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열등감의 끝에는
한 줄기 빛이 어둠을 가르며 악마의 본체에 내리꽂혔다.
“우어어어어!”
분노한 어둠의 거인의 고함에 천지가 진동했다.
성벽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학생들도. 실의에 빠져 있던 결사대원도. 악마의 권속들도.
빛의 발원지로 시선이 향했다.
이안이 그곳에 서 있었다.
빛의 정령 한 기가 이안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몰려드는 어둠을 내쫓았다.
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이안이 서 있는 곳만 환하게 빛났다.
그 강렬한 인상에 아무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탓.
이안이 땅을 박차 악마의 군세를 순식간에 돌파했다.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
이네스에게서 받은 새 힘이 신체에 넘쳐흘렀다.
심장은 평소보다 강하게 박동하고, 혈관의 피가 빠르게 순환했다.
이안은 저 앞의 악마를 보며 생각했다.
‘드디어 왔구나.’
오래전부터 준비해오던 싸움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미친 듯이 수련한 것도.
어떻게든 성검의 조각을 찾아 헤맨 것도.
모두 악마라는 강대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모든 준비가 끝난 걸까?
이안은 악마를 쓰러트릴 자격을 갖추었을까?
이안은 한없이 냉정하게 자신을 평가했다.
멍청하게 자신감만 가지고 덤벼봤자, 기다리고 있는 건 개죽음이니.
이안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이길 수 있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다.
계산과 확신이다.
그 확신에 이네스가 등을 밀어주었다.
[할 수 있어요. 상대는 악마지만. 제대로 말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봐서는 악마 중에서도 가장 약한 부류일 거예요. 이안이라면 이길 거예요.]
‘…….네.’
이안은 성검을 굳게 쥐고 앞으로 향했다.
성검은 정령이 내뿜는 빛을 반사해 은은하게 빛을 냈다.
그 모습을 입을 벌리고 바라보던 플로라에게 이안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꼴이 그게 뭐야. 침 떨어지겠다.”
“뭐, 뭐래.”
“내가 악마를 상대할 테니, 나머지 잡다한 놈들은 좀 맡아줘. 믿는다.”
네가 어떻게 혼자서 악마를 상대하냐고.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평소 같으면 그렇게 짜증을 냈겠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안의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믿음직스러워.
그리고 믿는다는 그 한마디가 왠지 기꺼워.
플로라는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일어설 수 있었다.
그렇게 플로라를 지나. 레아를 지나. 루크, 라이젤 그리고 다른 결사대원들을 말없이 지나며 악마에게 향한다.
주저앉아 있던 결사대가 이안이 지나갈 때마다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쳐 있던 사람은 악을 쓰며. 부상자는 동료에게 기대서라도 끝끝내 일어났다.
정령이 뿜어내는 빛에 둘러쌓인 이안을 보며, 그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지금 무얼 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이안이 악마와 싸우는 동안 시간을 벌어주는 것.
목숨을 걸고서라도 행해야 할 그들의 임무다.
이안이 검을 쥐고 속도를 높였다.
“우어어!”
악마. 어둠의 거인이 괴성을 지르며 주먹을 내리쳤다.
콰앙!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듯. 방금까지 이안이 서 있던 땅이 움푹 내려앉고.
지면이 흔들리고, 주위에 흙과 돌이 흩날렸다.
“우…….”
손맛이 없다.
악마는 급히 팔을 되돌렸지만…… 그제야 자신의 거대한 손이 떨어져 나갔다는 걸 알아차렸다.
“우어?”
이해할 수 없었다.
검광을 쓰지도 않았는데 악마의 신체가 이렇게 쉽게 베이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제야 악마는 이안이 들고 있는 성검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꺼림칙함을 느꼈다.
이안은 가볍게 말했다.
“역시 성능 죽이네.”
성검은 크레이 사가에서 최강의 무기는 아니다.
