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기사가 되어라
검술이라는 건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다 비슷비슷하다.
만류귀종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얘기는 아니다.
검이라는 건 아무리 포장하고 꾸며봤자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다.
검술이 세월과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했음에도. 그 속을 꿰뚫는 핵심적인 부분이 비슷한 건 당연한 일이다.
목적은 같으니까.
그 목적에 이르는 과정이 조금 다를 뿐이고, 그 점만 잊지 않으면 생각보다 많은 걸 읽어낼 수 있다.
이네스가 오래전에 홀로 얻은 깨달음이 이안의 머릿속에 내려왔다.
이 모든 걸 이네스가 의도한 걸까?
‘아마 그렇겠지.’
평범한 검사라면 어쩌면 평생을 바쳐도 얻지 못했을 깨달음.
하지만 좋은 스승과 그 스승에게서 얻은 재능은 너무나 쉽게 벽을 부숴 버렸다.
카착.
주먹에 제대로 얻어맞은 루크가 저 멀리 날아가 바닥에 쓰러졌고. 루크에게 달려 있던 아티팩트가 조각났다.
“…….
정적이 내려앉는다.
아까와는 그 성질이 다른 정적이다.
관중들의 얼굴에 비치는 감정은 경악.
좋은 혈통, 이름있는 명문가의 자식이자, 코르디스에 2순위로 입학한 뛰어난 검사가 검은 머리 평민에게 당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독약을 먹은 후유증 때문에 제 실력이 안 나온 거야.”
“그, 그런가?”
몇몇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납득하려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결투의 후반부.
이안이 루크를 압도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정적을 처음으로 깬 것은, 누군가가 손뼉을 치는 소리였다.
짝짝짝짝
황태자였다.
그는 뭐가 그리 기쁜지. 체통도 잊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빠르게 박수를 쳤다.
“하하하! 훌륭한 대련이었어. 뭣들 하는가? 승자에게 갈채를 보내지 않고!”
그 말에 뒤에 서 있던 두 마법사가 마지못해 박수를 쳤고.
이내 박수는 전염이 되어, 온 공간이 커다란 박수 소리로 울렸다.
‘살다 보니 이렇게 박수받을 일도 생기네요.’
이안은 승리의 기쁨을 즐기며. 눈앞의 패자를 내려다보았다.
루크는 땅을 두 손으로 짚은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내가…….”
꽤 충격이 큰 것 같았다.
‘하긴. 꽤 타격이 크겠지.’
탄탄대로를 걷던 루크의 명성에는 금이 갔다.
상대하던 이안의 실력이 뛰어났다는 건 중요치 않다.
시간이 지나면 그저 평민에게 졌다는 사실만이 부각 될 뿐이다.
원래 소문이란 게 그런 법이니.
어쨌든.
오늘의 일은 루크의 야망을 이루는 데에 두고두고 걸림돌이 될 것이다.
좌절하고 있는 루크를 조롱하려던 이안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여기서 더 뭐라 했다가는 진짜로 밤에 칼 맞을 수도 있겠네.’
뒷골목에서 단련된 생존본능이 그쯤 하라고 경고를 보냈다.
뭐 아무렴 어떤가.
지금은 그저 이 승리를 만끽할 뿐이다.
하지만 잔뜩 들떠있던 이안의 기분은 황태자의 다음 말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덕분에 아주 즐거웠구나. 특별히 그에 대한 보답으로, 오늘의 승자들과 한 명 한 명 직접 얘기를 나눠보고 싶군.”
다른 이들에게는 황송한 일이겠지만 이안에게는 아니다.
이안의 얼굴이 굳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런 이안을 질투와 부러움 섞인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중에서 단 하나.
깊은 분노와 원망이 담겨 있는 시선이 이안에게 향하고 있었다.
