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남들보다 6배로
패거리는 간수들의 묵인하에 죄수들을 부리고 편하게 살지만, 그들은 잘 알았다.
간수들이 마음만 바뀌면 자신들은 언제든 갈아치워질 수 있는 입장이라는 걸.
그야말로 애완견.
지금은 쓸모가 있으니 남겨두지만 그뿐이고, 언제 팽당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펄먼 패거리의 간부. 테리오는 그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남자였다.
테리오는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 3구역의 죄수들을 휘어잡으려 했다.
그의 잔인한 손속에 근래에는 죄수들이 순순히 따랐는데, 오늘 반발하는 죄수가 나오고 말았다.
‘마침 본보기를 보여줄 때가 됐지.’
테리오는 오히려 이걸 기회로 여겼다.
자신의 잔인함을 과시하고 죄수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일부러 죄수를 저 멀리 던져버렸다.
죄수가 벽에 처박히고 피가 튀면 퍽 끔찍한 광경이 연출되리라.
한데…….
‘뭐, 뭐야.’
테리오는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이 날아갔다.
그리고 빙글 돌더니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받아낸 장본인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그 작업을 해내었다.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충격에서 가장 먼저 풀려난 건 테리오의 말단 부하였다.
그는 젊었고, 혈기 왕성했으며, 조금이라도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사내였다.
마침 기회를 잡았다 생각한 부하가 옷소매를 걷어붙였다.
“근데 저 새끼가 건방지게…… 제가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부하가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제야 테리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야, 야야. 돌아와 임마!”
다른 건 몰라도 눈치 하나는 빠르다고 자부하는 테리오다.
그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 검은 머리를 절대 건들지 말라고.
하지만 테리오가 말렸을 때는 너무 늦었다.
그의 부하는 이미 저 멀리에 나가 있었다.
긴 그림자가 죽을 떠먹던 이안의 얼굴에 드리웠다.
“지금 그게 목에 넘어가?”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부하의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얼굴을 찡그리고 짧게 말했다.
“한번은 봐줄 테니까 꺼져.”
이안의 보일 수 있는 최대의 자비였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참지 않았을 거다.
지금은 구태여 싸우고 싶지 않았다. 얻을 것도 없었고.
안타깝게도 이안의 너그러움이 부하의 마음에까지 전해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미친 새끼가!”
콰장창!
부하가 이안의 앞에 놓여 있던 식판을 걷어차 버렸다.
식판이 저 멀리 날아가고, 내용물이 바닥에 엎어졌다.
숟가락을 들고 말없이 식판이 있던 자리를 쳐다보던 이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선 넘네.”
***
“음. 확실히 이게 좀 낫네.”
이안은 흰 빵을 한입 크게 씹고, 사과주를 들이마셨다.
맛없는 음식에 익숙하다 해도, 기왕이면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게 좋은 법이다.
우물거리던 이안이 멍하니 쳐다보는 레이먼에게 말했다.
“어르신도 좀 드세요. 그쪽도 좀 먹고. 그쪽이 받은 음식인데.”
“고, 고맙네. 하지만 나는 그냥 죽이나 먹겠네.”
“저, 저오. 이팔이 아하서…….”
“이빨이 아프다고?”
“예…….”
레이먼은 거절했고, 테리오에게 얻어맞던 죄수도 황급히 고개를 수그렸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굳이 싫다는데 두 번이나 권할 필요는 없겠지.
“저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테리오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 옆에 쭉 늘어서 앉아 있는 패거리 원들.
테리오를 제외하면 그들의 상태는 영 좋지 않았다.
온몸에 가득한 멍과 상처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눈치 빠른 테리오 만이 싸움이 시작하기도 전에 항복해 멀쩡할 뿐.
이안이 빵을 내려놓고 물었다.
“왜? 뭐 할 말 있어?”
“이제 어떻게 하실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시다시피 제가 패거리에서는 나름 간부라…….”
“음?”
저 자세로 얘기하던 테리오가 황급 손을 저었다.
“저, 절대 협박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고요. 펄먼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테리오는 옆에서 봐주기 민망할 정도로 비굴했는데, 사실 이게 맞는 대처였다.
만약 어쭙잖게 펄먼의 이름을 들먹이며 협박하거나 자존심을 세웠다면, 안 좋은 결과밖에 없었을 거다.
‘이놈은 무조건 펄먼보다 강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내 감이 얘기하고 있어.’
테리오는 고개를 바짝 낮추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새로운 강자의 등장.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이런 괴물 놈이 왜 이런 곳에 갇혔는지는 모르겠지만.’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감옥이다.
