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34화 (35/222)

34. 이건 빚이다.

‘피에람의 긍지’

크레이 사가에 있는 수많은 아티팩트 중에서도 손에 꼽는 걸작.

피에람의 초대 가주가 심혈을 기울여 자신의 불꽃을 잘라내 보석에 담았으니,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는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원래는 이 시기에 절대 얻을 수 없는 물건이기도 하고.’

아티팩트의 효과를 발동하면 모든 걸 불살라 버리는 불꽃이 둥글게 신체를 감싸게 된다.

불꽃은 날아오는 모든 공격을 막아주는 동시에 주위를 불태워버리는 훌륭한 공격 수단의 역할까지 겸한다.

지속시간은 3초.

사실상 사용자를 3초 동안 무적 상태가 되게 하는 사기적인 아티팩트였다.

“말도 안 돼.”

“마법…… 은 아니고. 설마 아티팩트인가? 이 정도 아티팩트는 피에람 가문 정도가 아니면…….”

그렉과 마리는 혼란스럽게 이안을 쳐다봤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이안이 아티팩트를 사용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아티팩트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는 정말 별거 없는 평민이 맞나? 단순히 검을 조금 다루는 것 외에도, 숨겨둔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저 아티팩트는 그중 하나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마리는 곧 평정을 되찾았다.

바위를 다루는 마법사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단단한 마음가짐이다.

화력은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떨어져도, 그들이 전장에서 선호 받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진정해 그렉. 설마 겁먹은 거야?”

“거, 겁먹었다니! 그냥 저놈이 쓰는 아티팩트가 생각보다 화려해서 잠시 당황한 것뿐이야.”

“그거라면 걱정 마. 저 브로치, 붉은빛이 사라졌잖아?”

그 말대로.

이안이 붙잡고 있는 붉은 브로치는 어느새 빛을 잃어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다.

“지금은 다시 사용할 수 없다는 거겠지. 애초에 저 정도 아티팩트는 다시 사용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할 거야.”

“그러면 지금 저놈은 아무것도 없다 이건가?”

“그야 모르지. 저 정도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을 정도니…… 뭘 더 숨겼을 수도.”

이안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마리의 추측대로 ‘피에람의 긍지’는 한번 사용하면 오랜 시간 불꽃 속에 집어넣어 놔야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일종의 충전식인 셈이다.

그 사실을 짐작해낸 그렉이 다시 자신감을 되찾았다.

한순간 겁먹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사납게 말했다.

“그런 게 있었으면 그걸로 끝냈어야지. 멍청하게 아끼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됐네?”

“그렇다고 널 산채로 태워 버릴 수는 없잖아. 그리고…… 대충 파악했어.”

그렉의 전투 스타일. 움직임. 마리와의 연계.

모두 충분히 눈에 담았다.

아마 둘은 합을 맞춰본 지 얼마 안 되었을 거다.

루크의 사주를 받고, 이안을 담구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손발을 맞춰봤겠지.

하지만 짧은 시간치고는 상당히 훌륭한 팀워크다.

그렉이 온 힘을 다해 시선을 끄는 사이 마리가 마법을 준비하고, 그렉이 먼지 구름을 일으켜 시야를 가린 사이에 화력을 쏟아붓는다.

마법사와 전사가 보여줄 수 있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연계였다.

[과연 코르디스. 역시 훌륭하네요]’

‘아주 정석적이에요.’

하지만 그뿐이다.

그 이상의 특별함은 없었다.

정석적인 움직임은 실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그 수가 뻔히 들여다보일 뿐이다.

“슬슬 끝내자.”

“뭐?”

탁.

이번에는 이안이 먼저 땅을 박찼다. 생각 외로 빠른 속도에 그렉이 당황했다.

“이 새끼 지금까지는 힘을 조절하면서…….”

부웅!

메이스가 허공을 갈랐다. 직접적인 타격보다는 견제를 위한 공격.

하지만 이안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땅을 굴렀다.

‘이놈의 실력이나 힘은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해.’

하지만 상대적으로 심리전이나 기교에서는 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더 간단히 말하면, 그렉은 단순하다.

멋들어지게 한 바퀴를 구른 이안은 그대로 검집을 들어 그렉의 발가락을 힘껏 찍었다.

빡!

“끄악! 이 새끼가……!”

방패는 그 크기가 작아질수록 가벼워지는 대신, 하반신이 무방비해지는 법.

빈틈을 찔린 그렉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곧바로 반격하려 했지만 이미 이안은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설마……!”

이안이 달려가는 쪽에 있는 건 마리.

전투에서는 마법사를 최우선으로 처치하라는 법칙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안색을 굳힌 마리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투툭. 툭!

땅에 있던 흙이 순식간에 공중에 뭉쳐서 주먹만 한 돌덩이가 된다.

