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51화 (52/222)

51. 하수도 (2)

이안은 횃불을 들어 앞을 밝혔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벽면을 타고. 혹은 오폐수를 헤엄치며. 혹은 동료의 등에 올라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횃불을 받아 반짝이는 수십 쌍의 붉은 눈동자.

이네스가 중얼거렸다.

[하긴. 이렇게 오래되고, 불길한 장소에 괴수들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겠죠. 심지어 악마 소환 의식이 펼쳐지는 곳이라면 더더욱.]

괴수.

평범한 짐승 중에서 어둠이나 부정한 감정에 노출되어, 비정상적으로 변화된 생명체를 이곳에서는 괴수라 부른다.

변화의 방향은 개체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원래 형태보다 더 강하고, 사악하고, 영악하게 변하곤 한다.

그런 괴수 수십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수가 많네요. 일단 물러날 건가요?]

‘아뇨. 굳이 그럴 필요는 없죠.’

이안은 오폐수에 섞여 있는 쓰레기 중, 적당히 둥글게 생긴 녀석을 집어 들었다.

손안에서 공을 굴리듯이 쓰레기를 굴리니 대강 감이 잡혔다.

‘좀 오랜만이지만…….’

자세를 잡은 이안은 왼발을 내딛는 동시에, 오른팔을 쭉 뻗어 온 힘을 다해 휘둘렀다.

후욱.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날아간 쓰레기가 직선에 가까운 곡선을 그리고.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던 눈동자 중 하나에 명중했다.

눈이 뭉개진 괴수가 비명을 질렀다.

“끼에에엑!”

“역시. 오랜만에 던져도 실력 어디 안 가는구나.”

그렇게 말하며 이안은 순식간에 다른 쓰레기를 주워들어 집어던졌다.

퍽!

“껙!”

이번에는 단순히 눈이 뭉개지는 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쓰레기에 머리를 제대로 얻어맞은 괴수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그제야 천천히 탐색하듯이 다가오던 괴수들도 분노하며 속도를 높였다.

“끼에엑!”

“꺄아아아아!”

괴수들의 질주에 사방에 오폐수가 튀고, 괴성이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이안은 침착하게 자세를 잡았다.

‘상대가 괴수라.’

떠올리는 건 검의 목적.

대부분의 검술은 기본적으로 사람 죽이는 걸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술이다.

당연히 괴수를 상대하는 데에는 그리 효율적이지 않다.

상대가 달라지면, 싸우는 방식도 달라져야 하는 법이다.

[코덱스에서 싸웠던 괴수들을 생각해요. 그 괴수들이 가지던 특징이나 공격 방식을 생각하고요.]

‘예.’

이안은 왼손에는 횃불을. 오른손에는 성검을 들었다.

검을 두 손으로 파지하던 평소와는 느낌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별로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시아아악!”

가장 앞장서서 달려오던 건 다리만 열 개가 넘는 거대한 거미다.

다리가 많아서인지 유독 속도가 빠르다.

불규칙적으로 머리 이곳저곳에 박혀 있는 붉은 눈알 네 쌍이 징그럽게 번뜩였다.

샤악.

뻗어 나간 검이 어지러운 궤적을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이미 거미의 징그러운 눈동자는 하나도 남김없이 베여 있었다.

“끼이……?”

퍽!

순간적으로 시각을 잃어 당황한 거미의 머리에 횃불이 내리꽂혔다.

거미는 불길의 뜨거움을 느낄 새도 없이 머리가 터져 죽었다.

“캬아아!”

이어서 달려든 건 머리가 두 개인 도마뱀.

놈은 입을 쩍 벌리며 무작정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독이 맺힌 송곳니가 보라색으로 번들거렸다.

제법 빠른 속도.

하지만 이안에게 닿기에는 한참 느리다.

이안은 양팔을 동시에 내밀었다.

성검이 도마뱀의 한쪽 머리를 꿰뚫어 뒤로 튀어나왔고, 횃불이 반대쪽 머리의 입에 들어가 그대로 놈을 산채로 지져 버렸다.

팡!

이안은 곧바로 횃불과 검을 뒤로 빼며, 도마뱀의 발을 힘껏 걷어찼다.

마지막 발악으로 주위에 독을 뿌리려던 놈은 힘없이 날아가며, 이어 달려오던 동료들의 몸에 부딪혀 넝마 짝이 되었다.

다음.

그다음.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괴수들이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많이도 오는구나.’

다른 이였다면 압도당할 수도 있는 광경.

하지만 겁먹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이안은 잘 알았다.

‘싸움에 숫자가 중요하지만…… 한 번에 싸우는 숫자를 조절하면 될 뿐이지.’

이 좁은 통로에서 이안을 한 번에 공격할 수 있는 괴수의 숫자는 기껏해야 둘.

