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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48화 (49/222)

48.변화

“그럭저럭 즐거운 시간이었구나.”

모든 일정을 마친 황태자가 섬을 떠날 시간이 왔다.

오테르가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 명하신 대로 학사의 자금 흐름 정리와 자격이 부족한 교수들에 대한 명단 작성을 마쳤습니다.”

“수고했소. 오테르 공. 그에 대한 적절한 조치는 돌아가서 하도록 하지.”

오테르의 보고 다음은 테이오스였다.

테이오스는 황태자에게만 들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섬을 조사해봤습니다. 그때 느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악마 소환을 시도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성공 가능성은?”

“꽤 높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황태자가 답했다.

“내버려 두시오.”

잠시 머뭇거린 테이오스가 물었다.

“제가 할 말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소. 이 평화로운 학사에도, 조금의 긴장은 필요하겠지.”

“전하께서 그리 말 하시니,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테이오스는 찝찝한 얼굴을 했다.

“그 검은 머리 놈.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다니?”

“전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 직감이 꽤 날카롭다는 것. 그냥 두면 저희의 계획에 분명 방해가 될 겁니다.”

“흠…….”

잠시 생각을 정리한 황태자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직접 그와 대화하고 속을 들여다봤지만, 놈은 오히려 우리 계획에 도움이 될 자요.”

“하지만 전하! 느낌이 좋지…….”

“그러니까, 그대가 하고 싶은 말은. 그대의 직감이 내 판단보다 위라는 것이오?”

황태자의 어조는 지극히 무덤덤했지만, 테이오스의 팔에는 왜인지 닭살이 오소소 돋아났다.

테이오스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럴 수 있지. 딱히 마음에 담아 두고 있지는 않소.”

황태자의 말에 테이오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이제 이 섬에 더 볼 일은 없겠구나.”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다.

팽개치고 온 업무들이 어찌나 많은지.

돌아가서 그걸 다 처리할 생각을 하니, 절로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래도 와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생각보다 더 유익한 시간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 검은 머리 소년. 이안에게는 큰 기대를 걸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만족감을 느끼며 황태자는 배에 올라타려던 그때.

황태자를 배웅하기 위해 모여든 인파를 뚫고, 누군가가 급하게 다가왔다.

“대체 누가…… 저하.”

레아가 조금 분한 얼굴로 뛰어오고 있었다.

호위를 맡은 기사들이 황급히 길을 열어주었다.

황태자도 친히 걸음을 멈춰주었다.

“동생아. 무슨 일이느냐.”

“무슨 일이라뇨. 몰라서 물어보십니까? 기껏 찾아와서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려 하시다니…….”

황태자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 나랑 얘기하고 싶으면 네가 먼저 다가오면 되지 않느냐. 너는 예전부터 그랬지.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너무 수동적이었어. 절대 먼저 다가가는 법이 없었지.”

“윽.”

정곡을 찔린 레아가 침음을 흘렸고, 황태자의 꾸지람이 이어졌다.

“황실에 있었을 때는 그래도 되었겠지만, 이곳은 코르디스다. 그렇게 해서는 소중한 인연이 찾아와도 놓쳐 버릴 수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너에게 맞는 짝을 찾을 수도 없겠지.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둘이 합쳐졌을  때 완벽한 형태를…….”

“그만하십시오. 그 얘기는 이미 질리도록 들었습니다.”

황태자가 버릇처럼 하는 얘기에 지긋지긋해진 레아가 말을 끊었다.

감히 자신의 말이 끊겼지만, 황태자는 화를 내는 일 없이 그저 미소지을 뿐이었다.

“그래도, 긴 시간 동안 고민하던 게 해소된 모양이구나. 벽을 부순 걸 축하한다.”

“……오라버니의 눈은 못 속이겠습니다.”

“오랜만에 얼굴 봐서 반가웠다.”

그걸로 하고 싶은 말은 끝났다는 듯, 황태자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런 황태자에게 익숙한 레아도 적당히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때.

황태자가 배에 올라타기 전에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동생아. 나는 나의 일을 하겠다. 너도 네가 짊어져야 할 사명을 잊지 말거라.”

지금까지의 따뜻함이 거짓말인 것처럼.

싸늘한 냉기만이 풍기는 목소리에, 레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네.”

그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

‘황태자의 첩자 신분이라…….’

결코 가볍지 않은 보상이다.

따지고 보면 백지수표와 다름없다.

황태자의 이름을 팔아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

돈으로는 따질 수 없는 엄청난 가치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했다.

‘괜히 잘못 썼다가 나중에 황태자 놈 마음이 바뀌어서 봉변당하는 거 아니야?’

있을 법한 일이다.

