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항쟁(2)
시장의 사병들이자, 도시를 지키는 경비병들이었다.
코헨이 부유한 도시라는 걸 감안 해도, 그들은 놀랄 만큼 잘 무장하고 있었다.
난투를 벌이던 사내들의 각자의 두목에게 시선을 보냈다.
잭은 한숨을 내쉬고 마일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한 줄기 피가 마일로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발. 시발 시발!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했어.’
경비병들도 구태여 움직이고 싶지는 않았을 터다.
그들로서는 눈엣가시인 조직들이 서로 싸우고 공멸하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을테니까.
하지만 민심을 생각하면 언제까지고 대로변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경비대장이 앞으로 나와 외쳤다.
“대로변에서 이게 무슨 짓들이냐 이 쓰레기들아! 모조리 감옥에 처박히고 싶은 것이냐?”
경비대장의 일갈에 흉흉한 분위기가 퍼져나갔다.
마일로의 부하들은 특히 경비대에 반감이 큰지, 당장에라도 달려들기 위해 자세를 잡고 있었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경비병들도 긴장한 얼굴로 무기를 꼬나쥐었다.
잭은 고민했다.
‘이미 도핑한 상태고, 차라리 여기서 마일로와 손을 잡고 경비대를 친다면?’
적의 적은 아군이라 했던가?
잭과 마일로가 싸우게 된 것도 결국, 아만 시장을 상대하는 데에 있어서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서였다.
이미 병력을 이끌고 나온 지금 공세를 펼친다면 효과적인 공세를 펼칠 수 있을 터다.
하지만…….
잭은 좀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갈등하는 건 마일로도 마찬가지.
그 살벌한 침묵에 모두가 숨소리조차 죽이던 그때.
마일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돌아가자. 아직 저 감옥의 간수들이 멀쩡히 남아 있는데, 섣불리 싸울 수는 없지.”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은 마일로는 신경질적으로 걸어나갔다.
그 뒤를 부하들이 줄줄이 뒤따랐다.
경비대장이 고함을 질렀다.
“어딜 가는 거냐 마일로! 이러고그냥 넘어갈 줄 알아!”
마일로가 씨익 웃었다.
“그러라고 먹인 돈이잖아. 아니면 액수가 좀 부족한가?”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모함을.”
당황한 경비대장이 횡설수설하는 사이.
마일로와 그 부하들은 뒷골목으로 사라져 버렸다.
잭도 그 틈을 타 후퇴했고, 그런 그들을 경비대는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걸어가던 잭이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피해 상황은?”
“정확히 파악해봐야 알겠지만…… 적지는 않습니다.”
“돌겠군.”
죽어 나간 조직원부터 사용된 약, 공방에 입은 손해까지.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마일로 역시 피해가 크겠지. 자기 정예병들에게 3단계를 먹였으니…… 결국 아만 그 자식만 좋은 짓을 해줬어.”
본부로 돌아오니, 부상자들이나 시체들이 들것에 실려 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그 숫자가 많았다.
언짢은 마음으로 그 사이를 지나가던 이안은 문득,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
펠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새하얀 천이 흘러나온 피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숨은 쉬지 않았다.
[…….세상에.]
‘같이 가기 미안하다고 예배당에 혼자 간다고 했었죠.’
이안은 쭈그려 앉아 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는 길이 편치 않았는지.
펠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안은 천천히 그 눈을 감겨주었다. 그러다 펠이 손에 무언가를 꼭 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천을 들춰보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유리병이었다. 분홍색 약이 들어있는 유리병.
이안은 그 손에서 약병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청년은 좀체 약병을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
“.......”
단순히 심장이 멈춘 뒤 근육이 굳는 현상일 뿐이다.
하지만 왜인지 이안은 끝까지 자기 임무를 수행하려 한 청년의 강한 의지를 느꼈다.
어벙하지만 자부심 넘치던 그 얼굴도.
이네스가 위로했다.
[이안 탓이 아니에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운이 없었을 뿐이죠.]
‘…….딱히. 제 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혼자 가겠다는 펠을 말려서 같이 갔다면?
그런 가정은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이안의 감정이다.
겨우 1주일. 친해져야 얼마나 친해지고, 정을 붙여야 얼마나 붙이겠나.
그렇게 이안은 스스로 생각했다.
하지만 시선을 펠에게서 떼지 않았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성검의 손잡이를 굳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손의 떨림이 멎었다.
***
코헨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저택.
그 꼭대기 층에 위치한 집무실에서, 윌리엄 아만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코헨의 지배자인 그는, 시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해 꿰고 있었다.
“꺽다리 놈. 제법 신속했다만 발톱이 충분히 날카롭지 못했군. 아니면 단순히 계산을 잘못했던가.”
