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38화 (39/222)

38. 흔적

이안은 미궁이나 다름없는 도서관을 헤쳐나갔다.

기본적으로 학자들의 숲은 장서의 훼손을 막기 위해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구조였다.

대신 책장 사이 사이에 박힌 야광석이 태양을 대신해 주위를 밝혀 주고 있었다.

샤샤샥.

가끔 이안이 발을 옮길 때마다 문자처럼 생긴 자그마한 존재들이 후다닥 달아났는데, 그럴 때마다 이네스는 옅게 미소지었다.

[책의 정령이네요. 오래된 도서관이 아니면 보기 힘든 존재예요. 운 좋게 친해지는 데 성공한다면, 옛이야기 들을 들려줄 수도 있어요. 수다쟁이들이거든요.]

‘별별 정령이 다 있네요. 그러고 보니 정령이 정확히 뭔가요? 수업을 듣는데 원체 뜬구름 잡는 얘기만 늘어놓던데.’

이안은 책의 정령들을 휘휘 내쫓으며 그리 물었다.

정령들은 책 이곳저곳으로 스며들었다.

[여러 가지가 있어요. 사람이 오래 사용한 물건에 혼이 깃들어 정령이 될 수도 있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외나 감정, 여러 믿음이 실체를 이루어 정령이 되는 경우도 있고요.]

정령 또한 인간에 의해 탄생한 존재. 그리고 그런 정령과 교감할 수 있는 자들을 정령사라 부른다.

한때는 그런 정령사들이 지금의 성직자들의 위치였지만…….

[교단이 들어서기 전 먼 옛날에는 불의 정령이나 바위의 정령 같은 자연을 신앙으로서 숭상했다고 해요. 그때에는 정령왕이라 불릴 정도로 강한 정령들도 많았다고 하는데…… 뭐, 요즘은 이런 얘기를 하면 교단에 붙잡혀 목이 잘리겠지만요.]

“…….

살벌한 말에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한때 성검을 지니고 악마에 맞섰던 이네스다.

분명 교단과도 이래저래 엮인 게 많았을 거다.

그 탓인지 이네스는 교단에 대해서 썩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뭐. 어쨌든 이 책의 정령들이 공격성이 없는 건 다행이네요.’

[글쎄요. 책을 훼손하는 사람의 귓가에 저주의 말을 읊기도 한다는데요. 어디까지나 괴담이지만요.]

“……괴담 맞죠?”

이안은 혹여나 떨어져 있는 책이라도 밟을까, 괜스레 발을 조심하며 살금살금 걸었다.

크레이 사가에는 히든 피스가 곳곳에 숨겨져 있어, 그걸 찾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당연히 이 도서관에도 히든 피스가 숨겨져 있다.

기억을 더듬어 이리저리 걷다 보니 괴수들에 대한 연구를 다룬 책이 모여 있는 구역에 도착했다.

주위를 유심히 살피던 이안은 벽장 안에 박혀 있는 유난히 크고 두껍고, 오래된 책을 꺼내 들었다.

[당신이 두려워해야 할 백 가지 괴수라…… 표지에 붉은색 해골이 그려져 있는데, 왠지 펼치면 안 될 것 같은데요?]

‘게임에서는 코덱스라 불리는 녀석이죠.’

다양한 종류의 힘을 부여해주는 서적, 코덱스.

하지만 당연하게도, 보상이 공짜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이안은 조심스레 코덱스를 펼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주위의 풍경이 변했다.

책만 가득한 도서관에서, 사방이 뚫린 메마른 황야.

하늘에 뜬 보름달은 구름에 가려 흐릿하게 보였다.

[맙소사. 환각을 일으키는 마법인가요?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짐작조차 안 되네요.]

경험 많은 이네스조차 경악할 정도로 기묘한 현상.

이안은 말없이 성검을 뽑아 들었다.

‘메마른 초원에 보름달. 이럴 때 나올 괴수는 하나밖에 없죠.’

그와 동시에 뒤쪽에서 중저음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보다는 꼭 짐승의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너, 너는 누구냐. 여기는 대체…….”

온몸에 털이 숭숭 나고, 넝마에 가까운 로브를 걸친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나, 나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이곳에서 한참을 헤매고 있어. 혹시 이곳에서 나가는 방법을 알면 제발 나를 데리고 나가줘……!”

사내가 비척비척 다가왔다.

유심히 지켜보던 이네스가 숨을 삼켰다.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영혼이잖아요!]

‘아무래도 이 코덱스를 만든 마법사는 수집욕이 강한 모양이네요.’

곤충을 잡아 박제해 놓은 곤충 표본이 생각났다.

이 코덱스는 그런 곤충 표본과 본질적으로 같았다.