뒤에 있는 괴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앞에 있는 괴수들을 신속하게 베어내면 될 뿐이다.

누군가 들었다면 허풍쟁이가 말은 쉽게 한다고 비아냥거리겠지.

하지만 이안의 실력은 그 허풍이 가능해질 정도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스윽. 서걱.

깔끔하게 잘려나간 괴수의 시체가 하나둘 쌓이며, 언젠가부터 시체 자체가 바리케이드가 되어 괴수들의 돌진을 저지했다.

괴수들의 가진 장점은 그 압도적인 숫자와 저돌적인 돌진력.

그 둘을 모두 잃은 괴수들의 미래는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샤아아아!”

“까악!”

그러나 싸움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일반적인 짐승들과 달리. 이 하수도의 괴수들에게 두려움이란 감정은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도망치거나 주저하는 기색 없이 오로지 본능에 몸을 맡겨 달려들 뿐이다.

‘오히려 좋아.’

괜히 겁먹고 도망쳐 버리면 쫓아가 죽이는 게 더 번거로웠다.

지금 제대로 흐름을 탔을 때, 모두 처리하는 게 나았다.

이안은 양손의 검과 횃불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다가오는 괴수들을 말 그대로 학살했다.

휘둘러지는 궤적을 따라 한발 늦게 따라오는 횃불의 불빛.

검에 반사된 빛의 궤적.

그 둘이 어우러져 멀리서 보기에 제법 아름다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지켜보는 이가 없는 게 아쉬울 따름.

그렇게 긴 시간을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마지막 괴수의 목이 떨어졌다.

이곳에 이제 숨이 붙어 있는 건 오직 하나. 이안 밖에 없었다.

“후우.”

이안은 숨을 고르며 근처 벽에 등을 기댔다.

괴수 시체 수십 구가 이곳저곳 널브러져 붉은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이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네요. 꿈에 나올 것 같아요.’

[앞으로는 더한 것도 보게 될 거예요.]

‘그렇겠죠.’

이안의 꼴도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피와 오물, 그리고 땀으로 범벅된 상태.

이안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대충 닦아냈다.

‘쯧. 옷도 새로 사야겠네요. 돈 아깝게시리.’

오물과 피를 닦아내도 이미 옷에 베여 버린 악취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름과 손수건으로 성검의 날을 한번 닦아준 이안은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아직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이 시체투성이에 냄새 나는 공간에서는 한시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위안을 삼아 볼 만한 건, 정신없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후각이 완전히 적응했다는 점 정도?

다시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이안은 횃불을 들고 다시 앞을 향해 신중히 이동했다.

이제 괴수의 위협은 없을 것 같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쯧. 길을 모르겠네요. 기본적으로 미로나 미궁처럼 복잡한 구조는 아니지만, 너무 넓어요.’

섬 전체에 퍼져 있는 하수 시설은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일부러 침입자가 길을 잃게 설계된 미로는 아니지만, 갈림길이 많은 건 큰 문제였다.

평소였다면 길 정도쯤이야 게임 속 지식으로 헤쳐나갈 수 있지만…….

이곳은 원래 게임에서는 찾아올 수 없는 곳이다.

길 따위는 하나도 모르는 셈이다.

‘뭐 어쩔 수 없지.’

고민했지만 이렇다 할 해결책이 나오지는 않았다.

뾰족한 방법이 없으면, 무작정 뒤져보는 수밖에.

이안은 자신의 운과 감을 시험해보기로 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걷고. 걷고. 또 걷고.

하수도의 통로를 한참 동안 걷다 보니 시간의 흐름조차 둔해졌다.

“후우.”

이안은 잠시 멈춰 서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이 어둡고 축축한 공간은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정신력을 갉아먹었다.

머릿속에 지금껏 지나온 길을 저장하며, 이안은 배낭을 열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겠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준비를 더 단단히 해서 올 걸 그랬어요.’

[이렇게 무턱대고 가다가는 진짜 한도 끝도 없겠어요.]

‘하아. 그렇다고 돌아가기도 아까운데…….’

이안은 짜증이 나 괜스레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가슴이 답답한데, 이 답답함을 풀 방법이 없었다.

뚝. 뚝.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불길한 울림을 만들어내고.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악취가 다시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눈도 조금씩 따끔거리기 시작하니.

이안은 혹여라도 중독되는 걸 막기 위해 손수건을 꺼내 입가에 묶었다.

‘역시 이대로는 안 돼.’

이안은 눈앞에 나타난 갈림길에서 멈춰 섰다.

뭔가 방법이 필요하다.

하다못해 대략적인 방향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결국 다시 찍어야 하나? 이쪽? 아니면 이쪽?’

이안은 횃불을 들어 왼쪽 길과 오른쪽 길을 비춰 보았다.

