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50화 (51/222)

50. 하수도

“이안.”

“아잇, 씨. 깜짝이야!”

예민한 이안도 감지하지 못한 기척.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건 레아였다.

이안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어…… 왜 그런 곳에 숨어 계세요?”

“……숨어 있던 게 아니라. 이안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를요?”

이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근데 제가 이 시간에 제가 여기를 지난다는 건 어떻게…….”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레아의 한마디에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더 파고들었다가는 왠지 곤란해질 것 같았다.

침묵이 내려 앉고.

레아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놓쳐서는 안 되는 인연.’

계속해서 수동적으로 굴다가는, 중요한 인연을 놓쳐 버릴 수도 있다.

황태자가 떠나기 전에 레아에게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레아는 곤란한 얼굴로 서 있는 이안을 쳐다봤다.

‘신분을 떠나, 늘 예상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

처음 검을 마주했을 때부터, 자신에게 조언을 해주거나, 루크와의 대련에서 승리하기까지.

이안은 언제나 레아의 예측을 뛰어서곤 했다.

적어도 레아가 지금껏 봐왔던 그녀의 또래 중에서는, 유일하게 그녀가 인정할 수 있는.

배울만한 점이 있는 사내.

얘기하고 싶은 게 많았다. 긴 시간을 들여 검에 대해 토론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이안. 저번에는 제가 결례를 범했어요.”

황녀가 고개를 숙였다.

지니고 있던 황족으로서의 자존심은 잠시 내려놓았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저를 위해서 마음을 다해 조언해줬는데. 저는 그걸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무례하게 받아치고 말았어요. 덕분에 저는 저를 가로막던 벽을 부술 수 있었는데 말이에요.”

“어…….”

“용서해주시겠어요 이안?”

아버지와 오라버니 외의 누군가에게 이렇게 고개를 숙여본 건 처음이다.

아마 황궁의 대신들이 봤다면 황권이니 뭐니 기겁을 했겠지.

하지만 레아는 부끄럽지 않았다.

거울을 보며 수십 번이고 연습했던 실수하지 않고 완벽하게 해내었다.

이안은 당황했다.

‘설마 그걸 마음에 담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벽을 깼다는 건 또 뭐고…….’

[검사에게는 실낱같은 깨달음이 천금보다도 귀하니까요. 고마워하는 게 당연하죠.]

어쨌든 이대로는 영 불편하다. 이안은 황급히 말했다.

“고개 드세요. 딱히 화 안 났으니까.”

“용서해주는 건가요?”

“애초에 마음에도 안 두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 이후로 수련장에 안 찾아오던 건…….”

확실히. 최근에 이안은 수련장에 잘 찾아가지 않았다.

현실에서는 최소한의 육체 운동만 했고, 나머지는 그냥 코덱스에서 괴수와 싸우거나 이네스와 검을 섞으면서 수련했었다.

굳이 수련장을 찾아갈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셈이다.

“그냥. 다른 방식으로 수련할 방법이 생겨서 그런 거예요.”

수련 방식에 대한 이야기에 레아의 눈이 반짝였다.

“혹시 그 방법이 뭔지 알려줄 수 있나요?”

“아뇨. 말하기 좀 곤란해서…….”

“아…… 하긴, 그런 귀중한 정보를 아무 대가 없이 알려줄 수는 없겠죠…….”

사실 귀중하다기보다는 그냥 말하기 힘든 종류의 방법이라 그런 거지만.

여기서 딱히 변명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시 정적.

이안이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어쨌든. 더 할 얘기 있으신가요?”

“아뇨…….”

사과를 하는 것까지는 생각했는데, 그 이후에는 계획이 없었다.

“그럼. 내일 봬요.”

“네, 네…….”

레아는 멀어져가는 이안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며 생각했다.

역시. 그녀에게 사람과의 관계는 아직 너무 어려웠다.

***

‘황녀가 저를 적대하지 않는다니 다행이네요.’

훗날 동료로 맞아들이고 싶은 황녀다.

호의를 쌓아두면, 나중에 영입하기도 더 쉽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이안은 책을 펼쳐, 책갈피를 끼워놓은 부분을 읽어내렸다.

‘그러나, 어떤 고대인들은 일부러 사악한 정령을 소환시키려 하기도 했다.’

아마도 악마 소환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부분.

이안은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그들은 주로 깊디깊은 동굴이나 지하에서 의식을 벌였다.’

‘어두운 감정을 모으기 위해 사로잡은 제물들을 산채로 수일에 걸쳐 몇백 명씩 고문해 죽이곤 했다.’

‘더 강렬한 감정일수록 더 강력한 정령이 탄생하기에, 더 큰 고통을 줄 수 있는 고문 전문가가 사회적으로 대접받기도 했다.’