지금은 이안이 황태자의 호의를 얻었지만, 변덕스러운 인간이다.

언제 그 마음이 바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뭔가를 내게 기대하는 눈치던데, 만약 그 기대에 못 부응하면 목이 뎅강 썰리는 거 아니야?’

게다가 코르디스 내부에서밖에 사용할 수 없는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안이 이제 코르디스에 남아 있을 기한은 길어야 3개월일까.

코르디스를 벗어나면 내가 황태자의 첩자요, 라고 말해도 그 누가 믿어주겠는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죠?]

서늘한 음성에 이안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실. 외면하고는 있었지만,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네스가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이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뜨끔한 이안은 서둘러 머리를 굴렸다.

‘화난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늘 자애로운 이네스다. 이렇게 화가 난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리저리 생각해봤지만, 역시 이럴 때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진심을 다해 사과하는 것.

아무리 얼어붙은 마음이라도 진심이 담긴 사과면 풀리기 마련이다.

이안은 이네스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다행히.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한번 웃어준 이네스가 물었다.

[뭘 잘못했는데요?]

“…….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과연 검의 최고수.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다.

이안이 떠듬떠듬 말했다.

“약속을 어기고 멋대로 도박에 손댄 점……?”

[또.]

“……또요?”

[그게 다예요?]

식은땀이 한 방울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이안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수백 명의 관중 앞에서 루크와 대련할 때도 이렇게 당황하지는 않았거늘.

이안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릴 때.

한숨을 푹 쉰 이네스가 말했다.

[후우. 됐어요. 결과가 좋았으니까요. 덕분에 경지가 한 단계 높아지기도 했고.]

“헤, 헤헤. 그렇죠?”

[그래도 다음부터는 저와 한 약속은 꼭 지켜주세요.]

이네스는 진지하면서도, 어딘가 슬픈 어조로 읊조리듯이 말했다.

[물론 제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는 건 알아요. 이건 이안의 인생이고, 저는 이미 예전에 죽어 버린 사람이니까요.]

“아뇨, 저는 그렇게는…….”

[제게 강요할 권리는 없어요. 하지만 그저 바랄 뿐이에요. 이안이 좀 더 훌륭한, 영웅과 기사에 걸맞은 그런 사람이 되기를요. 물론, 이안은 그런 것에 큰 관심이 없겠지만요.]

이네스는 안다.

이안이 악마를 토벌하려는 건, 딱히 인류를 위해서라거나 세계를 지켜낸다는 영웅적이고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어떻게든 자기 한목숨 살아보겠다는 평범한 사람의 필사적인 발버둥이라고.

하지만 이안은 분명 변화하고 있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플로라를 위해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이네스는 그걸 강하게 느꼈다.

이안은 선생님한테 꾸중 들은 아이처럼 말했다.

“다음에는 실망 안 시킬게요.”

그리고 이네스는 자애로운 스승처럼 말했다.

[저는 한 번도 실망한 적 없어요. 이안. 저는 항상 이안을 믿고 있거든요.]

“이네스 님…….”

이안의 코끝이 찡해졌다.

부모님 외에 자신을 이렇게 믿어준 게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단칼에 베어내듯. 검을 뽑아낸 이네스가 말했다.

[자, 그럼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지금부터 시험해봐야겠죠.]

“……이전처럼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거예요.”

[자신감 있는 모습 좋아요.]

둘의 검이 얽혔다.

확실히. 이전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띠었다.

대련의 수준 자체가 올라갔다 해야 할까.

하지만, 아직 이네스에게 한참 못 미친다는 건 변함 없었다.

“악! 아악!”

이네스의 검이 이안을 향해 무자비하게 휘둘러지고. 이안의 비명이 좁은 방안을 울려 퍼졌다.

“으…… 평소보다 더 거친데. 역시 아직 화 안 풀리신 거죠? 악!”

그 말을 무시한 채, 이안을 자비 없이 두들겨 패면서 이네스는 생각했다.

‘그때. 플로라양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불현듯 보였던 건…….’

아마도 이안의 가장 깊이 묻혀 있을 기억.

그 기억이 잠깐이나마 스쳐 지나갔었다.

솔직히,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 기억은 아직 이네스에게 허락된 영역이 아니다.

이안이 이네스를 더 신뢰하고. 마음을 열기까지.

이네스는 차분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

황태자가 떠나고 난 후로 이틀이 지났다.

교수와 임직원들은 오테르가 학사의 자료를 대대적으로 조사한 탓에 후폭풍을 걱정하는 듯했다.

학생들은 결국, 황태자의 눈에 띄지 못했기에 실망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그날 있었던 대련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특히 피오라와 루크 사건에 대한 건 큰 화두였다.