***
“안에 들어가서 극진한 예의를 갖춰야 할 것이다. 네가 평민이라 하니 실수를 저질러도 전하께서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겠지만,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전하께서 묻는 말에는 성심성의껏 답하고, 건방을 떨거나 무례하게 굴면 내가 직접 너를 벌할 것이야.”
새하얀 로브에 기다란 수염. 꼬장꼬장한 얼굴을 한 오테르는 이안에게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었다.
‘게임에서 상대할 때는 그냥 더럽게 까다로운 적이었는데…….’
지금 이렇게 보니.
그냥 잔소리하기 좋아하는 노인이란 느낌이 강했다.
그렇게 거듭된 잔소리에 이안이 고역을 느낄 때.
옆에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거 영감. 그쯤하고 들여보내지?”
검은 로브에 짧게 깎은 머리.
눈빛과 목소리에 사나움이 뚝뚝 묻어나오는 사내, 테이오스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아무래도. 둘이 사이는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오테르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신경 쓰지 마라. 이건 예절과 권위에 대한 문제다. 너 같은 놈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제국을 바로 세우는 거다.”
“하여튼 고리타분해서는…… 그런 쓸데없는 거에 연연하니까 몇 년째 영감 수준이 그 자리에서 머물러 있는 거야.”
테이오스의 그 말에 오테르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그가 오테르의 역린을 건드린 듯했다.
쿠구구.
초인만이 내보낼 수 있는 무형의 압박감이 오테르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
오테르가 차갑게 말했다.
“말조심해라 애송아. 지금 내 경지로도 네놈 따위는 손쉽게 짓뭉개 버릴 수 있어.”
하지만 그런 강렬한 압박감에도 테이오스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둘이 싸운다면 영감 목이 떨어지는 미래 밖에 안 보이는데? 뭐, 원한다면 지금 시험해봐도 되고.”
그렇게 말하며 테이오스도 힘을 끌어올렸는데. 두 마법사가 발산하는 강력한 압박감에, 정작 죽을 맛인 건 이안이었다.
‘이 새끼들…….’
다행히 이안이 질식하기 전에, 접견실에서 황태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밖의 분위기가 험악한 것 같은데 내 착각이오? 내가 그토록 둘이 싸우지 말라고 일렀거늘.”
오테르와 테이오스가 황급히 기운을 거둬들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전하. 그저 잠깐 의견 충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전하.”
“그거 다행이군. 준비가 다 됐다면 들여보내시오.”
오테르가 손짓하자 접견실의 문이 저절로 열렸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이안의 몸이 저절로 앞으로 향했다.
“들어가라. 내가 한 말 잊지 말고.”
이안은 서둘러 접견실로 향했다.
등 뒤의 마법사들은 여전히 눈빛으로 불똥을 튀기고 있었다.
‘더 있다가는 괜스레 봉변당하겠네.’
황태자를 위해 학사 측에서 급하게 마련한 접견실은 과할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황태자의 취향에 맞춘 모양이었다.
‘취향이 아주 졸부 느낌이네.’
화려한 방안에 앉아 있는 화려한 황태자.
이 공간에 있는 건 오로지 둘뿐, 호위는 따로 없었다.
‘하긴. 누가 감히 황태자를 암살하겠어.’
황태자는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다. 직접 검을 겨뤄 이길 수 있는 강자는 한 손에 꼽을 것이다.
지금도 그저 앉아 있을 뿐인데, 그 존재가 왜인지 거대하게 느껴졌다.
쫄지 않으려고 고개에 힘을 주더 이안의 눈에 문득. 황태자의 뒤편에 기대어 있는 황금색 대검이 눈에 들어왔다.
‘임페리얼 엣지다……!’
크레이 사가에는 여러 명검과 특별한 무기가 있다.
그런 명검 중에서도 최상으로 치는 게 바로 저 임페리얼 엣지.
플레이어들이 최고로 칠 만큼 훌륭한 성능을 자랑하는 보검이다.
‘성검도 좋은 무기지만…… 아무래도 범용성이 떨어지니까.’