‘의식의 마지막은 의식을 집도하는 술사가 자신의 심장을 바치면서 마무리된다. 심장은 뇌만큼이나 영적으로 중요한 상징이다.’

책에서는 구체적인 의식 순서와 상징물들. 소환 원리. 감정을 다루는 방법.

장소와 시간 등에 대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이쪽으로 조금만 지식이 있다면 누구나 그대로 의식을 따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금서의 기준에서 아슬아슬하게 선을 타는 그런 서적이네요.]

‘하지만 덕분에 찾아야 할 정보는 다 얻은 것 같아요.’

이제 도서관에서 썩을 필요는 없어졌다.

행동에 나서야 할 때.

‘하지만 그 전에…….’

미리 처리해 둘 것이 많았다.

‘앞으로 악마가 소환되기까지는 어림 잡아 2달. 약 60일의 여유가 있어. 코덱스에서 내가 사냥한 괴수가 53종류니까, 하루에 하나만 사냥한다 해도 그 전까지 시간에 맞출 수 있겠어.’

소환되는 악마는 강하다.

지금의 이안도 약하다고 할 수 없지만, 노예처럼 살며 낭비되던 시간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목숨이 걸려 있는 만큼 승산을 되도록 높이고 싶은 게 이안의 마음이었다.

이안은 코덱스를 펴고,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

어퍼 클래스의 교실은 여느 때와 같이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학생들은 다른 의미로 소란을 떨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로…….”

“저 조합은 뭐야 대체.”

이안과 레아. 항상 따로 앉던 둘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레아가 누군가.

그 누가 다가간다 해도 냉랭하게 쳐내던 사람 아닌가.

그런 그녀가 누군가와 교류한 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고.

그 상대가 검은 머리 평민이라는 건 더더욱 놀랄 일이다.

그리고 당사자인 이안은……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옆에 앉는 건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날씨가 좋네요. 이안.”

뜬금없는 질문에 이안은 창밖을 보았다.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음, 예. 그러게요.”

이안은 적당히 대답하고, 다시 정적.

레아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다, 서둘러 주머니 속 자그마한 책으로 향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안. 당신은 지금껏 살면서 내린 최고의 결정은 무엇인가요?”

“…….

이안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혹시. 저 뭐 면접 보고 있는 건가요?’

[…….어서 센스 있게 대답해 주세요. 상대가 무안해하지 않게.]

‘갑자기 센스 있게 하라고 해도 말이죠.’

이안은 적당히 생각나는 대로 답했다.

“오늘 아침에 밥을 두 공기 먹을까 세 공기 먹을까 고민하다 세 공기를 먹었는데. 그게 아마 제일 잘한 결정 아닐까요?”

“흠. 그거. 정말. 멋진. 결정이네요.”

국어책 읽는 듯한 말투로 대답한 뒤 다시 정적.

이안은 슬슬 이 촌극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레아의 속은 도통 알 수가 없지만, 조금이라도 친해지려면 박자에 맞춰줘야 하지 않겠는가.

레아의 질문이 계속되었다.

“어…… 당신의 장기적인 목표는 어떤 것들인가요?”

“목표라…….”

이번에도 꽤나 무거운 질문이 나왔다.

이안의 목표.

일단 가장 원초적인 목표는 어떻게든 살아남는 거다.

그걸 위해서는 단기적으로 성검을 모으려 하는 거고.

장기적으로는 악마를 사냥하려 하는 거다.

그 외에는 없었다.

꿈이라거나 일생 동안 이뤄내야 할 목표라거나. 그런 건 이안에게 사치에 불과했다.

‘당장 언제 악마에게 뒤질지 모르는데, 그런 걸 생각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그래서 이안은 레아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세상에 있는 악마를 다 때려잡는 거요.”

“……네?”

레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번 답변은 악마 사냥에 대한 레아의 속을 떠보기 위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너무 의외의 대답이었을까?

레아는 놀란 표정을 지을 뿐, 아무런 답변도 해주지 않았다.

그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그렇게 레아는 한참을 뜸 들이다, 입을 열려 했지만.

하필 그에 맞춰 교수가 들어오는 바람에 기회를 잃고 말았다.

레아는 아쉬운 듯이 입을 닫았고.

주머니에 든 ‘어색한 사람과 친해지기 가장 좋은 질문 100선’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

내친김에 레아와 그에 관해 더 얘기를 하고도 싶었지만, 한번 흐름이 끊긴 얘기를 다시 하기는 좀 애매한 감이 있었다.

레아는 홀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뭐. 당장 급하게 할 일은 아니지.’

지금은 일단, 어제 알아낸 단서들을 토대로 악마 소환을 추적하는 게 우선이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이안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자치회 건물이었다.

언제나처럼 서류 속에 파묻혀 있던 마틴이 이안의 얼굴을 보고 반가이 맞았다.

“오. 사고뭉치께서 오셨구만.”