단지 그보다 몇 배는 뛰어나고, 더 희소하며, 더 악랄할 뿐.

[아무리 괴수라고 해도 그렇지. 몇백 년을 책 안에 가둬두다니…… 심지어 저 사내는 반쯤은 인간이잖아요.]

마찬가지로 검에 갇혀 지내본 이네스이기에 눈앞의 사내가 어떤 느낌으로 살아왔는지 잘 알았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이네스가 말했다.

[해방시켜주죠. 이안.]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끄윽…… 끄아아!”

사내가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질렀다.

하늘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이동하며, 비정상적으로 밝은 보름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보름달을 보며 꺽꺽거린 사내의 두 눈이 붉어졌다. 주둥이는 길쭉해지고.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이 자라났다.

이안은 차분히 자세를 잡았다.

[혹시 이곳에서 패배하면 어떻게 되죠?]

‘죽지는 않지만, 한동안은 기절해 있죠.’

목숨의 위협 없이 전투 경험을 쌓을 좋은 기회.

게다가 책 속의 괴수를 모두 이기면, 보상도 얻을 수 있다.

‘100마리를 다 잡는 게 번거로워서 그냥 스킵하려고 했는데……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려고요.’

“크르르.”

변신이 끝났다.

갈가리 찢겨 버린 로브 아래 있는 건 더는 사람이 아닌, 한 마리의 웨어 울프.

놈이 이안을 보며 군침을 흘렸다.

“크르르.”

[매우 굶주린 모양이네요. 말했지만 굶주린 괴수일수록…….]

‘포악하다는 거죠? 벌써 10번은 넘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네스가 그 말에 대꾸하기도 전에 웨어 울프가 달려들었다.

네발로 뛰어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웨어 울프가 앞발을 휘둘렀다.

캉!

비스듬히 검을 휘둘러 손톱을 막아낸 이안은 검에 느껴지는 충격을 가늠했다.

‘괴수치고는 그렇게까지 강한 힘은 아니야. 그렉보다 조금 윗 단계 정도?’

우선은 정보 수집.

웨어 울프의 빠르기와 힘에 대한 대략 적인 정보를 머리에 집어넣은 이안은 찌르기를 펼친 직후,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검 끝이 웨어 울프의 팔에 닿았지만, 별다른 상처는 나지 않았다.

털과 가죽이 만만치 않게 단단하다는 뜻이었다.

“캬악!”

오히려 화만 돋운 것 같다.

눈이 훼까닥 돌아간 웨어 울프가 아가리부터 들이밀며 달려들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앞니.

제법 살벌한 기세였지만, 이안은 침착했다.

‘얼마 전에 본 걸 써먹어 볼까.’

떠오른 건 그렉의 움직임.

직접 맞부딪혀본 그렉의 힘 자체는 분명 수준급이었다.

정면 힘 대결을 펼친다면 어퍼 클래스에서도 이길 이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렉의 공격은 그리 빠르지 못했다.

무기 자체의 한계인지, 아니면 본인의 문제인지.

조금만 집중하면 쉽게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렉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발한다.

‘공간을 점한다.’

무기를 휘둘러 자기 앞의 공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애초에 상대를 맞출 생각이 아니라, 행동을 강제 시켜 주도권을 가져오는 식으로 싸우는 것.

그렇게 상대를 궁지에 밀어 넣고, 확실한 순간에만 치명타를 날리는 게 그렉의 스타일이다.

‘핵심은 상대를 내가 원하는 방향을 유도한다…… 인가.’

단순히 상대에게 대응하는 것만이 아닌, 전투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행위.

이안은 그렉의 움직임을 상세히 해석하고,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답을 찾아냈다.

‘이렇게.’

후욱. 훅

이안은 허공을 향해 검을 흩뿌리듯이 연달아 찔렀다.

그렉처럼 단순히 강하게 휘두르는 게 아니라 일부러 화려하게 움직였다.

실제로 이안의 노림수는 효과를 보였다.

“크, 크르르…….”

빠르게 휘둘러지는 날카로운 검은 시각적으로 위협을 주기 충분했다.

결국, 기계가 아닌 감정이 있는 생물간의 싸움이다.

자그마한 심리의 변화가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 법.

이안은 웨어 울프가 주춤하는 틈을 타, 오히려 역으로 치고 들어갔다.

강하게 파고들어오는 검을 웨어 울프가 급하게 피해냈다.

‘공수가 바뀌었다.’

공격을 하던 웨어 울프가 수비를. 막는 입장이던 이안이 공격을 시작했다.

흐름이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이안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게 그렉의 방식인가.’

만약 그렉의 실력이 조금만 더 뛰어났더라도. 저번 싸움이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안은 차분하면서도 견고하게 공격을 펼쳐냈다.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강한 공격은 자연스레 큰 틈이 만들어지고. 큰 틈은 곧 역전의 발판이니.

