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39화 (40/222)

39. 실마리

이 악마 소환 의식은 비교적 최근에 행해진 것 같다.

기물들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는 모습이나, 다소 어색한 마법진의 모습이나.

어디까지나 실험용으로 그려 본 것 같았다.

‘어쨌든. 큰 스토리가 원래대로 진행되는 것 같긴 하네요.’

이런 식으로 의뢰를 하나하나 수행하다 보면, 플레이어는 종종 악마 소환과 관련된 증거를 마주친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이 같은 사실을 밝혀도 믿어주지 않고. 도리어 의심을 사면서 행동에 제약 생기고 만다.

그러다 결국 악마가 소환되어 버려 학사가 큰 타격을 입고. 플레이어가 악마를 저지하는 게 스토리의 기본 얼개.

‘하지만 지금 같이 제 평가가 안 좋을 때 괜한 의심을 샀다가는 어떻게 될지 몰라요.’

최악의 경우네는 이안이 악마 소환과 관련이 있다고 엮어 처벌될 수도 있다.

골칫덩이를 치워 버릴 수만 있다면, 진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법이니까.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범인을 잡는 건 어떨까요?]

‘그쪽도 바보는 아니겠죠. 아마 누군가 여기 침입했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을 거예요. 그 정도 신중함도 없으면, 이미 진즉에 목이 잘렸겠죠.’

이안은 고민했다.

참으로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는 여전히 악마 소환 자체는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악마 소환 이벤트가 없어지면 성검을 탈취할 기회도 없어지고. 스토리의 흐름이 어디로 튈지 모르게 되어 버린다.

둘 다 이안이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네스의 말마따나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성미에 안 맞다.

‘놈을 심리적으로 급하게 만들거나 압박해서. 소환되는 악마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법이 없을까?’

만약 이안이 악마 소환의 범인을 쫓으면. 과연 범인은 겁을 집어먹고 숨어 버릴까.

아니면 마음이 급해져 소환을 서두를까.

쉬이 확신할 수가 없다.

‘정보가 너무 적으니,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네요.’

[저도 악마를 소환하는 법에 대해서는 잘…….]

‘잠깐.’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의별 장서들이 전부 모여 있는 이곳에. 혹시 악마에 관련된 내용도 있지 않을까?

‘아마 범인도 다른 곳이 아니라 이곳에서 정보를 얻었을 거 아니에요.’

게다가 악마에 대해 더 알면, 어쩌면 최종보스를 더 간단하게 쓰러트릴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실마리는 얻었다.

이안은 서둘러 그렉과 마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렉과 마리는 책을 분류하다 지쳤는지.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 주제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하면 실력을 증진할 수 있는가 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마법사를 상대하려면 멘탈을 흔들어야 한다 이거지?”

“결국 정신력으로 심상 속에 있는 마법을 현실에 구현하는 거니까. 심리적으로 흔들리면 마법을 실패할 가능성도 커져. 심하면 자기 마법에 잡아먹히는 경우도 있지.”

“흥미로운 얘기 중이네.”

이안이 자연스레 끼어들자 그렉과 마리가 험악하게 노려봤다.

“화장실을 좀 오래 갔다 오네?”

“중간에 길을 잃어서 말이야. 그보다 그 얘기나 계속해봐.”

“그런 식으로 능구렁이처럼 주제를 돌리려…… 후우. 됐다. 그냥 마법사를 상대할 때에 요령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어.”

마리는 긴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만사가 귀찮은 표정이었다.

그렉은 턱에 손을 짚고 곰곰이 생각했다.

“욕설이나 비아냥으로 상대를 긁는다거나? 아니면 가족을 인질로 잡거나 살해해서 심리적으로 흔들 수 있다는 거냐?”

“그래. 그렉. 이 쓰레기 같은 놈아. 정확해.”

“왜, 왜애! 나는 그냥 어디까지나 예시로서 생각한 거야!”

얼굴이 빨개져서 발끈하는 그렉을 무시하며, 마리가 이어 말했다.

“그래서 마법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할 수 있는 냉철한 이성이야. 가문에서도 보통 그런 쪽의 정신교육을 많이 하고.”

또래보다 성숙하고 냉철해 보이는 마리의 성격에는, 그러한 교육의 역할도 한몫했을 것이다.

“다루는 마법의 종류도 큰 영향을 끼치는데, 나처럼 바위를 다루거나 얼음을 다루는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그런 쪽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고…….”

“불이나 벼락같은 걸 다루는 마법사들은 불리하다 이거네?”

“정확해. 그쪽 방면의 마법이 화력은 매우 뛰어나지만, 오히려 선호 받지 못하는 이유지.”