“여전히 바쁘시네요.”

“사후처리로 바빠서 말이야. 그나저나 이번엔 제대로 저질렀네. 네가 황태자 전하 앞에서 고함지를 때, 나는 되도록 네가 작은 처벌을 받을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거든.”

“하, 하하…….”

마틴의 뼈있는 말에 이안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누군가 걱정해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하고 싶은 얘기는 많지만, 오늘은 내가 시간이 좀 부족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 무슨 일로 찾아왔는데?”

“물어볼 게 있어서요.”

“물어볼 거?”

“혹시 이 섬에서 가장 깊은 지하에 있는 시설이 어딜까요?”

책의 내용을 토대로라면, 범인은 부정한 감정이나 기운이 모이는 장소에서 소환 의식을 벌일 확률이 높았다.

어두운 감정은 아래로 흐르는 성질이 있다니, 분명 지하가 적합한 장소 일터.

그에 적합한 장소는 어디일까 고민해봤지만. 학사의 숨겨진 공간이나 지형은 마틴이 더 잘 알 것 같았다.

“흠…… 가장 지하에 있는 시설이라.”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마틴은 진지하게 고민해주었다.

“내가 알기로 입학 희망자들을 시험하는 시험장에 자연 동굴이 있어. 얼마 전에 무너졌다는 얘기도 들리지만.”

“…….”

그 동굴을 무너뜨린 것도 이안이었지만 굳이 그것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안이 황급히 물었다.

“또 없을까요?”

“글쎄. 건물 아래에 지하실 하나씩은 다 두고 있으니까…… 아. 내가 알기로 섬 아래에 오폐수를 바다로 흘려보내는 하수 시설이 있는데. 그게 가장 지하에 있지 않을까?”

하수 시설.

생소한 이야기에 이안은 경청했다.

“뭐. 일반 학생들은 잘 모르는 게 당연하려나. 잘 안 알려져 있으니까.”

“혹시 거기 들어갈 방법이 있나요?”

“음. 힘들지? 애초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쓰레기는 작게 분리해서 배출하니까.”

“그럼 하수 시설에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는데요?”

“애초에 크게 문제가 생길 일이 없는 구조인데…….”

말을 흐리던 마틴이 무언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퉁겼다.

“아. 오물이 흘러나오는 배출구 쪽에 들어가 거슬러 올라간다고 알고 있어. 근데…… 그건 왜 묻는 거야?”

“아. 그냥 궁금해서요.”

“또 뭔가 사고 치려는 건 아니지……?”

“그럼! 오늘도 수고하세요. 선배님!”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오는 마틴에게서 도망친 이안은 서둘러 바깥으로 나갔다.

‘하수 시설의 배출구라…….’

배출구는 바다 쪽에 나 있을 거다.

이안이 섬에 올 때 봤었던 깎아지른듯한 절벽에 구멍이 나 있겠지.

그곳이 과연 악마 소환의식의 장소일까?

‘아마 맞을 것 같아.’

게임에서는 섬 곳곳에 있는 악마 소환을 실험한 흔적이나 정황만 찾을 수 있을 뿐.

정작 중요한 의식 장소는 찾아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게임에서는 들어갈 수 없었던 하수 시설이 유력한 장소로 의심되었다.

그리고 도착한 섬 북동부 끝.

깎아지르는 절벽에 부딪혀 거친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이 근처라고 했는데…….’

이안이 배출구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이내 절벽의 한 구석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단단하게 고정된 말뚝에 묶인 밧줄로 만들어진 사다리.

이안은 말뚝을 툭툭 두드려 보았다.

[상태를 보면 꽤 새건 데. 사용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요.]

‘그렇다는 말은…….’

이안은 절벽 끝에서 고개만 아래로 내밀었다.

‘찾았다.’

바다를 향해 오폐수가 흘러내리는 커다란 구멍이 보였다.

그럼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는데…….

‘좀 무섭긴 하네요.’

아래를 보니 거친 파도가 절벽에 부서지고 있었다.

잘못 손이 미끄러지면 부서지는 건 이안의 몸이겠지.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안은 신중하게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오폐수가 흘러나오는 배출구로 몸을 집어넣었다.

“윽.”

코를 찔러오는 악취에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오폐수의 감촉도 끔찍하다는 단어 외에는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뒷골목 쓰레기더미에서도 잘만 잤었는데…… 여긴 좀 심하네.’

그러나 익숙해져야 한다.

화륵.

이안은 미리 챙겨온 횃불에 불을 붙이고, 주위에 시야를 밝힌 뒤.

오폐수를 걷어차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다시 그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첨벙. 첨벙. 첨벙.

‘아무래도 마중 나온 친구들이 있는 모양이네요.’

이안은 조용히 검을 빼 들었다.

그 마중 나온 친구들이 호의적이지 않다는 건, 굳이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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