그와 동시에 돌덩이들이 이안을 향해 다각도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느리다.

위력을 위해 돌덩이를 크게 키운 만큼, 날리는 힘 자체는 느려질 수밖에 없다.

후웅.

이안은 날아오는 돌덩이에서 끝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검을 휘둘렀다.

탕! 타탕!

넘길 건 넘기고, 맞아줄 건 맞아주고, 위력적인 궤도의 돌덩이만 쳐낸다.

순식간에 돌덩이 세례를 돌파해낸 이안을 보며 마리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이런…….”

어느새 이안이 코앞에 다가왔다. 마리는 급하게 양손을 땅에 짚었다.

퉁!

자그마한 돌과 모레들이 마리의 주위에 소용돌이치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위력 자체는 높지 않다.

어디까지나 시간 벌기.

이안은 검을 횡으로 휘둘러 회오리를 갈랐지만, 어느새 마리는 땅을 구르고 있었다.

귀하게 자라온 그녀는 처음 겪어보는 굴욕. 그리고 치욕.

하지만 체면이고 뭐고 다 버렸다.

자랑하던 긴 머리에는 흙과 먼지가 잔뜩 엉겨 붙어 있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란 말인가.

‘어퍼 클래스에만 갈 수 있다면…….’

질 수 없다는 절박함.

위로 올라가야만 한다는 강한 집념.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비단 마리만이 아닌지, 그렉도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로 필사적으로 다가와 메이스를 휘둘렀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다.

한쪽 다리를 저는 만큼, 밸런스는이미 무너져 있다.

탕!

이안의 검이 메이스의 옆면을 때리고, 기우뚱한 그렉이 방패를 휘두르기 전에 왼팔을 발로 차 방패를 떨어트렸다.

“끄악!”

그렉은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면서도 끝끝내 남은 손으로 이안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안이 서둘러 검집으로 오른팔을 내리찍어 남은 메이스도 떨어트렸지만, 도리어 그렉은 양팔로 이안의 양다리를 감싸 안았다.

섬뜩할 정도의 집념.

그렉이 외쳤다.

“지금이야!”

“미안해! 알아서 버텨!”

마리가 입술을 깨물며 돌덩이를 사선으로 날렸다.

그렉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이안을 쓰러트릴 생각이었다.

‘미리 합의된 움직임인가?’

고민해봤지만, 이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같은 목표를 간절히 바라는 둘의 마음이 통했다고밖에…….

어쨌든 떨어지는 돌덩이들에는 자비가 없었다.

‘어떻게 하지.’

그렉을 베고 빠져나오는 건 쉽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루크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꼴이다.

여기서 남은 수는…….

‘다 쳐내는 수밖에.’

[할 수 있겠어요?]

‘해 봐야죠.’

먼지로 시야가 가려진 아까와는 다르다.

이안은 성검에 씐 검집을 버렸다.

평범한 검으로 돌을 쳤다가는 이가 나가 버리겠지만, 튼튼하기로는 이 세상에서 순위를 다투는 성검이다.

이안은 조용히 검을 들고 정신을 집중했다.

갑작스럽게 드러난 성검의 칼날에 그렉은 순간 겁을 집어먹었지만, 이내 이안의 의도를 깨닫고 더 힘껏 팔을 그러모았다.

덕분에 다리에 균형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그 말은 조금만 실수해도 곧 균형을 잃고 넘어진다는 의미.

“후우.”

이안은 고르게 심호흡하며 타이밍을 쟀다.

검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거리감.

미세한 간격의 차이로 승부가 나는 게 검사의 전투다.

더 정확하게. 더 확실하게 계산하는 쪽이 승리한다.

이안은 계산했다.

돌덩이들이 날아오는 방향과 속도를 하나하나 눈에 담고, 궤적을 읽었다.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네스의 천재적인 재능을 물려받은 지금은. 그 압도적인 기술을 조금이나마 전수받은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가능하다고 믿었다.

휘익.

때가 왔을 때.

이안은 검을 휘둘렀다.

***

그렉은 이안의 양다리를 붙잡고 있는 것도 잊고 멍하니 위를 쳐다봤다.

이안이 검을 몇 번 휘둘렀다.

그리고 날아오던 돌덩이가 모조리 옆으로 튕겨 나갔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렉이라면 할 수 있었을까?

아니. 불가능하다. 긴 시간 동안 수련을 거듭하면 모른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이안의 실력은 더 앞서나가 있을 터.

그렉은 살면서 처음으로 ‘재능’ 이란 걸 마주쳤다.

‘이게 진짜 재능이란건가?’

입학 시험에서 간발의 차이로 사이드 클래스에 배정받았을 때도 이렇진 않았다.

마음을 조이는 열등감. 그리고 피어오르는 희미한 선망.