이안은 플로라를 떠올렸다.

확실히. 정신적인 단단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마법사와 싸울 때는 우선 멘탈을 흔들어라. 하나 또 배웠어.’

게임에서 얻을 수 없었던 유용한 정보는 때론 이렇게 예기치도 못하게 찾아오기도 한다.

마리와는 그와 관련해서 대화를 더 나눠보고 싶지만…….

“그래서. 이건 언제 다 치우지?”

그렉은 떨떠름한 얼굴로 주위 책들을 둘러보았다.

산더미란 말이 과장으로 안 들릴 정도로, 잔뜩 쌓인 서적들은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안 보였다.

“뭐. 어차피 오늘 안에 끝내기는 어렵고. 찬찬히 시간 들여서 해야지. 한 일주일이면 되지 않겠어?”

“이, 일주일.”

기왕 악마에 관해서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이안은 책을 정리하는 김에, 겸사겸사 관련 서적에 대해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렉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내색은 안 했지만, 마리도 뜨악한 얼굴.

이안이 가볍게 말했다.

“뭐, 너희는 대충 도와주다 돌아가도 좋아. 나 혼자 천천히 하지.”

아무리 빚이라 해도 그 정도로 부려먹을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잠깐 쉬는 시간에도 실력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둘이다.

이렇게 향상심 있는 애들의 시간을 뺏는 건 너무 미안했다.

“끄응.”

둘은 잠깐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짧게 신음을 흘린 그렉이 입을 열었다.

“흥. 이 그렉이 한번 하기로 한 일을 내팽개칠 것 같아? 일이 끝날 때까지 도울 거다.”

“……맘대로 해라.”

마리도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계속해서 도울 작정인 듯했다.

이안은 책을 집어 철자 순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악마와 관련이 있을까 책을 빠르게 훑었다.

당연히 작업의 진척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래도 이안은 끈기를 가지고 하나하나 책을 훑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검술 훈련은…….’

매일 같이 수련장에 나가 검을 휘두르는 건 이안의 저녁 일과였다.

그날그날의 수련을 빼먹는 건 이안의 성미에 안 맞지만…….

‘어차피 오늘은 웨어 울프랑 싸우기도 했고. 한동안은 괴수들이랑 싸울 것 같으니, 따로 안 가도 되려나?’

이안은 생각을 멈추고 다시 책을 훑기 시작했다.

***

“하암.”

이안은 늘어지게 하품을 내쉬었다. 결국. 어제는 도서관 폐관 시간까지 책을 훑어야 했다.

차라리 육체적으로 힘든 거라면 괜찮으련만.

책을 훑어보고 분류하는 건 생각보다도 많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업이었기에, 이래저래 피로가 많이 쌓였다.

‘거의 공무원 시험 준비할 때랑 비슷한 느낌이네.’

이안은 눈을 비비며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를 들고 걸었다.

그나마 코르디스에서 이안이 마음이 드는 게 바로 이 학생 식당이었다.

대륙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수준급의 음식들이 매끼 나오는데. 심지어 어퍼 클래스 학생에게는 무료였다.

‘어퍼 클래스 만만세네요. 음식 가지고 차별하는 건 좀 쪼잔하지만.’

[사이드 클래스에도 싼값에 식권을 파는 걸로 알고 있어요. 뭐, 중요한 건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기분 문제지만요.]

그런데도 학생 식당은 한산한 편이었다.

하나 같이 돈 있는 집안의 자재들이라 그런지, 섬의 상업 구역에 있는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서 사 먹는 걸 선호하는 듯 했다.

‘배부른 새끼들. 돈 귀한 줄 모르고.’

이안은 접시를 들고 적당한 자리를 찾아 천천히 걸었다.

‘기왕이면 혼자보다는 다른 사람이랑 먹고 싶은데.’

마리와 그렉. 하다못해 플로라라도 있었으면 합석했을 텐데,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이안은 식당을 천천히 거닐었다.

한편.

식당 한구석에서 혼자서 우아하게 식사하던 레아도 이안을 발견했다.

레아는 그날 이후. 이안에게 그때의 일을 사과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기회는 쉬이 오지 않았다.

평생을 고귀하게 대접받아 온 레아가 누군가에게 사과할 일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이성은 지금이라도 빨리 사과하라 외쳤지만, 도무지 몸이 말을 안 들었다.

특히, 남들이 지켜보고 있을 때 사과하는 건 부끄러워도 너무 부끄러웠다.

‘어제는 수련장에도 안 나오던데 설마 나 때문에…… 지금이 기회야.’

그때. 마치 상대의 빈틈을 포착하는 숙련된 검사처럼.

