보가 새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그 짧은 시간에 돌파했다는 건, 엄청나게 머리가 좋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미 이안은 시험장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었다.
사실상 정보가 유출된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꿈에도 알 리 없는 페리는 이안의 두뇌를 과대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피에트로가 돋보기 안경을 슬쩍 고쳐 끼며 물었다.
“다음 근거는?”
“예. 다음은 3 시험장에 있던 괴물을 그가 단신으로 해치웠다는 겁니다. 제 판단으로는, 그 괴물은 황실의 기사는 데려와야 겨우 상대할 만했습니다.”
“그럼 그놈이 황실 기사급의 실력을 갖췄다는 거요?”
참다못한 한 교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꼿꼿이 선 채로 고개만 돌린 페리가 곧바로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른다고?”
“괴물의 유해를 살폈을 때, 동굴의 붕괴로 떨어진 종유석에 관통당해 사망한 거로 판단됩니다. 혀가 검에 잘린 흔적은 있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습니다.”
“요컨대 자신의 실력이 아니었다 이 말인가?”
“공동의 붕괴는 그가 인위적으로 일으켰습니다. 그것도 실력이라면, 실력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설명을 듣던 피에트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지가 뛰어난거든, 실력이 좋은거든, 아니면 머리가 비상한 것이든. 어쨌든 평민치고는 너무 뛰어나다. 이 말이오?”
“그렇습니다.”
“또…… 또 있소?”
“다른 의문점은 그의 행적에 대한 문제입니다. 조사한 바로는, 그는 노른이라는 변방의 마을에서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페리는 짧은 시간 동안, 이안의 행적을 철저히 조사했다.
그가 노른에서 칼날 형제들과 싸운 일이나, 상단과 함께 페어윈드까지 온 것도 모두 추적해 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정보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다.
“노른 이전 행적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가족이 누군지, 무슨 성을 쓰는지. 그 정도 실력자가 소문이 안 났다는 건, 상당히 이상한 일입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신분을 지웠다는 거군?”
“사람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렇습니다.”
이건 사실 페리 나름의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 농담이 사실에 꽤 근접해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페어윈드에 오는 상단에서 에스테반 화이트가드 경과 같이 동행한 기록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에스테반 경은…….”
“미치광이 에스테반! 그놈은 강철 기사단 출신 아닌가.”
그리고 강철 기사단은 황태자에게 굉장히 우호적인 세력이다.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다.
이제 분위기는 거의 다 넘어갔다. 페리가 하는 추측을 이제 사실로 믿기 시작했다.
주위를 살피던 페리가 피에트로에게 귓속말했다.
“그리고 놈은 그 괴물. 에버그린 백작에 대한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실수로 발설한 건지, 아니면 일부러 저한테 얘기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피에트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에버그린 가문의 비극에 대해 아는 건, 이제 기껏해야 그와 페리 뿐.
그걸 알고 있다는 자체가, 뛰어난 정보원이 있다는 의미였다.
피에트로는 돋보기 안경을 벗고,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러다 이내 마음을 다잡았는지, 다시 고개를 들어 위엄 있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아무래도 그가 황태자 쪽 인물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소. 최근 전하의 행보를 보면…… 앞뒤가 맞는 것 같군.”
임직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황태자와 귀족들간의 갈등이 알게 모르게 심화되는 지금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의도가 명확해지지 않았는데, 우리 쪽에서 먼저 건들 수도 없는 노릇이오. 괜히 벌집을 건드릴 필요는 없지. 그러니…….”
피에트로는 잠시 침을 삼키고, 자신을 쳐다보는 임직원들에게 말했다.
“그자를 코르디스의 어퍼 클래스로 받아들이겠소. 하지만 감시의 눈길은 늘 유지해야 할 것이오. 살아 있는 폭탄이 학사 내를 걷는 것과 다름없으니. 이의 있소? 있으면 손을 들어보시오.”
피에트로의 선언 이후, 잠시 내려앉는 침묵.
하지만 이내, 이 자리에 있는 절반 정도가 손을 들었다.
“…….”
아무래도 피에트로의 결정에 격렬히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모양.
피에트로는 왜 하필 자신이 교장으로 있을 때 이런 일이 터졌는지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
[531기 코르디스 합격자 명단]
1. 레아 클로딘
2. 루크 브레이브하트
3. 플로라 피에람
…….
7. 이안
***
팡!
이네스의 왼 주먹이 이안의 가슴에 박혔다.