학사에서도 부랴부랴 관련 사건을 조사했지만, 루크가 직접 독약을 들이마셨는데 증거가 남을 리가.

조사 끝에 플로라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의혹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플로라의 이미지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버렸다.

어찌 보면 루크의 노림수는 결국에 성공하고 만 셈이다.

정작, 그 루크는 패배의 충격이 큰지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있지만.

그런 사건의 여파 때문에 학생들의 이안에 대한 시선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재수 없는 놈.”

“열등한 평민.”

“플로라 그 년을 옹호한 걸 보면, 저놈도 사실 공범 아니야?”

“쯧.”

소란을 벌인 덕에 부정적인 평가는 그대로. 아니, 오히려 더 증가했지만…….

“그래도 실력은 있지?”

“황태자 전하께 직접 얘기해 교수님이 해고당하는 걸 막았어. 재수 없는 놈이라도 겁쟁이는 아닌 거지.”

“루크님을 상대할 때의 그 검술은…….”

원래 안 좋게 생각하던 놈이 갑자기 좋은 모습을 보이면 그 점이 부각 되는 법이다.

특히 이안이 황태자와 직접 대화하는 걸 눈앞에서 본 어퍼 클래스 학생들의 평가가 알게 모르게 많이 올랐다.

덕분에 이안은 학생들에게 인정과 모멸을 동시에 받는, 다소 기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뭐, 그게 중요하겠는가.

‘내가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이제 황태자라는 예상치 못한 이변도 무사히 지나갔으니. 이안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복도를 걷던 와중, 눈앞에 익숙한 붉은 머리가 보였다.

이안이 플로라에게 선뜻 인사했다.

“뭐야. 왜 여기 서 있어. 나 기다렸냐?”

“아, 아니거든. 그냥 마무리 조사 받고 어쩌다 보니…….”

“그래? 뭐, 일단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네.”

“……여전히 내가 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플로라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부쩍 수척해진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안은 그런 플로라의 등을 팡― 하고 두드렸다.

“어깨 펴고. 허리 펴고.”

“무, 무슨 짓이야!”

플로라가 등을 어루만지면서 소리쳤고, 이안은 그 반응을 깔끔하게 무시해주었다.

“원래 사람이 그래. 이성적이지 못하고, 자기 좋을 대로 믿지. 네가 계속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결국엔 다시 좋아지지 않겠어?”

“그, 그럴까?”

“그럼.”

이안은 주저 없이 긍정해주었다.

“그나저나 네 뒤에 달고 있던 쫄다구…… 친구들은 어디 갔냐?”

플로라는 잠시 고민하다, 덤덤하게 말했다.

“그냥. 이 기회에 혼자서 많이 생각해봤어. 나 스스로나, 주위 사람들이나, 내가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들이나.”

“뭔가 답을 얻은 모양이네.”

“......그렇지”

플로라는 후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니 이안은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스스로 얻은 답이 나쁜 종류는 아니겠네요.]

‘사람이란 건 결국, 언젠가는 남한테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서야 하는 법이니까요.’

플로라가 타락해 적이 되는 미래는 피한 걸까?

지금 모습을 보면 아마 그러지 않을까 싶다다.

일단 기껏 갈고닦은 검술이 플로라에게 향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이안에게도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앞으로 올바르게 자라야 한다. 공부는 좀 못해도 되고, 눈치도 좀 없어도 되니. 착하게만 커라.”

“네가 내 아버지야? 그리고 이거 나 멕이는 거 맞지! 그치?”

플로라가 씩씩거리는 모습을 보며 이안은 껄껄 웃었다.

역시. 이렇게 기운이 넘치는 게 플로라답다.

“저기…….”

그런 이안에게 플로라가 답지 않게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때. 대련할 때 네가 말했잖아.”

“어.”

“모, 모든 걸 나한테 걸었다고 했잖아. 그, 그게 무슨 뜻이야? 아니 뭐. 딱히 궁금한 건 아니고.”

이안은 품 안에 고이 간직된 금화 주머니를 한번 매만졌다.

대련은 결국 취소가 되었고, 불량한 소년은 약속을 지켰다.

이안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말 그대로의 의민데?”

“윽.”

어쩐지 얼굴이 붉어진 플로라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이안이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래. 피곤해서 그래? 그러게 먹을 수 있을 때 든든히 먹어야지 밥은 왜 굶어. 빵 먹을래?”

“그런 거 아니……!”

이안은 익숙하게 품에서 비상식량을 꺼냈다.

플로라는 반사적으로 짜증을 내며 부정하려다,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먹을래.”

그렇게 둘은 복도에 서, 잠시 동안 말없이 빵을 나눠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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