레아가 기회를 포착했다.

‘같이 먹을 사람을 구하는 것 같아.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평소보다 행복하다고 들었어. 그러니 합석해서 밥을 먹다가 자연스럽게 사과한다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완벽한 계획! 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을 걸려던 그때.

“혹시…….”

“어? 로든 선배네요. 같이 밥 먹어도 될까요?”

“응? 어, 어…….”

이안은 같은 검은 머리라 어딘가 동질감이 드는 선배. 로든의 테이블에 합석했다.

레아는 황급히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이안의 뒤를 지나갔고, 그 모든 걸 지켜보던 로든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세요?”

“방금 황녀 저하가…….”

“황녀님이요?”

이안은 뒤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헤헤.”

“그래요?”

둘은 잠깐동안 신변잡기적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로든은 아무래도 대화를 나누기 좋은 상대는 아니었다.

계속해서 대화가 툭툭 끊기자, 이안은 일단 밥을 먹는 데에 집중했다.

로든은 가디건을 젖혀 그 안으로 닭튀김을 집어넣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안에서 그림자 정령이 마치 아기새처럼 닭튀김을 받아먹고 있었다.

이안이 물었다.

“정령도 음식을 먹네요?”

“응…… 음식을 꼭 먹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선호하는 먹을거리는 있더라고. 정령이랑 친해지려면 정령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아두는 것도 한 방법이야.”

카착카착.

기묘한 소리와 함께 닭튀김이 순식간에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그림자 정령은 먹성이 꽤 좋은 모양이었다.

신선한 광경이었지만 금방 흥미가 식은 이안은 주위로 신경을 돌렸다.

학생들은 재잘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느 무리든 주제는 비슷했다.

“이번에 학년별로 두 명씩 나와서 황태자 전하 앞에서 대련한다는데?”

“그러면 황태자 전하의 눈에 들 수도 있다는 거야?”

“마음에만 들면 출세는 보장된 셈이지.”

“어쩌면 나도…….”

“야. 꿈 깨라. 우리 학년에서 두 명 뽑으면 누가 나올지는 뻔하잖아.”

‘시범 대련이라…….’

이 역시 겪어본 적 없는 사건이다. 딱히 이안과 관련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내가 나가고 싶다고 해도 안 되겠지.’

딱히 나갈 생각도 없었다.

굳이 나가서 황태자의 눈에라도 띄면, 그건 그것대로 골치 아파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웬만하면 신경을 끄려 했지만, 누가 나가는지에는 절로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

‘성적순이나 실력으로 보면 플로라나 레아. 루크. 셋 중 두 명이 나갈 텐데. 아무래도 루크는 다른 둘에 비해 부족한 감이 크지.’

이안은 내심 루크가 선택되길 바랐다. 만약 그렇다면 황태자가 방문하기까지 약 한 달.

이안은 루크의 견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다.

‘게다가 루크는 그 둘을 절대 못 이기니, 대련하면 크게 깨지겠지. 평판이나 영향력에도 영향을 끼칠 거야.’

이안은 생각을 정리했고. 로든은 어색한 분위기 때문인지 그림자 정령에만 시선을 주었다.

로든과의 식사는 그렇게 별 대화 없이 끝이 났다.

한 가지 확실해진 건, 로든도 이안과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는 점이랄까.

지나가다가 로든을 경멸스럽게 쳐다보는 학생들의 표정에서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선배는 왜 염색 안 하는 거예요?”

“으, 응?”

“저야 어차피 눈도 검정색이고.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숨기는 건 왠지 자존심 상하고 열 받으니까 그냥 이렇게 다니는 거고. 선배는 충분히 염색할 수 있잖아요.”

직설적인 질문에 로든은 고민했다. 하지만 같은 처지에서 오는 동질감이라도 느낀 걸까.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해봤는데. 정령이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원래대로 바꿨어.”

“하긴 정령사니까, 그런 건 어쩔 수 없겠네요.”

“하나뿐인 친구라서. 헤헤.”

로든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림자 정령을 쓰다듬었다.

그림자 정령은 기분이 좋은지, 손길을 즐기며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퍽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그 뒤로 일과를 보내고. 어제처럼 도서관으로 향하던 이안은, 마리와 그렉에게서 한 가지 희소식을 들었다.

“황태자 전하께 보이는 시범 대련에, 피에람 양과 루크 님이 선정되셨데.”

“레아 님을 제치고?”

“아무래도 황녀님께서 스스로 거절하신 모양이야. 다른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플로라 대 루크.

이안이 기대하던 바대로 이루진 셈이다.

‘이걸로 루크는 나한테 신경 쓰기 어려워지겠지?’

그리고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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