상대가 거리를 벌리지 못하게 자잘하게 견제하며, 철저히 장기전으로 끌고 들어갔다.

누구의 인내심이 먼저 고갈되느냐의 싸움.

그리고 당연하게도. 불리한 처지에 놓일수록 마음은 더 급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크르륵!”

결국. 견디지 못한 웨어 울프가 충동적으로 결심을 내렸다.

설령 큰 상처를 입을 걸 각오하고라도 억지로 뚫고 들어오는 맹렬한 돌진.

하지만 예상하고 있었다.

이안은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며 웨어 울프를 요리했다.

“크아아!”

단단한 가죽에도 상처가 하나둘 생겨나고. 움직임은 점점 둔해진다.

승기가 급격하게 기울고.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횡으로 휘둘러진 성검이 웨어 울프의 가슴에 긴 상처를 만들었다.

웨어 울프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압도적인 승리.

이네스 조차도 순수하게 감탄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서. 이번에는 흠잡을 데가 없네요. 전투에서 배운 걸 응용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를 압도했어요.]

‘별말씀을요.’

[이제 단순히 배운 걸 암기하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직접 사고하고 개선하는 경지에 들어서다니. 괄목할 만한 성장이에요.]

흔치 않게 칭찬을 쏟아내는 이네스의 모습에 이안은 괜스레 머리를 긁적였다.

그 사이. 바닥에 쓰러져 대지를 피로 적시던 웨어 울프의 모습이 변해갔다.

“크륵…….”

주둥이나 발톱 따위가 줄어들더니 아까 보았던 사내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다시 눈에 돌아오는 흐릿한 총기.

사내가 힘겹게 말했다.

“……기억났다. 웬 미치광이가 우리 마을에 쳐들어와 내 일족을 전부 죽이고. 내 영혼을 이 공간 속에 처박아 두었었지.”

사내의 두 눈에는 은은한 분노가 깃들어있었지만, 그 분노조차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사내는 너무 오래 갇혀 있었고. 너무나 지쳐 있었다.

“덕분에 나도 이제 위대한 굴레에 들어설 수 있겠군. 고맙다.”

“아니. 그냥 가지 말고. 뭐라도 주고 가.”

“…….

점점 신체가 흐릿해지는 사내를 보며, 이안은 급히 말했다.

잠시 말을 잃은 사내가 억지로 근엄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곳에 갇힌 모두를 해방한다면. 그에 대한 보상을 얻을 것이다.”

그리 말을 남기고, 혹여라도 이안이 다시 입을 열까.

사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쉬움에 이안은 입맛을 다셨다.

‘쩝. 혹시라도 보상을 미리 얻을 수 있나 기대했는데. 꼼짝없이 100마리 다 상대하게 생겼네요.’

[…….삶을 마무리하는 상대한테 꼭 그렇게 말해야겠어요?]

주위 풍경은 어느새 바뀌어, 이안은 다시 책들 사이에 서 있었다.

쿰쿰한 공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대충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성검을 다시 검집에 넣은 이안은 코덱스를 챙겼다.

“뭐, 이건 시간을 들여 천천히 하고. 다음 목적으로 가죠.”

이안은 걸음을 옮겼다.

이리저리 걷다가 으슥한 곳에 부자연스럽게 책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 곳을 발견했는데. 그 책들을 조심스레 치우자, 자그마한 통로가 눈에 들어왔다.

[비밀 통로네요…….]

‘사서가 말한 공간 중 하나겠죠.’

비좁은 공간을 엎드려서 기어가니, 이내 좁은 원룸 크기의 공간이 하나 나타났다.

이네스가 펼쳐진 풍경에 말을 잃었다.

[세상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닭과 비둘기의 사체.

그 시체의 피로 그린 듯한 기하학적인 마법진.

한쪽 벽을 장식한 알 수 없는 동물의 큼지막한 두개골.

누가 봐도 불온한 의식을 치렀다는 걸 알 수 있는 흔적이었다.

[악마 소환 흔적이잖아요…….]

기분 탓인지 꽤나 눅눅하고 역겨운 분위기가 공간을 타고 흘렀다.

이안은 코를 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 코르디스 자체가 특수한 환경이니 교단이 간섭하기 힘들겠죠. 심지어 그 코르디스에서도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이곳이라면…….’

악마 소환과 관련된 실험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인 셈이다.

이안은 바닥에 널브러진 닭 사체를 유심히 살폈다.

딱히 방부처리를 하거나 한 흔적은 없었다.

그럼에 닭이 썩지 않았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건 하나다.

‘닭을 잡은 지 얼마 안 됐다는 거네요.’

범인은 불과 얼마 전.

이곳을 왔다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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