좋은 검을 보니 없던 욕심이 생겨났다.
‘저것만 얻으면 참 편할 텐데…….’
그러다 황태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속으로 뜨끔한 이안은 적당히 예를 표한 뒤, 황태자의 앞 자리에 앉았다.
“아직 앉으라고 안 했노라.”
“…….
이안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황태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농담이다. 어서 앉거라.”
이안은 조금 어이없는 감정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이런 타입은 조금 껄끄러웠다.
“내가 보는 앞에서 아주 화려하게 저지르더구나.”
“……죄송합니다.”
“딱히 추궁하려는 건 아니다. 브레이브하트 가문의 장남은 제법 치밀한 구석이 있더구나. 굳이 따지자면, 나랑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지.”
“아, 예.”
“그래서 그런지 별로 재미는 없었다. 하지만 네가 그 모든 걸 박살 내준 덕분에, 오랜만에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칭찬인가?
일단 호의적인 것 같아서 이안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담소만 나누는 건가?’
솔직히 말해, 황태자와 직접 대화하는 건 좀 껄끄러웠다.
언젠가는 목숨 걸고 싸워야 할 상대. 게다가 황태자는 여러모로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치밀한 듯하면서도 가끔 충동적일 때가 있어, 예측하기 어렵다 할까.
황태자는 이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예의 그 꿰뚫어 보는 듯한 눈.
잠시 침묵이 흐르고.
어깨를 으쓱인 황태자가 말했다.
“원래 코르디스에 찾아오는 건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이 시기에는 말이지.”
“……그러십니까?”
“근데 내가 심은 첩자가 이 코르디스에 입학했다는 얘기가 들리더군.”
다소 뜬금없는 대화 주제에 이안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황태자가 심은 첩자로 의심받는 사람이라…… 누구지?’
황태자가 이어 말했다.
“놈은 평민치고는 기묘할 정도로 뛰어난 검술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은퇴한 강철 기사단원과 여행을 다녔고. 게다가 기묘하리 만치 신분이 철저히 감춰져 있었다. 여러모로 오해받기 좋은 조건이었지.”
“음. 그런 사람이…….”
아는 인물 중에서 조건에 맞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밖에 안 떠올랐다.
‘난가?’
그런 이안의 표정을 읽은 듯. 황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아무리 우연이 겹쳐도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원래 코르디스는 더 제대로 준비해서 갑작스럽게 털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네 존재 때문에 교수진들이 쓸데없이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지. 더 시간을 주면 있던 증거도 다 사라질 판이라, 무리하게 일정을 조율해 온 거다.”
이안에게는 참으로 당혹스러운 이야기였다.
설마 그런 터무니 없는 오해를 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그렇게 나를 경계하던 건가?’
이제야 교수들의 행동이 조금 이해되는 것 같았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황태자가 이 시기에 코르디스에 온 건…….’
이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상 자기 때문에 왔다는 거 아닌가.
하지만 황태자는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뭐.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어차피 학사에는 한번 들릴 예정이었으니. 나도 모르는 내 첩자 얼굴도 한 번 보고.”
“…….
“내 동생도 보고. 여러 명문가의 여식들도 직접 보고 말이다. 안타깝게도 내 운명의 짝은 없더군.”
황태자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였다면 그냥 농담으로 흘려보내겠지만, 그 내막을 아는 이안은 소름이 돋을 뿐이다.
‘자기 짝을 찾아 전쟁까지 일으키는 미친놈.’
역시. 껄끄러운 놈이었다.
“아, 혹시 내 동생과 친분이 있느냐? 레아라고 하는데.”
“……몇 번 이야기 해 본 정도입니다.”
“그래? 동생이 친우를 좀 사귀었더냐? 워낙 어렸을 때부터 과한 짐을 짊어진 아이라, 사교성이 좀 떨어져 걱정인데.”