“내부 정보원의 말로는 잭이 강력한 용병을 들인 것 같다고 합니다. 그 용병 하나 때문에 고전하던 잭이 간신히 버텼다고 합니다.”
비서의 말에 아만은 코웃음을 쳤다.
“마일로 그놈이 미친놈이라 해도, 한때 우리와 함께 시를 통치하던 여섯 가문의 핏줄이다. 나도 그 능력 하나는 인정하고 있지. 그런 놈이 마음먹고 기습했는데, 겨우 용병 하나 때문에 실패했다고?”
“그게…….”
“정보원을 더 믿음직한 자로 바꿔야겠어.”
“제가 실언했습니다.”
비서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만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은 내저었다.
“이제 이번 일로 그쪽에 신경 쓸 이유가 전부 사라졌군. 이제 서로 싸우다 공멸하는 일뿐일 테니. 그것보다, 발굴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나?”
“예. 새로운 죄수들을 끊임없이 투입해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좋군.”
아만은 창가로 가 코헨의 정경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우중충한 도시.
그가 너무나 사랑하는 도시.
아만이 입을 열었다.
“머지않아 때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를 옭아매는 제국의 사슬을 끊어내고, 내가 사랑하는 이 도시에 진짜 자유를 되찾아 올 그날이.”
도시의 정경을 담은 아만의 두 눈동자는 희미한 달빛을 담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의 손에 들린 불길하게 생긴 검도 달빛을 받아 섬뜩하게 빛났다.
***
식탁을 사이에 두고 단둘이 앉은 자리에서 양손에 얼굴을 파묻은 잭이 흐느끼듯이 말했다.
“내가 멍청했어. 내 멍청함 때문에 너무 많은 식구를 잃었어.”
대꾸를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님을 알기에, 이안은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한참 후에 고개를 든 잭은 책상 위에 놓인 찻잔을 보며 말했다.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코헨의 사내라면 모두 즐겨 마시는 이 차 역시 연금술의 산물인 걸 알고 있나?”
“…… 처음 듣는 얘긴데.”
“연금술은 이 도시의 축복이자, 저주지.”
잭은 소파에 몸을 파묻고. 먼 과거를 회상하듯 말했다.
“우리의 선조들은 본인들만의 힘으로 악마의 군세를 막아내야 했다. 필사적으로 쟁취해낸 자유를 다시 빼앗길 수 없었거든. 근데 힘없는 평민들이 대체 뭘 할 수 있었겠어. 마법사? 정령술사? 기사? 그런 건 없어.”
“연금술뿐이었군.”
“그래 연금술뿐이었지.”
잭은 품에서 약병 하나를 꺼냈다.
이안이 건네주었던 노란색 물약이 든 약병이었다.
잭은 약병을 하늘에 비추며 말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어. 악마를 막아서기 위해…… 악마와 계약해야 했지. 부작용이 있을 줄 알았어도 악마들에게 몰살당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거라 여겼지.”
다른 이름으로는 ‘악마의 피’라 불리기도 하는 도핑약은 그렇게 탄생했다.
부작용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도핑약의 출시 초기.
얼마나 많은 사내들이 용감히 약을 마시고, 끔찍한 대가를 치렀을까.
코헨의 시민들은 유달리 수명이 짧다.
아무리 건강하게 먹고, 몸을 가꾸어도 핏속에 흐르는 약 기운은 신체를 갉아먹는다.
과거의 상흔은 여전히 저주로 남아, 코헨을 옭아매고 있는 셈이다.
잭은 긴 넋두리를 내뱉었다.
“나는 더 나은 방법을 찾아 헤맸다. 이미 중독된 시민들이 약을 완전히 끊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더 건강하고, 부작용이 적고, 의존성이 적은 약물을 만드는 게 유일한 한 수라고 여겼지. 그게 우리 가문의 일이라 생각했다. 최초로 도핑약을 만들어낸 게 마일로의 가문이라면, 우리 가문은 그 부작용을 억제했거든.”
“이상적이었군.”
“이상적이라 생각했지. 지금은 그게 빈틈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고. 내 식구들을 죽인 건 마일로가 아니야. 내 병신 같은 안일함이었지.”
이안은 잭의 한탄을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었다.
잭은 자기 부하들한테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외부인에게만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는 법이니.
조용히 듣던 이안이 툭 던졌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당연히 갚아줘야지.”
“어떻게. 다시 전쟁이라도 벌이려고? 원래 아만이랑 싸우기 위해 힘을 모으던 거 아니었어?”
잭은 입을 다물었다.
이안의 지적이 옳았다.
오늘의 전투로 양측에 누적된 피해가 적지 않다.