그 거창한 이름과 달리. 진짜 신성이나 신의 힘이 깃든 것도 아니었고.
평소에는 조금 튼튼하고 날카로운 검에 불과하다.
하지만 악마들을 상대하는 그 순간. 그 순간의 성검은 최강이었다.
‘덩치 큰 놈을 상대할 때는 아래에서…….’
이안이 자세를 낮춘 채 거인에게 달려들었다.
콰콰콰쾅!
네 개의 팔과 네 개의 주먹이 마구잡이로 땅에 내리꽂혔지만, 충분히 피할 수 있다.
땅이 흔들리는 걸 고려해 보폭은 일부러 크게 잡았다.
멀리서 본 이안의 모습은 뛴다기보다는 날아가는 것에 더 가까웠다.
순식간에 거인의 발치에 당도한 이안은 허리를 튕기듯이 비틀어 검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브레이브 하트 가문 검술의 24번째 동작을 응용한 기술.
성검이 거인의 오금을 깊게 베고 지나갔다.
어둠으로 이루어진 거인의 살점은 성검이 지나가자 너무나 부드럽게 흩어져 버렸다.
“우어어!”
쿵!
균형을 잃은 거인이 쓰러지기 전에, 네 개의 팔로 땅을 짚었다.
스륵.
잘려나갔던 어둠이 다시 모여들어 놈의 상처를 메워나갔다.
‘역시, 칼질 한두 방으로는 안 쓰러진다 이건가.’
이안은 게임 속 지식을 떠올렸다.
‘이 거인의 전투 패턴은 중반까지는 비교적 단순해.’
거체가 휘두르는 그 일격 하나하나의 위력은 엄청나지만, 그만큼 빈틈과 사각이 많다.
애초에 소환되는 권속들 자체가 더 까다로운 타입의 보스다.
소환되는 악마의 수족들을 다른 학생들이 막아주고 있는 지금.
피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문제는 놈이 피가 3할 정도 남았을 때지.’
궁지에 몰린 거인은 미친 듯이 공격을 시작하고. 1할 이하로 남은 순간부터는 그 속도와 힘이 최대로 올라간다.
패턴도 훨씬 복잡하고 변화무쌍해지니, 직접 겪어보면 이것만큼 까다로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플레이어들은 거인의 공략법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시도는 모조리 실패했고, 결국 정직하게 사냥하는 방법 밖에 없냐고 생각할 때쯤.
한 플레이어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작중에서 맥거핀으로 계속 언급된, 소환 의식의 범인을 죽이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럴듯한 얘기였지. 정작 그 범인을 찾을 방법이 없어서 문제지.’
거인의 일격을 피하며 검을 휘두르면서도 그런 기억들이 계속해서 떠올렸다.
‘범인.’
범인에 관한 건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주제였다.
대체 누구인지는 차치하고.
저 멀리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건지. 거인 속에 하나가 되어 있는 건지. 아니면 소환한 순간 이미 죽었는지.
놈의 소재를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직접 대면해본 이안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놈은 저 거인 속에 있어.’
저 어둠은 극렬한 감정의 덩어리나 다름없다.
수백 년간 이 학사에 쌓이고 쌓이 감정이 농축되어 있으니, 저 어둠에 접촉한 학생들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겠지.
하지만 그 격렬한 감정의 흐름 속에 조금 이질적인 흐름이 종종 눈에 들어왔다.
마치 암초를 만나 부서지는 파도 같다 해야 할까.
이안은 그걸 저 거인 속에 범인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라 확신했다.
‘거인 속에 있는 놈을 직접 벤다면…….’
어쩌면 번거로운 과정 없이 일격에 죽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그걸 위해서는 우선 저 거인의 몸속 어디에 박혀 있을지를 찾아야 한다.
쾅! 쾅! 쾅!
거인이 강하게 땅을 내리칠 때마다 지면이 요동쳤다.