펄먼보다 더 강자가 나타나면 우두머리가 바뀌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놈은 분명 펄먼의 자리를 노리는 거겠지. 누구나 편하게 살고 싶어 하니까. 그렇다면 조직은 새로 만들어지는 거고, 난 그곳의 이인자가 된다.’
테리오는 시선을 낮추면서도 그 두 눈을 탐욕으로 빛냈다.
아무리 이안이 강하다 해도,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도 있는 법.
그 부족한 부분을 테리오가 채워준다면, 둘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테리오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이안이 답했다.
“펄먼에게 가서 말해. 여기 나만 신경 안 쓰면…….”
얘기하던 이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죄수들이 불안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이안의 시선이 레이먼에게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3구역만 신경끄면 나도 신경 안 쓰겠다고.”
“……예?”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달라는 얘기야. 알겠어?”
성검의 조각만 챙겨서 얼른 빠져나갈 생각인 이안에게 감옥에서의 세력 구도 같은 건 별로 관심 없었다.
하지만 테리오는 달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펄먼이 가만히 있지 않을…….”
“뭐. 그럴 수 있지. 만약 싸워야 한다면 그때는 또다시 생각할 문제지만.”
식사를 마친 이안이 사과주 병을 탁상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그때에도 널 데리고 뭘 할 생각은 없으니까 꿈이나 깨라. 네가 뭔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줄 알았냐?”
그 얕은 생각이 꿰뚫린 테리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
“푸하하! 그놈 표정을 봤나? 평소 패거리의 간부라고 한껏 거들먹거리던 놈이, 코찔찔이처럼 울먹거리고서는. 후. 요근래 이렇게 웃어본 적이 없군.”
밤이 되고. 수감실에 갇혀 둘만이 있게 된 자리에서 레이먼은 껄껄 웃어댔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이제 슬슬 자네 진짜 정체를 알려줄 수는 없나?”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진짜 정체라고 해도 말이죠. 말할 건 다 말한 것 같은데요.”
“검은 눈에 검은 눈. 한데 신체 능력은 수준급이라니. 내 살면서 자네만큼 특이한 사람은 처음이네. 근데 그냥 평범한 용병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신나서 말하던 레이먼이 아차 싶었는지, 손을 내저었다.
“뭐, 됐네. 굳이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걸 억지로 캐물을 순 없지. 그보다 어떻게 하겠나? 펄먼 쪽에서 가만있지 않을 텐데.”
“음. 별생각 없는데요.”
빈말이나 허세는 아니었다.
이안은 펄먼 패거리 쪽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게임에서 지하감옥에서 등장하는 적 중에 위협적인 건 유적에서 튀어나오는 괴수와 간수, 그리고 유적에 잠들어 있는 보스뿐이다.
죄수 따위가 힘이 좀 세봤자 기껏해야 평민의 수준.
도핑도 없고, 강력한 무기도 없다면 이안에게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런 태평한 태도에 조급해진 건 오히려 레이먼이었다.
레이먼은 정확히 이안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몰랐다.
“대체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는 건가 자네는. 하지만 주의하는 게 좋네. 싸움이라는 게 숫자가 중요하지 않나? 게다가 펄먼 그 자식은 죄수들 중에서 유일하게 사슬을 풀고 다니는 놈이네.”
“……그래도 돼요? 간수가 그걸 허락해줘요?”
“펄먼이 워낙 오래 군림했으니, 그 세월만큼 신뢰가 쌓인 거네. 그리고 그렇게 놔둬도 별 상관없다는 태도이기도 하고.”
확실히. 간수들의 무장 상태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도 과할 정도로 뛰어났다.
[괴수를 잡기 위해 스크롤을 꺼내 쓰는 병사들이라니. 스크롤 한 장이 집 한 채 값을 한다는 걸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네요.]
그런 간수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고, 가능하다 해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이안이 무심한 얼굴로 레이먼의 걱정을 일축했다.
“뭐, 그건 그때 생각하죠.”
“……자네는 담이 참 크구만.”
“그것보다 궁금한 건 다른 거예요.”
감옥에서 하루를 보냈고, 대충 이곳 생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했다.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
‘오래 있어봤자 하나도 좋을 게 없다.’
이안은 이 감옥에 있는 시간을 완전히 낭비되는 시간이라 분류하기로 했다.
좋은 아이템이나 돈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신체를 단련할 시간도 부족하다.