순간, 뒤로 밀려나 균형을 잃은 이안의 안쪽으로 파고든 이네스가 검끝을 이안의 턱에 겨누었다.
“제가 뭐라 했죠?”
“균형이 곧 생명…….”
“맞아요. 균형을 이미 잃었다 싶으면, 어중간하게 버티는 것보다 차라리 완전히 쓰러지는 것도 한 방법이에요.”
이네스와 검을 섞으며 대련한 지도 벌써 꽤 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이안은 이네스에게 유의미한 타격은커녕, 세 합 이상을 버틴 적조차 없었다.
압도적이라는 단어도 부족할 만큼의 역량.
새삼 눈앞의 영웅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이 갔다.
“와. 진짜 검술은 못 당하겠네요.”
바닥에 주저앉은 이안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안의 꿈속에서 훈련하는 거지만, 그래도 정신까지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네스는 조금 으스대듯이 말했다.
“제 전성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원래는 검술 외에도 다양한 기술들을 사용했었어요. 빛의 정령이라거나, 신궁이라거나 월안(月眼)이라거나…… 지금은 빛의 정령도 간신히 소환하는 정도지만요.”
악마와의 전투에서 성검의 여러 조각으로 나뉜 것처럼, 이네스의 영혼도 여러 조각으로 나뉘었다.
당연히 이네스에게 전수받을 수 있는 힘의 양도 미약할 수밖에 없다.
“그것 때문에 성검을 찾으러 가는 거잖아요. 조각을 찾다 보면 금방 힘도 되찾을 수 있겠죠.”
“그렇겠죠? 자! 그럼 잡담 그만하고 다시 시작할까요? 제 힘이 약해졌다 하지만, 아직 이안은 그조차도 못 미치잖아요?”
이네스는 맑게 웃으며 주저앉아 있는 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안은 그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다, 이내 그 손을 굳게 잡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네스는 좋은 스승이었다.
어찌나 잘 가르치는지, 이안 스스로도 하루하루 실력이 쑥쑥 느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자, 대련은 여기까지만 하고. 이제 다시 기본기 수련부터 하죠. 우선 찌르기랑 내려 베기, 가로 베기를 10만 번씩만 하죠.”
물론. 좋은 스승이면서 굉장히 엄격한 스승이기도 했다.
“네에…….”
이안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리 대답했다.
***
입학까지는 약 한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이안은 그 시간을 신체를 단련하는 데에 온전히 쏟아부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몸을 혹사하니, 그때까지도 ‘말랐다’라는 인상이 강하던 이안의 몸은 이제 ‘탄탄하다’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한해가 막바지에 이르는 어느 날.
그날도 이안은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아가며 단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뜨거워진 몸을 식혀주는 눈송이의 감촉이 퍽 기분 좋았다.
그때.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오랜만입니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이제는 진짜 후배님이 되었네요.”
감은 건지 뜬 건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째진 눈. 방긋방긋 올리고 있는 입꼬리.
이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의 아들. 헤더 페어윈드가 직접 이안이 묵은 여관에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이안이 서둘러 옷을 걸치고 정중하게 인사하자, 헤더는 살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때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것 같은데…… 단련의 성과인 걸까요?”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거든요.”
“그런 것 같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헤더는 손바닥을 뒤집어 하늘 위로 향했다.
그러자 세찬 바람이 둘의 주위에 휘몰아치더니, 내리는 눈송이를 모두 튕겨내 주었다.
바람으로 만들어진 우산인 셈이었다.
이네스가 작게 감탄했다.
[이 정도의 바람 마법을 아무렇지 않게 다루다니. 역시 페어윈드네요.]
신기한 듯. 이안은 머리 위를 휘적거렸다. 언제 봐도 이 마법이라는 건 신비롭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있었다.
손바닥으로 바람의 감촉을 느끼며 이안이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 합격한 거 축하해주러 온 건가요?”
“그것도 있고, 이것저것 얘기할 것도 있어서요. 이거. 당연히 읽어봤죠?”
헤더가 내민 건, 이번 기수의 코르디스 합격자 명단이었다.
7번째 순서에 성 없이 덩그러니 적힌 이안의 이름은 몹시도 눈에 띄었다.
“요즘 소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보면 항구든 술집이든 광장이든 온통 후배님 얘기밖에 없다고요.”
“……벌써 거기까지 다 퍼졌나요?”
“소문이란 바람과 같아서, 눈 깜짝하는 사이에 퍼져 버리거든요. 그만큼 후배님이 해낸 일이 대단한 거기도 하고요. 평민이 10위 안에 들다니. 전무후무한 일이에요.”