그럴 때마다 어둠이 밝혀지며 통로의 모습이 번갈아 가며 드러났다.

별 의미 없이 한 행동.

하지만 이안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꼈다.

“…… 어?”

왼쪽을 횃불로 비추었고.

다시 오른쪽을 비춰 보았다.

이안은 눈매를 좁히며 그 동작을 반복했다.

그리고,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빛이 퍼지는 거리가 다르다?’

이곳 통로의 구조는 높이나 너비, 형태가 모두 같았다.

그런데도 왼쪽 통로가 오른쪽 통로보다, 빛이 퍼지는 거리가 짧았다.

이네스가 중얼거렸다.

[빛을 밀어내는 어둠은 악마의 권능…….]

‘…….그렇다는 말은, 빛이 덜 퍼지는 곳이 목적지에 가깝다는 거겠네요.’

나무막대 끝에서 타오르는 이 불씨가, 이곳에서는 나침반인 셈이다.

이안은 횃불을 앞세워 길을 찾기 시작했고.

이내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아무래도 정답인 것 같네요.’

어느 새부턴가 어둠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횃불의 불이 미약하게 빛을 내고 있었지만, 이곳은 어둠이 빛보다 더 강한 힘을 내는 영역이다.

횁술은 이안의 주위만을 간신히 밝힐 뿐이다.

이 어둠 속에 있으니, 마치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불길한 감각이 피부를 타고 흘렀다.

게다가 가끔씩 찾아오는 미약한 두통.

이안은 저도 모르게 성검을 뽑았다. 손에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이 마음을 조금 진정시켜주었다.

‘아마 이 앞이겠죠.’

눈앞의 돌무더기가 나타났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쌓아 올린 돌무더기는 오폐수가 그 안쪽으로 들어오는 걸 막아서고 있었다.

조금 꺼림칙한 기분. 하지만 이안은 찝찝함을 떨쳐내고, 돌무더기를 뛰어넘었다.

첨벙.

돌무더기의 안쪽에 흐르는 액체는 지금까지의 혼탁한 오폐수와는 달랐다.

‘…….피.’

새빨간 피.

짐승의 것인지 인간의 것인지 모를 피가 가득 고여 있었다.

이안은 서적에서 읽었던 내용을 기억해냈다.

‘피. 영혼이 녹아들기에 최적의 물질.’

이 정도로는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발목까지 오는 핏물을 밟아가며 나아가니, 네 방향에 통로가 나 있는 원형의 공간이 나타났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구조였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이곳이 하수 시절의 정중앙이자 섬의 한가운데임을 깨달았다.

‘이런 장소가…… 이곳을 찾아낸 것도 대단한데 이걸 이렇게 쓸 생각을 하다니.’

벽면에는 피로 그려진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빼고 메워 채워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알 수 없는 짐승의 사체와 염소의 두개골. 희미한 빛을 내는 삼각 촛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온갖 부정한 상징들이 빼곡히 나열되어 있었다.

더 설명해 무엇하랴.

이곳은 누가 보아도 악마 소환 의식 장소였다.

멍하니 있던 이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준비된 의식에 미세한 변화만 주어도 악마의 힘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거예요. 가령…… 상징들에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미세한 금을 내놓는다거나.’

이안이 원래 목적대로 움직이려던 그때.

이안은 핏물 한가운데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안은 고개를 숙였다.

“…… 이건.”

그건 인간의 심장이었다.

심장은 홀로 박동하며, 주위에 작은 파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안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의식이 마지막은 의식을 집도하는 술사가 자신의 심장을 바치면서 마무리된다.

심장을 바치는 건 의식의 마지막 단계.

그렇다면 지금 악마 소환 의식은…….

‘이미 완성되었다?’

이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분명 두 달 후에나 일어날 일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대체 왜? 누가?

연달아 의문이 생겨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건 기회일 수 있어. 원래 소환 날짜 보다 앞당겨졌으니, 준비도 그만큼 미흡했겠지.’

완전하지 못한 의식은 소환되는 악마의 힘을 낮춘다.

위기는 곧 기회.

이안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이제 곧 악마가 소환될 거야. 대비해야 해.’

의식이 끝났으니, 악마는 천천히 섬에 강림할 것이다.

그 전에 미리 대비해,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다.

이미 의식은 끝났으니, 여기서 심장을 파괴하거나 이 상징물들을 부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서둘러 돌아가려던 이안은…… 급하게 몸을 날렸다.

쐐액! 파박!

맹렬하게 날아온 화살이 이안이 있던 자리에 꽂혔다.

이안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살폈다.

“말도 없이 도서관에 안 온다 싶었더니, 내 이럴 줄 알았지.”

라이젤이 활을 들고 사납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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