이제 거인은 이안의 속도를 자신이 따라잡기 힘들다는 걸 깨닫고, 전략을 바꾸고 있었다.
마구잡이로 흩날리는 돌과 흙은 그 자체로 총알이나 다른 바 없고. 하나둘 늘어나는 구멍은 이동을 제한한다.
게다가 호시탐탐 이안을 노리고 들어오는 그림자들.
빛의 정령이 회전하며 그림자를 막아주었지만, 어둠은 끈질기게 빛을 먹어치우려 했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여기까지는.
하지만 점점 수세에 몰려가는 학생들은 아무리 이안이라도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무너지면. 저들이 상대하던 권속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터.
고민할수록 승산은 점점 낮아진다.
‘그렇다면…….’
결정을 내린 이안은 다시 한번 자세를 낮추었다. 아까와 마찬가지.
똑같은 수에 두 번 당하지 않겠다는 듯. 거인이 발을 쿵쿵 굴러댔다.
하지만 이안은 지면이 요동치는 힘까지 사용해 뛰어오른 뒤.
몸을 회전시켜 놈의 허벅지를 베어냈다.
“우어어어!”
쿵!
거인이 고개를 숙여 땅을 짚고. 흩어진 그림자가 금방 다시 모여들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바다.
이안이 노린 건 거인의 몸을 낮추는 것.
다리를 힘껏 구부렸다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이안이 허공을 날았다.
‘원래는 절대 시도할 수 없는 방법이지만…….’
거인의 가슴이 눈앞에 다가왔다.
거인의 피부 속이 상세하게 보였다.
그 안은 보고 있노라면, 마치 아득한 심해를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마음속에 근원적인 공포가 생겨났다.
하지만 망설임 없이 이안은 빛의 정령을 앞세우고, 성검을 휘둘러 한순간의 틈을 만들었다.
딱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틈을.
이안은 주저 없이 그 안에 몸을 들이밀었다.
샤아아아아아!
“사, 살려줘!”
“너만! 너만 없었어도!”
“엄마…….”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 비명과 한탄이 빠르게 흘러 다녔다.
거인의 살점, 그 안쪽은 생각보다 훨씬 더 끔찍한 공간이었다.
이렇게 잠시도 있고 싶지 않은 공간은 처음이었는데.
실제로 게임에서는 거인의 몸에 흡수당하면 순식간에 피가 줄어 사망에 이르게 되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안이 열고 들어온 통로가 닫히고.
제 발로 사지로 걸어들어온 이안을 잡아먹기 위해 그림자가 몰려들었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빛의 정령이라도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원래 같았으면 그대로 산채로 삼켜졌겠지.
원래 같았으면.
‘사기템이 있으면, 써먹어야지.’
이안은 붉은색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피에람의 긍지.
아주 먼 옛날, 피에람의 시조가 자신의 불꽃을 잘라내 만들어낸 이 전설적인 아티팩트가 점멸하고.
콰아아아아!
최대출력으로 방출된, 원시적이고도 파괴적인 불꽃이 이내 주위 모든 걸 불사르기 시작했다.
원래는 이 시기에 절대 얻을 수 없는 고등급의 아티팩트다.
엄청난 불꽃은 곧 환한 빛을 방출하고. 이내 사방으로 퍼져나가 순간적으로 거인의 몸속 어둠을 흩어 버린다.
“우어어어!”
작지 않은 충격인지, 거인이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안은 안다.
악마를 상대로 이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보다 노리는 건…….
‘어디 숨었나.’
화염이 뿜어낸 빛이 거인의 몸 이곳저곳을 관통하며 사라지고.
순간적으로 거인의 몸속을 훤히 비추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부자연스럽게 빛이 가로막히는 공간을 보며 이안이 빠르게 나아갔고.
성검을 휘둘러 그 부분을 찢어냈다.
후욱.