높디높은 코르디스의 입학 문을 당당히 부숴 버린 이안의 소문은 누구나 관심을 기울일 이슈였다.
헤더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싱글거리며 설명했다.
“시민들이 다 자기 일인 양 기뻐하고 있어요. 뭐, 일부는 이안이 귀족이라고 의심하고 있지만요.”
“음. 그건 좀 예상외네요.”
“하하. 부담가지라고 꺼낸 얘기는 아니었지만요.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후배님에게 기대하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뭘 기대하는지는 각자 다르겠지만, 저도 기대하고 있고요.”
“기대요?”
이안이 되묻자 헤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솔직히 저 같은 사람에게 코르디스는 뭐랄까…… 여러모로 답답한 곳이거든요. 어쩌면 후배님이란 존재가 코르디스에 부는 신선한 바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멋대로 기대하고 있어요.”
“음…….”
솔직히 헤더가 바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게 만약 어떤 종류의 변화라면, 분명 그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부터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대륙 각지에서 일어날 테니까.
물론, 코르디스에서도.
“아무튼. 다음에는 코르디스에서 뵙는 거로 하죠.”
그렇게 말만 남기고 헤더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전히 바람 같은 사내였다.
한동안 헤더가 사라진 빈자리를 쳐다보던 이안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
어느새 해가 바뀌었다.
이제 곧 입학식이라 슬슬 코르디스 기숙사에 미리 입사해야 했다.
이안은 지난 일 년을 곱씹으며, 항구로 천천히 향했다.
‘돌이켜보면 진짜 쉽지 않았네요.’
여러모로 죽을 맛이었던 1년이었다. 실제로 여러 번 죽을 뻔하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이안은 변했다. 그 전의 이안과는 다른 사람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 믿었는데, 은근 휙휙 바뀌더라고요.’
[결국, 사람을 만드는 건 환경이니까요.]
몇 번을 되새겨 봐도, 이네스를 만나기 전에는 고통스러운 기억뿐이다.
그 당시의 아픔이 떠올라 이안이 얼굴을 찡그리던 그때.
조그마한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이안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응?”
“히, 힘내세요!”
수줍게 말하며 붉은색 꽃을 건넨 아이들은 이내 쪼르르 사라져 버렸다.
“……한겨울에 꽃을 잘도 구했네. 이거 생화인가?”
그렇게 꽃을 들고 서 있으려니, 시민들이 하나둘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네가 그 귀족님들 학교에 가는 놈이냐? 소문대로 재수 없게 생겼구만.”
“가서 열심히 하라고!”
“아침 드셨나요? 든든하게 이거 먹고 힘내주세요.”
“아니 이 후줄근한 옷은 뭐야. 이런 걸 입고 귀족님들 사이에 가려고 했단 말이야? 내가 다 쪽팔리네.”
“가서 옷가게 피터 아저씨 데려와!”
검은 머리 검은 눈은 어디서나 굉장히 눈에 띄는 외모였다.
이안을 알아본 시민들이 몰려들어 빵이며 과일이며, 옷이며 이것저것 챙겨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몇 명은 여전히 이안을 꺼려하는 기색이 엿보였지만, 외모에서 오는 꺼림칙함을 호기심이 이긴 듯했다.
그리고 한바탕 소란이 끝났을 때쯤. 이안의 손에는 잡다한 짐이 잔뜩 들려 있었다.
이안은 갑작스러운 일에 다소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었다.
‘뭐지?’
이안의 민감해진 감각에 시민들이 저희들끼리 떠도는 목소리가 들렸다.
“만약 우리 같은 평민이 저곳에서 무사히 졸업만 한다면, 엄청 대단한 일일 거야. 그치?”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저 녀석이 보여줬으면 좋겠어. 힘들기는 하겠지만…….”
헤더가 말해준 대로 시민들은 이안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언제는 생긴 것 때문에 멸시하더니, 이제는 또 맘대로 기대를 걸어 버리고.
인간이란 참으로 제멋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요? 저들에게 나쁜 뜻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겠죠?’
이안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는 그나마 가진 것도 다 빼앗겼는데, 이제는 두 손 가득 선물을 들고 있다.
불과 1년 사이에 이리도 많이 변했다. 이런 게 인생의 오묘함인가.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분이 썩 나쁘진 않네요. 욕먹는 것보다는 낫죠.’
그럼 감상과 함께 수많은 시민의 응원을 뒤로하며, 이안은 보무도 당당하게 항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