그렇다면 이 무의미한 시간 낭비를 단축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결국, 성검을 찾으러 온 거니. 성검 찾는 시간을 줄이면 될 거 같은데.’
게임에서는 감옥의 유적을 파다 거대한 던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성검 조각을 얻을 수 있다.
그 과정을 단축할 수만 있다면 시간적으로 큰 이득을 볼 수 있을 터.
몇 년 후에는 대악마가 군세를 일으켜 세상이 멸망하는 만큼, 시간은 언제나 귀중한 자원이었다.
‘게임에서는 그냥 땅을 빨리 파는 수밖에 없었어. 다른 꼼수는 없었고. 하지만 현실에서라면…….’
이안은 몇 가지 계획을 생각했고, 그 모든 계획에는 한가지 필수 조건이 필요했다.
말하던 이안이 갑자기 생각에 잠기자, 참다못한 레이먼이 물었다.
“그래. 그래서 궁금한 게 뭔가?”
이안이 답했다.
“아무래도 뭐시기 패거리를 보니, 간수랑 친해지면 이것저것 편의를 봐주는 모양이네요?”
“그렇다네. 근데 그건 왜 묻나?”
“그러면 간수의 신뢰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뇌물 같은 걸 주기에는…… 지금 제가 가진 것도 없고.”
해괴한 소리를 들은 것 마냥 레이먼의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 더듬거리며 답했다.
“구, 굳이 어렵게 생각 안 해도 되지 않나. 쓸모가 있으면 편의를 봐주는 거고, 이용 가치가 없다면 내치는 걸세. 펄먼도 마찬가지야. 그놈이 쓸모 있고, 편하니까 내버려 두는 거지.”
“쓸모라. 뭘 해야 쓸모 있게 보일까요.”
“이런 류의 고민은 해본 적이 없어서…… 아!”
같이 고민해주던 레이먼이 손가락을 퉁겼다.
“아! 자네는 펄먼 패거리가 유일하게 못 건드는 죄수들이 누군지 아나?”
“누굽니까?”
“바로 유물을 잘 발굴하는 죄수들이네.”
죄수들은 모두 작업장으로 가 땅을 파지만, 개중에는 유독 유물을 잘 파는 사람들이 있다.
특별한 감각이 있든, 운이 억수로 좋든, 아니면 알 수 없는 요소가 있든.
이 유물 발굴에도 분명 재능이란 게 있었다.
“그리고 간수들은 그 무엇보다 유물 산출량에 민감하네. 구역마다 할당량이 있고 그게 진급이나 월급에 영향을 주거든. 그래서 간수들도 유물을 잘 파오는 죄수들은 몹시 잘 대해주네.”
“한마디로 실적을 많이 올리면 자연스레 잘 대해준다는 거죠?”
“정확히 이해했네.”
방법은 간단했다.
그걸 간단히 해낼 수 있느냐가 문제지.
레이먼이 물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이건 왜 물어보는 건가? 간수들이랑 친해져서 뭘 하려고.”
“아.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일하고 싶은데, 지금은 안 들어줄 거 같아서요.”
“농담도.”
“진짭니다.”
“......”
이안의 대답에 레이먼은 한동안 그를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 하다, 이내 이해를 포기한 듯.
눈을 감아버렸다.
***
다음 날 아침.
펄먼 패거리에서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테리오가 뭔가 의견을 피력한 걸까, 아니면 펄먼이 신중한 성격인 걸까.
이안에게는 관심 없는 이야기였다.
삽을 든 이안이 물었다.
‘이쪽이 맞죠?’
[예. 희미하지만 확실히 느껴져요.]
이안은 어깨를 풀며 주위 죄수들에게 말했다.
“다른 통로로 가서 파세요. 방해되니까.”
“네? 네…….”
죄수들은 군말 없이 물러났다.
어제저녁에 이안이 보여준 묘기를 직접 본 것도 있고. 펄먼 패거리와의 불화에 괜히 휘말려 들까 두려운 것도 있었다.
레이먼이 물었다.
“대체 뭘 하려고 그러나?”
“실적. 내라면서요.”
“그렇게 말하기는 했네만…….”
“남들보다 한 여섯 배 정도 빨리 파면 오늘 안에 유물 한두 개는 건지지 않겠어요?”
“여섯 배라니 대체 무슨 소리…….”
“조심하세요.”
이안이 삽을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이안의 뒤에는 흙이 산처럼 쌓였고 그 틈에서 이안이 오래된 유물 하나 찾았다.
“일단 하나. 맡아줘요.”
레이먼이 멍한 얼굴로 유물을 건네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