다시 한번 전면전이 일어난다면, 감당하지 못할 출혈과 함께 아만에게 먹히는 미래밖에 없겠지.
“…… 뭐 좋은 대안이라도 있는 거야? 이제 싸움을 피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어.”
“꼭 전부 싸울 필요는 없잖아.”
“뭐?”
“양측에서 몇 명만 골라서 싸우면 되는 거잖아. 진 쪽이 이기는 쪽 아래로 들어가고. 그러면 큰 피해 없이 마무리할 수 있는 거 아냐?”
잭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확실히. 평화적으로 해소할 방법이 없어진 지금, 이보다 더 나은 대안은 없어 보였다.
“…… 그거라면 마일로도 거절하지는 않겠군. 아니.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거야. 다른 건 몰라도, 실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어 하는 놈이니까.”
“그래.”
하지만 잭은 두려웠다.
무력으로만 보면 그와 마일로 사이에는 명백한 격차가 있었다. 그 사실을 잭도 잘 알고 있었다.
일대일로 싸우라니.
솔직히……. 두려웠다.
“.......”
다시 침묵.
한참을 갈등하던 잭이 이안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이내 결심이 선 듯,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진짜로 우리의 싸움이니, 우리가 알아서 하겠어. 너와의 거래는…… 내가 죽어도 부하 놈에게 이행하라 하지.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줘.”
눈빛은 이안의 도움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이런 상징적인 싸움까지 외부인에게 맡길 수는 없다는 자존심이 깃들어있었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방을 나서기 전 흘끗 뒤돌아본 잭은…….
“코헨과 식구들을 위해.”
그 문장을 반복적으로 읊으며 편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
“뭔가 심경의 변화라도 있던 건가요?”
검을 겨루다 대뜸 물어오는 이네스의 질문에 이안이 되물었다.
“뭐가 말이죠?”
“사실, 뒷골목에서 아이들에게 약을 파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잖아요? 잭과 손을 잡는 일. 그래서 이들의 싸움에 굳이 크게 관여 안 하려 했던 거고.”
“지금도 마찬가지인데요.”
“정말요?”
“…… 이네스 님은 속일 수가 없네요.”
이안은 한숨을 내뱉었다.
본래 게임대로라면 이렇게 두 조직의 수장이 나와 결투를 벌이는 시나리오는 없다.
총력전을 벌이거나, 마지막 남은 서로를 전부 죽일 때까지 싸우는 것외의 결말은 없었다.
원래는 그저 서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맞아요. 마일로도 미친놈이라 생각했지만,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잭도 똑같은 놈이라 생각했죠.”
그리고 그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이안은 잭의 조직원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도 보았지만. 그들이 그림자 속에서 무슨 짓들을 벌이고 있는지도 잘 보았다.
이들 역시 뒷세계의 주민들이었다.
‘어쩔 수 없다’라고 핑계 대봐야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들은 선인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충 어울려 주는 시늉만 하다가, 원하는 걸 얻으면 떠날 생각이었다.
그리고 잭에게서 확언을 받은 지금.
이안은 모든 목적을 이룬 셈이겠지.
하지만 이안은 평소보다 더 강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마치 싸움에 앞서, 기량을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잠시 검을 바닥에 내려놓은 이안이 말했다.
“저는 게임에서 이미 이 도시의 미래를 봤어요. 어느 조직이 이기든. 누가 수장이 되든. 시장이 모든 권력을 잡든. 결과는 똑같아요. 코헨은 결국 멸망하고 말아요.”
시기의 문제다.
제국에 싸움은 걸거나, 제국에 복속되거나 아니면 스스로 자멸하거나.
결국, 지금의 코헨은 멸망한다. 지하 감옥은 코헨의 수뇌부들을 가둔 뒤, 무너져 내리고. 남겨진 시민들도 제국의 노예가 될 뿐이다.
그래서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싫었던 거다. 이 도시가.
어차피 끝이라는 결과가 정해져 있고, 무슨 행동을 하든 무의미하며, 그 결과를 못 바꾸는 데 왜 좋아하겠나.
처참한 결과를 내놓고 그 과정이 값지고 아름다웠노라 말하는 것만큼, 이안이 혐오하는 것도 없었다.
이네스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러면. 왜 마음이 변한 거죠?”
“그냥…….”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심정이 즉흥적으로 바뀐 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냥 두고 보기에는 기분이 더럽더라고요. 보니까 잭 쪽이 좀 덜 나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캉!
두 사람의 검이 부딪히며 불티가 튀었다.
이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평소처럼 봐주지 말고 제대로 휘둘러주세요”
“바란다면야.”
평소보다도 더 격렬한 대련이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
마일로의 답신은 빨랐다.
3일 뒤 저녁.
끝을 결정지을 순간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