다른 곳보다도 유독 강하게 뭉쳐 있는 어둠이 반으로 갈라지고.
그 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찾았다.”
이안은 씨익 웃었다.
***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인간은 악마의 후손이다.
놈들은 사악하고 비겁하며 남의 것을 탐낸다.
놈들은 교활하다.
신체는 형편없고, 머리에는 음모만이 가득해 제대로 된 일을 하지도 못한다.
악의 섞인 편견, 미신에 가까운 믿음.
하지만 이곳은 믿음이 곧 힘을 발휘하는 세계다.
그래서일까?
이 넓은 공간 안에서 악마를 소환한 범인과 마주쳤을 때. 이안은 자기도 모르게 납득하고 말았다.
“오랜만이네요. 누가 악마를 소환했나 했더니…… 선배였네.”
어둠으로 둘러싸인 기묘한 공간에 홀로 서 있던 로든이 눈을 떴다.
로든의 심장이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피 대신 그림자를 쏟아내고.
눈에서는 붉은색 안광을 형형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반쯤은 그림자에 먹혀 버린 그 모습은 이제 더는 인간이라고 보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이안은 꼬박꼬박 존댓말로 말했다.
“생각해보면 선배만 한 사람이 없네요. 악마와 정령이 본질적으로 비슷한 존재니, 정령사. 그중에서도 그림자 정령을 다루는 선배만큼 악마 소환에 적합한 사람은 없겠죠. 그림자 정령을 부리면 의식을 준비하기도 편할 거고요. 하수구에 공간을 찾아낸 것도 정령 덕이려나?”
“…….”
이안이 말을 늘어놓아도 로든은 무반응.
애초에 이제 와서 그런 얘기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듯한 태도다.
‘뭐. 그렇긴 하지.’
그래도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었다. 이안은 일부러 로든의 신경을 긁어보았다.
“뭐, 대충 알 거 같아요. 그 머리 색 때문에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배척받았으니 거기에 대해 악감정을 가졌을 거고. 복수하고 싶었을 거고. 마침 조건은 갖춰졌으니 옳다구나 하고 악마 소환을 준비했을 거고. 맞죠?”
“…….”
여전히 대답은 없다.
이안이 이어 말했다.
“내가 딱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악마 소환은 왜 이렇게 서두른 거예요? 뭔가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이안이 궁금한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원래는 두 달 정도는 더 준비해야 했던 악마 소환이다.
아마 이안이 학사에 오게 되면서, 발생한 변수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타난 거겠지.
하지만 이안은 사건 간의 구체적인 연결 고리를 알고 싶었다.
“뭐. 그래도 우리 나름 친했잖아요? 나도 선배 좋아하고, 선배도 나 꽤 마음에 들어했던 것 같은데, 이 정도는 알려줄 수 있지 않나?”
그런 이안의 질문에 놀랍게도, 로든이 입을 열었다.
“나, 나도 이런 짓을 벌이지는 않았을 거다. 너만 없었다면.”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에 이안이 스스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로든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기뻤다. 같은 머리 색을 타고나, 같은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모두가 나를 욕하고 싫어해도, 단 한 사람이라도 그걸 이해해 줄 수 있다면.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난 괜찮다고 생각했다. 근데…….”
침을 삼키는지. 아니면 인간일 적의 습관이 남아 있는 건지. 잠시 숨을 고른 로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모든 걸 배신했다.”
“나, 난. 네가 나와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다.”
“근데 넌.”
“모두의 인정을 받았지. 황태자에게도. 황녀에게도. 피에람에게도.”
“왜? 왜 난 안 되는 거지?”
“너 같은 놈은 되는데 왜 나는…….”
문득. 얼마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황태자가 참관하는 대련 자리에서.
로든은 대련을 위해 결투장에 오른 사람들을 보며 ‘우리 같은 사람들은 평생 저 위에 서 볼 수 없겠지’라 말했다.
그건 자조이자 포기였다.