그런 감정을 처음 느낀 게 다른 누구도 아닌, 그토록 아니꼽게 여기던 검은 머리 평민이라니.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다시 검집을 찾아 집어넣은 이안이 만신창이가 된 그렉에게 물었다.

“더 해볼 생각이야?”

그렉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안은 마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머리를 한계까지 쥐어짰는지, 코피를 줄줄 흘리는 마리가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다.

더 저항할 의지는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의지를 잃은 적에게 폭력을 휘두를 셈은 아니죠?]

‘이러나저러나 아직 애들인데, 제가 그 정도로 양아치는 아닙니다. 그리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요. 파이팅 있잖아요?’

둘이 보여준 강한 의지와 분투는 이안에게도 꽤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안은 그렉과 마리를 불러모았다. 이미 실력 차를 알아 버린 둘은 체념한 얼굴로 푹 고개를 숙였다.

“대충 너희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알겠어. 루크 그놈 때문이지? 나를 때려눕히면 어퍼 클래스에 올라오는 데에 도움 줄 거라고 하든?”

“…….

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안의 추측은 모두 맞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미주알고주알 떠들 만큼 입이 싼 녀석들은 아니었다.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이안이 제안했다.

“오늘 있었던 일은 그냥 우리끼리 입을 싹 씻자.”

“뭐……?”

“그냥 없던 셈 치자고. 너희도 어디 가서 나한테 얻어맞았다는 소문이 돌면 곤란하잖아?”

그렉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만약 그런 소문이 돈다면 어떤 시선이 날아올지는 뻔했다.

지금이야 그렉은 이안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지만, 다른 학생들에게 아직 이안은 건방진 평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터.

자기만 욕먹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가문까지 욕먹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안이 건넨 제안은 매우 기꺼웠다.

마리도 마찬가지였는지 표정이 밝아졌지만, 조심스레 물었다.

“그, 그래도 되는 거야?”

“뭐가?”

“싸움에서 이겼으니, 우리한테 이것저것 요구할 수 있잖아. 심지어 우리는 너를…… 손 봐주려 했고.”

“됐어. 애들끼리 쌈박질 좀 할 수 있는 거지.”

“애, 애들끼리?”

코르디스에는 여러모로 적이 많다.

여기서 적을 늘리면 위험하다고. 뒷골목에서 기른 생존 본능이 경고를 보냈다.

‘여기서 무리하게 무언가를 요구하기보다는 관용을 베푸는 게 낫겠죠.’

계산이 섰고, 그대로 했다.

아마 그렉과 마리는 이안이 대단히 자비로운 인간쯤으로 보이겠지.

그렇다면 더 좋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이안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마리와 그렉은 입을 다물고, 꽤 긴 시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그렉이 분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 건 빚으로 기억해 놓겠어. 여전히 너는 마음에 안 드는 자식이지만, 나중에 어떻게든 빚은 꼭 갚을 거다.”

“나도 염치는 있어. 맨입으로 안 넘어갈게.”

마리와 그렉 둘 다 너무 진지한 어조라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인맥에 기대 승진을 노리는 것도 좋지만, 자기 실력도 열심히 늘리고.”

이안은 적당히 손을 휘휘 저으며 말하다가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 너희들한테 부탁할 게 있다.”

“뭐냐!”

“말만 해.”

“의뢰에 있는 약초들. 너희들이 다 캐와. 난 좀 쉬고 있으련다.”

“…….

“그게 끝?”

“빚은 꼭 갚는다며. 빨리 갔다 와.”

“이런 건……! 후, 됐다.”

더 화를 내려다 가라앉힌 그렉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숲의 안쪽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그 뒤를 마리가 코피를 닦으며 뒤따랐다.

[생각보다 깔끔하게 일을 마무리했네요.]

‘앞으로 반년은 있어야 하잖아요. 웬만하면 깔끔하게 지내야죠.’

이안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나무 등치에 몸을 기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몸을 많이 움직여 체력 소모가 크다.

게다가 신경을 집중하느라 피로가 배가 되니, 어서 빨리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도 마음속을 채우는 뿌듯함 덕에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자기 실력이 이 정도로 늘었다는 걸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으니까.

‘솔직히 아까 검으로 돌덩이 다 튕겨낼 때 좀 멋있지 않았어요?’

[자기 입으로 그런 말 하는 건 하나도 안 멋진 법이에요. 이안.]

‘됐고. 인정해요 안 해요. 빨리 그것만 말해요.’

[…….인정해요.]

기어코 대답을 받아낸 이안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짧은 단잠에 들기 전, 이안은 문득 생각했다.

‘뭔가 하나 잊은 게 있는 것 같은데…… 뭐 상관없으려나.’

숲에서 길을 잃고 눈물을 터트린 로든이 발견된 건 그로부터 반나절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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