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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77화 (78/222)

77. 1일 차

흰머리를 길게 길러 한데로 묶어 놓은 노인이었다.

고된 수감생활을 증명이라도 하듯, 눈두덩은 푹 패였고 볼은 홀쭉했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지혜를 담으며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노인의 말투나 억양에서 잘 배운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노인에게만큼은 깍듯한 이안이 공손하게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앞으로 한동안 함께 생활하게 된 이안이라 합니다.”

“내 질문에나 대답하게. 누구의 명을 듣고 나를 죽이러 온 건가? 이미 모든 힘을 잃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네를 구태여 죽이라 시키다니. 참 철저한 친구군. 마일로 그놈인가?”

노인의 입에서 마일로의 이름이 나왔다.

그들과 연관이 있는 인물인가?

‘그러고 보니 잭도 안부 전해달라는 말을 했었지.’

일단은 오해부터 풀어야 했다.

“어르신.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습니다. 저는 그냥 끌려들어 온 죄수에 불과합니다.”

“하하. 나를 바보로 아는 겐가?”

노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 수감실에 원래 나 말고도 죄수가 있었다네. 욱하면 주먹부터 나가던 고약한 놈이었지. 나도 몇 번 얻어맞았는데, 주먹이 어찌나 맵던지. 하지만 힘 하나는 세서 시킨 작업들을 척척 해내곤 했다네. 그래서 문제를 일으켜도 간수들이 내버려 두었지.”

그때를 회상하는지,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간수 하나가 찾아와 그를 데려갔어. 이름이 분명…… 베이커였나? 그놈의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고, 교도한다는 명목으로 데려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네어. 그 뒤로 한동안 홀로 생활하다, 베이커가 다른 죄수를 집어넣었지. 이래놓고 우연이라 할 셈인가?”

감옥에도 당연히 빈자리는 정해져 있다.

만약 이안이 원하는 곳에 가고 싶은데 그곳이 이미 차 있다면?

당연히 비워줘야 한다.

이제야 잭이 베이커에게 건네던 돈의 무게가 이해되었다.

할 말이 궁해진 이안이 침음을 흘렸다.

“음. 일단 어르신을 암살하러 온 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들어왔다는 건 부정하지 않는군.”

“그리고 마일로는 죽었습니다.”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는지, 노인이 미간을 좁혔다.

“그 꺽다리 놈이 죽었다고? 잭은 그놈을 죽일만한 역량이 안 되고. 설마 윌리엄 아만이 도시의 모든 걸 장악한 겐가?”

이안은 ‘내가 죽였습니다’하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마일로와는 별로 친해 보이지 않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니.

“결과부터 말하자면, 잭의 세력이 마일로의 세력을 흡수했습니다. 뒷골목이 통합된 거죠.”

노인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대대적으로 싸운 모양이군. 둘의 성향을 생각하면 총력적이 벌어졌겠지? 그렇다면 세력이 많이 줄었겠어.”

이안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총력전까지 가지 않았습니다.”

“…… 그것도 의외군. 빨리 설명해주게.”

“물론 얘기해드리겠습니다. 대신, 어르신도 제가 궁금한 게 생기면 가르쳐주십시오. 이 감옥에 대해서나 다른 부분에서나. 어떻습니까?”

감옥 생활에도 일단 적응은 해야 했다. 노인은 감옥에서 살아가는 법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경계심보다 호기심이 더 컸는지, 노인도 흔쾌히 승낙했다.

“좋네. 거래를 할 줄 아는 친구군. 설명해주게.”

이안은 어디서부터 설명할까 고민하다, 최근 코헨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처음부터 하나하나 설명했다.

마녀들이 도시에서 쫓겨난 일.

잭과 마일로의 대립.

그리고 결투까지.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던 노인은 마지막 결투 부분에서 크게 감탄했다.

“허어. 믿을 수가 없군.”

“뭐가 말입니까?”

“나는 잭과 마일로 그놈들을 코흘리개 시절부터 봐 왔다네. 놈들이 어떤 성정인지는 잘 알아. 그런 둘이 총력전이 아니라 결투를 벌이고, 심지어 잭이 이겼다? 둘 중 하나겠지. 자네가 거짓말을 했구나, 무언가를 빠트리고 얘기했던가.”

노인의 통찰에 이안은 놀라움을 느꼈다. 얘기를 나눌수록 만만치 않다는 게 느껴졌다.

“뭐. 자네의 눈을 보면 거짓말은 아니겠고. 후자겠군. 잭 그놈이 코헨의 뒷골목을 이끈다니. 솔직히 별로 믿음직스럽진 않군. 어쨌든. 고맙네. 이곳에서 좀체 바깥 소식을 듣기는 힘들어서 말이야.”

“그러면 이제 어르신 얘기를 해주시죠. 어르신은 대체 누구시길래 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왜 저를 암살자로 오해한 거고요.”

그제야 노인이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내 정신 좀 보게. 그러고 보니 아직 서로 통성명도 안 했군. 레이먼 제타라고 하네. 여기서는 일사오라고도 불리지.”

“…… 제타?”