그래도 그 ‘우리’ 안에 혼자가 아닌, 이안이 같이 있기에.
그래서 흘린 호의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 이안은 루크를 쓰러트리고. 더 이상 ‘우리’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말았다.
사람은, 자기보다 잘난 사람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거에는 오히려 익숙하다.
하지만 자기와 비슷하거나. 더 아래라고 생각하던 존재가 자신의 위로 치고 올라가면.
걷잡을 수 없는 열등감과 질투에 사로잡히게 된다.
로든도 사람이었다.
그래서 격한 감정 속에서 악마 소환을 강행한 거겠지.
차갑던 로든의 목소리에 점점 분노가 응어리진다.
“왜, 왜 나는…… 왜 나보다 너 같이 하등한 평민 새끼가 더 인정받는 거냐고!”
“…….”
그 외침에 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로든과 마찬가지로, 이안도 로든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 찌질하고, 겁이 많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머리색으로 평생을 차별받으며 살아온 그 로든이. 속으로는 이안을 신분 가지고 차별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씁쓸한 기분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가 사람을 이렇게 만든 걸까요.’
어쩌면 정말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검은 머리는 사악한 걸까?
아니면 그런 편견이 검은 머리들을 사악하게 만드는 걸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안이 해야 할 건 하나다.
성검을 든 이안이 자세를 잡았다.
“뭐, 너 같은 반푼이가 누구한테 인정받겠냐. 봐봐. 네가 소환한 악마도 악마치고는 형편없잖아. 다른 사람이 소환했으면 이미 학사를 함락시켰을걸?”
이안의 비아냥에 로든의 중얼거림이 뚝 멈췄다. 그리고 이안을 향해 불타는 듯한 시선을보냈다.
“…… 일단 그 혀부터 잘라야겠어.”
그러다 돌연, 로든이 머리를 감싸고 중얼거렸다.
“알았어! 금방 끝낼 거야!”
“뭐?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넌 빠져!”
그러고는 손을 한번 휘두르자, 사방에서 그림자로 된 가시가 뻗어 나왔다.
샤샥!
가시를 여유롭게 베어가며 이안은 생각했다.
‘역시인가.’
악마의 힘을 손에 넣으면 무슨 소용인가.
로든은 숙련된 전사는 아니었다.
전투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행동을 예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당장 빤히 보이는 도발에 감정이 저리 격렬해지지 않았나.
마치 어린애한테 위험한 무기를 들려준 꼴.
이안은 무식하고 단조롭게 파고들어 오는 가시들을 전부 베고.
곧장 앞으로 달려나갔다.
다급해진 로든이 외쳤다.
“도, 도와줘!”
“키익!”
사람의 실루엣을 한 그림자 정령이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숫자만 무려 다섯에, 성검으로 베어도 오히려 반으로 갈라져 그 수를 늘려나갔다.
악마의 힘을 받아들이면서 그만큼 로든의 실력이 늘었다는 증거였다.
파바박!
그림자 정령은 교묘하게 움직이며 이안의 움직임을 멈춰 세우고. 쉼 없이 그림자를 퍼트려 이안의 시야를 가리려 했다.
무능한 주인과 달리, 그 주인을 평생 보필해온 그림자 정령은 제법 까다롭다.
‘쯧. 쓸데없이 귀찮게.’
그림자 정령이 점점 늘어나며 진형을 갖춘다.
빛의 정령이 그에 맞서 움직였지만 역부족.
유리하다 생각했는지, 로든이 열렬히 외쳤다.
“조, 좋아! 그대로 밀어붙여! 저 쓰레기를 산채로 씹어 먹어!”
이안은 검을 들고 주위를 살폈다.
이 그림자 정령은 원래 독립적인 개체라 그런지, 성검이 그리 효과적이지가 않았다.
그러니 겁 많은 저 로든 놈이 저렇게 기고만장해 있겠지.