이것 또한 갑작스러운 질문이다. 화제가 이리 튀고 저리 튀는 황태자와의 대화는, 꽤나 피곤한 구석이 있었다.
이안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머리를 긁적였다.
‘동생이 외톨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고민하던 이안에게 황태자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거라. 어차피 네가 거짓을 고하더라도, 나는 다 간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아무래도 친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역시나인가…….”
살짝 미간을 좁히던 황태자가 이내 인상을 풀었다.
“뭐. 그건 그 아이가 알아서 할 일이지.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부탁이지만, 너라도 그 아이의 친우가 되어주거라.”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반쯤 레아를 포기하고 있던 이안이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노력해보겠다고 말할 수밖에.
“잡설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본론…… 말입니까?”
“그래. 이안. 거두절미하고 말하겠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들었다. 강철 기사단에 들어와라.”
이 역시 생각도 못 한 제안이라,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강철 기사단은 내 수족과 같은 이들이다. 하지만 몇 년 전의 사고로 그 수가 많이 줄었지. 네가 들어와 주면 기쁘겠구나.”
강철기사단.
에스테반이 소속되어 있던 곳으로 황태자의 최측근과 같다.
제국 기사의 상징으로, 사내라면 한 번쯤 꿈꿔본다는 로망 그 자체.
당장 코르디스의 남학생들도 황태자에게 혹시 스카웃 될까 김칫국을 마시지 않았던가.
“기묘하리 만치 숨겨져 있는 네 출신은 상관 않겠다. 대체 누구에게 배웠는지, 평민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강한 그 검 솜씨에 대해서도 묻지 않겠다. 우리와 함께하자. 부와 명예, 원하는 모든 걸 네게 주겠다.”
강철 기사단에 들어가, 황태자의 대업에 동참한다.
게임에서도 선택할 수 없는 루트.
다른 이가 들었다면 그 즉시 충성을 맹세했겠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설마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황태자가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로 되물었다.
“왜 그러느냐. 평민인 네가 이것보다 더 출세할 수는 없을 진데.”
“어딘가에 속하기보다는 좀 더 세상을 둘러보고 싶습니다. 해야 할 일도 있고요.”
이안은 적당히 생각해낸 변명을 내뱉었다.
예상대로, 제안이 거절당했다고 황태자가 분노하거나 하는 없었다.
“사내가 부와 명예, 출세를 제쳐두고 해야 할 일이라니. 그러면 말릴 수 없지. 그래도 나중에 언젠가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 찾아오거라. 기사단의 문은 항상 열어 놓겠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
원하던 목적을 이루지 못했음에도, 황태자는 더 붙잡지 않았다.
적절히 분위기를 봐, 예를 표하고 접견실을 나가려던 이안에게 황태자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승리에 대한 상을 주지 못했구나. 뭐가 좋으려나…….”
상이라는 말에 이안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임페리얼 엣지에 향했다.
그 시선을 알아챈 황태자가 껄껄 웃었다.
“하하. 이건 황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거라, 줄 수는 없겠구나.”
“……아닙니다.”
“흠…… 그래. 그러고 보니 교수들이 네가 나의 첩자라고 생각했었지.”
고민하던 황태자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씨잇 웃으며 말했다.
“그 신분을 사용해도 좋다.”
“……예?”
“이곳 코르디스에서, 너는 공식적으로 나의 첩자인 거다. 그 신분으로 교수들을 협박하든, 아니면 누군가에게서 돈을 갈취하든 나는 상관치 않겠다. 어디 한번, 재밌게 사용해 보거라.”
어쩌다 보니 이안은 황태자의 이름을 합법적으로 팔아먹을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낸 셈이다.
적어도 이곳, 코르디스에서는 말이다.
“그럼…….”
이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뒷걸음질로 접견실을 나왔다.
그리고 처음 떠올린 생각은 이러했다.
‘이걸로 어떻게 돈 벌 방법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