제타.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성씨다.

기억을 뒤집다 보니 불현듯 잭의 입에서 그 비슷한 이름이 나왔던 걸 떠올렸다.

“아…….”

“맞네. 한때 코헨을 통치하던 여섯 가문에 속해 있다가 만장일치로 그 자격을 박탈당한. 제타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일세.”

잭이 안부를 전해달라던 친우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

“모두 기상! 빨리 일어나!”

깡! 깡! 깡!

간수가 복도를 빠르게 거닐며 쇠창살을 몽둥이로 후려쳤다.

이 지하 감옥은 기본적으로 어둡다.

햇살도 들어오지 않고 닭 울음소리도 없는 이곳에서 아침이 왔다는 걸 알 수 있는 신호는 간수의 고함밖에 없다.

죄수들은 이런 상황이 이미 익숙한 듯,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안은 레이먼과 함께 창살 밖으로 나가 죄수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절그럭.

발에 묶인 쇠사슬 덕에 보폭을 크게 할 수 없었지만 익숙해지니 그럭저럭 움직일만했다.

복도를 따라 걷다 보니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기다란 식탁이 여러 개 놓여 있었는데, 식판을 든 죄수들이 밥을 얻으려고 줄지어서 있었다.

어젯밤, 새로 들어온 죄수들은 뭐가 뭔지 몰라 허둥거리고 있었다.

그런 신입 죄수들을 다른 죄수들이 낄낄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이안은 레이먼을 따라 눈치껏 줄에 합류했다.

신입 죄수들도 쭈뼛거리다 줄을 섰다.

뒤늦게 찾아온 다른 죄수들은 신입 죄수들을 밀치며 새치기하곤 했다.

쾅!

“비켜! 여기는 내 자리라고!”

“윽! 죄, 죄송합니다.”

“썩 꺼져!”

상황 파악이 안 된 신입 죄수는 벽에 부딪혀 기다시피 도망쳤다.

죄수들의 마수는 이안에게도 뻗쳤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 하나가 다가왔다.

“어디 건방지게 신참이 우리보다 밥을 먼저 먹어. 빨랑 꺼…… 윽.”

사내가 힘껏 이안은 밀쳤다.

하지만 이안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온 힘을 다했는데도 미동도 없다니.

‘뭐지? 아침이라 힘이 덜 실렸나?’

사내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무표정하게 서 있는 이안을 다시 쳐다보았다.

사내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했다. 아마 본능이 경고를 울린 것이리라.

그 사실을 깨닫고, 수치심이 밀려온 사내가 이를 악물었다.

“근데 이 새끼가 건방지게 내려다보고…….”

“워워. 그 정도만 하게. 이제 갓 온 신참이지 않나.”

레이먼이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사내는 레이먼의 얼굴을 보고 표정을 보고 잠시 안도를 느끼다, 이내 표정을 관리했다.

“영감님 얼굴 봐서 그냥 넘어가는 겁니다.”

“그래. 고맙네.”

“쯧. 재수가 없으려니까.”

사실 쫄았었는데, 마침 좋은 핑계가 생긴 사내가 부리나케 사라져 버렸다.

레이먼이 웃음을 흘렸다.

“허허. 머저리 같은 놈이지? 그래도 잘못 건드렸다가는 저놈 패거리가 우르르 몰려와서 피곤해질 걸세. 이 정도 대처가 딱 적당해.”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식의 유치한 기 싸움은 익숙했다.

그것보다 당장의 관심사는 아침 식사다. 방금 그 사내는 이안에게 한 끼 식사만큼의 가치도 없었다.

아침 메뉴는 허여멀건 한 죽에 더러운 빵 한 덩어리였다.

빵은 어찌나 딱딱한지 이도 잘 안 들어갔고, 죽에 있는 건더기라고는 운 나쁘게 들어간 바퀴벌레 따위밖에 없었다.

“하하. 이런 식단은 처음인가? 익숙해져야 할 걸세. 이곳의 하루는 고되거든.”

이안은 별말 없이 죽을 떴다.

조직에서 노예처럼 부려질 때는 살아남기 위해 하수도에 내려가 쥐와 벌레를 잡아먹던 이안이다.

이 정도면 훌륭한 식사였다.

이안이 아무렇지 않게 죽을 싹싹 비워 먹자, 레이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어디서든 잘 적응할 거 같군. 본래 저렇게 행동하는 게 대부분인데.”

레이먼이 신참 죄수들을 가리켰다.

죄수들은 죽을 앞에 두고 죽을상을 짓고 있었다.

벌레가 둥둥 떠다니는 죽을 먹기에는 비위가 상하는 것이다.

결국. 포기한 신참 죄수가 죽을 버리려 하자, 다른 죄수들이 몰려왔다.

“그거. 버릴 건가?”

“네? 아, 예.”

“그럼 나 줘.”

“예, 예. 그러세요.”

“앞으로도 버릴 거면 나 주는 거다?”

그렇게 말한 죄수가 식판을 반강제로 뺏어 들어 죽을 깔끔히 비웠다.

한발 늦은 다른 죄수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레이먼이 평탄한 어조로 말했다.