그렇다면…….
‘정령의 활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했던가.’
이안은 빛의 정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검에 스며들어.”
스르륵.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빛의 정령의 이안의 검에 깃들었고.
이내 성검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안이 자세를 잡았다.
“그럼 다시 가보자.”
후웅!
크게 검을 휘두르니, 빛의 궤적이 주위에 퍼져나갔다.
반으로 갈라진 그림자 정령이 고통스럽게 잘려나가고, 증식하는 속도도 아까보다 훨씬 느려진다.
“좋아.”
승리로 향하는 길이 보였다.
이미 길을 봤다면. 주저할 이유는 없다.
이안은 검을 휘둘러 기량을 마음껏 펼쳐내기 시작했다.
후웅!
검이 한번 휘둘러지면, 그림자 정령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간다.
마치 식사를 위해 포크나 나이프를 들 듯. 가볍고 편안한 동작으로 검을 휘두르지만,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다.
더 많은 수의 정령들이 달려들고. 더 많은 수의 정령들이 소멸한다.
백이든 천이든. 이제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이곳에 이안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아…….”
로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현실의 불합리함.
압도적인 재능이라는 토대 위에 노력과 시간으로 세워진 실력은, 감히 로든이 넘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악마의 몸으로 싸웠다면 이런 기분을 느낄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든 자신의 몸으로는, 아무리 악마의 힘으로 역량을 끌어낸다고 해도 이길 수 없다.
모든 걸 걸고. 심장마저 바쳐가며 이런 일을 벌였건만…… 이안은 결코 이길 수 없다.
“아…… 말도 안 돼.”
늘 느껴왔던 세상의 불합리함이 다시 한번 로든의 마음을 덮쳤다.
샤악!
이안의 검이 마지막 남은 그림자 정령을 베어냈다.
로든은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아 누군가에게 간절히 말했다.
“아아...... 모두 죽었어.”
“어서! 어서 도와줘!”
“내가 죽으면 너도 끝이잖아!”
‘악마와 대화를 하는 건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은 아무것도 안 하고, 도움만 청하다니.
이안에게는 한심한 광경이었다.
‘살고 싶으면 끝까지 발버둥이라도 쳐야지.’
이안이었다면 팔다리를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직접 달려들었을 것이다.
추하고, 고통스럽고, 두렵더라도.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 쳤을 것이다.
게임 속 거인은 그리 했고. 로든은 그렇지 못했다.
아마 그게 로든과 이안의 가장 큰 차이겠지.
이안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멋대로 악마를 소환하고, 멋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마지막에는 멋대로 포기해 버리고…….”
이안은 더 일갈하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이 가엾으면서도 용서받지 못할. 한때는 그래도 친구 정도로 생각하던 악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아. 그래도 네가 정령 다루는 솜씨. 그건 제법 훌륭했어.”
로든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서걱!
성검이 로든의 몸을 반으로 절단냈지만, 로든은 아무런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그저, 그토록 바라왔던 누군가의 인정을 마지막 순간에 들었던 게 기뻐서.
그 상대가 이안이라는 게 너무나 비참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서서히 흩어져갈 뿐이다.
그렇게 로든의 몸이 전부 흩어지던 마지막 순간.
이안은 기묘하게 생긴 존재의 형상을 보았다.
그리고 그 존재는 놀랍게도 이안에게 말을 건넸다.
“역시 소환사의 역량이 낮으니 별 힘을 못 쓰겠군……. 오! 이번 대에는 넌 가? 왠지 낯이 익은 느낌인데. 어쨌든, 이번에도 아버지를 즐겁게 해달라고!”
[.....악마!]
이네스가 외쳤고, 이안도 뒤늦게 움직이려 했지만 악마의 흔적은 소멸해 있었다.
로든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아버지를 즐겁게 해달라니…….”
이안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떠오르는 여명에 밤 어둠이 물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