“저 친구는 조금 있다가 바로 후회하겠군.”

“예?”

“작업을 한번 나가보면, 고상하게 살던 사람도 이런 쓰레기를 개처럼 핥아먹게 되네. 살기 위해 먹게 되는거지.”

고상하게 살던 사람이라는 표현은 왠지 레이먼 자신을 지칭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남한테 베풀어봤자 보답 받기도 힘들어. 오히려 더 내놓으라고 역으로 화를 내는 녀석들이 수두룩하지.”

얘기를 하면서도 레이먼은 부지런히 음식을 입에 넣었다.

레이먼의 얘기를 듣다 보면 감옥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짧은 식사 시간이 끝나고.

채찍을 든 간수가 바닥을 내리쳤다.

찰싹!

“그만. 이제 모두 작업하러 간다!”

신참 죄수 하나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저 작업이라 하면…….”

찰싹!

“끄악!”

“그런 건 눈치껏 알아서 해! 내가 네 엄마로 보이냐?”

채찍에 얻어맞은 신참이 바닥을 뒹굴고. 그 모습을 다른 죄수들이 낄낄거리며 쳐다보았다.

간수가 목청을 높였다.

“잘 들어! 딱 한 번만 설명하겠다! 네놈들이 위에서 무슨 생활을 했는지는 이제 상관없다! 다 잊어라! 그리고 눈치껏 행동해!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싶다면!”

[…….폭력이 지배하는 곳이네요.]

이네스는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는 그런 곳이었다.

법과 규칙보다는 오로지 힘이 지배하는 세상.

다행인 점은, 이안에게는 힘이 있다는 점이다.

간수가 외쳤다.

“그럼 빨리 이동한다! 머저리 하나 때문에 시간이 너무 지체됐어!”

죄수들이 일사불란하게 다시 이동했다. 이안은 레이먼을 뒤따라가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작업이라……. 게임에서는 땅을 파거나 무슨 던전 같은 데를 탐험했었는데.’

지하 감옥의 땅을 파다 보면 오래된 아이템이나 아티팩트가 발굴되었고, 가끔 숨겨진 던전도 나타났다.

게임에서는 그 숨겨진 던전의 한 군데에 성검의 조각이 묻혀 있었다.

‘찾으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리겠지.’

걷다 보니 작업장이 나왔다.

너른 공동에 몇 개의 통로가 나 있었고. 그 통로들은 각각 토사로 막혀 있었다.

죄수들은 삽을 들고 토사를 퍼내 수레에 담고, 밖으로 나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간수들은 갑옷과 무기. 그리고 투구를 걸치고 있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한 무장이었다.

[혹시라도 있을 죄수들의 반란을 경계하는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한 간수가 외쳤다.

“부지런히 파라! 만약 새로운 유적을 발견하거나, 아티팩트를 발굴해내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하겠다.”

그 말에 자극받은 죄수들이 더욱 힘을 내 삽질에 박차를 가했다.

물론, 단순히 보상을 보고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흉흉하게 눈을 빛내는 간수들은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는 죄수가 보이면 어김없이 무기를 휘둘렀다.

그들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죄수는 또 추가로 수급하면 될 뿐이다.

레이먼이 말했다.

“우리도 슬슬 작업을 시작하지.”

“그 몸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래 봬도 젊었을 적에는 일선에서 싸우던 몸이네. 웬만한 젊은이 보다 팔팔해.”

“……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솔직히 못 미더웠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더 말리는 것도 이상했다.

이안은 삽을 들고 적당한 위치로 갔다.

그리고 빠르게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지부진하던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주위 죄수들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와, 와아. 뭐야.”

“뭐가 이렇게 빨라.”

놀라는 게 당연했다.

이안 혼자서 일반 죄수 두 사람 몫의 일을 하고 있으니.

이안 자신이 조금만 힘을 쓰면, 노인인 레이먼이 일을 적게 해도 될 거라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이마저도 실제 힘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레이먼도 조금 놀란 듯했다.

“허, 허어. 힘이 좋구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아. 이곳에서 흙을 파다가는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깡!

이안의 삽이 무언가 단단한 것에 부딪혔다.

쌓인 흙이 흘러내리고, 그 안에 웬 회색 돌로 된 사자의 석상이 드러났다.

레이먼이 중얼거렸다.

“이런…….”

이안의 행동이 더 빨랐다.

이안은 레이먼을 안고 다리를 힘껏 구부렸다가, 그대로 용수철처럼 뒤로 물러났다.

발에 묶인 사슬 때문에 이 방법 외에는 없었다.

이안의 재빠른 판단은 실로 정확했다.

콰득!

눈 깜짝할 새에 죄수 한 명의 몸이 반으로 나뉘었다.

“크르릉.”

어느새 네 발로 땅을 디딘 사자상이 아가리를 벌려 죄수를 통째로 삼켜 버렸다.

레이먼이 외쳤다.

“가, 가고일!”

망겜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듯.

괴수와의 조우는 이렇게도 급작스러웠다.

강력한 괴수를 앞둔 이안은…….

미련 없이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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